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 번째가 무력을 이용하는 경우이고, 두 번째가 운명(fortuna)에 의한 경우이며, 세 번째가 역량(virtu)에 의한 경우이다. 무력에 의한 쿠데타를 옳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민주국가’에서 첫 번째 경우는 자연스럽게 권력 쟁취의 수단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판명난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의 분류에서 지금 참조할 수 있는 것은 두 번째와 세 번째이다. 이 범주를 지금 현재 한국의 정치상황에 적용해보자.
여유로운 호사가들이 즐기는 게임으로 정치를 국한한다면, 결국 정치판이란 것은 권력을 놓고 벌이는 예비 군주들의 각축장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 보다 더 흥미진진한 오락거리는 없다. 정치인은 연예인과 더불어 미디어산업을 먹여 살리는 무한한 소재들이다. 분석이 난무하고 예측이 횡행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언제나 빗나가는 맛이 있기에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가 있다.
보수의 정치는 바로 이런 2% 부족한 분석과 예측을 먹고 생존한다. 미디어에 노출이 되면 될수록 영향력은 커진다. 인기 정치인이 되는 것이 권력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첩경이다. 이런 원리를 잘 이용한 당사자가 바로 유력한 대선 후보 박근혜일 것이다. 물론 노출은 빈도수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너무 자주 나타난다면 식상한 느낌을 주게 마련이다. 그래서 알맞게 조절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지금까지 박근혜는 과하지 않은 행보를 계속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근혜가 지금까지 보인 모습은 ‘독재자 박정희의 딸’에 그의 이미지를 고정하고자 했던 반대편의 전략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듣는 입장에서 속이 쓰릴 수도 있지만, 웬만한 공격으로 무너뜨리기 어려운 요새가 이미 구축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다. 한번 진지가 만들어지면 도발하기 점점 힘들어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공성작전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결과는 뻔하다. 박근혜의 이미지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시도는 여럿 있었지만, 효과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런 결과를 놓고 쉽게 단정하자면, ‘국민들’ 수준을 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 운운도 이런 까닭에 발생한다.
그러나 문제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로 단언하면서 넘어가고 마는 그 지지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다. 박근혜와 박정희를 연결 짓는 발상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운명의 수혜자로 그를 묶어놓고자 하는 의도를 감추고 있다. 박정희 후광으로 박근혜가 지금 지지를 받고 있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이런 까닭에 박근혜에 대한 지지를 박정희 향수로 판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이브한 생각이다. 박근혜에 대한 지지는 하나처럼 보이지만, 복잡한 층위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박근혜는 단일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보수의 특징이 그렇듯, 박근혜를 지탱하고 있는 정치적 지지기반은 다양하다. 이런 다양성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단순하게 태생적인 운명에 힘입어 손쉽게 얻어낸 행운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박근혜에 대한 많은 진단이 범하고 있는 오류가 여기에 있다. 이른바 박근혜의 ‘적들’은 그에 대한 평면적인 인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문제는 박근혜라는 개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는 어떤 현상과 관련 있다. 박근혜가 있다기보다 ‘박근혜 현상’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마키아벨리로 돌아가서 ‘박근혜 현상’을 살펴보자. 박근혜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것은 분명 박정희의 유산이다. 이것은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명은 행운의 다른 말이다. 노력을 통해 얻었다기보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는 뜻이다. 인간 박근혜를 만들어낸 것은 박정희라는 과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시대가 중세도 아니고, 근대국가에서 이렇게 타고난 행운만을 가지고 강력한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긴 어렵다. 역량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박근혜에 대한 비판 대부분은 이런 역량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도 지난 총선 이후에 크게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박근혜가 어떤 역량을 보여줬는지, 안철수와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박근혜와 유사한 위치로 부상한 인물이 바로 안철수이다. 안철수는 박근혜와 달리 타고난 운명은 없지만, ‘타인의 호의’를 얻는 행운을 얻었다. 여하튼, 권력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다.
그런데 박근혜가 총선을 거치면서 빈사의 위기에 처했던 여당을 기사회생하게 만들어 ‘선거의 여왕’으로 화려하게 복귀했을 때, 안철수에 대한 지지율이 주춤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태생적인 것이든, 후천적인 것이든, 행운만으로 고정적인 지지층을 확보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이다. 안철수에게 없고 박근혜에서 확인된 것이 바로 이 역량이다. 이것을 정치적 역량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물론 박근혜의 역량은 지난 총선에서 비로소 증명된 것이 아니다. 그의 역량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은 지금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이명박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했을 때이다. 당시에 많은 전문가들은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분열을 점치고 있었다. 친이계와 친박계가 벌이는 계파갈등이 봉합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박근혜는 양보했고 덕분에 이명박 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다. 당연히 고난이 예정된 양보였다. 그 이후 다시 불거진 친이계와 친박계의 갈등이 이를 말해준다.
