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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너와 나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3,2.5-18
2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였다.
5 아브람과 함께 다니는 롯도 양과 소와 천막들을 가지고 있었다.
6 그래서 그 땅은 그들이 함께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
그들의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 수가 없었던 것이다.
7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과 프리즈족이 살고 있었다.
8 아브람이 롯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9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10 롯이 눈을 들어 요르단의 온 들판을 바라보니,
초아르에 이르기까지 어디나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았다.
그때는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다.
11 롯은 요르단의 온 들판을 제 몫으로 선택하고 동쪽으로 옮겨 갔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갈라지게 되었다.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서 살고, 롯은 요르단 들판의 여러 성읍에서 살았다.
롯은 소돔까지 가서 천막을 쳤는데,
13 소돔 사람들은 악인들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이었다.
14 롯이 아브람에게서 갈라져 나간 다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을, 또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15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16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
17 자, 일어나서 이 땅을 세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고
가로로 질러가 보기도 하여라. 내가 그것을 너에게 주겠다.”
18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7,6.12-1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6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12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13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The Narrow Gate
말씀의 초대
아브람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과 롯의 가축을 치는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자, 롯은 요르단 들판을 선택하고 동쪽으로 옮겨 간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라며,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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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롯은 함께 하란을 떠났다. 그들에게 많은 가축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먼저 원하는 땅을 선택하게 한다. 그래서 롯은 요르단 들판으로 가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으로 간다. 그 뒤에 하느님께서는 다시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고 거기에 도달하는 그 길은 비좁다고 말씀하신다. 생명에 이르고자 한다면 많은 사람이 가는 넓고 편한 길이 아니라 좁은 길로 가야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 말씀은 황금처럼 빛나는 규율이라고 해서 ‘황금률’로 불립니다. 산상 설교(5―7장)의 주요 부분을 갈무리하는 지점에 나오는 이 말씀은 이전 내용을 전체적으로 요약하는 구실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선언하시고(5,17 참조)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충만한 뜻을 여러 가르침으로 밝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모든 가르침을 관통하는 근본정신, 곧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황금률로 압축하여 표현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서 후반부에 언급되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라는 계명 다음에도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22,39-40 참조). 그렇다면 황금률과 이웃 사랑의 계명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남(이웃)이 너희에게 하여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이웃)에게 하라는 것은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사랑하듯 하라는 계명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황금률은 사랑의 계명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로마 13,10 참조).
남이 나에게 하여 주기를 바라는 것들을 떠올려 보면, 그 많은 것이 결국 하나의 단어로 모두 수렴되는 듯합니다. ‘사랑’, 우리는 결국 남에게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은 온전한 삶을 영위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 사랑을 누군가는 주고 있을 것입니다. 받는 존재로만 머물지 말고 주는 존재도 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상호적인 사랑을 강조하신 듯합니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이제는 우리가 남에게 사랑을 줄 차례입니다. 황금률을 다음과 같이 각색하여 보면 어떨까요? ‘남이 너희를 사랑하여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을 사랑하여라.’(정천 사도 요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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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선민의식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하느님 백성’이라는 도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주의적 사고는 강한 배타성을 지닙니다. 게다가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듯이 하느님께서는 자신들만의 하느님으로 계셔야 한다는 신학적 명제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선민의식과 강한 정체성은 하느님을 전능하신 창조주며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이 아닌, 이스라엘만의 민족 신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이런 보수적 신학의 입장을 거부하는 신학도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이 되는 길은 단순하게 혈통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입니다. 중요한 것은 혈통이 아니라, 윤리적 가르침과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라도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혈통이 아닌, 윤리 중심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이를 위한 표현으로 시편에서는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시편 15[14],1)라고 노래합니다. 기존의 가르침에서는 하느님의 천막인 주님의 집에 머무는 것은 유다인에게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화답송에서는 의로운 사람, 악의와 불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 이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성별이나 민족이나 능력을 떠나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하느님 백성이며,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격을 얻은 것은 모태 신앙이거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견진성사를 받아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였다면, 남에게 바라는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실천하면서 다시 주님의 장막에 머물 수 있는 신앙인의 특권을 누려 봅시다.(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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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것이란 어떤 것일까요? 원래는 구별된 것, 따로 몫을 지어 떼어 놓은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많지 않아서 쉽게 접할 수 없는 것, 그래서 값이 제법 나가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써, 가장 거룩한 것은 바로 우리 가운데 있고, 이웃과 함께 머무는 것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지난 4월에 영화로 소개되어 우리를 잔잔하게 울린 소록도의 두 천사 이야기를 아시나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동정녀 회에 입회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간호사가 되어 동양의 맨 끝 나라인 한국에, 그중에서도 가장 버려진 천형의 섬, 소록도에 있는 나환우들을 찾아온 ‘마리안느와 마가렛’이라는 두 천사의 이야기입니다.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나환우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맨손으로 약을 발라 주었던 동정녀들, 그리고 환자들을 치료하면서 의료 지식보다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아침마다 따뜻하게 우유를 데워 주고, 소박한 생일잔치를 열어 주는 것을 훨씬 소중하게 생각했던 두 사람은, 진정으로 거룩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던 이들입니다.
어떤 어려움이나 두려움 가운데에서도 사람을 사람으로 존중해 주는 것,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고, 장갑이 아닌 서로의 손을 잡고 대화하는 것, 이것들은 쉽지 않은 좁은 문이지만, 하느님께 이르게 하는 거룩한 문입니다.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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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지긋하신 분이 성경 공부 과제물로 제출한 글에 좁은 문, 좁은 길에 대한 내용이 있었습니다. 문이 넓다 해도 수많은 사람이 그 문으로 들어가려 한다면 문은 좁아질 수밖에 없고, 반면 길이 좁다 해도 그 길로 가는 사람이 없다면 길은 넓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참으로 지혜로운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침 좋은 예가 오늘 독서에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롯의 관계에서 아브라함이 한 일은 좁은 길을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둘이서 땅을 나누어 가져야 할 때, 상대편에게 좋은 몫을 고르라고 선택권을 선뜻 내어 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장에서 물건을 고르거나, 여럿이 음식을 먹거나, 호텔이나 피정의 집 같은 곳에서 방을 배정하다 보면 쉽게 드러나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시장에서 채소를 살 때도 자주 그런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은 것을 먼저 선택하려고 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래서 세상에는 경쟁이 치열한가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에게 좋은 몫을 양보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는 길에는 경쟁이 없었고 그의 문은 넓었습니다. 탐내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멸망으로 이르는 문은……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을 뒤좇으면서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르고 달릴 것이 아니라, 이 길이 올바른 길인지 짚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생명으로 이르는 길은 비록 작은 길이지만 비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의 정신을 아주 간략하게 요약해 주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크고 거창한 일을 하라고 요구하셨다면 쉽게 순명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일을 요청하셨기 때문에 이것을 무시하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만이 큰일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이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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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신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시며, 하느님 나라 또한 거룩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돈, 명예, 권력에 집착해 하느님의 뜻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경향이 짙습니다. 그것들이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줄로 착각하며, 언젠가는 썩어 없어지고 말 것에 목숨을 겁니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아닌, 썩어 없어질 것들에 마음을 두는 것은 이기적인 마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마음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알 턱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것을 순전히 자기 방식대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가 별게 있습니까? 공자도 『논어』에서 “자기가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마라.”(己所不辱 勿施於人)고 하셨는데, 주님의 말씀과 잘 통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행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행한다는 것은 좁은 길을 선택한다는 의미입니다. 머뭇거린다든지, 온갖 우상들이 제안하는 길은 더욱 쉽고 넓은 길이겠지요? 거기에는 진리가 없고 ‘거짓’만이 판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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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모 신부님은 우리나라에 들어온 첫 외국인 선교사입니다. 청나라 사람으로 ‘북경교구 신학교’를 1기생으로 졸업하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교구장 ‘구베아 주교님’은 조선 교우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그를 조선 땅으로 보냅니다. 주 신부님은 조선인으로 변장하고 1794년 12월 어렵게 국경을 넘습니다. 그를 안내했던 분은 순교자 ‘지황’이었습니다.
신부님은 한양에 도착하여 ‘최인길’의 집에 머물며 조선말을 익힙니다. 마흔두 살의 나이에 외국 말을 배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796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는 교우들과 함께 조선말로 미사를 드렸습니다. 이 땅에서 봉헌하는 첫 번째 예수 부활 대축일 미사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배교자에 의해 입국 사실이 알려지고 최인길과 지황은 순교합니다. 다행히 신부님은 피신했지만 숨어 지내며 사목 활동을 해야 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교우들은 붙잡히고 신부님의 거처를 캐묻는 문초를 받습니다. 교우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한 신부님은 순교를 결심하며 관아에 자수합니다. 그리하여 1801년 5월 31일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당하셨습니다. 당시 나이 49세였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비좁기 마련이다.’ 자신을 낮추고 작아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문모 신부님은 그렇게 사신 분입니다. 이 땅에서 활동하신 첫 사제였지만 지금도 ‘소박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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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작아져야 합니다. 욕망을 희석시키고 욕심의 물줄기를 가늘게 해야 합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기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좁은 문을 당연히 어려운 문으로 여깁니다. 경쟁이 치열한 문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그건 세상의 편견에 불과합니다. 천상 문은 경쟁이 없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몸을 낮추고 자신의 마음을 비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신앙생활을 힘들게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내가 신앙에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내게 가까이 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내가 은총 속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저 은총이 내려오기만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자신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지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는 받는 기쁨이 전부지만, 어른이 되면 주는 기쁨도 깨달아야 합니다. 베풀고 나누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좁은 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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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이 말씀을 언뜻 들으면, 구원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험하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그러나 그 문과 길을 크고 넓게 만들어서 더욱 많은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해야 맞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왜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작고, 그 길마저 비좁을까요?
먼저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몸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렇게 겸손한 사람이 아니면 그 문을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많은 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떵떵거리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세상은 자신을 높이려 하지만, 정작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자기 자신을 낮춘 이들만 맞이합니다.
또한 비좁은 길을 걸으려면 몸가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걸어가다가는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생명에 이르려는 사람은 주님께서 선포하신 거룩한 말씀을 등불로 삼아 이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는 오늘 복음의 가르침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와 동시에 길이 비좁은 것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전혀 헤아리지 않고 마구 달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는 서로 부딪혀 낭떠러지에 떨어질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오늘 복음의 가르침처럼 다른 이들을 배려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습니까? 좁은 문을 통과할 만큼 겸손하고, 비좁은 길을 걷는 사람처럼 몸가짐을 조심하여 다른 이들을 배려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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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사시던 시어머님이 큰 병이 드셨습니다. 온통 마음이 혼란해집니다. 아들이 여럿 있지만 하나 둘 저마다 핑계를 대며 어머니를 외면하기 시작합니다. 굳이 막내며느리인 자신이 맡아서 어머니 병 수발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마음속으로 항변합니다. 지금 아이들이 어리고, 성당에서도 열심히 봉사하고 있기에 자신은 시어머님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위로해 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제는 형제들이 야속해지고 그동안 시어머님에게 받은 상처들도 떠오릅니다. 아들들을 저렇게 잘못 키우셨으니, 그것은 시어머님이 지고 가셔야 할 십자가라며 이제 원망을 시어머님에게 돌립니다. 그동안 해 오셨던 잘못을 생각하면 저 정도 고통은 당하셔야 한다며 자신의 정당성을 시어머님 탓으로 돌립니다. 남편도 아내의 이런 주장에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합니다.
이 땅의 수많은 늙은 부모들이 어쩌면 자식들의 이런 모습 속에 혼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심지어 성당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애써 외면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운명처럼 져야 할 삶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일을 말합니다.
성지 순례 때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님 탄생 성당’에 가면 아주 낮고 좁은 문이 있습니다. 그곳 안내원은 그 문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에 그 문의 영성적인 의미를 붙여서 설명합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고개를 숙이고 작아져야 들어갈 수 있는, 『성경』에서 말하는 ‘좁은 문’이라고 했습니다. 겸손하게 몸을 낮추어 그 문을 통과해야만 성당 안의 ‘예수님 탄생’, 그곳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좁은 문이 있습니다. 그 문을 통과해야만 우리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멸망의 문은 넓고 편하지만, 생명의 문은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리로 가는 사람이 적다고 합니다. 어떤 길을 지금 걷고 있는지요?
세계적인 부자인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의 롤모델로 알려진 인물이 있습니다. ‘척 피니’(찰스 F. 피니)입니다. 그런데 그는 미국의 한 경제지에 ‘돈만 아는 억만장자’ 1위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즉, 돈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비난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부자면서도 부인과 샌프란시스코의 자그마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차고 있는 시계는 14,000원짜리 플라스틱 시계이며, 자동차도 집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직원들에게도 이면지를 쓰라고 했고, 소송에 휘말렸을 때 변호사 수임료마저 깎으려 했으며, 경제인 모임을 가면 계산하지 않으려고 일찍 자리를 뜨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렇게 사니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던 중 1997년 그가 운영하는 DFS면세점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법정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회계장부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15년 동안 2,900회 지출된 금액은 무려 40억 달러(4조 4천억 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재산을 빼돌렸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곧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모두 기부한 것이었습니다. 악랄하게 돈을 벌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그의 돈은 모두 가치 있는 곳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돈을 사랑했고 늘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돈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 자신을 쫓아올 수 있도록 산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어서 하는 기부 보다 살아서 하는 기부가 더욱 즐겁다.”
