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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광주사태에 대하여 얼만큼 알고 있었는가? 그것은 그가 1989년 2월 광주청문회가 끝난 직후 광주사태 유공자들로 선정하여 평양으로
불러들인 인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과연 남한 사람들 중에서는 문익환 목사와 서경원과 황석영이 광주사태의 주역들이었다는 사실을 몇명이나 알고
있었을까? 광주사태 당시 문익환 목사와 서경원과 황석영은 각기 세 분야에서 운동권 거두였다. 문익환 목사는 종교계 운동권 거두였으며, 운동권
용어대로 서경원은 농민운동권에서 그리고 황석영은 문화운동권에서 각기 거두였다. 국민연합 실세였던 문익환 목사는 5월 8일 국민연합 중앙위원
조성우를 시켜 김대중과 광주운동권 사이에 폭력시위 동맹을 맺게 하였으며, 서경원은 카톨릭농민회 회장직을 이용하여 당시 남민전 점조직이었던 전남
가농이 19일을 기해 예비고 무기고를 접수하도록 하는 무장봉기 거사 준비를 해놓고 있었으며, 황석영 역시 그의 극단 광대가 언제든 민중봉기
선동에 동원될 수 있도록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었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김일성은 1989년 2월 광주청문회가 끝나기가 무섭게 이
세 명의 광주사태 유공자들을 평양으로 불러들여 만났다.
황석영은 1989년 3월 20일부터 장기간에 걸쳐 방북한 후 김일성을 7차례 만나 연방제 통일방안을 의논하였다. 1988년 12월부터
1989년 1월 사이에 안재구 등 남민전 간부들이 출옥할 무렵 황석영은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그해 1989년 3월 입북하여 북한의 5.18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의 시나리오를 썼다. 도대체 황석영이 김일성이 부르는 대로 북한에 가고, 김일성이 시키는 대로 북한의 5.18영화
시나리오를 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김일성이 본 황석영은 누구였던가? 김일성이 황석영은 단지 문인으로서만 보았던가? 아니다.
1989년 2월 김일성의 입맛대로 광주청문회가 끝나자 김일성이 1980년 봄 대남공작원들이 문익환 목사와 서경원 등 남한에서 전민봉기를 일으킬
목적으로 접선하였었던 인물들을 북한으로 불러들였는데, 그 초청자들 중에 황석영이 끼어있었다. 이것은 문익환과 서경원처럼 황석영도 김일성이 직접
관리하던 인물이었음을 시사한다.
북한이 대남공작의 일환으로 지원하던 운동들 중에 문화운동이 있었던바, 광주운동권이 문화운동권으로 분류하던 황석영의 극희 광대가 광주사태
도화선에 점화하였다. 그래서 5.18측에서도 황석영을 광주사태 주역 중 하나로 꼽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광주사태 때부터 김일성이
눈여겨보고 있었던 황석영은 어떤 인물이었는가.
그럼 황석영의 극희 광대와 광주사태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었던 것이었는지 몇가지 사실들을 여기서 정리해 보자. 운동권 논리에서는
'결집'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운동권 표현대로 1980년 1월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와 연극반 출신이 중심이 되고 조선대 탈반, 전남대
국악반 출신 일부 회원이 하나로 결집돼 광주 마당극 운동의 본류로서의 극희 광대가 탄생된다 (正史 5·18 p. 53). 황석영은 윤한봉으로
대표되는 광주운동권이 키워준 인물이었다. 윤한봉의 지하조직 전남민주청년협의회가 합법적으로 활동하기 위한 위장명칭이 현대문화연구소였다.
문화연구소는 운동권 단체 명칭처럼 안보인다. 그러나, 북한의 대남공작도 윤한봉의 통일운동도 문화운동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리고 황석영의 공연
때마다 윤한봉의 현대문화연구소에서 수천 명의 관객을 동원하여 주어서 황석영이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운동권이 이렇게 운동권 문화공연만
밀어주었다는 것은 광주에서는 다른 문화예술인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었음을 시사한다. 운동권이 문화계를 독점할 수 있도록 윤한봉이 지원하였으며,
그런 기형적인 문화 풍토도 광주사태 발발의 한 요인이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인봉이 코미디로 사람들을 웃기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그
한 예가 21일 정오 무렵 도청 광장에서 인봉이 "앞에 일병 애인 있어?" "괜챦은 아가씨 하나 소개시켜줄까나?" "황금동 흑다방에
미스백이라고...가슴이 아메리칸 가슴이요...이렇게 안아버리면...가만, 지금 이일병 무슨 생각하고 있어? 머리속에서는 미스백하고
한참...블록한 남대문 좀 보소. 군복 찢어지겠다"고 지껄이자 시위군중이 깔깔대고 폭소하는 장면이 나온다.