한 마디로 박근혜의 역량은 하루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증명된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차곡차곡 축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박근혜는 박정희의 후광에 머물러 있던 지지층의 외연을 확대했다. 천막당사와 세종시 문제에서 확고한 입장을 보였을 때 지지율이 상승했다. 물론 그 이후 다양한 현안에 대해 침묵을 유지함으로써 그 동안 쌓아온 이미지를 갉아먹은 측면이 있지만, 큰 타격을 받았다고 보기 어렵다.
반대 측의 주장과 달리, 박근혜는 운명에 머물지 않고 역량을 보여줌으로써 ‘여군주’의 이미지를 완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박근혜는 집권여당의 후보이기도 하다. 이 삼박자가 들어맞으면서 당분간 박근혜를 능가할 만한 정치인은 없을 것이라는 평가가 중론이다. 안철수에 대한 지지율이 급상승했을 때 대세론이 흔들리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안철수는 행운 이상 확신을 줄 수 있는 역량을 아직까지 보여주지 못했고, 지금은 전세가 역전되고 있다. 안철수가 박근혜를 능가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일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도 있다.
박근혜가 실질적으로 야권연대보다도 안철수라는 정당 외부의 인물과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모로 흥미롭다. 말하자면, 박근혜를 지지하는 상당수가 정당정치에 대한 반감 내지 혐오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성 정치인과 같지 않기 때문에 박근혜 현상은 가능한 것이라고 하겠다. 19대 총선에서 박근혜가 보여준 이미지가 바로 이런 정서에 기반을 둔 것이다. 정치인이면서 정치인답지 않은 행보를 보여 온 박근혜에 대한 지지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탈정치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탈정치화라는 것은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려는 전통적인 부르주아의 통치술과 무관하지 않다. 경제라는 범주가 모든 가치에 선행함으로써 국가를 통해 재현되지 않는 과잉의 데모스는 충실한 ‘국민’으로 자기 몫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 ‘국민’은 또 다시 도시와 농촌, 그리고 한국의 경우처럼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나뉘어서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구분을 무너뜨리고 공동체의 합의를 깨뜨리면서 새로운 경계선들을 만들어 내야할 정치는 이제 쓸모없는 과잉의 제스처로 규정되어 억압당할 수밖에 없다. 정치라고 호명되는 것은 부르주아적인 가치에 변별성을 부여하는 차이에 따라서 안전한 궤도를 따라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공학과 정치철학이 동맹관계를 맺게 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 정치는 장기판을 뒤집는 것이 아니라, 각 계파들이나 정파들 사이에 조성된 세력균형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정당은 모든 정치적인 것을 빨아들여서 절대화한다. 진보는 민주당이고 보수는 새누리당이라는 정식이 이런 원리에 따라 고착화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치판에서 진보와 보수는 어떤 변별성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갈등의 정치를 배제하고 경제적 이해관계의 조절과 공공재의 분배를 목적으로 삼는 부르주아 정치체제는 ‘등가적 교환’을 매개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등가적 교환이 가능한 정치만을 정당한 것으로 인준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이되, 이것은 공평하게 교환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을 갈아치울 수 있다’는 전제가 여기에 깔려 있다.