이런 삶이 과연 쉽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 자신의 안일함을 먼저 챙기면서 살아갑니다. 돈을 가치 있는 곳에 쓰기보다는 나를 위해 쓰는데 먼저 생각합니다. 이렇게 남들이 가지 않는 가치 있는 길을 향해 가는 사람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이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문은 너무나 좁고, 이 문으로 가는 길은 비좁아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좁고 비좁아도 이 길을 걸어가서 좁은 문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들처럼’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자신의 사랑 실천 그 자체를 먼저 생각하기보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살펴보면서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문으로 또 널찍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길을 예수님께서는 ‘멸망으로 이끄는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길로 또 어떤 문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보통의 ‘남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나’처럼 살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말이지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목적의 달성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그 자리에서 죽는다면 이 또한 행복이다(우당 이회영).
죽음은 편안하지 않다.
미의 상징으로 불리는 클레오파트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해군에 대패하게 됩니다. 이제 죽음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다양한 독약의 효능을 시험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유지한 채 생을 마감할 수 있을지를 사형수와 노예를 시험 대상으로 삼아서 인체 실험을 계속했습니다. 그 결과 맹독성 코브라를 선택합니다. 사형수와 노예를 시험해 보니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황홀한 표징을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 역시 맹독성 코브라에 물려 사망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과연 고통 없이 생을 마감했을까요? 현대 의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코브라의 신경독은 물리는 즉시 눈꺼풀 등의 얼굴 근육에 이상이 생기게 해서 몽롱하게 졸린 듯한 표정을 짓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속이 울렁거리고 극심한 통증과 호흡곤란으로 고통스러운데도, 근육이 마비되어 어떤 표정도 지을 수도 없고 말도 할 수 없고 고통으로 몸부림칠 수도 없어 최고의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죽음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평범한 일상을 비범하게 살아간다는 것!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창고들을 정리하면서 폐기 처분할 물건들을 과감하게 정리하였지만, 때로 애매한 물건들도 많았습니다. 조만간 어디엔가 쓰일거야, 하는 마음에 하나 둘 제 사무실에 쌓아두었더니, 한 달 만에 제 사무실이 잡동사니로 가득한 창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출입문도 겨우 열고 들어가야 하고, 책상까지 가려면 조심조심 걸어가야 합니다. 가끔씩 책상 앞에 앉으면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모으는 것도 필요하지만 처분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때로 잊어버리는 것도 얼마나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 제 사무실도 갑갑하고 복잡하지만, 때로 제 영혼이나 내면의 상태도 그에 못지않게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제게 오늘 예수님께서 뼈 때리는 한 말씀을 건네시는군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넓적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오 복음 7장 13~14절)
하느님 나라의 문, 즉 생명의 문은 넓지 않고 좁다고 하십니다. 육신의 뱃살도 줄여야겠지만 영혼의 뱃살도 과감하게 줄여야겠습니다. 현세적 소유도 줄여야겠지만 다양한 걱정거리, 부정적인 기억들도 줄여야겠습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이 점점 깃털처럼 가벼워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어디에도 묶이거나 매이지 않는 한 줄기 바람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게 있어 ‘좁은 문’은 어떤 문일까? 생각해봅니다. 한적하고 안전한 곳에서, 매일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축복의 장소에 살아가면서, 맡겨진 일에 충실하고, 주어진 시간에 기도하고, 기쁘게 살고...그리 어려운 길이 아닌 것 같지만, 쉬운 길만도 결코 아닌 것 같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평범한 일상을 비범하게 살아가는 것! 매일의 작은 의무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충실하게, 정성껏 이행하는 것!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가장 작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예의를 갖춰 대하는 것!
매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좁고 가파르고 불편한 길을 불평불만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는 것!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그 역시 주님의 모상이며, 주님으로부터 축복받고 사랑받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잘 견뎌내는 것! 그것이 구원과 생명의 좁은 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생명과 구원으로 이르는 길이 좁고, 불편한지, 그래서 그리로 찾아드는 자들이 작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살짝 걱정되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죄가 하늘을 찌르고, 구원받기에 합당치 않으며, 구원 받을 자격조차 없지만, 주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와 부당함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를 빼앗아 당신 등에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것! 세상 모든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의 은총 역시 보편적입니다. 주님께서 지니신 구원의 보편성이 우리의 죄를 모두 씻어주실 것이며 덮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구원의 길, 구원의 문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따라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찾는 일이 너무 쉬워졌습니다. 그 누구라도 예수님을 찾고, 그분을 향해 나아가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100퍼센트 구원입니다.
내게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상처가 있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타 종교나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진 관계의 법칙인 ‘황금률’이 나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황금률을 지킬 수 있다면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나도 남들에게 해 주려면 반드시 예수님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이런 뉴스가 났습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기차 소유주들이 몰래 자기 차에만 밤새 코드를 꽂아놓고 충전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전기세는 온 아파트 주민이 다 내는데 자기만 더 전기를 끌어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자가 물었더니 자신은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고 하며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이는 분명 내가 다른 이들에게 받기를 원하는 대로 다른 이들에게 해 주는 모습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사람과 자연,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자신이 해 주는 것보다 당연히 자신이 더 받아야 한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입니다.
이를 ‘피해의식’이라 합니다. 피해의식이 있으면 우리는 황금률을 지킬 수 없습니다. 반대로 내가 황금률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 피해의식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뉴스의 그 사람은 분명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돈에 대한 상처를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든지 형제간에 차별을 받았다든지 사랑이 부족한 어른 밑에서 자랐을 것입니다. 당연히 받아야 했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상처가 되어 그 상처를 세상으로부터 치유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도 다 피해의식에 시달립니다. 그러니 자신의 피해의식을 세상에서 충족하려 할 때는 관계만 악화할 뿐입니다. 누가 같은 전기료를 부담하면서 전기차 가진 사람만 더 사용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치유되지 않은 피해의식 때문에 세상도 분열되고 자연도 파괴됩니다.
피해의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때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치유하려면 세상 사람들에게 또 상처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무한한 사랑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치유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황금률도 내가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룸’(Room: 2015)은 실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17살 때 닉이라는 남자에게 속아 7년 동안 작은 헛간에 갇혀 살아야 했던 조이의 이야기입니다.
닉은 가끔 들어와 최소한의 음식과 생필품만을 주고 조이를 감금했습니다. 그리고 잭이라는 아이가 태어납니다. 잭이 5살 되었을 때, 닉은 직장을 잃습니다. 조금씩 주던 배급과 전기도 제대로 공급해 줄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입니다.
조이는 그곳으로부터 탈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처음엔 잭이 독감에 걸린 것처럼 연기했지만 닉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어 잭에게 죽은 시늉을 하라고 연습시켜 잭을 탈출시킵니다. 잭은 다행히 탈출에 성공하고 결국 엄마 조이를 구하고 닉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러나 사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조이는 7년 동안 자신이 그렇게 고생하며 있었는데 편안하게 살면서 아버지와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재혼해 살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불만, 자신의 딸을 납치해 7년 동안 감금한 닉의 아들인 잭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아버지, 자신의 이야기로 흥미만 유발하려는 언론들, 모두가 조이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솟구치게 했습니다. 결국, 조이는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합니다.
잭은 자신을 그런 환경에서 낳고 또 자신을 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엄마 조이가 밉습니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이기에 잭은 병원에 있는 엄마에게 힘을 주려 합니다. 자신의 힘이라며 절대 자르지 않고 길렀던 긴 머리를 잘라 엄마에게 보낸 것입니다. 조이는 잭도 자신과 같은 피해자인데 엄마인 자신을 위로해주고 있음을 깨닫고는 다시 엄마로서 살아보려 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잭이 엄마와 함께 갇혀있었던 헛간을 보고 싶다고 하여 그 헛간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겁이 나서 잘 들어오려 하지 않는 엄마와는 다르게 잭은 자신이 갇혀있던 작은 헛간의 이곳저곳과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이는 피해의식과의 작별을 의미합니다.
엄마 조이는 몸은 탈출했지만 피해의식으로부터는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같은 피해를 본 아들 잭으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어 그녀 또한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고 그저 하나의 기억으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조이는 이러저러한 상처로 피해의식을 지니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대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받지 않아도 되는 피해를 당하셨음에도 또 우리에게 당신 소중한 살과 피를 내어주시며 우리를 위로하고 계십니다.
사랑으로 받은 상처는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같은 무한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황금률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과거의 상처를 그저 좋은, 더 나아가 감사한 기억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분은 무한한 사랑을 지니신 하느님, 그리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 상처가 치유되어야 우리도 이웃들에게 요구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황금률이 완성됩니다.
자라오면서 절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절대 즐겁게 이야기하지 못할 상처의 기억을 남겨놓지 맙시다. 그래야 피해의식 없이 타인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나도 타인에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족되어 모든 부끄럽고 상처가 된 기억들에 인사합시다. 그리고 갇혀있던 그 방을 나옵시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기 전까지는 서로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입고 나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 서로를 존중할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황금률이 그리스도의 수난 덕분으로 지켜지는 그런 곳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5월 21일 ‘한미정상회담’이 있었습니다. 양국정상은 회담을 마치고 공식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에게 기자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백신과 관련해서 미국으로부터 얻은 것이 많이 있습니까?” 한국의 대통령은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백신을 공급받는 대신에 미국의 백신을 한국에서 생산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생산된 백신은 필요한 국가에 공급 될 것입니다. 한국은 백신을 공급하는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한국 대통령의 답변을 들었던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밝게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내가 문재인 대통령을 좋아하는 이유는 한국만을 위한 백신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백신을 공급하는 국가가 되려하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작은 이익을 보지 않고, 인류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양국의 대통령이 독실한 가톨릭신자라는 것도 좋았지만, 양국 정상의 생각이 가톨릭 적이라서 더 좋았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저도 기분 좋았던 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981년입니다.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서부역에서 기차를 타고 문산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기차 시간은 다 되었는데 2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남아서 표를 주어야 했습니다. 제가 남겠다고 했습니다. 늦게 도착한 친구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문산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조금 늦게 갔지만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텐트를 쳐 놓았고, 저녁 준비도 해 놓았습니다. 2021년입니다. 1월이었습니다. 신부님들과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숙소에 방은 5개였고, 인원은 6명이었습니다. 제가 거실에서 자겠다고 했고, 침랑을 가져갔습니다. 거실은 벽난로가 있어서 따듯했습니다. 냉장고도 거실에 있어서 물을 마시기도 편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이 있어서 아침에 산보가기도 편했습니다. 방을 양보한다고 했지만 얻는 것이 더 많았습니다.
2010년입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선교하였던 이태석 요한 신부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의사였던 신부님은 선교지에서 아픈 사람을 돌보았습니다. 나환자들의 일그러진 발에 맞추어서 신발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아이들을 위해서 음악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음악을 통해서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신부님은 건강이 악화되어서 아프리카로 돌아가지 못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지만 신부님의 제자들은 10년 뒤에 의사가 되어서 신부님이 못다 이룬 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가진 것 하나를 열로 나누면 우리가 가진 것이 십 분의 일로 줄어드는 속세의 수학과는 달리 가진 것 하나를 열로 나누었기에 그것이 ‘천’이나 ‘만’으로 부푼다는 하늘나라의 참된 수학, 끊임없는 나눔만이 행복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행복 정석을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모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업적을 쌓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처럼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지도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굳센 신념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따뜻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많은 갈등들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고, 한 가족인데 서로를 향해서 독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포기와 양보는 패배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만 이렇게 복잡하게 엉킨 문제들을 풀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명확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눔과 희생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글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친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람은 어둠 속에 빛나는 별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감사와 친절입니다. 주변을 보면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서 주인에게 돌려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좁은 문은 눈에 보이는 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눔과 희생, 배려와 양보, 감사와 친절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될 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 보면 소유적 사랑과 존재적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먼저 소유적 사랑은 상대를 자신의 공허함을 채워주는 소유물로 상대를 대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상대방이 지닌 존재의 의미 대신에 그가 가지고 있는 능력과 가치만을 따지고 바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결혼의 대상을 만나면서 그 대상의 존재의 의미보다 돈이 많은 것을 더 따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존재와 존재가 아닌 소유자와 소유물 사이에 형성되는 매우 폭력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 존재적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사랑입니다. 즉 사회가 그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든 우리는 상대방의 존재를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곧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가치를 넘어 보이지 않는 존재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남이 자신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기보다는 내가 바라는 대로 남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거나, 아니면 내가 받을 목적으로 미리 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소유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사랑을 빙자한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그 대상을 통해서 내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위해서 내가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소유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지 존재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인생(人生)여정에서 대 스승과 함께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삶을 뜻하는 '생(生)'은, '소 우(牛)'자와 '한 일(一)'자가 합쳐진 글자이다. 소가 외나무 다리를 건너는 형국이다. 소가 외나무 다리를 건너가는 것은 '위기의 연속' 이란 뜻이다. 다리를 건너야 꿈꾸고 바라는 것에 도달할 수 있지만, 다리 밑은 깊은 강물이 있다. 그러나 외다리이기 때문에 되돌아 갈 수도 없고, 뜻밖의 함정이나 장애물을 만나더라도 어떻게든 넘어야만 한다. 아슬아슬하고 때로는 두렵기도 하지만 어쨋든 건너야만 한다.
