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하 소작쟁의 운동의 본고장 암태도
섬이라는 공감각 속에는 얼마간의 단절감이 들어있다. 육지와 분리된 채 바다에 둘러쌓여 있는 땅이라는 선입감과, 섬이 아직도 유배인들이 갇혀 지내던 고립된 공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른다.
그러나 섬은 때론 고달픈 현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나는 이상향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도달하고 싶은 유토피아 세계에 대한 염원이기도 하였다. 홍길동전에 나오는 '율도국'은 한 외딴 섬에 세우고자 했던 민중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이 아니었을까?
천사대교를 지나며
섬 사람들은 끊임없이 섬이라는 분리된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래서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다리가 놓여지고 있다. 육지로의 귀속을 희망하는 섬 사람들에 의해 그 분리된 공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육지와 다리가 이어지는 순간 섬이라는 공간은 그 의미를 잃는 것이지만 섬이 갖는 공간적 제약을 극복하려면 어찌할 수 없는 노릇 같다.
우리나라에서 섬이 가장 많고 '천사섬'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군이 서남해에 자리한 신안군이다. 마음씨 고운 천사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1004의 섬 숫자가 주는 이미지 메이킹이 나름 그럴 듯하다.
서남해의 무수한 섬 중에 암태도는 다리가 연결되면서 이제 그 섬의 공간적 의미는 잃었다. 지난 2019년 4월 4일 개통된 이 다리의 이름이 '천사대교'다. 신안군의 천사 섬 애칭을 따온 것 같다. 천사대교는 섬과 섬을 연결하는 연도교로 압해도와 암태도를 연결하고 있다.
암태도 담벼락 파마머리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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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마머리 노부부 벽화 집주인인 노부부 벽화와 애기동백나무가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
ⓒ 정윤섭 |
암태도岩泰島, 많은 섬들 중에 암태도가 주는 이미지는 무엇일까? 그 많은 섬들이 각각의 특징을 갖기는 힘들지만 섬은 자연환경이나 특산물, 출신 인물, 뭐 이런 것들로 섬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암태도는 천사대교가 연결되면서 육지의 많은 관광객들이 섬을 찾고 있다. 천사대교를 지나 암태도로 접어들면 암태도와 자은도가 갈라지는 기동삼거리 담벼락에 재미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멀리서 보면 파마머리를 한 노부부의 모습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담장 안에 있는 애기동백나무를 머리 삼아 담벼락에 두 노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이 집의 주인부부 초상화다. 생각도 기발하지만 덕분에 주인부부도 유명인이 되었다. 찾는 이들에게 재미있는 에피소드 같은 느낌이 들게 하는 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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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사대교 신안군 압해도와 암태도를 잇는 다리다 |
ⓒ 정윤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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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태도 승봉산에서 내려다 본 다도해 섬들이 마치 섬들의 군무처럼 황홀하다 |
ⓒ 정윤섭 |
암태면사무소가 있는 섬의 중앙으로 들어서면 섬 한복판에 있는 승봉산(355m)이 듬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승봉산은 산 정상에 올라서면 다도해의 절경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등산로가 잘 되어 있어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산 정상에는 벤치가 놓여 있고 눈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섬들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
진도군 조도면은 섬이 새때처럼 많아 조도(鳥島)라 했다지만 승봉산 앞바다에 펼쳐져 있는 섬들은 새떼들의 군무 같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무수한 섬들이 햇살에 반사되어 보여주는 모습이 환상적이다.
암태도 소작쟁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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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태도 소작쟁의 기념탑 암태도는 일제강점기하에서 지주들과 일본인들에 대한 소작쟁의가 이루어진 대표적인 섬이다. |
ⓒ 정윤섭 |
점점 현대화 되어가고 있는 암태면 소재지의 암태면사무소 쪽으로 가다보면 암태도 소작쟁의기념탑이 서 있다. 기념탑을 중심으로 암태도 소작인 항쟁을 기리는 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암태도 사람들의 힘겨운 지난날의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기념탑이다.
암태도는 신안군의 여러 섬들처럼 소금을 생산하는 염전이 많지만 간척으로 인해 생긴 농토도 많아 농업의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소작쟁의 운동은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소작인들의 투쟁의 흔적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암태도는 일제강점기하에 지주들과 일인들에 대한 소작쟁의 운동의 본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서태석으로 대표되는 열정적인 청년들에 의해 농촌계몽운동과 애국독립 운동의 농민항쟁사가 현장에서 살아 숨쉬고 있는 섬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하에서 어렵게 농토를 갖게 된 섬 주민들은 대부분 가난한 소작농들이었다. 지주들과 일제의 가혹한 소작료 수취로 인해 암태도 농민들은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에 청년 서태석 등은 1923년 8월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하여 항쟁하였다.
암태도 소작쟁의 운동은 섬 농민들의 강고한 단결력과 지속적인 투쟁으로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1924년 4월 6일자의 동아일보 기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다른 소작쟁의 운동에 큰 힘을 불어넣어 준 대표적인 소작쟁의였다.
암태도 소작쟁의는 소설가 송기숙 선생에 의해 <암태도>라는 제목으로 소설화되어 1979년 창작과비평사에 연재되기도 하였다. 약 1년간 지속된 암태도 소작쟁의 운동은 자은도, 비금도, 도초도 등 인근 여러 섬에서 소작쟁의를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 같은 농민들의 항쟁으로 인해 당시 7할이 넘는 소작료를 4할까지 내리게 하였다.
암태도 송곡 매향비와 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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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태도 송곡 매향비 섬지방에서는 유일하게 발견된 매향비다. |
ⓒ 정윤섭 |
암태도 민중들의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염원 같은 비가 송곡마을에 가면 있다. 암태도 소작쟁의 운동을 돌아보면 이곳 섬 사람들의 오랜 염원이 매향비(埋香碑)에도 담겨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향은 미륵신앙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도탄에 빠진 민중들을 구원해 줄 부처의 출현을 염원하는 의식으로 행해졌으며 이때 매향비가 조성되었다.
1405년(태종5) 건립된 송곡 매향비는 매향의 주도층으로 향도가 명시되어 있고 매향처를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매향비는 본래 마을에서 떨어진 비석거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송곡리로 들어가는 남쪽 입구의 잘 정비된 보호각 속에 있다. 남북한을 통틀어 현재까지 유일하게 섬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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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태도 송곡리 우실 마치 성벽과 같은 우실이 송곡마을에 잘 남아있다. |
ⓒ 정윤섭 |
매향비를 보고 본 마을쪽으로 올라가면 마을의 북쪽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초입에 성벽을 연상케 하는 돌담이 양쪽에 쌓여 있다. 약 3m내지 4m 높이의 돌담은 가운데에 입구가 있어 마치 성문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돌담과 몇 그루의 고목나무가 잘 조화를 이룬 멋진 우실이다.
우실은 마을 출입구나 풍수적으로 허한 곳에 흙 또는 돌로 담을 쌓거나 수목을 조성하여 외부에서 마을이 보이지 않도록 마을 주위를 감싸는 울타리의 역할을 하는 돌담이다.
서남해안의 여러 섬에는 이러한 우실이 남아 있는데 송곡 우실은 그 원형이 꽤 잘 남아 있는 우실이라 할 수 있다. 송곡마을 우실은 지나가던 스님이 마을 번창과 우환을 막으려면 이곳에 담을 쌓아야 한다고 하여 돌을 이용해 우실을 만들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