박근혜 현상은 이런 부르주아 정치의 원리를 적절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박근혜는 다른 무엇으로 얼마든지 교체 가능하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당사자가 바로 박근혜일 것이다. 박근혜보다 더 적절하게 부르주아 정치의 이념을 구현한 대상이 있다면 개인 박근혜는 사라질 것이다. 안철수가 그 가능성을 보여줬기에, 그에게 ‘타인의 호의’가 집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 보궐선거에서 보여줬던 안철수의 행운은 역량을 보여줘야 할 단계에서 멈춰 있다. 향후 안철수가 어떤 역량을 보여줄 것인지에 따라서 박근혜 현상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처럼, 박근혜 현상은 그 보다 더 적절하게 현재 진행 중인 부르주아 정치의 원리를 구현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박근혜 대세론은 대세론이 아니다. 박근혜는 ‘아버지의 소망은 복지국가였다’는 한 마디로 경제개발과 복지국가를 하나로 묶어버릴 수 있는 존재이다. 박근혜 현상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그에 대항하는 야권의 입지는 좁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박근혜가 보여주는 것은 여야를 넘어선 정치, 다시 말해서 정치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경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과거 이명박 정부처럼 정치를 축소하고 경제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보수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19대 총선의 구호가 말해주듯, 박근혜가 표상하는 것은 ‘제대로된 보수’이다. 이 보수는 정치를 노골적으로 억압하는 것이라기보다, ‘즐길 수 있는 교양’ 정도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을 ‘격이 있는 정치’라고 부르는 것이 박근혜의 수사학이다. 지금까지 정치가 너무 막 나갔기 때문에 좀 품격을 높여야한다는 요지이다. 이런 발상도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 19대 총선의 ‘막말파문’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보수주의와 이런 발언이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 결과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지만, 막말을 막말로 규정하는 그 방식이 일정하게 선거여론의 향배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몇 년 전에 성인용 인터넷 방송에서 했던 막말이 다시 살아나서 막말정국을 만들어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 당시에 아무런 문제가 없던 것이 다시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막말파문’은 울고 싶은데 뺨때려준 격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이 어느 때보다도 높았던 시기에 권력교체에 나선 야권 대표선수라고 할 민주당이 보여준 구태의연한 태도들은 유권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 상황에서 공천 잡음을 비롯해서 다양한 문제점이 노출되었고, 여기에 덧붙여 막말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나타난 것이다. 과거 ‘유시민 백바지’ 사건을 떠올려보더라도, 국회의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이중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초선 의원이었던 유시민은 국회 등원 시에 캐주얼 복장을 착용함으로써 국회의 권위에 도전하고자 했다. 일부에서 갈채를 받았지만, 대다수 반대여론이 비등하자 더 이상 실험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 그보다 더한 도발들을 국회에서 보기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이른바 ‘국민들’은 국회의원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지만 일정한 품격을 유지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박근혜 현상은 이런 이중적 보수주의를 통해 지탱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보수주의는 자기의 운명을 모르는 오이디푸스 같은 비극적 존재이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해서 노동유연화와 금융시장화를 가속화해왔지만, 정작 자신들이 수혜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이런 보수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의 특징이다. 신문사들이 정부의 특혜를 받아 종편에 진출하고, 과거 정경유착의 습속 때문에 제 2 금융권이 과도한 투자를 하는 바람에 문을 닫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그가 보여주는 중립성 때문이다. 중립성은 ‘도덕성’을 구성하는 기준이다. 이 중립성은 국가의 위치에 대한 요청이기도 하다. 중립에 서 있는 국가는 무엇인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국가이다. 이 국가는 ‘누구의 국가’를 정확하게 뒤집어 놓은 모습이다. 박근혜가 만들어낼 국가는 따라서 박정희라는 특정한 ‘누구’에서 불특정한 ‘아무나’로 자리를 옮겨야한다. 이것이 박근혜가 만들어내는 차별성이고, ‘국가 없음’을 드러내는 원인이다.
중립적인 국가에 대한 요청은 국가 없는, 또는 사회 없는 상황을 최선의 상태로 여기는 태도를 내포한다. 사회는 규제의 온상이다. 따라서 사회가 없는 상태는 절대적 자유의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대처주의자들은 사회 없음을 적극적으로 역설했다. 사회가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가치의 기준을 설정할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문화이다. 이런 까닭에 신자유주의는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여기에서 문화는 사회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제 3의 영역을 의미한다. 문화가 곧 자유의 조건이고, 문화적 진화가 자유를 만들어낸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런 논리로 인해 신자유주의는 문화적으로 보수주의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다른 보수주의를 보여준다. 일방적으로 특정한 문화를 나쁜 것이라고 규정하기보다, 더 진화한 문화와 그렇지 않은 문화를 제시하고, 전자를 후자보다 더 나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박근혜 현상은 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어온 신자유주의 개혁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이중적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고유한 행위자로부터 떼어내어서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 놓기 때문이다. 원래 그대로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절충적으로 이어 붙이거나 분리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 총선에서 박근혜가 진두지휘한 새누리당의 ‘혁신’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새누리당이 약진했던 원인은 여럿으로 설명되겠지만,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보수’라는 이미지에 적절히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보수는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인 보수로 통용되는 보수주의의 체현자가 아니다. 오히려 세련된 개혁노선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진 합리적 보수주의이다. 과거의 보수주의가 아닌 새로운 보수주의를 보여주는 것이 2012년 선거 국면의 관건이다.
