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반경>에 있는 법문인데,
여러분도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 이라고 허는
게송은 모르는 분이 없을 거여.
왜 설산동자는 그 게송을 듣고 확철대오를 했는데,
우리는 조석으로 쇳송을 허면서, 목탁석을 허면서 노상 외우면서도 우리는 그냥 염불로써만 외우제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가?
그것은 그만큼 위법망구적으로 목숨을 바챠서 고행정진을 헌 뒤끝이고, 그 반 토막 게송을 듣기 위해서
나찰귀신에 목숨을 바친 그런 위법망구적인 신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 게송 반 구절을 듣고서 확철대오를 헌 것이다 그 말이여.
자기 자신이 평소에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단 한 생각도 그냥 방치허지 아니하고 즉각그 생각이 두 번째 생각으로 번지기 전에 터억 화두를 들고 ‘이 뭣고?’
망상이 일어나거나 번뇌가 일어나거나, 슬픈 생각이 일어나거나 기쁜 생각이 일어나거나, 과거일이 생각나거나
미래일이 생각나거나,
일체처 일체시에 항상 그 생각을 돌이켜서 생각이 일어나는 그 당처를 찾는 거여.
이 뭣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항상. 밥을 먹을 때도 ‘이 뭣고?’ 똥을 눌 때도 ‘이 뭣고?’ 걸어갈 때도 ‘이 뭣고?’ 일을 하면서도 ‘이 뭣고?’
속이 상할 때도 ‘이 뭣고?’ 슬플 때도 ‘이 뭣고?’
인생은
어차피 흥망성쇠와 생로병사 희로애락
그 속에서 눈을 뜨나 감으나 먼 디에서 가까운 디에서
그것을 여의고는 우리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고
느낄 것이 없어.
그 속에 끌려 들어가서 몸부림을 쳐봤자
생사윤회밲에는 없어.
바로 거기에서 그놈에 즉해가지고 ‘이 뭣고?’
이것이 바로 생사 속에서 생사 없는 도리를 깨닫는
유일한 길이여.
설산동자(雪山童子)는
그 게송 반 쪼가리를 듣고 나찰귀신에 그 게송을
바위나 절벽 나무 길에다가 마구 그것을 새기고서,
그 새기는 뜻은 다른 많은 중생들도 그 게송을,
그 금쪽같은 보석보다도 더 소중한 그 게송을 접해가지고 눈을 떠서 생사해탈 하라는 중생을 위한 자비심이여.
그리고 마침내 나무에 올라가서
나찰귀신을 향해서 몸을 던졌다 그 말이여.
그 공덕으로
십이 겁(12겁)을 건너뛰셨어. 초월을 하셨어.
우리라고 해서 견성성불(見性成佛)허지 못허라는 법이
없어
첫댓글 일체 중생 참 나를 깨달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 나기를 발원합니다 _()_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