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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12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콜로 3,12-17
복 음 : 루카 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새 사람의 삶
-사랑하라, 그리고 또 사랑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늘 새롭게 깨닫고 확인하는 사실입니다. 평생 공부가 사랑 공부입니다.
사람-사랑-삶, 말마디들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랑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3-4개월 참 치열히 하늘 사랑으로 청초히 피어났던 수도원 가난한 뜨락 달맞이꽃밭도
어제 말끔히 정리되었습니다.
‘아, 사랑도 때가 있구나, 죽으면 사랑도 끝이구나!
죽는 그날까지 사랑하다 깨끗이 사라지는 삶이 참 아름다운 사랑이겠다!‘
저절로 나온 말이었습니다. 지날 때 마다 자주 눈길 가는 텅 빈 달맞이꽃 밭입니다.
늙어 베어지는 그날 까지 치열히 피어났던 청초한 사랑! 달맞이꽃이었습니다.
달맞이꽃을 그리며 다시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날마다
이른 새벽 잠깨어 일어나면
맨 먼저 인사 나누는 야생화 달맞이꽃이다.
보라!
하느님 친히 가꾸시고 돌보시는
무수히 피어나는
수도원 가난한 뜨락
야생화 달맞이꽃들
‘더불어의 여정’이다
하느님만 찾는 구도자의 모범이다
참
놀랍다
반갑다
고맙다
새롭다
애오라지 일편단심
한결같은
하늘 향한 샛노란 사랑이다
땅에 깊이 내린 뿌리와 꽃대는
참 질기고 억세고 단단하다
한낮의 불볕더위 견뎌내며
벌써 3개월째
여름 한 철 내내
끊임없이 폈다지며
하늘 향해 오르는 야생화 야생화 달맞이꽃대!
지칠 줄 모르는 열정
파스카의 꽃
야생화 달맞이꽃들
낮에는 죽은 듯 보이지 않다가
밤새 활짝 깨어 피어나
어둔 밤
환히 밝히는
님맞이 야생화 달맞이꽃들
갈수록 더해지는
청초한 아름다움에 그윽한 향기다
늘 날마다
아침까지 계속되는
황홀한 축제의 여름밤이다.“-2019.8.20
참으로 살아있는 동안 치열히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줬던 달맞이꽃입니다.
사랑해도 짧기만 한 삶, 미워하며 원망하며 절망하며 걱정하며 불평하며 살기에는 너무 억울하고 허망합니다.
하여 제가 내심 작정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문자 메시지든, 편지 등 시작할 때는 반드시 ‘사랑하는---’ 말마디를 붙이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랑하는---’이란 말마디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일단 용기를 내어 고백하고 던져놓고 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사랑에 매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도 몸도 사랑 따라 가기 마련일 거란 믿음이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랑은 순수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오늘 제1독서 콜로새서 말씀과 루카복음 말씀이 완전히 말씀의 보석 창고 같습니다.
무수히 반짝이는 말씀 보석들로 가득차 있어 어느 하나 생략하기가 너무 아깝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성을 띠는 살아 있는 말씀들입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주님의 단호한 명령입니다. 내 눈에 원수지 하느님 눈엔 사랑하는 자녀일 수 있습니다.
원수에게도 남모르는 피치 못할 사연이 있을 것입니다.
남을 심판하지 말아야 하는 것 역시 각자 사람마다 특수한 사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자기를 알면 알수록 절대로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 해주고,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해 주며,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들 역시 무지에 눈멀어 있거나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내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내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고,
달라는 자에게 주고, 내 것을 가져간 자에게는 되찾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실천의 동사입니다.
참으로 악을 무장해제 시켜 무력화無力化시키는 것도 사랑뿐입니다.
그러니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원수가 아니라도 못마땅한 모든 이들을 연민의 자비로운 마음으로 잘 대해 주고,
인격으로 존중하고 잘 되기를 바라며 또 잘 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모두가 나름대로 말 못할 사정에 무거운 인생 짐을 지고 힘겹게 분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짐을 덜어주지는 못할망정 짐이 되지 않는 사랑이, 할 수 있다면 짐을 덜어주는 실제적 사랑이 참 절실합니다.
사랑은 비상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일상에서의 실천입니다.
못마땅한 모든 이들에게 선으로 잘해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받을 상이 클 것이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을 심판하지도 단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부단히 용서하고 내어 주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마침내 오늘 복음의 결론이자 우리 모두에게 부여되는 예수님의 평생과제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어떻게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까? 어떻게 항구한 사랑,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의 사도, 바오로가 콜로새서에서 명쾌한 답을 줍니다. 구구절절 보석 같은 말씀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의 신원은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1. 동정과 2. 호의와 3. 겸손과 4. 온유와 5. 인내를 입는 것입니다.