박근혜에 대한 비판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까닭은 자명하다. 여야를 막론하고 추구해온 정치적 지향이 교차하는 지점에 그가 서 있기 때문이다. 경제개발과 복지국가가 박근혜라는 개인을 통해 구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드리워져 있다. 지금 현재 겪고 있는 불행의 원인이 무엇인지, 한국 사회는 아직 모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시민사회가 쇠퇴하고 관리기계인 국가가 그 시민사회를 대체하는 기조가 지난 시기 동안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SNS가 시민사회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기성 정치세력의 담론들을 충실하게 되풀이 생산하는 것이 전부이다. 토론과 갈등보다도 합의와 담합이 훨씬 더 현실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 분위기이다. 박근혜는 이런 악몽의 현실에서 솟아오른 기념비인 셈이다. 박근혜가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그 동안 박정희로 표상되는 경제개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왔던 시민사회의 존재가 미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근혜는 범상한 존재라고 보기 어렵다. 우연한 조건과 개인의 역량이 마주치면서 박근혜를 가장 시대적 요구에 적합한 정치인으로 인준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아무리 박근혜 개인의 약점을 파고들어도 소용이 없다. 문제는 박근혜가 아니고, 박근혜가 표상하고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 이명박 정부에게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주문했던 유권자들의 이중성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박근혜가 집권한다면 한국을 어디로 끌고 갈지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박근혜 현상의 본질이다. 무엇인가 리드한다기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들을 고쳐주기 바라는 것이 바로 박근혜에 대해 거는 기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철수와 여러 가지로 이미지가 겹치는 것이다. 박근혜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비어 있는 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대위를 내세워 과거의 한나라당을 혁신해서 새누리당을 만들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민주당도 한나라당과 비슷한 처지였지만, 전혀 혁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박근혜가 있어야할 자리에 한명숙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의견 없는 정치인’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실제로 이 점이 박근혜의 리더십을 구성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무런 역할이 없지만, 박근혜가 있다는 이유로 리더십이 발휘되는 것이다. 여러 계파 간에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박근혜의 리더십은 빛을 발한다. 그 리더십은 이중적이면서 기존의 가치를 서로 포개놓는다. 박정희를 쪼개고 분리해서 좋은 박정희와 나쁜 박정희를 만들어낸 뒤에, 좋은 박정희를 복지국가와 겹쳐놓는 식이다. ‘아버지의 소망이 복지국가였다’는 논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박근혜는 기존의 보수에게도 불편함을 줄 수밖에 없다. 이중성은 애매모호한 혼란을 초래한다. 수구라고 불리는 세력과 결별하고, 양가적인 가치로 보수를 끌어내는 것이 이를테면 박근혜 식의 혁신이다. 물론 이 혁신을 박근혜가 도모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집권’이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충고도 들을 수 있다. 이것이 박근혜의 특징이다. 19대 총선에서 확인했듯이, 한명숙은 누구의 충고도 듣지 않았다. 둘 다 집권을 꿈꾸면서 왜 다른 반응을 보였을까? 가치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한명숙의 가치는 과거 노무현 정부를 다시 복원하는 것이었던 반면에, 박근혜는 낡은 것을 가져오되, 분리시켜 서로 다른 것들끼리 포개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가치가 양가적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이렇게 되면 박정희에 대한 비판도 충분히 수용 가능해진다. 어차피 그 비판의 타깃은 나쁜 박정희에 대한 것이니까. 박근혜는 굳이 박정희와 자신을 분리할 필요도 없이 좋은 박정희의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독재자의 딸’ 박근혜에게 집권의 기회가 부여되고 있는 이 상황은 비극일까?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목격하고 있는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박근혜가 그렇게 또 다른 박정희로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처럼 유력한 대권 후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미 그 운명에서 한참 걸어 나왔다.이것이 그의 역량이었던 것이다.
역량은 탁월함에 대한 인정을 만들어낸다. 아이러니하지만, 결과적으로 박근혜의 역량은 세속적인 기준에서 아무런 능력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오직 집권을 위해 계파도 부정하고, 측근도 갈아치웠다. 그 대가로 그는 보수주의를 양가적인 가치로 포장했다. 이것이 그의 ‘혁신’에 숨어 있는 진실이다. 물론 지금까지 확인한 박근혜의 업적은 집권한 뒤에 펼쳐 보일 권력의 운용과 전혀 다른 것이기도 하다. 잠시 한 발 물러서서 그를 좀 더 지켜봐야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유로운 호사가들이 즐기는 게임으로 정치를 국한한다면, 결국 정치판이란 것은 권력을 놓고 벌이는 예비 군주들의 각축장일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이 보다 더 흥미진진한 오락거리는 없다. 정치인은 연예인과 더불어 미디어산업을 먹여 살리는 무한한 소재들이다. 분석이 난무하고 예측이 횡행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언제나 빗나가는 맛이 있기에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가 있다.
