모란의 저녁 (외 2편)
김경성 물의 결이 겹겹이 쌓이는 저녁이 오고 있다 멀리 왔으니 조금 오래 머물고 싶다고 지친 어깨에 내려앉는 노을빛은 붉고 무창포 바다 왼쪽 옆구리에 쌓이는 모란의 결 누군가 마음속에 넣어두었다가 꺼내놓았는지 꽃잎 사이사이 조약돌 같은 꽃술이 바르르 떨린다 바다가 너울너울 무량하게 피워내는 모란 바람의 깃에 이끌려 꽃대가 흔들린다 초승달에 걸린 바다가 허물어진다 모란이 지고 있다 상처에 관한 변주곡 물속에 발목을 담고 사는 새들의 전생은 물이었다 뼛속을 비우고 하늘로 뛰어드는 것은 깃털을 가다듬기 위한 것 파득거리는 물고기를 물고 솟아오르는 물총새가 바람으로 물비린내를 닦으며 날아갔다 물속에 사는 것들이 물 밖이 궁금할 때는 물의 창문을 열어놓고 출렁출렁 제 속의 소리를 멀리 떠나보낸다 물의 풍경 흔들리지 않게 소금쟁이와 검은풀잠자리가 움켜쥐고 있는 물의 낯을 얇게 뜯어내면 수천 장의 풍경이 펼쳐진다 강 하구까지 오는 동안 출처가 지워진 물길이 강의 깊은 속까지 흘러 들어가서 우리도 모르는 상처가 섞이면서 흔들리는 것이다 물의 내장으로 스며드는 것 중에는 새들의 붉은 발과 부리가 일으키는 굴절의 소리도 있다 맨드라미 그의 근원을 찾아가면 주름진 길의 가계가 있다 길 바깥에 촘촘히 앉아 있는 수천 개의 검은 눈이 있어 꿈속에서라도 어긋날 수 없다 단단하게 세운 성벽은 안과 밖이 없다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바깥이고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바깥이다 어디든 틈만 있어도 잘 보이는 눈이어서 지나치지 않는다 자리를 틀면서부터 새로운 가계가 시작된다 뜨거운 불의 심장을 꺼내 기둥을 세운 후 세상과 맞선다 처음부터 초단을 쌓는 것은 아니다 제 심지를 올곧게 땅속 깊이 내리꽂은 후 뱃심이 생기고 꼿꼿해질 때 온 숨으로 쏘아 올리는 붉음 높이 오를수록 몇 겹으로 겹쳐가며 치를 만들고 면을 서서히 넓혀가며 하나의 성이 세워진다 상강 지나 된서리 때리는 새벽 수탉이 볏을 세우고 푸드득 날갯짓을 하며 날 듯 나는 듯 소란스럽다 —시집 『모란의 저녁』 2023.11 ---------------------- 김경성 / 전북 고창 출생. 2011년 《미네르바》로 등단. 시집 『내가 붉었던 것처럼 당신도 붉다』 『와온』 『모란의 저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