1980년에는 다양한 다방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면 왜 그 많은 다방들 중에 하필 황금동 다방 아가씨를 인봉이 들먹인 것이었을까?
이것 역시 실화에 근거한 이야기이다. 단지 실화에서는 황금동 아가씨들이 폭력시위와 방송국 방화에 동원되었던 것이 달랐을 뿐이었다. 윤한봉의
현대문화연구소 간사이면서 황석영의 광대 단원이었던 임영희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양동시장 부근 시위때 윤상원선배에게서 깡통수류탄의
사용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투석, 화염병 투척 등 시위양상이 격렬해지자 나도 시위대와 함께 공수부대에 돌과 화염병을 던진 적도 있다. 당시
시위대에는 높은 하이힐에 짙은 화장을 한 황금동 아가씨들도 끼어 있었는데 이들 또한 공수부대에 돌을 던지고 MBC에 화염병을 날리는 것을
보았다" (광주민중항쟁과 여성 p. 222).
광주사태 때는 폭력시위와 방송국 방화 등에 이용당하였던 황금동 아가씨들에 대한 인봉의 유치한 성(性)적 코미디 장면에는 아마 5.18
옹호 관객들도 거부감 내지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 5.18 영화 제작자들의 의도는 광주사태 주역들과 시민군이 저질 코미디언들로
보이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영화 제작자는 5.18측이 주장하는 이론을 따라야 하는데, 그 이론이 황석영의 극희 광대로 대표되는 문화운동이
광주사태를 일으킨 역량이었다는 것이다. 김일성 역시 그 이론을 공유하기에 황석영을 북한으로 불러들였으며, 북한에서도 문화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북한의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시나리오을 쓰게 하고 큰 상을 내렸던 것이다. 황석영이 1989년 2월 광주청문회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김일성에게 충성하기로 했었던 것이 아니라, 그 두 인물 사이에 광주사태로 거슬러올라가는 인연이 있었다. 북한의 대남공작의 일환이
운동권의 문화운동을 지원해 주는 것이었다.
작가로서의 황석영은 운동권과 공생의 관계에 있었다. 1980년 봄 황석영은 윤한봉 등 운동권의 지원으로 광주의 유명 작가로 떠오르고
있었다. 광주운동권이 공연 때마다 수천 명씩의 고정 관객들을 동원해 주자 이에 힘입은 황석영은 동명동 장동 로터리에 '동리소극장'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극단 광대 전용 소극장을 마련하였다. 동리소극장이란 간판은 신재효의 호 동리(桐里)를 따서 붙인 명칭이었다. 그리고 광주사태는 바로 그
동명동에서 시작되었다. 바로 그 동명동에서 윤기권 등 광주운동권이 정오 무렵 동명동 동산파출서로 쳐들어가 파출서를 쳐부수고 최규하 대통령
사진을 떼어내 짓밝은 것이 광주사태의 신호탄이었다. 그날 완성을 얼마 남기지 않고 황석영의 개관기념 작품인 한씨연대기(韓氏年代記) 연습 도중
회원 대다수가 광주사태 선동팀으로 동원되엇다.
윤한봉이 미국에 망명해 있는 동안 재미교포들을 북한에 보냈던 것도 아마 김일성 지령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조총련이 김일성의 지령대로
재일교포들을 북한에 보내면 그들이 김일성 왕조에 충성하는 인물이 되었다. 바로 그런 일을 윤한봉이 미국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한봉의
광주운동권 동지 서경원의 간첩활동이 드러났던 1989년 윤한봉은 미국에서 재미한국청년연합(약칭, 한청련)이라는 친북단체를 이끌고 있었으며, 그때
이미 재미교포들 중 방북교포 수가 4천명을 넘고 있었다. 운동권 설명으로 윤한봉의 한청련은 "남북의 운동역량에 상응하는 고유한 역할 임무, 즉
남한운동 지원사업, 해외에서의 조국통일 운동"을 하는 세력이라고 한다. 그때 반미소설『고삐』작가 윤정모가 운동권 월간지 말지 1989년
9월호에 "한청련과 윤한봉을 찾아"란 제목의 탐방기를 기고하였다. 윤정모는 윤한봉의 종씨였으며, 광주사태 직후부터 윤한봉을 서울에서 숨겨주었던
장본인이다.