보수의 정치는 바로 이런 2% 부족한 분석과 예측을 먹고 생존한다. 미디어에 노출이 되면 될수록 영향력은 커진다. 인기 정치인이 되는 것이 권력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첩경이다. 이런 원리를 잘 이용한 당사자가 바로 유력한 대선 후보 박근혜일 것이다. 물론 노출은 빈도수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너무 자주 나타난다면 식상한 느낌을 주게 마련이다. 그래서 알맞게 조절하는 능력이 필요한데, 지금까지 박근혜는 과하지 않은 행보를 계속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박근혜가 지금까지 보인 모습은 ‘독재자 박정희의 딸’에 그의 이미지를 고정하고자 했던 반대편의 전략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듣는 입장에서 속이 쓰릴 수도 있지만, 웬만한 공격으로 무너뜨리기 어려운 요새가 이미 구축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다. 한번 진지가 만들어지면 도발하기 점점 힘들어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공성작전까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결과는 뻔하다. 박근혜의 이미지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시도는 여럿 있었지만, 효과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런 결과를 놓고 쉽게 단정하자면, ‘국민들’ 수준을 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 운운도 이런 까닭에 발생한다.
그러나 문제는 박정희에 대한 향수로 단언하면서 넘어가고 마는 그 지지의 원인에 대한 분석이다. 박근혜와 박정희를 연결 짓는 발상은 마키아벨리가 말한 운명의 수혜자로 그를 묶어놓고자 하는 의도를 감추고 있다. 박정희 후광으로 박근혜가 지금 지지를 받고 있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이런 까닭에 박근혜에 대한 지지를 박정희 향수로 판단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이것은 나이브한 생각이다. 박근혜에 대한 지지는 하나처럼 보이지만, 복잡한 층위를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박근혜는 단일한 정치적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지 않다. 보수의 특징이 그렇듯, 박근혜를 지탱하고 있는 정치적 지지기반은 다양하다. 이런 다양성을 만들어낸 원동력이 단순하게 태생적인 운명에 힘입어 손쉽게 얻어낸 행운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박근혜에 대한 많은 진단이 범하고 있는 오류가 여기에 있다. 이른바 박근혜의 ‘적들’은 그에 대한 평면적인 인식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문제는 박근혜라는 개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나는 어떤 현상과 관련 있다. 박근혜가 있다기보다 ‘박근혜 현상’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마키아벨리로 돌아가서 ‘박근혜 현상’을 살펴보자. 박근혜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것은 분명 박정희의 유산이다. 이것은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운명은 행운의 다른 말이다. 노력을 통해 얻었다기보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는 뜻이다. 인간 박근혜를 만들어낸 것은 박정희라는 과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지금 시대가 중세도 아니고, 근대국가에서 이렇게 타고난 행운만을 가지고 강력한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긴 어렵다. 역량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박근혜에 대한 비판 대부분은 이런 역량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비판도 지난 총선 이후에 크게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박근혜가 어떤 역량을 보여줬는지, 안철수와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박근혜와 유사한 위치로 부상한 인물이 바로 안철수이다. 안철수는 박근혜와 달리 타고난 운명은 없지만, ‘타인의 호의’를 얻는 행운을 얻었다. 여하튼, 권력을 얻을 수 있는 하나의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다.
그런데 박근혜가 총선을 거치면서 빈사의 위기에 처했던 여당을 기사회생하게 만들어 ‘선거의 여왕’으로 화려하게 복귀했을 때, 안철수에 대한 지지율이 주춤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태생적인 것이든, 후천적인 것이든, 행운만으로 고정적인 지지층을 확보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이다. 안철수에게 없고 박근혜에서 확인된 것이 바로 이 역량이다. 이것을 정치적 역량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물론 박근혜의 역량은 지난 총선에서 비로소 증명된 것이 아니다. 그의 역량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것은 지금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이명박에게 후보 자리를 양보했을 때이다. 당시에 많은 전문가들은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의 분열을 점치고 있었다. 친이계와 친박계가 벌이는 계파갈등이 봉합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박근혜는 양보했고 덕분에 이명박 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다. 당연히 고난이 예정된 양보였다. 그 이후 다시 불거진 친이계와 친박계의 갈등이 이를 말해준다.
한 마디로 박근혜의 역량은 하루아침에 자고 일어나니 증명된 것이 아니라, 이 과정에서 차곡차곡 축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면서 박근혜는 박정희의 후광에 머물러 있던 지지층의 외연을 확대했다. 천막당사와 세종시 문제에서 확고한 입장을 보였을 때 지지율이 상승했다. 물론 그 이후 다양한 현안에 대해 침묵을 유지함으로써 그 동안 쌓아온 이미지를 갉아먹은 측면이 있지만, 큰 타격을 받았다고 보기 어렵다.