앞서의 우리 마음 안 현세적인 것들인
1. 불륜, 2. 더러움, 3. 욕정, 4. 나쁜 욕망, 5. 탐욕과는 정반대입니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참아주고 서로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입는 것입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어주는 끈입니다.
이어 그리스도의 평화가 우리 마음을 다스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평화를 누리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더불어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풍성히 머무르게 하는 것입니다.
아, 이 모두가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무엇보다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감사야 말로 믿는 이들의 핵심적 덕목입니다.
감사함이 바로 겸손입니다. 감사할 때 저절로 샘솟는 사랑입니다.
그러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느님께 시편과 찬미가를 불러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한풀이 노래가 아니라 하느님께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 노래에서 샘솟는
생명과 빛, 기쁨과 평화, 위로와 치유, 정화淨化와 성화聖化입니다.
더욱 주님 사랑을 닮아가게 되니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시편 노래도 없습니다.
그러니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하여 우리는 지금 그분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사랑의 성체가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사랑의 실천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이런 고마운 주님께 우리가 드릴 응답은 화답송 후렴처럼 사랑의 찬양뿐입니다.
“숨 쉬는 것 모두 다 주님을 찬양하라.”(시편150,6ㄱ).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형제님으로부터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부님, 사실 제가 성령 기도회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언젠가 성령 기도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아픈 사람들도 참 많았는데, 사람들이 눈물을 펑펑 쏟아내면서
이상한 말을 외치는 모습이 제게는 큰 충격이었지요.
이 모습을 본 뒤로는 무섭다는 생각도 들고, 나하고는 맞지 않는다면서 피했습니다.
그런데 제 아들이 희소병에 걸렸습니다. 어느 병원에 가도 뾰족한 해결책이 없는 것입니다.
그 순간 성령 기도회가 생각났어요. 그러면서
‘그분들이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정말로 치유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 기도회에 왔던 것이구나.’ 싶더군요.”
그리고 계속 말씀하십니다.
“간절한 마음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성령 기도회를 이상하게 보았던 것은 제가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안에는 다양한 기도 방법이 있지요.
성령 기도회 역시 다양한 기도 방법의 하나로 너무나 좋은 기도입니다.
따라서 ‘맞다’, ‘맞지 않는다’가 아니라, 이 역시 주님 앞에 나아가는 훌륭한 기도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절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비친 이상함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주특기는 ‘사람의 간절함 파악하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믿음만을 보고 치유해주시고 여기에 더 나아가 영적 무장까지 시켜주시지 않습니까?
우리 역시 주님을 따라 이웃의 간절함을 보는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보통 일반적으로 말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세상의 눈으로는 말도 안 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 모범으로 십자가에서 당신을 중상하는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사회가 점점 험악해지면서 끔찍한 범죄들이 등장하곤 합니다.
그 죄는 자기 관점에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면서,
그 범인을 몽둥이로 직접 처벌한다면 어떨까요? 법적 처벌을 받아서 교도소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자격도 없으면서 이웃을 정죄하면, 정죄 받는 것은 그대 자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심판의 영역이 우리의 영역이 아님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역할은 사랑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 세상은 그 보상을 해 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더 크신 주님께서 대신 보상을 해 주신다고 합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죄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주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담아봅니다.
주님의 말씀은 단순히 좋은 말씀이 아니라 내가 행할 때 살아있고 힘 있는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무리 살아있는 말씀이라 하더라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서운함이 있다면 이 말씀을 되새기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발 더 나가십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충고를 듣는 것도 힘이 든데 누가 나의 뺨을 때린다면 어떻게 반응할까?
나도 상대방을 한 방 먹여야 속이 후련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뺨을 내주라고 하십니다.
겉옷뿐만이 아니라 속옷까지 내주라고 하십니다. 간 쓸개 다 빼주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그렇게 행하는 사람입니다.
당시 겉옷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사막지역에서 겉옷은 낮에는 천막이요, 밤에는 이불입니다.
그래서 겉옷을 담보로 잡았다 해도, 해가 지기 전에는 돌려줘야 하는 법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속옷까지 내주라 하시니 한마디로 상대방을 위해 간, 쓸개 다 빼주고 덤까지 주라는 말씀입니다.
상대를 위한 희생과 사랑을 다하기 위해 나를 포기하라는 요구입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하나가 되면 가능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면’가능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내 안에서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해도 해도 다할 수 없는 사랑의 의무에 충실하기를 희망합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않고 베풀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을 추슬러서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가는 징검다리여야 합니다. 사랑은 한 결 같이 주고 용서합니다.