그런데 그런 운동권 윤정모가 보기에도 1989년의 일부 재미 친북단체들의 친북운동은 우려할만 하였다. 1989년 평양축전 준비를 미주청년 조국통일협의회(약칭, 청협)과 윤한봉의 재미한국청년연합이 공동으로 하고 있었다. 윤정모는 그 평양 발대식 장면을 본 소감을 이렇게 적는다: "나는 용기를 내어 ‘평양 발대식’ 회장에 가보았다. 그곳 참가 청년들은 모두 흥분해 있었고, 오직 북한 자랑 뿐이었다. 나는 남한이 도외시된데 대한 소외감과 해외운동가들이 그렇게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과연 통일운동에 도움이 될까 하는 의구심 때문에 곧 회합장을 나와 버렸다." 그 길로 윤정모는 뉴욕의 한청련을 찾아가 보았는데, 그 강당에서는 여러 청년들이 ‘국제평화행진’과 ‘미주평화행진’용 깃발과 피켓을 만들고 있었다. 행사준비하느라 동분서주하는 윤한봉을 못만난 윤정모는 북한의 지원을 받는다는 단체로부터 숙식 제공 받기가 꺼림칙하여 잠시 거리 구경을 하다가 되돌아왔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한청련센타의 모습은 이러하였다:
아무래도 윤한봉을 놓칠 것같아 나는 다시 한청련센타로 갔다. 청년들은 아예 센터에서 먹고 자면서 잠을 쪼개어 일들을 하고 있었다. 여성들은 행진 기간중 풍물패가 입을 농민복을 만드느라 재봉틀을 돌리고 흰 티샤쓰에 우리나라 지도와 ‘조국은 하나다’라는 글씨를 프린트하고, 또 한쪽에선 거리에서 돌릴 선전문안을 작성했고, 또 한쪽에선 깃발과 걸게 그림을 그리느라 물감을 늘어놓아 발디딜 틈도 없었다. 그때 두명의 젊은 남녀가 들어오더니 서명용지를 챙겨들었다. 한국에서 핵을 몰아내달라는 10만명 서명운동을 전개중인데 그것을 19일부터 도보행진을 해서 27일 워싱턴 DC국회의사당에 전달할 것이라 했다.
그런데, 한국에서 핵을 몰아내달라며 미국에서 시위하고 서명운동까지 하던 운동권이 2002년에는 어떻게 말이 바뀌었던가? 김정일의 핵무기는
우리 꺼니깐 한반도에도 핵무기 있으면 좋다는 논리로 바꾸지 아니하였던가? 북핵에 대한 오늘날의 광주운동권의 입장은 무엇인가? 황석영은
1988년의 그의 기고문 '항쟁 이후의 문학'에서 윤한봉의 반핵운동을 이렇게 추켜세웠다: "미국에서는 광주에서 나와 함께 현대문화연구소를
운영하던 윤한봉이 미주 한청련 조직을 끌고 나가고 있지요. 그는 지금 제3세계 활동가들과 연대하여 반핵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김대중이 2000년 김정일에게 비밀송금한 수억 달러가 핵무기 제작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2002년 가을에 드러났을 때 과연 윤한봉은 북핵
반대운동을 하였으며, 황석영은 윤한봉더러 애국세력의 북핵 반대운동에 동참해 달라는 말을 단 한마디라도 던졌었던가?
