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소로 나아갑시다
5월이 되자 10년 전 이사 올 때 화단에 심었던 쟈스민의 향기가 코를 찌릅니다. 마침 옆집도 쟈스민으로 아치 모양의 대문을 만들었기에, 거기서 날아오는 꽃향기도 만만치 않습니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면 일부러 그 앞에 가서 향기를 들이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대부분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듣습니다. 또한 “제 안에 위장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다 아는 이야기를 새삼스럽게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저도 감정이 있는 사람입니다.”라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만일 “제 안에 사람의 영이 있습니다.”라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실 저는 제 안에 사람의 영이 있다는 것을 20대 중반까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 후 성경과 제 체험으로 제 안의 ‘사람의 영’의 존재를 확인했고(양심은 사람의 영의 일부임),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얼마나 중요한지를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슥 12:1, 롬 8:16, 히 12:9-10).
그러므로 형제님들,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
진실한 마음으로 확신에 찬 믿음을 가지고 지성소로 나아갑시다(히 10:19, 22).
아침에 위 히브리서 본문을 묵상하고 추구했습니다. 참고로 저는 말씀 묵상할 때 회복역을 주로 봅니다. 그러나 핵심 진리나 교리적으로 쟁점이 될 만한 단어는 습관적으로 다른 번역본들도 참고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위 ‘지성소’를 개역성경과 개정개역이 ‘성소’로 번역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 상식으로는 지성소와 성소가 다른 영역이라 왜 이런 번역이 나왔는지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지성소인가 성소인가?: 구약의 성막 그림에 익숙한 분들은 성소와 지성소가 전혀 다른 두 영역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성소는 등잔대와 떡상과 분향단이 있는 곳이고, 지성소는 언약궤가 있는 성막의 가장 안쪽 부분입니다(출 26:33, 히 9:2-5). 그런데 위 본문에서 ‘지성소’로 번역된 원문은 ‘하기온’(39)으로서 ‘하나님을 위해 분별된’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일부 영어 성경은 이런 원문대로 그냥 ‘the sanctuary’로 번역하기도 합니다(ISV, NET Bible). 아마 개역성경도 이러한 ‘거룩한 장소’의 의미로 ‘성소’(聖所)라고 번역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번역은 떡상이 있는 ‘성소’와 혼동될 수 있기에, 개역성경을 제외한 거의 모든 한글 번역본은 이것을 문맥을 따라 ‘지성소’라고 번역했습니다.
어떻게 지성소에 들어가는가?: 구약에서는 대제사장만이 욤 키푸르라고 불리는 속죄일(7월 10일)에 1년에 딱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 전후 절차 또한 매우 까다롭고 복잡합니다(레 16장 참조). 그러나 지금은 그 물질적인 성막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지성소로 나아가라’는 위 말씀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여기까지라도 묵상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성경을 매우 진지하게 읽는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참고로 저는 이 묵상 단계에서 잠시 성막의 변천과정을 되돌아보았습니다. 먼저 성전 개념은 주님께서
하신 ‘이 성전을 허십시오. 내가 삼 일 만에 다시 세울 것입니다(요 2:19).’라는 말씀을 기점으로 크게
전환되었습니다.
즉 구약의 돌 성전에서 주님 자신(개인)으로(요 1:14), 부활 후에는 거듭난 믿는 이들, 즉 주님의 몸인 교회(단체)로 확대되었습니다(고전 3:16, 엡 2:21). 지금은 우리가 성전입니다! 그런데 아래 각주는 성전에서 특히 지성소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인 거듭난 영임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성소는 하늘에 있으며, 그곳에 주 예수님께서 계신다(히 9:12, 24). 그렇다면 여전히 이 땅에 있는 우리가 어떻게 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가? 그 비결은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 말한 우리의 영이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바로 그분은 지금 우리 영 안에도 계신다(딤후 4:22). 하늘에 속한 사다리(창 28:12, 요 1:51)이신 그분은 우리 영을 하늘과 연결시키시고, 하늘을 우리 영 안으로 가져오신다. 따라서 우리가 영으로 돌이킬 때마다, 우리는 지성소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은혜의 보좌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난다”(히 10:19, 각주 1).
위 본문의 전후 문맥은 유대교 배경을 가진 믿는 이들이 율법에 기초한 구약 경륜으로부터 돌이켜 새 언약을 체험하는 단계로 전진하도록 격려합니다. 그런데 새 언약의 핵심은 주님께서 (생명의 영의) 법을 우리의 생각 안에 넣어 주고, 마음에 새기시는 것입니다(히 8:10).
그리고 바로 이런 작업이 우리가 영으로 돌이킬 때마다 지성소인 우리 영 안에서 이뤄지고 있습니다(고후 3:16-18).
저의 경우 아침 부흥 후 스포츠 센터에 가서 근육 운동을 하고 있는 동안, 그 안에서 틀어놓은 음악 소리가 귀에 크게 들려오지만, 개의치 않고 제 영 안에서 그날 읽었던 말씀을 되새김합니다. 혹은 뒤뜰에 나가서 손으로는 잡초를 뽑고 떨어진 낙엽을 주우면서도, 제 영 안에서는 영광의 주님을 앙망하므로 주님께서 그분의 생명의 법을 제 생각과 마음 안에 새기실 기회를 드리기도 합니다.
첫댓글 아멘!
성령이 내 영 안에 임하면
내 안에 성령(하나님)과 또 다른 내(영)가
있는 것을 알게 되지요
성령은 영안에
성령과 영은 마음(혼) 안에
성령과 영과 혼은 육체 안에 있지요
흙의 집이 무너지면 내 영혼이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겠지요
@아들의 영 김바울님이 어느 소속
교파인지도 모르고
교파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보기드문 깊은 믿음의 글이라
기뻐했고 아멘일 뿐이니
님은 남의 글에 판단 정죄보다
진리의 글이 아니면 아니요 글을
인간적 예의를 갖추고 올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아들의 영
님은 자기 신앙과 조금만 틀려도
판단 정죄하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것 같아요
과연 님이 인정하는 신앙인이 있을까요?
자기 말을 듣고 아멘하는 사람만 인정하겠지요
내 선생은 그리스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