반대 측의 주장과 달리, 박근혜는 운명에 머물지 않고 역량을 보여줌으로써 ‘여군주’의 이미지를 완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박근혜는 집권여당의 후보이기도 하다. 이 삼박자가 들어맞으면서 당분간 박근혜를 능가할 만한 정치인은 없을 것이라는 평가가 중론이다. 안철수에 대한 지지율이 급상승했을 때 대세론이 흔들리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안철수는 행운 이상 확신을 줄 수 있는 역량을 아직까지 보여주지 못했고, 지금은 전세가 역전되고 있다. 안철수가 박근혜를 능가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일지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도 있다.
박근혜가 실질적으로 야권연대보다도 안철수라는 정당 외부의 인물과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여러 모로 흥미롭다. 말하자면, 박근혜를 지지하는 상당수가 정당정치에 대한 반감 내지 혐오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성 정치인과 같지 않기 때문에 박근혜 현상은 가능한 것이라고 하겠다. 19대 총선에서 박근혜가 보여준 이미지가 바로 이런 정서에 기반을 둔 것이다. 정치인이면서 정치인답지 않은 행보를 보여 온 박근혜에 대한 지지는 한국 사회에 만연한 탈정치화를 반영한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탈정치화라는 것은 경제와 정치를 분리하려는 전통적인 부르주아의 통치술과 무관하지 않다. 경제라는 범주가 모든 가치에 선행함으로써 국가를 통해 재현되지 않는 과잉의 데모스는 충실한 ‘국민’으로 자기 몫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이 ‘국민’은 또 다시 도시와 농촌, 그리고 한국의 경우처럼 수도권과 비수도권으로 나뉘어서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구분을 무너뜨리고 공동체의 합의를 깨뜨리면서 새로운 경계선들을 만들어 내야할 정치는 이제 쓸모없는 과잉의 제스처로 규정되어 억압당할 수밖에 없다. 정치라고 호명되는 것은 부르주아적인 가치에 변별성을 부여하는 차이에 따라서 안전한 궤도를 따라 움직일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공학과 정치철학이 동맹관계를 맺게 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 정치는 장기판을 뒤집는 것이 아니라, 각 계파들이나 정파들 사이에 조성된 세력균형을 적절하게 조절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정당은 모든 정치적인 것을 빨아들여서 절대화한다. 진보는 민주당이고 보수는 새누리당이라는 정식이 이런 원리에 따라 고착화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치판에서 진보와 보수는 어떤 변별성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갈등의 정치를 배제하고 경제적 이해관계의 조절과 공공재의 분배를 목적으로 삼는 부르주아 정치체제는 ‘등가적 교환’을 매개로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등가적 교환이 가능한 정치만을 정당한 것으로 인준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이되, 이것은 공평하게 교환할 수 있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정치인을 갈아치울 수 있다’는 전제가 여기에 깔려 있다.
박근혜 현상은 이런 부르주아 정치의 원리를 적절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박근혜는 다른 무엇으로 얼마든지 교체 가능하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당사자가 바로 박근혜일 것이다. 박근혜보다 더 적절하게 부르주아 정치의 이념을 구현한 대상이 있다면 개인 박근혜는 사라질 것이다. 안철수가 그 가능성을 보여줬기에, 그에게 ‘타인의 호의’가 집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장 보궐선거에서 보여줬던 안철수의 행운은 역량을 보여줘야 할 단계에서 멈춰 있다. 향후 안철수가 어떤 역량을 보여줄 것인지에 따라서 박근혜 현상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것처럼, 박근혜 현상은 그 보다 더 적절하게 현재 진행 중인 부르주아 정치의 원리를 구현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박근혜 대세론은 대세론이 아니다. 박근혜는 ‘아버지의 소망은 복지국가였다’는 한 마디로 경제개발과 복지국가를 하나로 묶어버릴 수 있는 존재이다. 박근혜 현상이 지속되면 지속될수록 그에 대항하는 야권의 입지는 좁아질 것이다.
