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절모에 두루마기를 입으신 아버님이 지켜보시는 앞에서 했던 코흘리개 <국민학교>입학식이 지금도 아련하다. 시골 작은 면소재지 학교 입학 후 첫 해, 봄 소풍으로 먼지나는 신작로를 따라 전교생이 두 줄로 놀목(노루목)을 넘어 장학리 민씨 墓(묘)로 갔다. 그 시절 춘천의 초중고등학교는 물론 우리나라 어느 시골 학교의 소풍장소는 사찰, 능, 강이나 바닷가 등이었을 것이다. 마땅히 공원화된 장소가 부족했음이 이유일 것이다. 묘에 도착한 후 처음 본 것은 온통 벚꽃과 큰 소나무에 둘러싸인 높은 언덕의 큰 묘! 동네에서 미끄럼 타던 산소와는 다르다. 이 후 줄곧 6년 동안 아니, 이 묘와 우리 학교가 생기면서부터 같이 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不惑(불혹)이 넘어서야 향토사료집을 통해 다시 알게 되었다.
개화기 공회당에서 서당으로 시작하여 1936년 초, "가산공립보통학교"가 인가되던 해 조선조 영의정, 평양감사 등을 지낸 민영휘<서울휘문학교>설립자가 별세하여 이 곳 장학리 산자 수려한 명당에 안장될 때 당시 면장, 지역유지, 민초들이 명정과 조등을 다량 만들어 조문하고 장례를 도우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서울 민영휘 대감의 장례 풍경은 생전 민씨 세도 가문을 상징하듯 춘천 읍내에는 한 두대 정도밖에 승용차가 없었으나 조객들의 차량이 장지 앞에서 뒷뚜루 읍내까지 늘어서고 장례차는 지붕을 금빛으로 도금한 휘황찬란한 차로써 이 고장 사람들은 생전 처음보는 장관이었다고 기록되었다. 장례 후, 고인의 아들 <한국 최고의 갑부로 조선 한일은행 운영자> 민형식, 민대식, 민규식 3형제가 장례식 도움에 感泣(감읍)하여 내어준 하사금 3500원으로 2500여 평의 부지와 신축 교사를 마련하면서부터였다.
<노루목> 교차로
60년 초 초가집 몇 채와 기름진 옥답은 현대 건축물로 변모되었다.
전교생 400여 명이 이 곳에 도착, 보물찾기와 손수건 돌리기 등의 소풍행사를...
舊(구)도로를 평생 수없이 지나다녔지만 마지막 소풍 후 도랑만 건너면 될 짧은 거리를 오늘에서야 와 본다.
높고 웅장했던 기억이~ 여전하다.
선생님들이 저 위로 오르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상급생 몇 명과 지역에서 영향력 있는 가족은 올라 사진도 찍었다.
문인석 : 우연의 상흔인가? 아니면 감정의 파괴인가? 상관을 잘못 만난 댓가인가?
문인석과 수호석, 망주석 등 전형적인 고관대작 묘소이다.
그런데 이 장엄한 묘에 묘비가 없다. 처음부터 없지는 않았을 듯...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장명등 : 어떠한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기둥은 교체된 듯 하다.
묘에서 바라본 대룡산과 구봉산의 풍경
구봉산 허리에 산토리니 등 이름도 이국적인 카페촌이 보인다.
단풍으로 물든 가을철 모습. 벚꽃이 핀 봄철 모습은 더욱 장관이다.
좌로는 구봉산, 우로는 봉의산과 소양강이~
과연 이 곳이 좌청룡 우백호의 명당이 아닐런지?
기적비 : 생전의 업적을 기록해 놓은 듯 하다.
<동학농민운동 혁명군 토벌에 앞장 섰으며 일제강점기에 관직을 이용하여 '반도 유일의 부호'라 불릴만큼 부를 축적하여 훗날 상당량의 토지와 현물이 국고에 귀속되고...>이런 내용은 아닐 듯하다.
묘소 아래에는 묘막이~
고목으로 변한 벚나무의 모습이 세월의 풍상을 말해주는 듯 처연하다.
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 66호로 지정되었다.
(지역 일부 정파와 관련단체의 문화재 취소를 위한 논쟁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기와지붕은 교체, 수리한 듯 하나 문화재라고 하기에는 다소 허술함이 느껴진다.
대문에 걸린 빛바랜 태극기가 처연해 보인다.
구봉산~ 배후령 입구~용산(춘천댐)간 자동차 전용도로
저 도로를 이용하면 20여 분이면 가능한 거리를 40~50분 돌고 돌아 이 곳에서 원망스럽게 바라본다.
이륜자동차가 다닐 수 없는 적폐, 자동차 전용도로!
※ 과거 조선을 망하게 한 "관존민비 사농공상" 현상이 21세기까지도 재현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만감이 교차하였다.
과연 대한민국에 규제개혁의 변화는 정녕 진행되고 있는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어릴 적 追憶이 아련한 곳이군요. 사람에 대한 평가는 후세의 주류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남한에 김구 선생께서 계셨다면 북한엔 독립운동가 평양의 조만식 선생이 계셨지요. 해방 이후 남북의 통일을 위해
힘쓰셨지만 결국 김일성에게 이용만 당하고 국군이 북진하던 1950년10월 공산당에게 처형당하신 걸로 압니다.
과연 조만식 선생에 대한 평가를 북한에서 어떻게 할지요? 북한에선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조차도 모를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역적 김일성의 잔재들이 북한을 아직도 지배하기에 말입니다...
박학다식/주식1004님 남쪽도 시원하시죠
윗쪽은 좀 더~~~촙습니다.ㅎㅎ
잔잔하지만 묵직한 해설 감사합니다.
조만간 미모 사모님과의 행복 넘치시는 투어후기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될겁니다 '개혁' 국민이 두눈 부릅뜨고 지켜보면 바이크가 고속도로위를 언젠간 쭈우욱 달리겠죠. 지치지말고 쭈우욱 지켜봐야죠 ㅎ
위 사진속 전용 일부 구간은 앞 뒤로 주행차가 안보일정도로 한산합니다
미치는 거죠~ 흔한말로...감사합니다.^^
동상 뒷 부분 총탄의 흔적처럼 느껴지는데 아니겠죠? 사진 잘 봤습니다.
격동의 흔적이겠죠 잘 봐주셨다니 감사드림니다.
해설 감사합니다 상전이벽해가되고 천지가개벽이되는 지금
말씀하신대로 ? 는
훗날 역사가들이 말할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