그러면 여기서 김일성과 윤한봉 등 1980년의 남북한의 광주사태 주동세력이 1989년 다시 합작하여 벌이고 있던 그들의 새 프로젝트
'국제평화대행진' 시국으로 되돌아가 보자. 1989년 김일성은 한편으로는 광주사태의 주역들이었던 문익환 목사와 서경원과 황석영 등을 북한으로
불러들이면서 한편으로는 윤한봉을 시켜 국제평화대행진을 주최하게 하였다. 그 행사란 평양축전 뒤 남에서는 한라에서 판문점, 북에서는 백두에서
판문점으로 행진하는 것이었으며,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윤한봉의 한총련이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양을 밀입북시켰던 것이었다. 김일성도 대남공작을 위해 종종
종교인들을 사용하였으며, 윤한봉도 종교 보호막을 이용하는데는 전문가였다. 임수경 양 혼자서 남한 대표로. 즉 운동권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입북하는 것이 법적으로도 여론상으로도 어려우며 한국 정부가 내버려 둘리 없으니깐 문규현 신부라는 종교 보호막을 윤한봉이 임수경 양에게 붙여주었던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윤한봉의 한총련이 국제평화대행진 주최측이었으나, 실제로는 김일성이 그 행사의 주최자엿다. 평양이 주최하는 국제평화대행진
행사 논리는 남한에서 미군을 몰아내자는 것이었으며, 그로부터 20 여년이 지난 지금껏 문규현 신부는 그 주한미군철수 논리의 종복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1989년 김일성이 국제평화대행진 행사를 앞두고 북한으로 불러들인 문익환 목사와 서경원과 황석영 모두 남민전 중앙위원이었던 안재구의
동지들이었는데, 바로 그 무렵 김일성은 안재구에게 공작금을 보내어 구국전위 결성에 착수하라는 지령을 보냈다. 전대협이 구국전위보다 몇년 먼저
결성되었음에도 1993년 1월 구국전위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자마자 전대협을 장악하였던 이유는 김일성의 지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전대협 역시 간접적으로든 직접적으로든 김일성 지령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임수경 양이
밀입북하였다. 즉, 임수경 양 개인적으로는 광주운동권 선배들이 시키는대로 밀입북하였던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해 8월의 평양축전에 남한 운동권
대표를 꼭 참석시키려던 김일성의 원격조정이 있었다. 그 후의 법민련 결성을 위해서도 전대협 대표의 방북은 상당히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전대협 대표는 문규현 신부가 아니라, 임수경 양이었지만 한국 정부가 길을 막지 못하도록 문규현 신부를 동행자로 붙여줄 만큼 윤한봉은
평양축전 행사 준비를 위해 전력을 다하였다. 여기서 과연 윤한봉이 누구의 장단에 따라 춤추고 있었던 것이지 그 그림이 보이지 아니하는가.
평양에서 부는 피리 소리에 따라 재일교포들의 주머니를 뜯어내 북한의 대남공작 자금에 사용하던 일본의 조총련의 명분은 통일운동이었다. 바로 그
통일운동이란 명분으로 윤한봉도 재미교포들로부터 모금하여 평양축전 행사 준비 등에 낭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윤한봉은 언제부터 북한 당국과 내통하고 있었던 인물이었는가? 여하튼 윤한봉과 황석영의 동맹관계는 윤한봉의 현대문화연구소의 간사
임영희가 황석영의 극단 '광대'의 단원을 겸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현대문화연구소는 김대중의 국민연합과 동맹으로 전국적 민중봉기
거사 계획을 진행시켰던 단체, 즉 김대중 내란 음모의 몸통이었다. 그런데, 이 단체 간사 임영희가 극단 '광대'의 단원이었다. 극단 광대는
5월 15일부터는 황석영의 동명동 소극장 개관기념 작품 '한씨연대기' 공연을 앞두고 대본연습에 돌입하였다. 17일밤 예비검속이 있자 18일
아침 일찍 임영희는 현대문화연구소에 들어가 불리한 증거물이 될 수 있는 주요서류를 소각하였다 (상게서, p. 222). 임영희가 그 서류들을
소각하지 몇시간 후 광주사태가 터지기 시작한다. 그녀가 그 서류들을 소각하였기에 광주사태의 진실이 밝혀지는데, 무려 3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리게 되었다. 그러나, 5.18측에서 비밀로 하는 그 불리한 증거물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이제 우리는 하나하나 범위를 좁혀갈 수
있다.
