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05. 24 금요일
(2218 회)
- 공감과 배려 -
40대 중반의 J변호사는
어느날 지인의 장례식장에 가서 문상을 마치고 나오다가 다른방 빈소에 유치원생 같은 아이의 영정사진을 보았다.
조문객은 아무도 없었고
아이의 부모같은 젊은 부부만 상복을 입은 두개의 섬처럼 적막하게 앉아 있었다.
J변호사는 조용히 들어
가 아이의 영정 사진에 분향하고 절을한뒤 상주 인 부모에게 말했다.
"지나다가 모르지만 너무 가슴이 아프고 안타까워 아이의 명복이라도 빌어
주려고 들어 왔습니다"
50대 중반의 K프리랜
서는 어느날 갑자기 아내가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버렸다.
아내의 친구가 항암치료 때문에 삭발을 한 다음 창피해서 외출을 못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자
머리 깎은 한사람은 쳐다보지만 두 사람은 안쳐다본다며 자신도 긴 머리카락을 친구처럼 빡빡 깎아 버린 것이다.
그 뒤로 시장이든 백화점이든 늘 함께 다녔다.
부인이 비구니가 되는 줄 알고 매일 좌불안석 이었던 K프리랜서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50대 중반의 중견 출판
사의 H대표는 어느날 골목에서 남루한 행색의 걸인같은 사내를 보고 지폐를 꺼내 적선하려다가 멈칫했다.
돈을 불쑥 내미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에 잠시 고민하다가 사내의 등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 이거 흘리고가셨어요 "바닥에 떨어진 돈을 주워 주인에게 돌려주는 척하며 적선을 했다.
마치 톨스토이의 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
가"의 한 장면처럼~
이 세사람의 따뜻한 일화는 우리 주변에 흔할것 같으면서도 흔하지 않은 실제 얘기들이다.
생면부지의 빈소에 분향하며 헌화했다는 얘기를 아직 들어 본적 없고,
암투병 중인 친구를 위해 같이 삭발했다는 얘기를 아직 들어 본적 없고,
적선은 하되 걸인을 주인으로 만들어 명분을 세워주고 자존심을 배려하는 방법까지 고민했다는 얘기를 아직 들어본적없다.
요즘처럼 공감과 배려가 크게 강조되는 시대도 드물다.
그러나 대부분 먼발
치에서 잠시 눈물짓고 잠시 슬퍼하는 것으로 공감과 배려를 소비해버린다.
커피를 마시는게 아니라 커피 브랜드를 마시는 것과 같다.
공감과 배려는 브랜드가 아니다 소비도 아니다.
값싼 동정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작은 감동
의 생산이고 그생산이 모여 감동의 연대를이룬다.
*아이 엄마는 낯선 조문객 하나만으로도 세상이 따뜻했을 것이고,
*암투병 환자는 삭발한
친구 하나만으로도 이미 절반은 다 나았을것이며,
*걸인은 일부로 자신의 떨어진 자존감을 세워주는 것 하나 만으로도 긴 터널같은 일상에 잠시나마 빛같은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이 세분의 인품과 마음이 진짜 생산적인 공감과 배려의 씨앗인 것입니다.
그 씨앗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