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산 자락의 미륵사지에서 한나절을 보내다.
봄은 어느 곳이든 운치가 있다. 모든 산들에 산벚꽃들이 피어나고, 물가에 그늘을 드리운 연푸른 버드나무, 익산 미륵산 자락에 봄이 무르익었다.
나라 안에서 가장 큰 폐사지 미륵사지에 커다란 절이 들어선 것은 백제 말이었다.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미륵사의 창건에 있어 먼저 미륵사 창건지인 금마와 무왕과의 관계를 살필 필요가 있고, 이미 기술한 금마와 무왕과의 상관관계를 또 다음의 기술에서 확연히 엿볼 수 있다.
중국의 기록인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는 그 책의 말기에 백제에 대한 사료가 적혀 있는데 “백제의 무강왕이 지모밀지란 곳에 도읍을 옮기어 새로 정사를 이루었다. 그런데 정관(貞觀) 13년(639) 겨울 11월에 큰 뇌우를 만나 재석사가 다 불타버렸다....” 라고 하고 있다.
위의 글에서 무강왕은 무왕의 이기이며 지모밀지(枳慕密地) 또한 금가저(金馬渚) 지모현(支牟縣)의 본래의 칭호로서 정관 13년이 바로 당나라 태종이 13년(693)에 해당되므로 이 때가 바로 백제 무왕 40년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륵사 창건은 앞서 이야기 한대로 백제 법왕의 시건(始建)을 거쳐 다음 대인 무왕에 의해 창건되어진 것만은 여러 사서(史書)를 통해 충분히 나타나고 있다. 즉 무왕의 미륵사 건립에 있어서는 고려 시대의 스님인 일연一然이 저술한 「삼국유사三國遺事」 무왕조(武王條)에 다음과 같은 무왕과 미륵사의 연기설(緣起說)을 적어 놓고 있다.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의 어머니가 서울의 남지南池란 못 쪽에 집을 짓고 홀어미로 살더니 그 못의 용과 상관하여 그를 낳았는데, 아명은 서동이니 그의 재능과 도량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평소에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
그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善花가 아름답고 곱기가 짝이 없다는 소문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가서 마를 아이들에게 마를 나눠 먹였더니 여러 아이들이 서동과 친하게 되어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는 동요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달래어 이 노래를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시집 가서
서동이를 밤이면 안고 돈다.
이 동요가 서울 안에 잔뜩 퍼져 대궐에까지 들어갔디. 모든 관리들이 알게 되어 공주를 먼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게 되었는데, 공주가 떠나는 날 왕후가 순금 한 말을 노잣돈으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사리 처소를 향하여 가는데, 서동이가 도중에서 뛰어나와 절을 하면서 호위하면서 가겠다 하니 비록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는 못하였지만 공주는 우연히 마음이 당기고 좋았었기 때문에 따라 오레 하여 남 몰래 관계를 한 뒤에야 서동이라 이름을 알고서 동요가 맞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함께 백제까지 와서 왕후가 준 금을 내어 놓고 장차 살림을 차릴 것을 의논하였는데, 서동이 웃으면서, ”이것이 무슨 물건이요“ 하니, 공주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것이 황금이요, 이것으로 한 평생 부자로 살 수 있소,“ 이 말을 들은 서동이 ”내가 어릴 적부터 마를 캐던 데는 이러한 것을 내러 버려 쌓은 것이 흙더미 같소“ 하였다.
공주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면서 ”이것은 세상에도 다시 없는 보물이요, 당신이 지금 금 있는데를 알거든 그 보물을 부모님 계신 궁전으로 실어 보냈으면 어떻겠소.“ 공주의 말을 들은 서동이 ’좋소” 하고는 금을 끌어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의 처소를 찾아 가서 실어 나를 계책을 묻자 지명법사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내가 귀신의 힘으로 보낼 수 있으니 금을 가져 오라.”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놓았더니 법사가 귀신의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신라 궁중으로 날려 보냈다.
진평왕이 이런 신기로운 일을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면서 늘 편지를 써서 안부를 물었더니 서동이 이 까닭으로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백제 무왕이 부인(신라 진평왕의 선화공주)과 함께 사자사로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까지 왔는데, 미륵불 셋이 못 속에서 나타나 왕이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렸다. 이에 부인이 왕에게 “여기다가 꼭 큰 절을 짓도록 하소서. 저의 진정 소원이외다” 하였다. 왕이 이를 승낙하고 지명법사를 찾아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었더니 법사가 귀신의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미륵불상 셋을 모실 전각과 탑, 행랑채를 각각 세 곳에 짓고 미륵사라는 현판을 붙였다. 진평왕이 장인들을 보내어 도와 주었으니,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
이런 연유로 익산시의 대표 축제가 서동왕자와 선화공주를 기념하는 축제를 열었다. 그런데 2009년 1월 익산 미륵사지 서탑에서 발견된「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 사택적덕(沙宅積德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우리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 善因을 심어...정재淨財를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 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맞이했다.”
봉안기에 따르면 사택적덕(沙宅積德)은 백제 제30대 무왕(재위 600∼641)의 택왕후(沙宅王后)의 아버지로, 좌평(佐平)을 역임하였다. 그 봉안기에 따르면 그는 사택왕후(沙宅王后)의 아버지로 명기되었고, 이를 통하여 사택적덕은 백제 무왕 치세에 권력의 핵심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뒤 진평왕의 따님으로 미륵산 자락에서 마를 캐는 서동왕자에게 시집을 왔다는 선화공주가 역사 속에서 애매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의 창건 설화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동서로 172m 남북으로 148m에 이르는 미륵사터는 넓이가 2만5천 평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로서, 국보11호로 지정된 미륵사지 9층 석탑인 서 석탑과 1993년에 복원된 동석탑 그리고 당간지주가 있는데 다른 절과는 달리 2기가 있다.
미륵사지에서 어떤 곳에 쓰였는지 모르는 수많은 석재들을 바라보며 지나간 역사르 이렇게 저렇게 회고한 하루가 그렇게 저물고, 나는 다시 그 미륵사지를 떠올리고 있으니,
2023년 3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