광주사태에는 예정된 사건과 예정되지 않은 사건이 있다. 서경원이 운동권 특공대를 동원해 19일 예비군 무기고를 접수하고 무장단체를 구성하는 것이 계획되어 있었으나, 18일 비상계엄이 선포되고 계엄군이 배치됨으로 이틀 지연되었다. 그런데, 18일 아침 황석영의 극단 '광대'의 단원들이 최초의 폭력시위대를 구성하게 되었던 것은 전혀 예정에 없었던 사건이었다. 18일은 일요일이었는데, 왜 운동권이 가방에 돌을 잔뜩 넣어 전남대 정문 앞에 모이게 되었던가? 그들은 황석영의 극단을 위해 '한씨연대기' 공연 연습을 하던 자들이었다. 전남사회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윤상원 평전_들불의 초상』 215쪽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한다:
당시 '동리소극장'의 개설을 위해 개관기념 작품으로 '한씨연대기' 공연을 앞두고 연극연습에 열중해 있던 박효선은 아침을 마치기가 바쁘게 동료들을 만나보기 위해 연극연습장인 YWCA로 향했고, 상원을 제외한 다른 후배들은 전남대 정문으로 떠났다. 만일 비상사태가 발생하게 되면 각 대학 정문 앞에서 오전 10시에 집결해 투쟁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정오에 도청 앞에 집결해 투쟁을 전개하자고 약속되어 있었다.
그들이 떠나자 상원도 서둘러 집을 나와 들불야학의 공동방으로 갔다. 그곳에서 우선 상원은 국민연합 전남지부 결성에 관한 문건들을 소각했다. 평소 박관현의 활동 터전이기도 해서 모든 대외비 자료를 치워두도록 강학들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위에서 YWCA는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광주 YWCA 양서조합이었다. YWCA 는 기독교 단체이지만 양서조합은 남민전 도서 등 이념
서적들만 선정하여 읽는 독서회로서 지하조직이었다. 양서조합이란 명칭은 그 지하써클의 정체를 숨기기 위한 위장명칭이었다. 극단 광대는 양서조합
전용 소회의실 혹은 YWCA 안마당에서 공연 연습을 하였다.
국민연합 공동의장이라는 것 외에는 아직 정당 소속이 없었던 김대중에게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은 그의 대변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
윤상원이 17일 밤 황석영의 극단 광대 단원 박효선과 한 방에 있었다. 분명 그것은 19일로 예정된 무장봉기 거사 준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은 같은 시각에 윤한봉이 그 거사를 준비하고 있던 다른 운동권, 즉 서경원이 광주로 보낸 전남 가농 간부들과 한 방에 있었다는 사실로도
분명히 확인된다. 19일로 예정된 무장봉기 외에도 당시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국민연합 전남지부 결성을 황석영의 동지 윤한봉과 윤상원이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문건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의식화하던 들불야학의 공동방에 있었다. 현대문화연구소 간사 임영희처럼 윤상원도
18일 아침 그 문건들을 소각하였다. 우리는 그날 아침 광주운동권의 어떤 비밀들이 소각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날 아침 10시에
전남대 정문 앞에 모인 최초의 폭력시위대 등 광주사태의 주역들이 황석영의 주변인물들이었음을 위의 자료에서 본다.
『正史 5·18』183쪽도 황석영의 문화패 광대의 성격을 문화운동의 필요성에 따라 윤한봉의 전남민주청년협의회와 현대문화연구소의
문화선전대로 규정한다. 쉽게 말해, 광대는 처음부터 순수 예술이 그 목적이 아니라, 광주운동권 문화선전대의 역할을 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였다. 황석영의 역할이 광주운동권 문화선동이었으며, 광주사태 선동도 황석영의 극단 광대 멤버들이 전적으로 하였던바, 당시 윤상원의
동지이자, 황석영의 극단 단원이었던 박효선은 그의 증언록 '5·18은 영원한 나의 중심화두'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리고 그 5.18의 과정에서는 주로 문화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게 되는 거죠. 문화투쟁 뭐 선전 선동 홍보 이런 일이죠? 그러다가
그 당시 주로 했던 일은 우리 광대의 멤버들이 거의 전부 10여명 정도가 선전 선동 홍보에 팀이 되가지고 그대로 홍보팀 역할을 했었죠."
그러고 그때 당시의 구체적인 일로는 어떤 시민궐기대회, 시민궐기대회가 다섯 차례인가 여섯 차례인가 있었는데 시민궐기대회를 주도를
했고, 가두방송반이라고. (문화투쟁에서 문화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연극 미술 등의 형태를 띠었었나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언론의 역할을
해왔죠. 대자보 벽보를 만든다든가 또 투사회보를 쓰고 밀어서 제작한다든가 그다음에는 가두방송 아나운스먼트 방송 역할을 하는 거지요.