'사람 인(人)'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고 서 있는 형상이다. "함께"의 뜻이다. 결국 두 글자를 합하면 "서로 기대고 격려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외다리를 함께 건너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人生)"인 것이다.
모두 힘겹게 살아간다. 삶은 주저 앉아 보기도 하고 일어 서기도 하고 처박하기도 한다. 인생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넓은 길만 찾아서는 인생 끝이다. 계곡 바닥에서 산 정성을 향해 올라가는 나와의 끈질긴 싸움이다. 이 좁은 문을 통과하려면 십자가의 길을 걷고 부활을 얻어낸 대 스승과 함께해야 한다. 대 스승은 모두를 인생되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분을 만나야 인생 성공이다. 오늘 복음(마태7,12)에서 말씀하신 예수님, 우리를 위해 ‘황금률’을 사신 분, 대 스승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대 스승과 함께 건너가야 한다. 그냥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다. 힘들 때 나를 내 입장에서 바라 보시며 힘이 되어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분, 살아계신 하느님, 황금률을 사신 예수님이 내 여정에 함께 계시며 걸으신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7,12-14).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7, 6. 12-14(연중 12주 화)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중요한 세 가지의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가르침이요, <둘째>는 “너희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가르침이요, <셋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말씀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두 가지 원리 중 하나입니다.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는 이웃과의 화합의 원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이와는 대조되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 7,6)는 이웃과의 단절의 원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결코 남에게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분별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르기”(마태 7,6) 때문입니다. 곧 세속적이고 악한 생활로부터 영적인 분별력과 신중함을 가지라는 말씀이요, 나아가서 균형 있고, 조화 있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분별 있는 행동을 이렇게 권고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도 <수도규칙>에서 ‘분별을 모든 덕의 어머니’(64,19)라고 강조하였으며, 요한 카시아누스는 분별의 귀중함에 대해서 <담화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분별의 은총 없이는 완전한 덕이 없다.”(담화 2,3)
<둘째> 말씀은 흔히 황금률이라 불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이는 6장 33절의 말씀과 더불어 산상설교의 2대 강령이기도 합니다. 곧 6장 33절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는 말씀이 수직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면, 여기 7장 12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은 수평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코 ‘정직은 그 대가를 지불한다.’는 공리주의적 금언이 아닙니다. 또한 ‘주는 양만큼 똑같이 받을 것’을 기대하는 합리주의적 금언도 아닙니다. 반면에, ‘이타적인 사랑’으로 남에게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는 겸손하게 ‘먼저’ 남에게 베풀라는 적극적인 사랑에 대한 요청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마태 7,12) 입니다.
<셋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규명하는 네 가지 비유 중 첫 번째로, ‘좁은 문의 비유’입니다. 곧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14 참조)는 요청입니다. 이 문은 좁기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버려야할 것들은 버리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분의 이끄심에 의탁하는 자라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임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이 세 가지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실현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
주님!
제 자신이 부서지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제 뜻이 꺾이고 사라지게 하소서.
좁지만 열린 문이기에, 붙들어 주는 당신을 꼭 붙들고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살아 있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갈등의 모습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은 누구나 갈등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 중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재물과 관련된 것입니다.
‘재물 앞에 형제도 없다.’라는 속담이 왜 나왔겠어요? 형제는 그 어떤 관계보다 친밀하고 최 우선으로 꼽는데도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이 재물이기에 인간의 한계로서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저자는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의 재산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둘 다 부자임에는 틀림이 없고 그 규모가 크다고 표현되는 것이 재물도 재물이려니와 양쪽의 종들의 숫자가 크다는 것입니다. 성경저자는 ‘그 땅은 그들이 함께 살기에는 너무 좁았다.’(창세 13,6)라고 갈등의 여지를 꼽으며 종들인 목자들이 사이에 다툼이 잦았던 사실을 또한 표면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된다.’라는 틀에서 벗어나 종들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이렇게 해결의 말을 건넵니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8-9절)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카에게 먼저 선택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물이 넉넉한 지방을 자신의 몫으로 선택하여 동쪽으로 옮기고 소돔까지 천막을 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곳에서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 마므레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그곳에서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습니다.
오늘 전례에 따르는 복음에서 마태오는 독립된 3가지 교훈의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소중한 것을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지 말라는 말씀, 황금률과, 구원에 이르는 좁은 문에 대한 것입니다. 첫째 말씀은 이렇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몇 줄 되지 않는 말씀이지만 ‘거룩한 것’과 ‘개, 돼지’에 대한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룩한 것’은 무엇일까요? 무난한 해석은 산상수훈으로 이어지는 여러 말씀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토라의 율법들을 현실에 맞게 교훈적이고 실천적인 말씀들로 쉽게 풀어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거룩한 것’은 히브리 단어대로 해석한다면 ‘하느님의 것’으로 세상 것과 ‘분리’, ‘구분’한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 이제까지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신 말씀들을 ‘거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풀어서 말하면 이렇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들을 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예를 들어 이방인, 그리고 박해자들인 유대인들을 말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런 주님의 말씀을 받들어 성경 말씀이나 교리를 예비자 교리로 가르칠 때, 철저하게 준비 시켰다는 것입니다. 만일에 준비 시키지 않은 예비자가 나중에는 그 가치를 모르고 오히려 그 반대의 행동(개, 돼지)을 해서 교회를 어지럽힌 자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믿지 않는 이들은은 아무리 거룩한 말씀이라도, 아무리 소중한 지혜의 가르침이라도 개나 돼지는 먹는 것에만 관심 있고 그 가치를 모르듯, 세상은 구미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하느님의 말씀이라도, 교훈과 슬기의 덕행이라도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그 가치를 뒤 엎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말씀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한 마디로 요약한 ‘황금률’(12절)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가르침이신 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내 중심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이웃이 중심이 된다면 우리는 훌륭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세 번째 말씀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좁고 험하다는 뜻이지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13-14절)
아브라함은 비록 재물이 많은 부자라 하더라도 재물욕에 사로 잡힌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뜻은 언제나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조카 롯에게 양보하고 좋은 것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말씀들은 다 주옥과 같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 교훈의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하지 마라.’라는 부정적 율법표현과는 달리 주님께서는 ‘-하라.’라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표현의 명령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올바르고 충실하게 생활하는 것이 넓고 평탄한 길은 아니라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나약한 우리에게 힘을 주시며 격려해 주십니다. 비록 갈릴리 호숫가는 아니더라도 이렇게 매일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르침을 나눌 수 있는 우리는 사실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래, 난 사람이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래, 난 사람이다
한줌 먹잇감 앞에
으르렁대는 짐승이 아니라
고프더라도 함께하고
부르더라도 함께하는
그래, 난 사람이다
보이는 것에 눈멀어
날뛰는 짐승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찾고
보일 수 없는 것을 품는
그래, 난 사람이다
살기 위해 죽이는 길을
어슬렁거리는 짐승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죽는
사랑과 정의의 길을 걷는
그래, 난 사람이다
<누가 더 행복할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세 부류의 사람이 있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나에게 해 주기를 남에게 바라고 요구하는 사람.
오늘 주님 말씀처럼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사람.
남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남이 원하는 대로 해 주기만 하는 사람.
그런데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더 사랑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당연히 남에게 바라는 사람, 바랄 것이 있는 사람이 불행합니다. 그것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고, 만족과 충만의 상태가 행복이듯이 부족의 상태, 부족으로 인해 불만이 있는 상태가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이 아닌 욕망의 상태이지요. 사랑은 너를 채우려는 것이고 욕망은 나를 채우려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남이 원하는 것을 오히려 해 주려는 사람은 하느님처럼 완전히 충만하고 행복한 사람이요 완전한 사랑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고 다만 그것을 하느님으로 채우는 사람이 있거나 인간으로 채우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은 그것을 사람으로 그것도 가까운 사람으로 채우려 합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불만이 없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불만이 있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내게 바라는대로 남에게 해 주라고 하십니다.
사랑도 받고 사랑도 하라는 얘기이고, 바라는 그대로 해 주라는 것은 그 주고 받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라는 그대로 해 주는 사람이 드물고 바라는 것 없이 해 주기만 하는 사람은 더 드물어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고 하시며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실로 생명 의지와 행복 의지가 없으면 욕망대로 살고, 사랑도 받으려고만 들지 하려고 들지 않을 우리이니 오늘 주님 말씀에 자극을 받는 우리라면 이제 생명 의지와 행복 의지가 사랑 의지를 견인토록 해야겠습니다.
험난한 인생길 명답들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말라와 해주기 바라는 대로 남에게해주라는 말씀.
좁은 문이 생명 가는 길이라고 가르쳐주시는 예수님 말씀 참 좋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간결 명쾌하지만 험난한 인생길 명답들이라 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곧 하느님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물들었지요.
해서 교만하고 우월주의에 빠진 지도자들이 인생길을 망쳐 버렸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서 예수님은 하늘 뜻 맞는 새 백성 나라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전 인류는 누구나 하느님의 새 백성 됩니다.
이웃사랑하며 내세보고 사는 사람이라면 하늘진주 받도록 하실 겁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길
예수님께서 나중에 “내 멍에는 펀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고 말씀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여기서도 주님은 같은 뜻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면 선한 길은 좁고 비좁다고 하신 이 구절 말씀과 나중 말씀이 서로 어긋나 보이지 않습니까? 잘 들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짐이 무척 가볍고 편하며 기분 좋은 것임올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째서 좁고 비좁은 길을 편하다고 하는 것이오?” 하고 묻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문이면서 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길도 문이며 길이지만, 다른 길에는 영속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길에 있는 것은 모두, 기분 좋은 것이나 괴로운 것이나 일시적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우리의 전체 생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의 ‘그리스도인 완성의 원형’에서 (PG 46,283-286)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드러내고 구별 짓는 것은 행동과 말과 생각 -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중 생각이 먼저 나오고, 다음으로 마음속에 생기고 새겨져 있는 생각을 드러내 밝히는 말이 나오며, 생각과 말 다음으로 마음속에 생각한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도중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게 될 때, 우리 말과 행동과 생각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설명해 주는 그 칭호들의 거룩한 규범에 맞도록 해야 하고 이들의 고귀한 함축적 의미에서 벗어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결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귀한 이름을 지니는 영광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이 세 가지 각각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또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명확한 판단을 여러 방법으로 내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걱정과 불안이 담긴 행동과 생각과 말은 결코 그리스도께 상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영혼의 진주를 걱정, 불안이라는 진흙과 뒤섞어 그 귀한 보석의 광채를 손상시켜 버리는 악마의 날인과 자취를 지니고 있는 것들입니다.
한편 온갖 애착심에서 벗어난 순결한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 원천은 우리 마음의 생각과 정감을 순수하고 깨끗한 샘에서처럼 솟아나게 하는 평화의 주이시고 왕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개울에 흐르는 물과 항아리에 담겨 있는 맑은 물이 샘 속에 있는 물과 거의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우리의 생각과 정감은 그 원천인 그리스도와 유사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순수성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순수성은 한가지로서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수성은 샘에서 솟아 나와 샘에 고여 있는 그 순수성이고 우리의 순수성은 샘에서 솟아 나와 우리에게까지 다다른 물의 순수성입니다. 그리고 샘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물이 우리에게까지 이를 때 그분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담아다 줍니다. 또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그리스도에게서 솟아 나오는 생각과 정감은 우리의 실제 생활을 꾸며 주어 거룩함과 질서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안전성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포함하는 모든 칭호를 우리 내적 생활과 우리 말과 행동이라는 외적 생활에 완전히 참여시키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 있다고 봅니다.
<좁은 문>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연중 제12주간 화요일>(2021. 6. 22. 화)(마태 7,6.12-14)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말씀은, 15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개들, 돼지들, 강아지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거룩한 것, 진주, 자녀들의 빵’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석됩니다. (또는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해 주는 성전, 성경, 성사, 전례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우상 숭배자들을 구원의 대상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자들은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우상 숭배를 버려야 합니다.(미신을 믿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신앙인이 미신 행위를 하거나 그런 일에 가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 라는 고귀한 신분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개나 돼지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리석기만 한 일이 아니라, 십계명 제1계명을 어기는 대죄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라는 계명에 연결됩니다. ‘너 자신처럼’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로 해석할 수도 있고, ‘너 자신이기 때문에’로 해석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일에는 무슨 이유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 이웃 사랑 실천은 바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웃은 하느님 앞에서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한 가족이고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이웃의 아픔과 슬픔은 곧 나의 아픔이고 슬픔입니다. 그러니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 (1코린 12,26).”
<신앙인은 구원받기를 희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혼자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시면서 하신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깜짝 놀라서 예수님을 말렸습니다(마태 16,22). 부활 예고는 흘려듣고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말씀만 듣고서 놀란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하느님의 일’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앞일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편안하게 지내는 일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십자가의 길은 너무나도 좁고 험한 길이고, 그 길 끝에 있는 문은 ‘좁은 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고 (막으려고) 예수님을 말린 것은 아닙니다.
