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한부 선고, 뒤늦게 찾아온 사랑, 눈물을 강요하는 클라이맥스
1990년대 한국 멜로가 충실히 따르던 공식입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1998)는 똑같은 재료를 쥐고도 정반대 길을 택했습니다. 관객을 울리는 대신, 관객이 스스로 슬퍼할 자리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이 영화가 지금도 '한국 영화사 최고의 멜로'로 꼽히는 이유는 이 하나의 태도에서 갈라져 나옵니다.
허진호 감독은 카메라를 인물의 감정에 붙이지 않습니다. 초반, 정원(한석규)이 혼자 사진관 문을 닫고 골목을 청소하는 장면에서부터 이 태도는 시작됩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인물이 응당 흔들려야 할 순간에도 카메라는 그를 몰아세우지 않고 일상적인 동작을 그저 지켜봅니다.
이 원칙이 가장 선명해지는 곳은 마지막 장면입니다. 정원이 죽은 뒤 다림(심은하)은 닫힌 사진관 앞에서 진열장에 놓인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고 옅게 웃는데, 카메라는 그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파고들지 않고 거리를 유지합니다.
설명 대신 관찰, 해석 대신 여백 - 마지막 20여 분이 거의 무대사로 흘러가는 것도 같은 원칙의 연장입니다.
이 영화가 실제로 다루는 주제는 사랑보다 시간입니다. 원제 후보였던 '즐거운 편지' 대신 최종적으로 선택된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제목부터 그렇습니다. 여름과 겨울, 어울리지 않는 두 계절을 한 제목에 욱여넣어 삶과 죽음, 젊음과 소멸, 두 사람 사이의 시간차를 예고합니다. 정원이 다림에게 자신의 병을 끝내 알리지 않는 이유도 이 시간의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순전히 '시간이 없어서'인지 '그녀를 슬픔에 묶어두고 싶지 않아서'인지 영화는 답을 내려주지 않습니다. 정답을 주지 않기 때문에 관객은 각자의 방식으로 정원의 침묵을 완성하게 됩니다.
한국 멜로에서 죽음은 대개 눈물을 짜내는 도구로 소비됩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죽음을 극적 사건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정원은 영정 사진을 찍으러 온 노인을 담담히 대하고, 자신의 죽음도 일상의 연장선에서 받아들입니다. 허진호 감독이 가수 김광석의 환하게 웃는 영정 사진에서 이 영화를 착안했다는 사실이 이 태도를 정확히 설명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일상의 밝음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죽음은 사랑을 완성시키는 무대장치가 아니라 애초부터 거기 있던 삶의 조건으로 다뤄집니다.
한석규와 심은하의 연기가 완성도에 결정적이었다는 평가는 과장이 아닙니다. 다만 이 연기의 미덕은 기교가 아니라 배우의 존재감을 지운다는 데 있습니다. 한석규는 시한부라는 무거운 설정을 짊어지고도 비장함 대신 생활인의 얼굴을 유지하고,
심은하는 명랑한 다림 뒤에 감춰진 상실의 예감을 함께 담아냅니다. 관객에게 '연기를 본다'는 감각 대신 '삶을 엿본다'는 감각을 주는 것, 이것이 이 영화가 30년 가까이 지나도 낡지 않은 이유입니다.
다만 이 절제가 모두에게 미덕으로 읽히는 것은 아닙니다. 사건다운 사건이 거의 없고, 갈등은 대개 인물의 침묵 속에서만 진행되며, 정지된 화면이 오래 지속되는 구간도 적지 않습니다. 빠른 편집과 명확한 전개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이 영화를 두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영화라고 느낄 수 있고, 실제로 그런 평가도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30년 가까이 살아남은 힘은 역설적으로 그 '아무 일도 없음' 자체에 있습니다. 사건이 없기 때문에 관객은 인물의 표정과 침묵, 그 사이의 정적을 스스로 읽어내야 하고, 그렇게 읽어낸 감정은 영화가 떠먹여 준 감정보다 훨씬 오래 남습니다. 완성된 슬픔을 건네받는 관객과, 스스로 완성해야 하는 관객은 같은 장면을 보고도 다른 무게의 여운을 안고 극장을 나섭니다. 이 영화가 볼 때마다 다시 새롭게 다가온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한줄평
"사랑을 그리지 않고 사랑의 여백을 그렸기에, 30년이 지나도 매번 새로운 8월."
작성자 로더리고
첫댓글 이~제~너를 남겨두고 나~떠나야 해
한석규의 나즈막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정원이 다림을 오토바이에 태우고 가는 장면이 참 좋지요.
말씀대로 시간을 다루는 이야기지요.
정원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시간'이고
그래서 사랑하는 이들과 '시간'을 평소처럼 보내는게 중요했을 겁니다.
정원에게 우연히 찾아든 다림의 만남과 연결 그리고 연정은 분명 사랑으로 다가왔을테구요.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 더 많은 다림의 삶을 알기에 정원은 더 깊은 관계를
이어가지는 않는데, 그 선택은 아버지에게 리모콘 사용법을 알려주려는 태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언제나 '부재'를 통해 그들과 보낸 시간과 기억속에서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삶은 매번 이별을 맞이하는 것일텐데도, 참 익숙해지지 않는게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 같습니다.
매일 이별하면서 나아가는 우리와
참 닮아서 연결되는 영화가
8월의 크리스마스 같습니다.
항시 귀한 영화비평을 올려주시는 로더리고님 고맙습니다.
덕분에 또 간만에 영화를 볼 수 있겠네요.ㅎㅎ
이 명작을 아직 안봤네요!
이번주말 당첨입니다~
감사합니다!
여름에서 가을 겨울 시간의 흐름도 좋습니다
달달하니 잼난영화죠~
‘관객을 울리는 대신, 스스로 슬퍼할 자리를 마련해 준 영화’라는 표현이 정말 와닿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사랑과 죽음을 다루면서도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침묵과 일상의 순간들로 더 깊은 여운을 남기는 영화인 것 같습니다. 젊었을 때는 사랑 이야기로 보였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결국 사랑보다 삶과 시간에 관한 영화라는 생각이 더 깊어지고요.
좋은 영화는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것보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마음속에 오래 남아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라는 로더리고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역시 최고의 영화평론가다운 훌륭한 감상평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를 꼽아보면 대부분은 이렇게 담담한 영화더군요. 저는 한석규가 신구선생님에게 리모컨 설명을 하다가 울컥하는 장면 그리고 설명서를 만드는 장면이 그렇게 뇌리에 남습니다. 우리 영화 중에서는 늘 최고로 생각하는 영화인데, 로더리고님 덕분에 이번 주말에 또 한 번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