또 어떤 시민들의 궐기대회를 하게 되면은 궐기대회의 어떤 연설문의 작성 나아가서 어떤 연설문을 읽는 것, 일정한 역할을 맡아서, 교사가 되기도 하고 하나의 연극일 수가 있어요. 또 예를 들어서 궐기대회 주변에 플래카드를 건다. 그러면 그 플래카드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하는 것은 미술패들이 그런 작업들을 진행하고, 또 음악적인 조예가 있는 사람은 궐기대회를 하는 과정에서 음악을 계속 사이사이에 대중연설 사이사이에 음악을 노래를 하지요. 그것도 새로운 노래를 개사곡으로 해서 준다든가 이런 일이 있을 수 잇는 거죠.
또 궐기대회를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해갈수록 지루할 수가 있지요. 그러니까 어쩌다 한번은 화형식 전두환 화형식을 한다, 하나의 헤프닝 같이 화형식을 한다든가 뭐 그런거예요.
그런데, 위의 증언에서 "궐기대회 주변에 플래카드를 건다. 그러면 그 플래카드에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하는 것은 미술패들이 그런
작업들을 진행하고" 등은 앞의 윤정모의 기고문이 서술하듯이 1989년 평양축전 및 국제평화대행진 지원행사들을 윤한봉의 한청련이 준비하였을 때의
행사준비 방법과 동일하다. 이처럼 미국에서의 윤한봉의 친북 운동은 광주운동권 시절의 운동 연장선에 있었던 것이다.
'그날의 연극'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박효선은 전옥주와 차명숙의 유언비어 선무방송의 주역도 황석영의 극단 광대였음을 밝히는 증언을 한다:
단원들은 시위에 동참했고 투쟁의 깃발을 높이 들기 시작했다. 수류탄을 품고서 밤을 새워 지하유인물을 밀었고 날이 새면 자전거나 군용지프를 타고 정보에 갈증난 시민들 틈바구니를 누비고 다녔다. 국세청 뜨락을 접수(?)해 플래카드와 피킷을 제작했고 시청과 대학에서 차량을 징발해다 가두선전방송을 하였다.우리들의 투쟁은 시민궐기대회의 운영에서 절정에 달했다. 분수대 단 아래에서 시를 짓고 즉석 연설문구를 작성하던 우리는 혁명적 극작가였다. 단 위에 올라서서 노동자, 농민, 학생, 부인네 역할을 맡아 연설을 하던 단원들은 말 그대로 살아있는 배우요 혁명적 예술가였다.
박효선이 위 증언에서 전옥주와 차명숙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군용지프를 타고 다녔다느니 시청과 대학에서 차량을 징발해다 가두선전방송을
하였다느니 하는 증언을 전옥주의 증언록들과 연결시켜 읽을 때 누가 그녀들을 군용지프에 태우고 유언비어 쪽지들을 주며 가두선전방송을 하게 하였는지
분명해진다.
황석영의 극단 광대가 광주사태 직전에도 당시 빈번했던 집회·시위의 문화선전대 역할을 주도하였던 전문적 선동군 조직이었음을 증언하는 박선출은 그의 증언록 '양심이 무엇이길래'에서 광주사태의 기폭제가 되었던「광대」팀이 광주사태 기간 동안 어떤 역할을 하였었는지를 이렇게 서술한다:
그러던 중「돼지풀이」이후 다음 작품을 준비하던「광대」팀은 광주민중항쟁의 기폭제가 됐던 5월「민주화 성회」를 맞아 공연준비를 중단하고 마침내 5·17 계엄확대 조치가 내려지자 이후 5월 항쟁에 본격적으로 참여케 된다. 당시「광대」회원들이 했던 일은 소식 전단발행(후에「투사회보」로 연결됨), 대자보 부착, 궐기대회 개최 등이 주였으나 항쟁이 격화되면서 투쟁지도부나 무장투쟁조에 들어가기도 했다.