“왜 꼭 그 길로만 가셔야 하는가? 좀 더 쉽고 편한 다른 길은 없는가?” 라는 생각 때문에 말린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 외에 다른 길은 모두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사탄이라는 뜻은 아니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항상 “쉽고 편한 길로 가라. 왜 굳이 어렵고 힘든 길로 가는가?” 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 유혹에는 “어느 길로 가든지 도착하는 곳은 같다.” 라는 유혹도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은 백 퍼센트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에는 “다른 길은 없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내게서 떠나라.”가 아니라, “내 뒤로 가라.”, 즉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입니다. 제자는(신앙인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대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문이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기 때문이고, 그 길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문과 길이 좁든지 넓든지 간에 그것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문과 길인가?”, “생명으로 이끄는 문과 길인가?” 그것만이 중요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걸어가는 길이라고 해도, 또 좀 더 편하고 쉬운 길로 보인다고 해도, 그 길이 멸망을 향하는 길이라면 그 길을 걸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과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어렵고 힘들고 좁은 문과 길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항상 어렵고 힘든 생활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인들에게는 신앙생활이 가장 편안한 생활이고, 다른 생활에서는 얻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얻는 생활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고난을 겪을 때도 많고, 많은 것을 참고 견뎌야 할 때도 많지만, 그 고난과 시련은 믿음과 희망으로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시련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지는 못합니다(요한 16,22).>
하느님 중심의 삶, - 분별력, 황금률, 좁은문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중심의 삶자체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축복의 삶입니다. 바로 아브라함이 그 모범입니다. ‘아브람은 가축과 은과 금이 많은 큰 부자였다.’ 제1독서 창세기 서두가 축복받은 아브라함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구절은 그의 하느님 중심의 삶을 요약합니다.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창세13,18)
제단을 쌓을 자리 꼭 성전만이 아니라 바로 내 삶의 자리입니다. 저로 말하면 날마다 밤 이른 시간 일어나 집무실에서 강론을 쓰며 제단을 쌓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1.기도하는 시간, 2.공부하는 시간, 3.회개하는 시간, 4.위로와 치유의 시간이 강론 쓰는 시간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강론을 읽으며 묵상한다면 이 또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간이요 하느님 중심의 삶을 날로 깊게 해 줄 것입니다. “날마다의 강론은 내 사랑이자 운명이요, 유언이자 위로와 치유의 구원이다.” 게시판에 붙여 놓고 늘 되뇌어 보곤 합니다. 사실 이런 강론준비보다 더 좋은 미사준비도 없습니다.
우리 수도원 수사님들의 항구하고도 치열한 분투의 삶 역시 말그대로 하느님의 중심의 삶이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아니 참으로 믿는 이들의 삶 모두가 그러합니다. 재적과가 끝난 배밭 배열매들 크는 모습이 참 대견스럽습니다. 탁구공 크기만합니다. 곧 봉지싸는 일이 펼쳐질 것입니다.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ㄴ), 특히 농장 수사님들이 좋아하는, 참으로 농사일에 종사하는 분들이 자부심을 갖게 하는 구절입니다.
어제 때에 맞춰 요란한 굉음轟音을 내며 농약차를 운전하며 농약을 살포하는 수사님들이 흡사 전투에 출동한 모습같아 감동이었습니다. 요즘 착한 형제자매들이 배판매에 결정적 도움을 주니 용기백배 사기충천한 농부수사님들입니다. 농사는 80%가 하느님이, 20%가 사람이 하는 것이라니 참된 농부라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에서 겸손과 인내의 참된 농부가 됩니다. 80% 하느님 은총과 20% 사람 노력의 결과가 배열매들이니 기도의 열매, 은총의 열매인 배즙이라는 결론입니다. 요즘 강론의 도움 요청에 호응하여 이런 배열매로 만든 100% 순도의 배즙을 판매해 주는 형제자매님들이 참 고맙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자체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하는 모든 일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선사되는 온갖 필요한 축복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이 그 축복의 내용을 상세히 소개합니다.
첫째, 분별력分別力의 은총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밝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 뜯을지도 모른다.” 누가 개들이며 돼지들인가 물을 일이 아닙니다. 참으로 적절한 사람에게 적절한 때 적절한 말과 행위를 하라는 분별의 지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건 차별差別이 아니라 분별分別의 지혜입니다. 말그대로 분별력의 지혜요 사랑입니다. 내 좋을 대로 사랑할 것이 아니라 존중과 배려의 사랑으로 잘 분별하여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또한 하느님 중심의 삶에 충실할 때 주어지는 분별력의 은총입니다.
둘째, 황금률黃金律의 실천입니다.
예수님 약 10세때 죽은 유대인 랍비 힐렐에 관한 일화가 재미있습니다. 한 사람이 조롱하듯 힐렐에게 그가 한발로 서있는 동안 ‘전 토라(the whole Torah)’를 자기에게 가르쳐 줄 것을 요청했을 때 힐렐의 가르침입니다. “네가 싫어하는 것을 네 이웃에게 행하지 마라. 그것이 토라 전부다. 가서 그것을 공부하라.”
힐렐의 소극적 부정적 황금률보다는 예수님의 적극적 긍정적 황금률이 더 깊고 풍부합니다. 힐렐대로 한다면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음 예수님 대로 라면 이웃을 위해 할 일은 무궁무진 끝이 없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런 적극적 긍정적 황금률이야말로 분별력의 지혜와 사랑의 절정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의 빛나는 열매들입니다. 사랑의 이중계명과 함께 가장 포괄적인 계율이요 모든 분별의 잣대가 됩니다. 바로 이런 분별력과 황금률의 빛나는 모범이 제1독서 창세기의 주인공인 무욕無慾의 아브라함이요, 조카 롯에 대한 그의 관대寬大한 처신에서 잘 드러납니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다.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에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그대로 롯에 처분을 일임하므로 황금률을 실천하므로 공존의 평화와 화목을 추구하는 너그럽고 지혜로운 아브라함입니다.
셋째, 좁은문의 자발적 선택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시공을 초워한 만고불변의 진리요 참 생명과 구원의 길이 이 말씀에 달렸습니다.
“너희는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굳이 좁은문 찾아나설 것은 없습니다. 바로 누구나의 지금 여기 제 삶의 자리가 하늘에 보물을 쌓을 자리이자 동시에 통과해나가야 할 좁은문입니다. 본능적 욕망대로의 삶이라면 바로 멸망에 이르는 지름길이자 넓은문입니다. 그러니 좁은문이나 넓은문은 내 선택의 문제이니 이 또한 분별의 지혜입니다.
참으로 주님의 뜻대로 정의와 사랑을, 산상수훈 말씀을 치열하게 실행하는 일이 바로 구원의 좁은문을 통과하는 일입니다.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이 바로 좁은문 통과의 주인공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짜 사는 것입니다. 예전 초등학교 교사시절 선배 교사의 충고(?) 또한 잊지 못합니다.
“이 선생,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
“예, 저에게는 이렇게 사는 것이 쉬운 삶인 걸요!”
솔직한 심정의 발로입니다. 지금은 하느님이 내 사랑 전부이지만, 그때에는 아이들이 내 사랑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44년전 제자들이 찾는가 봅니다. 사실 밖에서 볼 때 좁은문이지 안에 들어와 보면 넓은문입니다. 내적으로는 주님의 말씀대로 좁은문을 통과하면서 점점 넓은문이 됩니다. 성인들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늘 고통이 따르고 휴식이 없는 삶이었지만 날로 내적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로 넓어진 넓은문이었습니다.
참 이런 기막힌 진리가 오늘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벌어집니다. 롯은 눈의 욕망따라 넓은문을 택한 결과가 바로 멸망에 이르는 소돔과 고모라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좁은문은 결국 축복에 이르는 생명의 문, 넓은문이 되고 말았으니 참 하느님의 구원섭리가 오묘합니다. 보십시오. 롯이 아브라함에게 갈라져 나간 다음 하느님은 친히 좁은문을 택한 너그럽고 욕심없는 아브라함에게 한량없는 축복(창세13,14-17)을 약속하시지 않습니까!
하루하루가 첩첩산중疊疊山中 넘어야 할 산이요, 첩첩문중疊疊門中 통과해나가야 할 좁은문, 생명의 문, 구원의 문입니다. 하루하루 분투의 노력으로 주님의 말씀대로, 뜻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바로 여기 참 기쁨과 행복도 있습니다. 성규 머리말 마지막 분도 성인의 말씀이 좁은문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즉시 놀래어 좁게 시작하기 시작하기 마련이 구원의 길에서 도피하지 마라. 그러면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 계명들의 길을 달리게 될 것이니, 주의 가르침에서 결코 떠나지 말고, 죽을 때까지 수도원에서 그분의 교훈을 항구히 지킴으로써 그리스도의 수난에 인내로써 한몫 끼어 그분 나라의 동거인이 되도록 하자.”(머리48-50)
비단 정주의 분도 수도자들뿐 아니라 좁은문의 현실을 살아가는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시는 주옥같은 가르침입니다. 이와 맥을 같이하는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시 마지막 연을 다시 나눕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희에게는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늘 분투의 노력과 다짐을 새롭게 하는 고백의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날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깊이하시며 잘 분별하고 좁은문을 잘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가르치시면서 예까지 보여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 가르침은 참 훌륭하고 바람직하지만, 잘 지켜지기는 그리 쉽지 않은 듯합니다. 사람은 대개 남에게 바라는 건 많으면서, 타인에게 무얼 해줄 때는 자기중심성과 이기심이 발동하는지 좀 야박해질 때가 종종 있어 보이니까요.
"내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창세 13,9)
아브람과 롯의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기 어려워서 서로 갈라져 나가기로 합니다. 이때 아브람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지요.
먼저 선택을 한다는 자체가 엄청난 기득권이 될 수 있습니다. 비옥하고 물이 넉넉한 좋은 땅을 합법적으로 선점할 기회니까요. 하느님에게서 땅과 후손을 약속 받은 아브람은 어디가 되었든 자기에게 돌아오는 땅이 주님 약속의 땅임을 믿기에 관대히 선취권을 내놓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남에게 바라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창세 13,10)은 곳을 선택하고, 아브람은 그가 고른 곳의 반대편으로 나아갑니다. 롯의 선택 기준은 그러나 주님 눈에는 위험하지요. 성경은 풍요를 좇은 그의 영리한 선택이 소돔과 같은 욕망과 쾌락, 이집트와 같은 노예살이의 결과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
롯이 자리잡은 소돔은 "악인들, 죄인들의 성읍"이었지요. 그는 당장 눈에 보이는 외적 풍요가 어떤 결과를 잉태하고 있는지 모른 채, "넓은 문, 널찍한 길"을 택하여 나아갑니다. 복음사가는 이를 두고 "멸망으로 이르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다고 하였지요.
자기가 선택한 땅이 아닌, 하느님께서 선택해 주신 땅으로 나아간 아브람은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창세 13,15)는 축복을 받습니다. 세상에! "보는 땅"이라니요! 발길이 닿은 땅도 아니고 싸워서 점령한 땅도 아닌, 아브람 시야에 들어온, 보는 땅을 주신다는 말씀에서 주님의 무한하신 스케일이 느껴집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
"거룩한 것, 진주"는 우리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가리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진주를 산 상인의 비유에서도 보듯(마태 13,45-46 참조) 모든 것을 걸고 지켜야 하는 영혼의 본질이고 정수일 겁니다.
하느님의 숨을 받아 이 세상에 와 살고 있는 우리가 목숨처럼 소중히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없는 재물이나 현세적 지식, 썩어 없어질 외모가 아닐 겁니다. 무언가 선택을 할 때 (개, 돼지들에게 참 미안한 비유입니다만) 거룩하고 귀한 것을 알아보지 못해 개, 돼지들로 빗대어진 쾌락과 욕망, 허영과 사치들에 자신을 던지지 말라는 뜻이지요.
아무리 삶이 녹록치 않고 제도와 사람들의 이해가 따라오지 못해도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지향, 귀한 꿈을 세상의 바벨탑, 소돔의 널찍한 문으로 밀어넣어서는 안 되지요. 쉽고 넓고 편한 세상의 달콤한 유혹 뒤에는 "멸망"이 감춰져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함, 우리의 진주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이를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의 선택이 어떤 기준에서 나오는지,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거룩함, 귀한 진주를 잘 간직하며 살아가는지 돌아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목놓아 기다리시는 생명의 좁은 문을 향하는 이들이니까요. 이 길에 서로 동행이 되어 주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과 함께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이 생명으로 가는 길임을 굳게 믿습니다. 아멘.