왜냐하면, 박근혜가 보여주는 것은 여야를 넘어선 정치, 다시 말해서 정치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경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과거 이명박 정부처럼 정치를 축소하고 경제를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보수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는 19대 총선의 구호가 말해주듯, 박근혜가 표상하는 것은 ‘제대로된 보수’이다. 이 보수는 정치를 노골적으로 억압하는 것이라기보다, ‘즐길 수 있는 교양’ 정도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을 ‘격이 있는 정치’라고 부르는 것이 박근혜의 수사학이다. 지금까지 정치가 너무 막 나갔기 때문에 좀 품격을 높여야한다는 요지이다. 이런 발상도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 19대 총선의 ‘막말파문’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보수주의와 이런 발언이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그 결과에 대해 설왕설래가 많지만, 막말을 막말로 규정하는 그 방식이 일정하게 선거여론의 향배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몇 년 전에 성인용 인터넷 방송에서 했던 막말이 다시 살아나서 막말정국을 만들어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 당시에 아무런 문제가 없던 것이 다시 문제가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어떻게 생각하면, ‘막말파문’은 울고 싶은데 뺨때려준 격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만이 어느 때보다도 높았던 시기에 권력교체에 나선 야권 대표선수라고 할 민주당이 보여준 구태의연한 태도들은 유권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이 상황에서 공천 잡음을 비롯해서 다양한 문제점이 노출되었고, 여기에 덧붙여 막말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나타난 것이다. 과거 ‘유시민 백바지’ 사건을 떠올려보더라도, 국회의원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이중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초선 의원이었던 유시민은 국회 등원 시에 캐주얼 복장을 착용함으로써 국회의 권위에 도전하고자 했다. 일부에서 갈채를 받았지만, 대다수 반대여론이 비등하자 더 이상 실험적인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 이후에 그보다 더한 도발들을 국회에서 보기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이른바 ‘국민들’은 국회의원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지만 일정한 품격을 유지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박근혜 현상은 이런 이중적 보수주의를 통해 지탱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보수주의는 자기의 운명을 모르는 오이디푸스 같은 비극적 존재이다. 신자유주의를 신봉해서 노동유연화와 금융시장화를 가속화해왔지만, 정작 자신들이 수혜자이자 동시에 피해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 이런 보수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의 특징이다. 신문사들이 정부의 특혜를 받아 종편에 진출하고, 과거 정경유착의 습속 때문에 제 2 금융권이 과도한 투자를 하는 바람에 문을 닫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그가 보여주는 중립성 때문이다. 중립성은 ‘도덕성’을 구성하는 기준이다. 이 중립성은 국가의 위치에 대한 요청이기도 하다. 중립에 서 있는 국가는 무엇인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국가이다. 이 국가는 ‘누구의 국가’를 정확하게 뒤집어 놓은 모습이다. 박근혜가 만들어낼 국가는 따라서 박정희라는 특정한 ‘누구’에서 불특정한 ‘아무나’로 자리를 옮겨야한다. 이것이 박근혜가 만들어내는 차별성이고, ‘국가 없음’을 드러내는 원인이다.
중립적인 국가에 대한 요청은 국가 없는, 또는 사회 없는 상황을 최선의 상태로 여기는 태도를 내포한다. 사회는 규제의 온상이다. 따라서 사회가 없는 상태는 절대적 자유의 공간인 것이다. 그래서 대처주의자들은 사회 없음을 적극적으로 역설했다. 사회가 없다면 도대체 무엇이 가치의 기준을 설정할 수 있는가? 그것이 바로 문화이다. 이런 까닭에 신자유주의는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데, 여기에서 문화는 사회도 아니고 자연도 아닌 제 3의 영역을 의미한다. 문화가 곧 자유의 조건이고, 문화적 진화가 자유를 만들어낸다는 논리인 것이다.
이런 논리로 인해 신자유주의는 문화적으로 보수주의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과거와 다른 보수주의를 보여준다. 일방적으로 특정한 문화를 나쁜 것이라고 규정하기보다, 더 진화한 문화와 그렇지 않은 문화를 제시하고, 전자를 후자보다 더 나은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다. 박근혜 현상은 90년대 한국 사회에서 진행되어온 신자유주의 개혁의 결과물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는 이중적이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가치체계를 고유한 행위자로부터 떼어내어서 새로운 영역으로 옮겨 놓기 때문이다. 원래 그대로 이식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절충적으로 이어 붙이거나 분리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는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 총선에서 박근혜가 진두지휘한 새누리당의 ‘혁신’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새누리당이 약진했던 원인은 여럿으로 설명되겠지만, 무엇보다도 ‘제대로 된 보수’라는 이미지에 적절히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보수는 한국 사회에서 전통적인 보수로 통용되는 보수주의의 체현자가 아니다. 오히려 세련된 개혁노선과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진 합리적 보수주의이다. 과거의 보수주의가 아닌 새로운 보수주의를 보여주는 것이 2012년 선거 국면의 관건이다.