황석영의 극단 「광대」는 광주사태의 기폭제였을 뿐만 아니라, 광주사태 이후에도 계속되는 그의 황동 기반이었음을 그는「창작과
비평」1988년 겨울호에 기고한 "항쟁 이후의 문학"에서 이렇게 증언하다: "83년 봄이었군요, 광주 운암동의 내 집 이층에서 나는 '문화패
광대'의 잔여 활동가들과 '자유광주'라는 방송국을 차렸습니다. 방송국이란 다른 게 아니라 한 달에 한 개씩의 카세트 테이프를 제작해서 배포하는
일이었죠. 그때 세 번째 만든 물건이 항쟁에서 죽은 남녀를 주제로 한 '넋풀이'라는 거였는데 그 주제곡이 '님을 위한 행진곡'이었습니다."
금호문화 1989년 5월호에 실린 '문화에 나타난 5· 18 정신'에서 오창규 민중가요 운동가는 황석영의 "「광대패 」들이 만든 테이프
중 「영혼 결혼식 」에 담긴 「님을 위한 행진곡」 노래는 82년, 83년에 전국 화되면서 전국의 대학생, 농민, 노동운동 쪽에 서 노래 창작
활동이 눈에 띄게 활성화되었습니다"라고 회고하며, 광주운동권의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이 끼친 영향력을 강조한다. 그런데 도대체 광주운동권이
김일성에게 뭐라고 보고하였기에 바로 그 노래가 북한의 5.18 영화 제목으로 선정되고, 김일성이 그 제목과 그 노래대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라고
황석영에게 시켰다는 말인가?
자, 1989년 5월이면 황석영이 북한에서 한창 김일성에게 재롱떨며 북한의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시나리오를 쓰고 있었을
때였다. 위의 금호문화 좌담회에서 황석영의 극단 광대 출신 박효선은 5.18「광대」들의 전통과 정신을 계승하여 1980년대에 등장한 공연물들은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것을 알리는 작품들, 반미 자극화 계열의 작품들, 그리고 통일문제에 관한 작품들이라고 밝힌다. 김일성 역시 바로 그
점을 보았던 것이다. 남한 운동권이 반미 정서를 자극하며 북한의 연방제 적화통일론을 지지하는 작품들을 쏟아내었는데, 그런 연극계의 반미운동의
원조가 황석영의 극단 광대였던 것이다.
황석영이 그의 문화운동의 윗선은 김일성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증언을 한 적이 있었다. 김일성이 독일에서도 윤이상을 시켜 문화운동을
하였는데, 1988년의 광주청문회는 김일성의 그런 문화운동의 한 성과이기도 하였다. 황석영은 위의 기고문에서 그가 북한으로부터 간접적으로 받은
지령을 이렇게 증언한다: "지난 봄에도 윤 선 생이 판문점에서의 평화음악제를 제안한다면서 남한 시인들의 가사로 작곡한 교성곡과 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광주여 영원히」라는 교향곡의 테이프를 주면서 여론을 환기시켜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문익환, 백기완, 고은, 문병란, 김남주 같은 분들의
시를 한 흐름으로 연결한 가사였습니다. 테이프를 여러 개 복사해서 각계에 나누었습니다만, 음악제가 꼭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작정입니다."
이렇듯 김일성은 1989년 평양축전 및 판문점 행사를 1987년부터 이미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 작전이 5.18문화운동 작전이었다.
미국에서는 5.18의 대명사 윤한봉이 문화운동을 하였고, 독일에서 윤이상이 한 문화운동도 광주사태를 주제로 한 교향곡 테이프 제작이었으며, 후에
북한의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주제곡이 될 그 테이프를 황석영은 각계에 대량으로 유포하는 문화운동을 한국에서 하였던 것이다.
위의 기고문에서 황석영은 윤한봉이 미국 12개 도시에 조직한 한청련을 통해서 만난 인물들이 누구였는지를 말한다:
『분단을 넘어서』라는 책도 그때 보았고 북한을 방문한 목사, 교수, 지식인 필자들도 만났지요. 좌우간 전두환 파쇼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그때에 나는 강연을 다니면서 대사관이 그어놓은 선을 넘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우리의 통일운동이 대단원에 이르렀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미국에서는 또 참지 못하고 판을 벌여 문화 패 '비나리'를 조직하고 순회공연을 했지요. 뉴욕 한청련회관에서 한참 연습 중이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찾아왔다는 거였어요. 그는 소련과 한반도 문제의 세계적인 학자인 동경대학 사회과학연구소장 와다 하루끼 교수였습니다. 워싱턴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가 내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지요. 그는 칠십 년대부터 온몸으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밖에서 지원해오던 일한연대위원회의 공동대표였어요. 와다 교수를 통해서 일본의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우리 동포 작가 · 지식인들을 거의 모두 알게 되었던 겁니다. ...북쪽국적을 갖고 있는 작가 (이하 경칭 생략) 이회성이나 김석범이나 시인 김시종이나 또는 전 한민통 기관지의 주필을 지낸 정경모나 그밖에 여러 계층의 동포들을 종횡무진으로 만났습니다.