이해와 사랑
노우재 미카엘 신부님
할머니 두 분이 지팡이를 짚고 미사에 오시는데 지팡이 하나는 꽃무늬가 있었고 다른 것은 황토색이었습니다. ‘이게 더 예쁘네요’ 하고 꽃무늬 지팡이 할머니에게 인사하니 ‘내 거는 여자 것이고, 저 거는 남자 것이야’ 하십니다. 황토색 지팡이 할머니가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체중이 많이 나가 이것 써야 해’ 하고 항변하듯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남이 자기를 알아주기 바랍니다. 주일학교 학생이 학교에서 친구와 싸웠는데 선생님이 자기만 야단쳤다고 합니다. 제가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하니 ‘안녕히 계세요’ 하며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가버렸습니다. ‘아, 사람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자기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는구나.’ 그러면 우리는 남에게 어떻게 해주어야 할까요? 알아주고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 나를 알아주고 이해해주어서 내가 좋아졌구나 하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가까운 이에게 용서받고 존중받은 이가 마찬가지로 이웃을 용서하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겐 항상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가 회피하고 머뭇거려서 그렇지, 주님은 늘 먼저 우리를 알아주시고 이해해주십니다. 그분의 따뜻한 시선을 받고, 그분의 살아 있는 말씀을 들으면 우리도 마음이 움직여 남을 알아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함승수 신부님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행복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하면 더 행복해질 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으며,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게” 같은 세상의 가치들을 추구하며 살고 있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행복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노력하여 얻은 세상의 가치들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영원의 가치'들을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는 눈은 높아졌는데 자존감은 낮아졌습니다. 고속도로는 넓어졌는데 삶을 바라보는 시야는 좁아졌습니다. 소비는 많아졌는데 마음은 가난해졌고, 더 좋은 물건들을 사고 쓰지만 만족과 기쁨은 더 줄어들었습니다. 집은 더 커졌는데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더 줄어들었고, 기술의 발전으로 일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음에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재충전할 시간은 줄어들었습니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인성은 바닥을 치고, 지식은 더 많아졌는데 판단하고 결정하는게 더 힘들어졌습니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많아졌는데 우리를 힘들게 하는 문제들은 오히려 더 복잡해졌고, 약의 효능은 더 좋아졌는데 우리의 건강상태는 더 나빠졌습니다. 말은 많아졌지만 진정한 소통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고, 돈을 더 잘 버는 법을 배우느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잊어버렸습니다. 교통수단은 빨라졌는데 지척에 사는 가족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고, 우주 같은 더 넓은 세계를 정복한만큼 우리의 마음 속 세계를 잃어버렸습니다. 분자는 쪼갤 수 있게 되었지만 편견과 고집은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졌고, 여가시간에 즐길 거리는 많아졌는데 마음의 평화는 줄어들었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요? 우리들 각자가 세상의 가치들만 쫓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쉽고 편한 것만 찾으며 어렵고 힘든 것들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어렵고 힘든 것들이 나의 삶을, 내 마음과 영혼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어줍니다. 귀찮고 힘든 운동이 내 건강을 지탱하고, 어렵고 힘든 경청이 서로의 공감을 지탱합니다. 내가 먼저 하기는 억울해서 싫은 용서가 내 마음의 평화를 지탱하고, 하면 손해보는거 같아 망설여지는 양보와 배려, 이해와 존중이 살 맛 나는 세상을 지탱합니다. 모두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앎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을 뿐이지요.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성공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남들과 경쟁해서 이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소수의 성공을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세상의 가혹한 논리에 휘둘리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우리 삶이 끝날때까지 계속되기에 힘들고 어렵습니다. 더 많이 갖고 싶은 욕심, 더 높아지고 싶은 교만, 더 편해지고 싶은 나태함과 게으름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비대해진 내 영혼을 끊임없이 깎아내야 하기에 너무나 고통스럽고 피하고만 싶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렵다고 그 과정을 외면하고 쉽고 편한 길을 따라가면 그 끝엔 멸망이라는 낭떠러지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생명의 길을 끝까지 걷는 이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필요와 바라는 것은 다르다. <마태 7, 12-14> 6월 22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필요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바라는 것은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네가 바라는 그대로 너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는 꼭 필요한 것을 해주라는 말씀이지 원하는 대로 다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알 수 없는 것은 남에게 알려줄 수 없듯이 내가 얻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해줄 수 없습니다. 세상에 자기 뜻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꼭 필요한 것을 얻어야 하고 그것은 사랑입니다.
필요도 없는 것을 욕심내서 바라면 욕심이 지나쳐 화를 부릅니다. 안 되는 것을 될 것 같다고 믿고 바라며 살면 결국 실망과 몸에 해로움만 일어납니다. 그래서 우울증, 절망감으로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 주시지만, 각자의 욕망을 채워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자기 원대로 하는 것이 자유로 알지만 참 자유는 필요에 필요가 되어 사는 것이 자유입니다. 요즘은 방을 나올 때 챙겨야 할 것은 마스크입니다. 마음대로 한다면 마스크 끼지 않고 싶지만, 하지 않으면 모든 이에게 피해를 주고 자기도 피해를 보니 해야 합니다.
사람은 필요 이상의 것을 바라고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지만, 필요를 아는 것은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민족 통일을 간절히 원하지만, 통일에 절대적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마구 떠드는 사람은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필요한 것은 오랜 경험과 체험을 통해서 알고 얻으려고 합니다.
참사랑이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내가 필요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어느 신학교 학장 신부님은 건강하셔서 병원을 가보신 일 없어 학생들이 병원에 간다면 짜증을 내시며 “그까짓 거 가지고 병원에 가느냐?” 하면서 허락하며 병원 가는 사람 비웃으셨습니다. 그러던 중 병이 나서 병원에 한 달 입원해서 병 때문에 고생하고 학교에 돌아오시고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학생이 병원 가보겠다고 하면 “그래, 큰 병 되기 전에 어서 가보아라.” 하셨다고 합니다.
일제에서 해방 후 월남하여 6.25와 서울서 4.19 겪고 사제가 된 후 가난을 퇴치하려고 농민운동을 하면서 축산 장려하기 위해 병아리 부화장 만들어 각 가정에서 병아리 키우게 해서 구입하고, 신용협동조합 만들어 부족한 자본을 충당했습니다. 공소 없는 곳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공소를 지었습니다. 이 시절이 30, 40대였습니다. 가톨릭 농민회를 만들어 농산물 특별히 그 지역 양송이 단지를 만드는 것으로 제일 먼저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어려서 고생한 보람으로 신자들 없는 주머니 열어 봉헌금 내라고 하지 않고 한 푼이라도 벌어서 내도록 이끌었습니다. 모두가 원하는 것을 다 하지는 못했지만, 필요가 되어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인간 상록수”라는 프로에 나가기도 했지만, 지금은 필요가 없는 일입니다. 요사이 농촌에 집도 살림도 생활 수준도 변하고 발전했습니다. 피땀 흘려 일하는 사람에게 모든 필요가 충족됩니다.
필요에 응하는 삶을 살 때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의 것을 주시는 주님에게 기도합시다.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9일 기도의 여섯째 날로서, ‘이산가족과 탈북민을 위하여’라는 지향을 두고 기도하며 살아갑시다. 언젠가 한 번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상대가 미워서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욕을 할 가치조차 없다.”라는 대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치 상대가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행동을 하는 부류라고 생각하면서 조심이나 경계심 없이 다가가지 말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어떤 면에서는, 잘해주는 것과 거룩한 생애에로의 초대와 단계는 순서를 따라야 한다고 하시는 듯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남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고 하시면서 그것이 결국 주 하느님을 따르는 사랑의 길이라고 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그리고 그 길은 여러 사람이 우르르 몰려가듯 걸어가는 길이 아니며, 나 스스로 이룩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13-14절)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기 힘든 것이거나 하기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지 말고, 내가 좋아하고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시는 듯합니다. 실제로 돌아보면, 나 스스로 땀 흘려 이룬 것이 내 것이 됩니다. 더군다나 내 인생은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으며, 또 그러기에 다른 누구에게 빼앗길 걱정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른 이들을 따라가는 길은 내 길이 아니며, 다른 이들에게 묻어가는 길 역시 내 길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이루는 내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며, 나 스스로 각고의 노력을 통해 진정 나를 이루는 일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게 심어 주시고 불러 주신 내가 걸어갈 사랑의 길을 개척하고 가꾸어 마침내 그 길을 완성하여 주님께 다다르도록 합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점점
작아져야 할
우리들 모습이다.
사랑이
깊을수록
낮아지고
작아지시는
좁은 문의
하느님이시다.
자아에 걸려
넘어지는
우리들 삶이다.
비우지 못하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들
욕심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작아지고
작아지면
드디어 주님과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좁은 문이란
자아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복음의 삶이다.
복음의 삶이란
내려놓고
비우고
맡겨드리는
하느님
중심의 삶이다.
중심(中心)이
십자가이다.
좁은 문의
십자가가
구원의
첫시작이다.
관계와
관계 사이에는
십자가라는
좁은 문이 있다.
작아지는
회개(悔改)가
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
우리의 뜻까지
내려놓는
좁은 문의 신비다.
십자가의 신비다.
파충류는 좋은 애완동물이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파충류의 뇌는 많은 부분에 있어 본능적인 공포를 지니고 있는데 이 부분이 너무 크다보니, 공포에 눌려 고등 사고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뱀 같은 파충류들은 자기 이름이나 주인의 사랑을 결코 배우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포유류의 경우에는 공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공포가 뇌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특히 인간의 경우에는 뇌 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고통과 시련으로 인해서 어느 정도의 공포를 느낄 수는 있지만, 그 공포 안에만 머무르지 않을 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행복하다고 느끼게 될 때, 공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종종 불안과 공포로 인해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만납니다. 도저히 자신의 삶에 어떤 진전이나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파충류의 뇌를 가지고 있지 않은 한, 그러한 생각은 현실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내 몸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변화의 노력을 계속해서 시도한다면 분명히 행복을 느끼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범죄자가 자신 안에 또 다른 인격이 있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 인격이 진짜 자신의 인격 같아서 이 인격이 요구하는 데로 했다는 것입니다. 뭐 그럴 수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찾고 그 목소리를 찾아 따르는 것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것일까요? 그보다는 우리와 연결된 사람들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더 본질적으로 가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진짜의 내 자신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보다 가짜의 내 모습처럼 보이지만 스스로 가짜 마더 데레사 성녀가 되는 노력이 더욱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는 앞서 말했듯이 우리 뇌의 구조상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는 황금률의 말씀을 하십니다. 솔직히 남이 해달라는 그대로 해주면 바보, 멍청이 소리를 들을 것만 같습니다. 손해 보는 것 같은 삶 안에서 기쁨은 없어지고 짜증이 날 것만 같습니다. 남들이 먼저 내게 해준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는 있겠지만, 나만 한다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먼저 남에게 먼저 해준 뒤에 얻었던 행복의 감정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기쁨의 감정으로 충분히 모든 것을 보상받고도 남을 수 있지 않을까요? 바로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 안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내면의 악한 마음을 이겨냈을 때 더 큰 기쁨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렵고 힘들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길을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생에서는 뜻하지 않은 일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 모든 것 또한 나를 위해 준비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존 고든).
성공적인 대화를 위한 6가지 원칙
세계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였던 데일 카네기는 성공적인 대화를 위한 원칙을 6가지로 정리합니다. 각 원칙의 이니셜을 따 'LADDER(사다리) 공식'이라고 부르는데, 타인과 대화를 할 때 매우 유용합니다.
L 상대방을 바라본다. (Look at the other person)
A 질문한다. (Ask questions)
D 중단시키지 않는다. (Don’t interrupt)
D 주제를 바꾸지 않는다. (Don’t change the subject)
E 감정을 조절해서 표현한다. (Express emotion with control)
R 적절하게 반응한다. (Respond appropriately)
대화 원칙이라 하는데 솔직히 너무 간단하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가장 기본적인 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공적인 대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지 않고 말하고 들었던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자기 이야기 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질문하지도 않고 또 상대방의 말을 중단시키기도 합니다. 가까운 사람과도 사무적으로 이야기하면서 거리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이 대화 원칙을 기억하면서 대화를 이끌어보시길 바랍니다. 분명히 대화가 한층 즐겁고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귀향(歸鄕)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인간이란 존재 참 특별합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 닦아 한없이 높이 위로 올라갈 수 있지만, 어떤 틀에 갇혀 있을 때, 지속적으로 자신을 성찰하지 않을 때,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아틀랜타 총영사 시노즈카 다카시의 ‘위안부는 사례 받은 매춘부’라는 발언을 들으면서, 졸속으로 처리된 지난 정부의 위안부 합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 인간이 얼마나 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는가’를 생각합니다.
피해 당사자들인 우리 할머님들께서 진정으로 바라시는 바가 무엇일까요? 그까짓 알량한 피해보상금이 절대 아닐 것입니다. 그분들이 가장 원하시는 바는 진정성 있는 사과입니다. 그 사과는 공식적이어야 하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솔직해야 하고 인간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그런 비인간적인 행위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가 뒤따라야 합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이미 지난 정부에서 한일양국이 정식으로 합의했는데 재협상이 무슨 말이냐?”고 말들을 합니다. 한 마디로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피해 당사자들이 아직도 엄연히 우리 가운데 생존해계시는데, 그분들의 목소리가 조금도 반영되지 않은 합의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습니까? 혼이 비정상적인 사람들이 졸속으로 도출해낸 합의는 재검토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 할머님들의 참혹했던 지난 세월을 소재로 한 ‘귀향(歸鄕)’을 관람하러 한 영화관에 들어갔었습니다. 놀랍게도 당시 총 관객 숫자는 1명, 저 혼자뿐이었습니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영화였습니다. 때로 너무 가슴이 아파 시선을 허공으로 향해야했습니다.
자신의 딸들조차 지켜내지 못했던 약소국 국민으로서의 비애와 서러움, 부끄러움과 분노가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요즘 잘 나가는 좀비 영화도 좋고 할리우드 영화도 좋지만, 더 많은 국민들이 이 영화를 보셨으면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을 위해 늦게라도 다시보기를 적극 추천합니다.