박근혜에 대한 비판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까닭은 자명하다. 여야를 막론하고 추구해온 정치적 지향이 교차하는 지점에 그가 서 있기 때문이다. 경제개발과 복지국가가 박근혜라는 개인을 통해 구현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드리워져 있다. 지금 현재 겪고 있는 불행의 원인이 무엇인지, 한국 사회는 아직 모르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시민사회가 쇠퇴하고 관리기계인 국가가 그 시민사회를 대체하는 기조가 지난 시기 동안 유지되어 왔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SNS가 시민사회의 기능을 수행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기성 정치세력의 담론들을 충실하게 되풀이 생산하는 것이 전부이다. 토론과 갈등보다도 합의와 담합이 훨씬 더 현실적인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는 분위기이다. 박근혜는 이런 악몽의 현실에서 솟아오른 기념비인 셈이다. 박근혜가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그 동안 박정희로 표상되는 경제개발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왔던 시민사회의 존재가 미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근혜는 범상한 존재라고 보기 어렵다. 우연한 조건과 개인의 역량이 마주치면서 박근혜를 가장 시대적 요구에 적합한 정치인으로 인준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아무리 박근혜 개인의 약점을 파고들어도 소용이 없다. 문제는 박근혜가 아니고, 박근혜가 표상하고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과거 이명박 정부에게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주문했던 유권자들의 이중성을 통해 구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박근혜가 집권한다면 한국을 어디로 끌고 갈지 명확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박근혜 현상의 본질이다. 무엇인가 리드한다기보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들을 고쳐주기 바라는 것이 바로 박근혜에 대해 거는 기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철수와 여러 가지로 이미지가 겹치는 것이다. 박근혜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비어 있는 지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대위를 내세워 과거의 한나라당을 혁신해서 새누리당을 만들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민주당도 한나라당과 비슷한 처지였지만, 전혀 혁신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는 박근혜가 있어야할 자리에 한명숙이 있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의견 없는 정치인’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실제로 이 점이 박근혜의 리더십을 구성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무런 역할이 없지만, 박근혜가 있다는 이유로 리더십이 발휘되는 것이다. 여러 계파 간에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박근혜의 리더십은 빛을 발한다. 그 리더십은 이중적이면서 기존의 가치를 서로 포개놓는다. 박정희를 쪼개고 분리해서 좋은 박정희와 나쁜 박정희를 만들어낸 뒤에, 좋은 박정희를 복지국가와 겹쳐놓는 식이다. ‘아버지의 소망이 복지국가였다’는 논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박근혜는 기존의 보수에게도 불편함을 줄 수밖에 없다. 이중성은 애매모호한 혼란을 초래한다. 수구라고 불리는 세력과 결별하고, 양가적인 가치로 보수를 끌어내는 것이 이를테면 박근혜 식의 혁신이다. 물론 이 혁신을 박근혜가 도모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집권’이고 그렇기 때문에 누구의 충고도 들을 수 있다. 이것이 박근혜의 특징이다. 19대 총선에서 확인했듯이, 한명숙은 누구의 충고도 듣지 않았다. 둘 다 집권을 꿈꾸면서 왜 다른 반응을 보였을까? 가치에 대한 태도 때문이었다. 한명숙의 가치는 과거 노무현 정부를 다시 복원하는 것이었던 반면에, 박근혜는 낡은 것을 가져오되, 분리시켜 서로 다른 것들끼리 포개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가치가 양가적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였다.
이렇게 되면 박정희에 대한 비판도 충분히 수용 가능해진다. 어차피 그 비판의 타깃은 나쁜 박정희에 대한 것이니까. 박근혜는 굳이 박정희와 자신을 분리할 필요도 없이 좋은 박정희의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 ‘독재자의 딸’ 박근혜에게 집권의 기회가 부여되고 있는 이 상황은 비극일까? 모를 일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목격하고 있는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박근혜가 그렇게 또 다른 박정희로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처럼 유력한 대권 후보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이미 그 운명에서 한참 걸어 나왔다.이것이 그의 역량이었던 것이다.
역량은 탁월함에 대한 인정을 만들어낸다. 아이러니하지만, 결과적으로 박근혜의 역량은 세속적인 기준에서 아무런 능력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오직 집권을 위해 계파도 부정하고, 측근도 갈아치웠다. 그 대가로 그는 보수주의를 양가적인 가치로 포장했다. 이것이 그의 ‘혁신’에 숨어 있는 진실이다. 물론 지금까지 확인한 박근혜의 업적은 집권한 뒤에 펼쳐 보일 권력의 운용과 전혀 다른 것이기도 하다. 잠시 한 발 물러서서 그를 좀 더 지켜봐야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첫댓글 근혜 현상의 깊이를 잘 표현한 글입니다...지금보다 5년뒤 근혜현상의 뒤를 이을 역량들이 안보여서 그게 더 큰 걱정입니다.후계자가 없으면 결국 근혜현상의 혁명도 시들지나 않을지...
까치대부님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
박근혜란 인물에 대한 모범답안이네요. 오답주위를 돌며 핵심을 못잡는 반박들의 아둔함에 정말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