황석영이 윤한봉의 한청련을 통해 정경모 등 한민통 인물들과 접선할 수 있었다. 이러한 김일성의 귀염둥이 황석영이 일본에서도 문화운동을
하였는데, 황석영은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동경에서 재일 동포 3,4세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문화패 '한우리'를 구성하고 우리문화연구소를
개설했습니다. 이회성, 정경모 선생들이 뒤에서 밀어주었고 일본 지식인들이 도와주었죠. 북한 국적의 작가인 이회성과 남한의 나는 함께 재일 동포
젊은이들과 '통일 굿'을 벌이기로 해서 그가 실행위원장을 맡고 내가 총 연출을 맡았지요." 황석영이 일본에서 우리문화연구소를 개설하였는데,
조총련 산하조직 한민통 인물들이 지원하여 주었다. 자, 황석영이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독일에서도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김일성의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렇듯, 황석영이 1989년 2월 광주청문회가 끝나자마자 갑자기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이 생겼던 것이 아니라, 그가 김일성 왕조
사람들에게 세뇌당하는 과정이 있었다. 황석영은 윤한봉이 주동하는 일이면 뭐든지 주동하였기에 광주사태 선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으며, 미국에서도
윤한봉의 동지로서 운동하다가 친북좌익사상으로만 계속 치우치고 물들고 세뇌되었다. 무엇이 그 귀결이었던가? 극단 광대를 총동원하여 광주사태를
선동하였던 황석영이 북한의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시나리오를 쓴 것이 그 귀결이었다.
[사진설명] 1989년 북한의 5.18 영화 '님을 위한
교향시'
시나리오를 쓰고 김일성 상을 받은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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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은 아래 목차 중 <I. D. 광주사태 선동한 황석영의 극단 광대>입니다.
윤한봉이 회고록에 남긴 5·18 비밀열쇠
I. 1980년 봄 광주운동의 두 주체
A. 윤한봉과 탈북자 회고록의 일치점
B. 서
울대 대자보에 박힌 북한말
구호
C. 광주사태 주동세력 광주운동권
D. 광
주사태 선동한 황석영의 극단
광대
E. 광주사태 배후세력 남민전
1.
한명숙의
용공서클과 간첩 서경원
F. 광주사태 지원세력 북한군
II. 김대중의 내란으로서의 광주사태
A. 김대중과
광주운동권의 폭력시위 동맹
B. 김대중의 홍위병과 유언비어 대자보
C. 무장봉기 기획한 5.18 비밀문서
D. 김대중의 예비내각 명단
E.
무기탈취 특공대 중의 김대중의 사조직
III. 도시 게릴라 전으로서의 광주사태
A. 19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무장봉기
B.
무기탈취 이전의 도시 게릴라전 무기들
C. 경찰저지선 돌파를 위한 도시 게릴라 전술
D. 폭동강령 유인물과 북한군의 교란작전
E. 20일 등장한 정체불명의 무장단체
IV. 통일운동으로서의 광주사태
A. 5·18 광주의 영웅과 만난 문익환
목사
B. 북한에 먼저 알려진 무장봉기 음모
C. 주
객이 전도된 광주방송과
평양방송
D. 시민군 도청 점거의 상징적 의미
E.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광주사태
☞ 보름 앞으로 성큼
다가온
광주사태 30주년
광주사태
주동자들의 친미
유언비어와 반미 행동
MBC 방송국
전소시킨후
TV 본 5.18 치매증
광주사태 연구사료
북한군은 잠수함 타고 광주에 침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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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광주사태에 대한 귀순용사 '임천용님'의 생생한 증언이 인터넷에 많이 올라와 있더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북한과 간첩단과 친북세력이 주도해서 광주사태를 일으킨 사실에 대하여는 http://www.facebook.com/media/set/?set=a.226095900736993.67888.100000097536812&type=1&l=af972f6020 에서도 한 눈에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