위안부 문제는 대한민국 역사이기에 ‘귀향’이라는 영화는 국가 주도로 제작되었어야함에도 불구하고 국민성금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나눔의 집에서 생활하시는 할머님들의 증언을 토대로 만들어졌기에 실화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1943년, 천진난만한 열네 살 소녀가 영문도 모른 채 일본군 손에 체포되어 가족의 품을 떠납니다. 가족들을 향한 설명도 양해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만류하는 부모의 머리와 어깨 위로 무자비한 개머리판 폭력이 가해졌습니다. 끌려가면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딸을 바라보던 부모는 울부짖다 혼절합니다.
군용트럭에서 군함으로, 군함에서 열차로, 그렇게 우리 꽃 같은 딸들은 중국으로, 동남아시아로, 남태평양 섬으로 짐짝처럼 실려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꽃 같은 청춘과 순결이 처참하게 짓밟혔습니다.
이윽고 지옥 같은 전쟁이 끝났습니다. 야속한 것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다들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딸들은 지독한 트라우마와 깊은 상처, 치욕스런 기억을 안고 죽음과도 같은 불면의 고통의 세월을 보내야했지만,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고 떠들고 즐겼습니다. 그렇게 무심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무심한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생존 피해자들도 몇 분 남지 않았습니다. 더 세월이 흐르기 전에 일단락 짓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지난 정부에서 졸속 처리된 한일 양국의 합의는 전면적으로 재검토되고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더 이상 인간의 탈을 쓰고 있지만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아무리 말해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들, 끝끝내 자신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갈등하는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아주 명쾌한 대처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오복음 7장 6절)
이 세상에서 거룩한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거룩함의 극치이신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분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또한 거룩하십니다. 그분을 기억하는 성찬례가 거룩합니다. 그분이 제정하신 거룩한 교회 전례와 성사가 거룩합니다. 또한 거룩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그분이 유언처럼 남겨주신 사랑의 가르침 역시 거룩합니다. 사랑, 일치 봉사, 우정, 친절, 환대, 배려, 용서가 거룩합니다.
그런데 그런 거룩한 사랑의 가르침은 정상적인 인간에게만 통용되는 것입니다.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끝까지 성찰하고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 끝까지 공동체의 평화와 일치를 파괴하는 이들은 이성을 상실한 사람들이기에, 즉 개나 돼지와 같기에 또 다른 방식의 대처가 필요합니다.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피해 당사자들을 향한 진심을 담은 사죄가 우선입니다. 자신들이 저지른 인류 최악의 범죄를 세상 앞에 솔직히 참회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다시는 그런 수치스런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요지의 자필 반성문과 범죄자들과 책임자들의 지장(指章)과 UN의 공증이 필요합니다.
“당시 제가 당했던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끔찍해 평생 가슴속에만 묻어두고 살아왔지만...국민 모두가 과거를 잊은 채 일본에 매달리는 것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습니다. 부디 제가 눈을 감기 전에 한을 꼭 좀 풀어 주세요.”(故 김학순 할머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영어 표현 중에 ‘It's up to you.'가 있습니다. 우리말로 이야기하면 ’당신이 좋은 대로 하세요.’정도입니다. 저도 그런 표현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식사를 하러 갈 때도 그렇습니다. ‘점심에 무엇을 먹을까요? 응 아무거나, 먹고 싶은 거 먹어요.’ 휴가를 갈 때도 그렇습니다. ‘어디로 갈까? 응 아무데나 가고 싶은 곳으로 가세요.’ 모임에 다른 사람이 오기로 했다고 할 때도 그렇습니다. ‘응 나는 상관없어요. 원하는 대로 하세요.’ 상대방을 위한 배려일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는 결정을 잘 내리지 못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결정을 상대방에게 유보하는 편이 많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또 있는 것 같습니다. 안주 중에 ‘아무거나’라는 메뉴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인이 알아서 적당히 골라주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브람은 조카 롯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한 혈육이 아니냐? 너와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목자들과 너의 목자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아브람은 결정을 미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카에 대한 배려를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삶은 생명으로 들어가는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용운 스님은 그런 마음을 ‘복종’이라는 시에 담았습니다.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을 복종하라면
그것만은 복종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바라보는 거울은 늘 거짓이 없습니다. 내가 거울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으면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도 환하게 나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내가 거울 속에서 잔뜩 화난 얼굴을 보이면 거울 속에 비친 나의 모습 역시 화난 얼굴입니다. 거울을 바라보고 환하게 웃듯이 우리가 만나는 이웃에게 친절하고, 환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우리의 이웃도 그렇게 우리를 대할 것입니다.
때로 물에 글을 쓸 수 없듯이, 우리의 선한 모습이 드러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잘못이 아닙니다. 거울에 먼지가 있거나, 흠결이 있으면 나의 웃는 얼굴이 제대로 비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역시 나의 얼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거울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할 도리를 다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쉼표’도 악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8일 동안 피정을 갑니다. ‘예수님의 비유’라는 주제로 강의를 듣고, 책도 읽고, 기도를 하고, 산보도 하려고 합니다. 좋은 피정이 될 수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온전한 삶,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인생은 학교입니다. 평생 졸업이 없는 학교입니다. 인생 학교의 목표는 하느님의 사람이, 하느님의 벗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그 온전한 삶의 모델입니다.
성무일도 제4주간 월요일 아침기도 독서는 들을 때 마다 새롭습니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하느님을 참으로 섬기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련을 겪었다는 것을 기억하여라. 너희는 너희 조상인 아브라함이 유혹을 당하고 많은 환란을 통해 정화되어 하느님의 벗이 되었음을 기억하라. 마찬가지로 이사악과 야곱과 모세 그리고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던 모든 이들은 많은 곤란 가운데서 하느님께 충실하였느니라.”(유딧8,21ㄴ-23).
바로 오늘 창세기의 말씀이 그대로 이런 아브라함의 삶을 입증합니다. 늘 영원한 도반이신 하느님과 동행한, 온전히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입니다. 끊임없는 ‘떠남의 여정’임과 동시에 ‘비움의 여정’을 통해 하느님의 벗이 되어 간 아브라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평생 목표와 희망은 하느님의 벗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 늘 하느님과 소통할 때 하느님의 벗이 되어 갑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롯이 분가되는 과정에서도 아브라함의 관대한 마음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마음을 비운 무욕의 사람, 기도의 사람, 평화의 사람 아브라함입니다. 무욕의 지혜입니다.
롯과의 분쟁을 피해 조카인 롯을 분가시키는 과정에서도 롯에 우선권을 줍니다. 제꾀에 제가 빠진다는 것처럼 눈에 참 좋게 보이는 땅, 죄악이 만연되어 곧 멸망하게 될 소돔과 고모라를 택한 욕심 많은 롯입니다. 롯이 아브라함에게서 갈라져 나간 다음,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축복의 약속을 주십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자기를 비워갈 때 충만한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아브람은 천막을 거두어,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으로 가서 자리 잡고 살았다. 그는 거기에 주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다.’(창세13,18).
늘 새로운 곳에 머물 때 마다 주님을 위해 제단을 쌓음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롭게 확고히 한 아브라함이야 말로 온전한 삶의 모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은 창세기의 아브라함에게서 완전히 실현됨을 봅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분별의 지혜’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온전한 삶의 첫째 조건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 지도 모른다.”(마태7,6).
이 단절어는 차별差別이 아닌 분별分別의 지혜를 말합니다. 누군가를 개나 돼지로 판단하여 차별하라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 맞게 분별의 지혜를 발휘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나오는 분별의 지혜입니다.
이래야 상호 평화로운 공존입니다. 바로 창세기에서 욕심 많은 조카 롯에게 땅의 선택에 우선권을 주는 아브라함의 모습에서도 분별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아브라함은 ‘상식적 사랑’을 지닌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사람이었습니다.
온전한 삶의 둘째 조건입니다. 비상한 사랑이 아닌 아주 평범하나 흔히 잊고 지내는 황금률이 제시하는 상식적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7,12)
황금처럼 귀하다 하여 황금률입니다. 모든 문화권에서 볼 수 있는 황금률입니다. 황금률은 사랑의 이중계명과 더불어 가장 포괄적인 계율입니다.
예수 생전의 힐렐 율사는 ‘네가 당하기 싫어하는 일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마라. 이것이 율법 전부요 나머지는 풀이다.’ 말했습니다. 롯을 대하는 아브라함 역시 이 황금률대로 선택의 우선권을 롯에게 줍니다. 아브라함인들 왜 눈에 좋게 보이는 땅이 탐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선권을 주었고, 결국은 전화위복이 되었습니다.
마음을 비운 역지사지의 상식적 사랑 역시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연유됨을 깨닫습니다.
셋째, 아브라함은 생명의 좁은 문을 선택한 사람이었습니다.
행복도 선택입니다. 생명의 좁은 문을 선택할 때 참 행복입니다. 온전한 삶의 셋째 조건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을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7,13-14).
좁은 문의 역설입니다. 외관상 좁은 문이지만 가면 갈수록 내적으로 넓어지는 문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도 ‘수도생활과 신앙에 나아감에 따라 마음이 넓어지고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감미로써 하느님의 계명들을 달리게 될 것’(성규;머리49)이라 말씀하십니다.
역시 아브라함의 삶은 좁은 문의 연속이었지만 내적으로는 얼마나 자유롭과 행복해 보이는지요.
참으로 훈련을 요하는 좁은 길, 좁은 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소수의 사람들만이 발견하는 길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걸어 갈수록 인간의 ‘가장 깊은 필요와 욕구(the deepest needs and desires of the human person)’에 더욱 일치되기에 점점 쉬워지는 길이요 참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의 길은 결코 많은 종교중 하나로서 별난 삶의 스타일이 아니라, 인간 삶이 희구하는 모두와의 온전한 조화를 목표로 하는 길입니다.
아브라함은 물론 예수님을 비롯한 모든 성인성녀들이 간 길입니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은 넓은 길은 가기에 더 쉬울지는 몰라도 절대 진정한 행복은 가져다 주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참행복에 이르는 생명의 좁은 문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도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연유됨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온전한 삶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풍성한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시편27,4). 아멘.
바라는 그대로 해주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가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도 친구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와 바람에 만족하고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고 느낄 때가 훨씬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는 이 정도는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자기는 잘하고 있는데 상대는 그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일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접 받기를 원한다면 남을 똑같이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받는 고통이나 기쁨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정된 사람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한정된 테두리를 극복 하도록 촉구하십니다.“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가6,32).
오래 전입니다. 교우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탈 기회가 있었습니다. 신부를 옆자리에 태운 것이 긴장되었는지 후진을 하다가 그만 다른 차를 들이 받았습니다. 얼른 내려서 잘못을 얘기하려고 하는데 그 운전사는 차량 상태를 확인도 하지 않고 그냥 가라고 했습니다. 별 이상은 없다고 하더라도 차량상태를 확인할 법도 한데 말입니다. 아마 확인을 했으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이후로 ‘은혜를 입었으니 같은 처지가 되면 그런 넉넉한 마음을 표현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온갖 유혹을 거슬러 살려면 문이 좁고 길이 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밑지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옳은 길과 옳은 문을 찾는 수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의 기대와 바람만큼 걸 맞는 수고와 땀을 소홀히 하지 않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길이라 해도 그 길이 목적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서둘러 그 방향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험하고 힘든 고된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이 천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군소리 없이 걸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의 삶은 매 순간이 세상을 감당하는 도전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 가라. "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은 산상설교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짧은 말씀이지만, 중요한 세 가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는 가르침이요, <둘째>는 “너희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는 가르침이요, <셋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입니다.
<첫째> 말씀은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두 가지 원리 중 하나입니다.어제 <복음>에서 우리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는 이웃과의 화합의 원리를 들었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이와는 대조되는“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태7,6)는 이웃과의 단절의 원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는 결코 남에게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분별 있고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르기”(7,6) 때문입니다. 세속적이고 악한 생활로부터 영적인 분별력과 신중함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균형 있고 조화 있게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세속정신과 이방종교들과 함께 있는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별 있는 행동을 이렇게 권고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로마 12,2)
이러한 분별의 귀중함에 대해서 요한 카시아누스는 그의 <담화집>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분별의 은총 없이는 완전한 덕이 없다”(담화 2,3)
사부 성 베네딕도께서도 <수도규칙> 64장 19절에서 ‘분별을 모든 덕의 어머니’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둘째> 말씀은 흔히 황금률이라 불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이는 6장33절과 더불어 산상설교의 2대 강령이기도 합니다. 곧 6장 33절의“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는 말씀이 수직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면, 여기 7장 12절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은 수평적인 관계의 황금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결코 ‘정직은 그 대가를 지불한다.’는 공리주의적 금언이 아닙니다.또한 ‘주는 양만큼 똑같이 받을 것’을 기대하는 이해타산의 합리주의적 금언도 아닙니다.
오히려 철두철미한 ‘이타적인 사랑’으로 남에게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는 겸손하게‘먼저’ 남에게 베풀라는 적극적인 사랑에 대한 요청입니다. 곧 사랑을 타인에게 기대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사랑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7,12) 입니다.
<셋째>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을 규명하는 네 가지 비유 중 첫 번째로, 좁은 문과 넓은 문의 비유입니다. 곧 “생명으로 이끄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14 참조)는 요청입니다.
이 문은 좁은 문이기에 통과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버려야할 것들은 버리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길이지만 자신을 비우고 들어가는 문이기에 많은 이들이 선뜻 들어서지 않는 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생명의 문이신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그분의 이끄심에 의탁하는 자라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들은 이 세 가지 말씀이 우리의 실행 안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이 미사 중에 은총을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빠른 차는 넓은 길을 원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안철수 의원이 KBS '교양강좌'에서 했던 강의 중 우리나라 영재교육에 대한 문제점에 대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영재는 말 그대로 어릴 적부터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천재적인 아이들을 말합니다.
미국에서 최고경영자 과정을 이수할 때 법대 교수에게 들은 것인데, 경영학 하는 사람들에게 법에 대해 가르치면 대부분 어려워하는데 극소수의 사람들은 법대 학생들보다 더 법에 대한 이해도가 빨라 최고 점수를 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궁금해서 10년 뒤에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찾아봤는데 대부분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똑똑하기만 하다면 이런 것입니다. 또 몇 년 전 금융위기 때 전 세계적인 어려움을 주게 만들었던 핵심 멤버들이 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영재교육은 속도중심, 문제해결 중심, 결과중심인데 특히, 속도위주의 교육과 관련, 루이스 터만 연구에서는 20세기 초반 캘리포니아주의 학생 25만 명으로 IQ 140 이상인 영재학생 1,470명을 선발해 이들의 평생을 추적하는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성공한 사람은 있었으나 전 국가적으로 공헌을 한 사람은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이 연구 대상에서 탈락된 사람들 중 노벨상 수상자가 2명이나 나오는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저도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천재라고 불렸던 사람이 지금은 어디에도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정말 너무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우고 수학을 조금 더 빨리 풀어야하는 조급함만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런 속도위주의 교육 시스템은 학생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대인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끊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저도 이런 교육 하에서 자라서 그런지 남들보다 빨라야 하는 조급증을 지니고 살아온 것 같습니다.
‘좁은 문’이란 어떤 그림을 보았습니다. 큰 길에 판자로 화려한 도시가 그려져 있고 밝은 불도 밝혀져 있습니다. 그 큰 길로는 많은 사람들이 즐겁게 이야기하며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허름한 판자로 된 작은 문이 나 있는 뒤로는 아주 좁고 굽은 길이 나 있는데 그 길은 언덕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멀리 보이는 언덕 위에는 희미하게 십자가가 서 있습니다.
‘내가 저기 있었다면 어느 길을 택했을까?’ 생각을 하다가 아무래도 큰 길을 택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좀 바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느린 것을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차를 몰 때도 저는 사람을 태우면 과속을 좀 자제하지만 저 혼자 다닐 때는 속도를 내는 편입니다. 양쪽 차선을 막고 천천히 가거나,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앞에서 어물대는 차가 있으면 참지 못하고 크락션을 눌러 재촉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길을 선택할 때도 좁은 1차로보다는 좀 돌아가더라도 고속도로와 같은 넓은 길을 택합니다. 더 빠르게 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이렇게 속도를 재촉하는 세상에 살다보니 하늘나라에 이르는 길도 좁고 굽어서 오래 걸리는 길보다는 넓은 고속도로를 선택하고 있지는 모르겠습니다. 빨리 간다는 것은 정신없이 간다는 뜻인데 아무래도 하느님나라는 좁은 문으로 나 있는 좁은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몫인 것 같습니다. 빠른 차는 넓은 길을 택합니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좁고 느린 길을 택하는 사람들의 것인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들어보면, 냉담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빠서 쉬게 되었었다고 말합니다. 그렀습니다. 세상은 바쁘게 만들고, 바쁘지 않은 사람들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와 오늘, 한 시간씩 운동을 했습니다. 그동안 한 시간 운동을 할 시간도 없이 지내왔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루 한 시간도 운동을 할 수 없도록 바쁘게 살아온 것이 어리석게 느껴졌습니다. 하느님은 시간을 합당히 사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시간을 허락하시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진주를 돼지에게 주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사실 진주보다도 귀합니다.
시간을 귀중히 여겨야 더 많은 시간을 주십니다. 저는 바빠지면 성체조배 시간을 늘립니다. 그러면 시간이 더 없어져야 당연한데 실은 더 여유로워집니다. 그 시간을 봉헌한다는 것은 그 가치를 아는 것이기에 더 많은 시간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이치는 모든 것에 다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시간과 재능, 재물 등 내가 가진 모든 것들을 봉헌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 가치를 모르는 것이고,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 돼지와 개와 같은 것입니다. 봉헌은 나의 가장 귀중한 것을 바치는 것이고, 그것을 보고 하느님은 그 가치를 아는 이에게 그 가치 있는 것을 더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분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않으시고,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않으십니다. 나에게 무언가 부족하다면 내가 그것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6절) 여기서 ‘거룩한 것’이란 우리가 함부로 쓰거나 망가뜨리면 불경한 짓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범하려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경의 죄를 지은 것이다. ‘진주’는 소중히 여겨야 하는 모든 영적인 것이다. 거룩한 것이나 진주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개 안에 담겨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드러내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사람들이 명백하게 중요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오로지 미움과 하찮게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개로 배불리고 어떤 이들은 돼지로 배불린다. 나는 어떠한 것으로 불리고 있는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요약하신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면,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동료가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 주라고 하셨다. 이보다 짐스럽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공평한 것이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이제 다시는 몰랐다고 핑계 대며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그렇게도 평범한 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모습은 아니다. 복음을 아는 신앙인의 모습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그만큼 성숙하는 그러한 사랑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하셨고 산상설교에서 겸손하고 온유한 이들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이 편안한 멍에와 이 가벼운 짐을 마다하는 사람이 많아서,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힘들고 문은 좁게 느껴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우리는 하느님께서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그 짐은 은총이기 때문에 가볍고 기분 좋은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좁고 비좁은 길을 편하다고 하는 것이냐? 그것은 그것이 문이면서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하셨다.
그 길이 좁아 보이는 것은 주님의 멍에 곧 계명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기꺼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가 적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안에, 곧 성령 안에 머물 수 있을 때만이, 그 계명을 따를 때만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다. 주님의 뜻을 오늘도 실천하는 우리가 되도록 하자.
먼저, 한층 더 능동적으로 사랑하기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남이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7,12) 하십니다. 구약성경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공자님도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마라.”(論語, 己所不欲 勿施於人)고 하였지요.
이른바 황금률로 불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형제애를 사는 기본적인 태도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사실 황금률은 예수님 이전에도 여러 형태로 발설되어 전해왔습니다. 또 표현방식도 예수님처럼 긍정적으로 표현하는가 하면 부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하였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은 전혀 새로움이 없는 말씀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소극적 표현이든 적극적 표현이든 황금률은 타인 존중을 지향합니다. 그러나 좀 더 숙고해보면, 남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보다, 남이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능동적 사랑을 요구하셨지요. 악행을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남이 바라지 않는 것을 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마태 5,39-42)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능동적 사랑의 기준은 ‘남이 자신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입니다. 누구나 진심으로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그 누구보다 앞서 존중받기를 바라지요. 자신을 가장 소중한 존재로 여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온힘과 정성과 사랑을 다해 나를 사랑해주기를 바랍니다.
건강할 때나 기쁠 때, 뭔가를 이루었을 때에 누군가 함께 기뻐해주기를 바랍니다. 아플 때나 슬플 때, 고통과 시련을 겪을 때 나를 이해해주고 함께 십자가를 져주기를 바랍니다. 외롭고 쓸쓸할 때, 오해받고 무시당하고 배척당할 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주었으면 하지요. 속상하고 마음의 번민이 쌓여갈 때 또 누군가는 내 마음을 들어주는 귀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남의 잘못이 커 보일지언정 내 잘못만은 용서받고 싶어 하지요.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나 자기완성을 위해 먼저 자신에게로 향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위한 ‘이기적 사랑의 정류장’에만 머물지 말라 하십니다. 자신을 아끼는 절박함과 간절함으로 남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남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아울러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사랑 방식이 ‘먼저’, ‘한층 더’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능동적인 사랑은 남이 해주기를 기다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 사랑하고 베풀고, 희생하고 용서하는 사랑입니다. 말보다는 먼저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랑이 우리가 살아야 할 사랑입니다. 또한 우리의 사랑은 늘 ‘한층 더’ 사랑하고, ‘더욱 더’ 함께 하고, ‘더 기꺼이’ 나누고 되돌리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어디 이런 사랑이 쉬운 일입니까? 사실 내가 죽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7,13) 하십니다. 거기에 영원한 행복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오늘도 나를 내놓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능동적 사랑을 실천하는 복된 우리였으면 합니다.
권동성 폰시아노 신부님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이 황금과 같이 귀하고 중요하다고 해서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황금률’은 그리스도교 윤리 도덕의 기본이며 대원칙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이나 다른 종교에도 황금률과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토비트가 아들 도비아에게 가르치는 말 중에 ‘네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아무에게도 행하지 말아라!’하는 말이 있고, 공자의 논어에도 ‘자기가 싫어하는 바를 남에게 시키지 마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처럼 자기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인 삶의 자세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없거나 종교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신자인 우리에게는 이런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요구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황금률은 사랑의 계명과 연결됩니다. 황금률은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고, 예수님은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가장 근본적인 계명으로 ‘하느님을 온 마음과 온 힘과 온 정성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황금률은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규범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이웃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노력하고, 그대로 해주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는 말씀은 결국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덧붙여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원할까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좋아할까요? 때때로 우리는 친절을 베풀었는데, 결과는 오히려 안 좋게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 드립니다.
어느 마을의 빵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 빵집에는 마음 착하고 평소 어려운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주인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부턴가 이 빵집에 초라한 행색을 한 젊은 청년이 와서 식빵을 사갔습니다. 그 청년은 매번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가장 저렴하고 맛없는 식빵을 사갔습니다. 마음 고운 아주머니는 초라한 행색의 청년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한참 먹고 일할 나이에 저런 식빵으로 어쩌나? 그렇다고 그 청년에게 빵을 덤으로 주자니, 오히려 청년이 자기를 무시한다고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걱정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청년을 도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좋은 방법이 떠올랐습니다. 그 청년이 사가는 식빵에 청년 몰래 버터를 잔뜩 넣기로 한 것입니다. 겉모양은 똑같으니 청년이 식빵을 사가면서도 모를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그 어느 때보다 정성을 다해서 그 청년에게 줄 식빵을 만들었습니다. 맛있는 버터를 잔뜩 넣어서 말입니다. 이윽고 초라한 행색을 한 청년이 식빵을 사러 왔습니다. 아주머니는 모른 체하면서 그 청년에게 특별히 만든 식빵을 건넸습니다. 청년이 돌아가고 빵집 아주머니는 흐뭇한 엄마 미소를 지었습니다. 청년이 식빵을 먹으면서 얼마나 행복해할까? 맛있게 먹고 힘내서 빨리 좋은 직장을 구했으면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나고 그 청년이 다시 빵 가게에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울상이 되어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 청년이 다짜고짜 하는 말이 ‘대체 왜 그러셨어요?’라고 따지는 것입니다. 아니 기껏 친절을 베풀었더니, 이거 너무하다 싶습니다. 하지만 그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난 아주머니는 자신의 친절이 오히려 그 청년의 인생을 망치고 말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은 목탄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고, 마침 미술대전을 앞두고 몇 달에 걸쳐 심혈을 기울여 그림을 그렸고, 이제 완성 단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이 사갔던 식빵은 먹는 것이 아니라 바로 목탄을 지울 때 사용하는 것이었지요. 식빵 안에 버터가 든 것을 모르고 그림을 고치다가 그림을 망쳐버리고 만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랑은 때로는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모두가 원하고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참된 사랑은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베풀고 요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깔려 있어야 합니다. 이해가 없는 사랑은 폭력이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독서를 보면, 아브람과 롯이 서로 번창하게 되자 그 종들이 자꾸 싸우게 됩니다. 양떼가 많아지고 소와 천막 등 재산이 많아지게 됨으로써, 조그만 땅에 함께 살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헤어지기로 결정하고 영역을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내가 삼촌이니까 내가 좋은 곳을 택하고 그 다음에 네가 원하는 것을 가져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가위 바위 보를 해서 결정짓지도 않습니다. 아브람은 롯에게 말합니다. “온 땅이 네 앞에 펼쳐져 있지 않느냐? 내게서 갈라져 나가라.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창세 13,9) 아브람이 택한 ‘평화로운 공존’의 방법은 선택의 공을 롯에게 넘긴 것입니다. 롯이 먼저 원하는 곳을 선택하고 나면, 그 반대쪽에 정착하여 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예수님 말씀처럼 양보하고 희생하는 길이 그 당시엔 남보다 뒤처지는 것 같지만, 최후에 그 결과를 보면 처음 계획하고 생각할 때처럼 성공과 안녕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 듯합니다.
롯이 고른 좋아 보이는 소돔 땅은 너무 좋아서 그런지, 소돔은 악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고 주님께 큰 죄인들의 땅이어서, 훗날 유황불꽃으로 태워지고 마치 화산재로 인한 것처럼 잿빛 소금 기둥으로 굳어버리는 벌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의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이 결국 사람들을 망하게 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안겨줍니다.
그런가하면, 아브람이 고른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참나무 곁 땅은 척박해 보였지만, 훗날 새 민족을 일구는 땅이 됩니다. “눈을 들어 네가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을, 또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아라.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 내가 너의 후손을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할 것이니,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자라야 네 후손도 셀 수 있을 것이다.”(창세 13,14-16) 이 땅은 마치 오늘날 아무도 찾지 않고 걸으려 하지 않는 그러나 참 가치를 가진 생명의 길입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주 예수님께서 펼쳐주시고 일러주시는 다소 좁고 외로워 보이는 길에서 참 생명을 얻어 누리시기를 빕니다.
"아버지 집으로 오르는 탄탄대로인 예수 그리스도님"
박미라 도미틸라 님
주님께서는 사람들 편에서 "멸망에 이르는 문은 크고 또 그 길이 넓다."고 하시고 "생명에 이르는 문은 좁고 또 그 길이 비좁다."고 하셨는데 그 문을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고 찾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찾아 내고 나면 생명에 이르는 문은 얼마나 넓고 그 길은 탄탄대로인지요.
그 길은 이 세상 그 어떤 무기도 때려 부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고 또, 쭉뻗은 고속도로 그 자체입니다.
십자가에 달려계신 그분의 온 몸이 바로 그 길이니 그렇지요.
그 길은 바로 이 길을 만드신 그분께서 직접 피를 뚝뚝 흘리며 그곳에 달려 계시며 당신의 온 몸을 타고 아버지 집으로 올라가도록 2000년 전에 마련해 놓으신 길입니다.
그분께서는 거기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태초에 하느님께서 당신이 가진 온행복을 다 주시고자 사람을 만들었습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그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집짐승과 온갖 들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세기 1, 26) 하시고 사람을 만드시어 온갖 것을 다 주시며, 다만 하나 따먹지 말라는 열매만은 다먹지 말라고 하셨지요.
따 먹으면 죽게 되리라고(창세기 2,17)...
그런데 성경에 보면, 사람이 뱀의 유혹을 받아 따먹으면 죽게 되리라는 열매를 따먹어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은 두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해 올릴 수도, 아래로 내려 땅을 짚을 수도 있게 하느님께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네가 하늘이건 땅이건 스스로 선택하라."고 가장 중요한 "자유의지"를 주셨지요.
뱀은 온 몸을 땅에 대고 기어다니는 짐승입니다.
보통의 짐승은 땅에다 손과 발을 대고 걸어 다니지요.
보통의 짐승이 온 몸을 땅에 대었을 때는 잘 때나 아니면 죽었을 때이고요...
그렇다면 온 몸을 땅에 대고 있다는 것은 죽어 있는 짐승과 같다는 뜻이 되겠지요...
두 손을 높이 쳐들어 하늘을 향할 수도 있게 창조 된 사람이 온 몸을 땅에 대고 있어 죽은 것과도 같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느님께서 금하신 실과를 따 먹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온갖 과일이 넘쳐나고, 온행복을 누릴 수 있는 낙원에서 쫓겨나 죽을 몸으로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돋고(창세기 3, 18) 들풀을 먹고 살아야 하는 세상으로 짐승의 가죽 옷을 입고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쫓겨난 그곳에는 천사가 불칼을 들고 있어 이무도 그곳으로 들어 갈 수 없게 되었지요.(창세기 3,24 참조)
사람이 뱀의 유혹을 받아 죽게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주인이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려 자기 스스로가 주인이 되려고 두 손을 땅에다 대어 땅의 것을 소유하여 자기가 주인이 되려는 욕심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사람이 두 손을 땅에 대고 있으면 절대로 하늘을 볼 수가 없게 됩니다.
제가 교리 중에 그것에 대하여 설명을 할 때는 꼭 모두 다 일어 나 보라고 합니다.
그리고 땅에다 손을 대고 하늘을 쳐다 보라고 해 봅니다.
아무도 하늘을 제대로 볼 수가 없지요... 못 믿겠으면 한 번 해 보세요...
살짝! 어거지로! 아주 힘겹게 볼 수는 있겠지요...
아뭏든 그리되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계신 그곳과 죽게 된 사람이 사는 세상과의 사이에 아주 단단한 막을 쳐 놓으셔서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그 막을 뚫고 아버지가 계신 그곳으로 올라 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 때문에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을 만드신 그분께서 어떻게 가만히 계실 수 있었겠습니까?
자기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올라 올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당신께서 직접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람들의 죄악을 기워 갚아 살려 주시려고 베들레헴 성 밖 짐승의 집에서 태어나시어, 짐승의 먹이통 안에 누으셨고, 급기야는 하늘과 땅을 가로 막은 그 "단단한 막"에 당신의 두 손을 못박아 거기에서 피를 뚝뚝 흘리고 계시면서 당신의 온 몸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 집으로 오르는 탄탄대로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두 손을 못박은 그 막은 세상 끝까지 펼쳐져 있으며, 두 발이 박혀 있는 그 나무의 끝은 세상 가장 밑바닥까지 뻗어 있으며, 그 십자가에 달려 계신 그분의 머리는 자비로우신 아버지께서 계신 그곳에 두고 계십니다.
우리가 절대로 꿈도 꿀 수 없었던 하늘나라로 오를 수 있는 탄탄대로를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그리고 당당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고요.
이제 왜 제가 그 길이 탄탄대로라고 했는지 이해가 좀 되시나요?
2000년 전에 주님께서 분명히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태 5,10) 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는데.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대희년을 선포하시며 "대희년"을 준비하라고 "삼천년기"를 내시면서 "이제 겨자나무가 다 자라 전인류를 덮을 만큼 컸습니다." 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하신다고요...
대희년 전까지는 그 길로 나가는 일이 정말 힘들고 어려워 "좁은문"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대희년이 지나고도 17년이나 지난 지금은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이 쉬워졌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지난 번에도 말씀드렸듯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일 때, 이 길 그 자체인 "참행복의 길"에 대한 글을 다 썼는데도 지금껏 기다린 것이, 2001년 6월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다가 멈춘 것이,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 사람들의 귀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저에게도 때가 이르지 않아 14년 동안은 한 마디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짐승처럼 죽은 사람들 가운데 주님께서 "참사람"으로 내려 오신 2000년 전 그때부터 이 세상에는 기원이 시작되었고, 짐승처럼 죽게 된 사람들이 본래의 모습인 사람으로 되돌아 올 수 있는 완전한 때가 이르렀다고 요한 바오로 2세께서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완전한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가 다 건설 되었다고...
이 세상에 건설된 하느님 나라는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주님의 사도들이 12기둥을 세우고, 2000년 교회 역사 안에서 무수한 성인들이 벽돌 한 장 한 장이 되어 완성 된 건물입니다.
저도 다만 1972년 12월 부터 지금까지 거기에 벽돌 한 장 얹고 싶어서 꾸준히 달려 왔는데, 자비롭고 사랑 넘치시는 주님께서 부족하고 보잘 것없는 제게 하늘나라의 엄청난 신비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만이 대희년이 1년 더 연장이 되었었습니다.
저는 그때 마침 독일에 계셨던 오라버니 덕분에 2001년 1월 6일 주님 공현 대축일에 있었던 대희년 폐막 미사 때 교황청 베드로 대성전 마당에 있었습니다.
대희년의 성문이 닫히기 하루 전 날! 그 성문을 통과했고, 그 다음 날 역사적인 그 순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집전하시는 그 거룩한 미사에 참례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비록 주님 말씀대로 더 많은 사람들이 외면한다하여도, 이글을 읽고 계신 분이라면 틀림없이 그 좁은문으로 들어 갈 수 있으리라고 저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
마음을 먹고 주님께로 나아가 그분께 손을 내밀어 도우심을 구한다면요...
그 길로 나아 가 그분의 몸을 타고 오르는데 꼭 필요한 일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따라 끊임없이 자신을 이웃의 먹이로 내어 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남에게서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밥"이 되어 주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남이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주기를 바라지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 주기를요....
그러면서도 자신은 남의 밥이 되어주는 것을 무슨 큰 손해라도 보는 것으로 여겨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생각하지요.
"네가 요~~만큼 내어 주면 나도 요~~만큼 내어 주겠다."하며 "자신의 마음 속 자"의 눈금을 잽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는 한 몸을 이루는 부부 사이에서 더욱 더 치열해 지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인 이 세상의 모든 부부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하고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이 변하게 될 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을 텐데요...
2000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들어왔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세상이 변화되지 않는 것은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먼저 남의 밥이 되어 주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라고, 너무나도 손해를 보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선뜻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먼저 그 일을 몸소 "나"를 위하여 하셨습니다.
내가 생각지도 않은 그 때에 "나"를 위하여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로 오르시어 당신의 모든 것을 다 나의 먹이로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나"보고도 남을 위하여 먼저 "나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당신께서 마련해 놓으신 영원한 우리의 본향인 하늘나라로 오르는 탄탄대로로 나아 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좁고 험해보여 누구나 두려워하는 그 길이 들어가 보면 얼마나 좋은 지...
그곳은 처음부터 하느님 나라의 참행복이 철철 넘쳐 흐르는 곳이기에 그렇습니다.
그 길로 나아 오라고 그 길을 만들어 놓으신 그분께서는 오늘도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시관에 둘러쌓여 불타는 성심 그 안에서....
그 문이 아무리 좁아도, 또 그 길이 아무리 비좁아 가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 않더라도 "내"가 그 문을 통하여 들어 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그분 안에서 울님들 모두 오늘도 참으로 행복한 하루되시기를 바라오며 연중 제 12주간 화요일 첫 새벽 인사를 올립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최원석
좁은문 혹은 바늘귀 이말을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좁아 좁은길 .. 도데체 이문이 물리적으로 좁은문을 의미하는 것인지 ? 그렇다면 좁은 문의 정의를 다시하면 넓은 문이 될것입니다. 나의 크기보다 작은 것을 좁은 문이라고 하지요 그러면 나의 크기라는 개념을 없애면 좁은 문도 없을 것이고 좁다라는 것도 없을것입니다. 물리적인 것을 가지고 좁은문 하니 맹점이 보이네요 그러면 좁은 문? 주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은 어떤 문을 말씀하시는것인지 ? 물리적인 그런 문은 아닌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떤 문을 좁은 문이라고 하셨을까요 ?? 나를 떠나서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이 좁은 길이고 좁은 문이지요 .. 주님의 삶이 그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주님은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주님의 길을 가십니다.. 사람이라면 내 부모님 공양하고 돈 잘벌어다 드리고 따뜻한 밥 같이 먹고 편안히 그리고 웃는 얼굴을 그리면서 살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것은 그것데로 당신 아버님께 맞기고 당신가실 길을 가십니다. 당신이 그 삶을 사시면서 많은 어려움을 부딧히지요 .. 하지만 그 인간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으시지요 ..하느님의 뜻을 삶안에서 실현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보고 믿게 하려고 하신분이 주님이시지요 .. 좁은 문은 생각의 전환입니다..사고의 전환이 좁은 문입니다.. 인간관점에서 보면 불가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 관점에서 보면 쉬운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하는 행복 안락 돈 명예 권력 드리고 편안함 눌러있으려는 마음 ..이기적인 것 .. 내것 .. 등을 주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분명히 주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 좁은길은 ..바늘귀 ..는 하늘이 무너져도 불가한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행한다면 그것은 성화의 길이요 주님 닮은 사람의 길이지요 .. 하늘나라도 하늘나라의 예복을 입어야지 들어갈수 있지요 그것은 주님을 나의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사는 길이지요 ..주님이 가신길처럼 .. 나의 부모.. 나의 애착..나의 안락..나의 재산..명예..권세.. 부..로부터 나를 속박하지말구 보다 근원적인 것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근원에 가까이가면 나머지것은 주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지요 ..세상의 모든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런것과 같은 것이지요 ..쇳가루가 자석 성분을 가지면 나머지 것은 자석 둘레로 모인다는 것과 같이 우리 몸을 주님의 거룩한 으로 체우면 나머지는 더불어 온다는 것이지요 .. 경중을 어디다 두느니냐 ? 그것은 주님의 것을 중심으로 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인간관점 나관점..이기적인 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주님의 길은 불가한 길이지만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본다면 성화의 길이요 그곳은 적과 꿀이 흐르는 길로 가는 하나의 과정으로 바라볼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근본원의는 성화이고 아버지와 같이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그 행복을 가기위해서는 당연히 땀도나고 눈물도 나고 그렇지요 세상사는데 거저가 어디있어요.. Free는 없어요.. 성화를 위하여서 오늘 하루도 힘차게 !!아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 13)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생명으로
이끄시는
예수님께서
먼저 낮아지시고
작아지십니다.
매순간 낮아지고
작아지시는
생명의 빵으로
매순간 우리에게
오십니다.
작아지셨기에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었고
작아지셨기에
모든 것을 여실 수
있으셨습니다.
작아지면질수록
하느님께
의탁하게됩니다.
우리 힘만으로
무거운 이 짐을
다 질 수
없다는 것을
겸손되이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문은 좁아지고
우리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문은 넓어질 것입니다.
생명에 이르는
좁은 문은
섬기는 삶이며
섬기는 삶이란
주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커질수록
생명을 모욕하고
삶을 모독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찾아드는
은총의 기쁜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좁고 비좁기에
나누어야 할
소중한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게됩니다.
좁은 문이 있기에
버리고 비우고
내려놓아야 할
우리의 많은 짐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구원의 좁은
문입니다.
살기위해
하느님 아닌 것을
내려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