사랑은 분별없이 마구 퍼주고 철없는 탕아처럼 다 내주고도 너무 적게 준 것이 아닌지 걱정합니다.
“성인은 착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착하지 않은 사람 또한 선하게 대하니
덕(德)이 오직 선하기 때문”(노자)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랑일 뿐, 상대에 따라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자체가 보상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가슴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 사랑이 생겨나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하느님 사랑이 자라납니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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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마음은 유리판과 같다.
쉽게 금이 가고 쉽게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되기도 하지만
어느 한 부분만 충격을 받아도 전체가 금이 가거나 깨지기에 그렇게 비유한다. -익명-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감싸는 큰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기를 기도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텔레비전을 바꾸면서 전선 정리를 했습니다.
10년이 넘게 있었던 전선은 뽀얀 먼지가 가득했고, 선들은 엉켜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비디오, 인터넷, 케이블 수신기 등의 전선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습니다.
먼지를 털고 모든 선을 깔끔하게 정리하니 보기에도 좋았습니다. 교통정리를 한 느낌이었습니다.
꽉 막히는 도로에 교통경찰이 수신호로 정리하면 금세 교통의 흐름이 원활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을 정리해 주십니다.
내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거래하듯이 선행을 베풀지만,
빛의 자녀들은 손해를 볼지라도 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십니다.
겉옷을 달라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십니다.
학대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니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전선을 정리하면서 필요 없는 것들은 모두 버렸습니다.
아깝다고 필요 없는 선들을 남겨놓아서는 정리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비디오와 연결된 선을 모두 치웠고, 영상과 소리를 전달하는 선도 다 치웠습니다.
요즘 나오는 텔레비전은 그런 선들이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추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을 다스리게 하십시오.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이나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면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교회는 2000년 역사를 거치면서 교회 내부와 외부에서 거센 도전을 받았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한 적이 있었고,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기준으로 교회가 흘러간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교회는 내부에서 바람이 불었습니다. 그것은 깊은 산중에서 기도하던 수도자들의 힘이었습니다.
수도자들로부터 기도의 바람이 불었고, 영성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아빌라의 데레사,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같은 성인들은
정체된 교회, 꽉 막힌 교회에 기도의 바람이 불게 하였습니다. 가난과 비움의 영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교회는 막힌 혈관을 뚫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개혁의 바람, 영성의 바람, 성령의 바람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피가 흘러야 합니다. 기도의 바람, 영성의 바람, 나눔의 바람은 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살아있는 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가야 할 길을 명확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운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너희가 되질하는 만큼 그대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 36)
한상우 바오로 신부
하느님의
자비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삶인 자비의 삶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하느님 말씀을 듣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원수까지 사랑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줍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해줍니다.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악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 줍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하지 않습니다.
자비는
우리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길입니다.
자비가 있습니다.
자비를 따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교만은 겸손과 사랑이 결핍된 지식
전삼용 요셉 신부
1999년에 개봉된 ‘매트릭스’란 영화에서 주인공 네오(키아누 리브스)가
이 세상이 현실이 아니라 가상이고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의 스승 모피어스로부터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 세계가 꿈인 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러나 결코 스승 모피어스를 이길 수 없습니다.
네오는 그것이 모피어스의 힘과 민첩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숨을 헐떡입니다. 그때 모피어스가 말합니다.
“내가 빠르거나 힘이 센 게 내 근육 탓일까?
여기서? (꿈속에서 어떻게 숨이 찰 수 있느냐는 질문)
네가 지금 공기를 마신다고 생각해? 다시 해봐!
생각하지 말고 인식을 해! (여기가 꿈이란 현실을 믿으라는 것).”
그때야 네오는 무언가를 깨닫습니다.
자신이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 가상일뿐이라고 믿고는 있지만
아니 믿고 싶지만 지금까지의 삶에서 배운 지식들 때문에,
즉, 자신은 저렇게 힘이 세고 빠른 사람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
사람이 새처럼 절대 날 수 없다는 것,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어야 한다는 것 등이 자신을 사로잡아
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피어스는 계속 말합니다.
“그래. 네 마음을 풀어주는 거야. 나는 문까지만 안내할 수 있지.
그 문을 나가는 건 네가 직접 해야 돼. 모든 걸 버려. 두려움. 의심. 불신까지. 마음을 열어.”
우리가 하느님께 가기 위해서 모든 지식이 유용한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지식은 오히려 우리가 깨어나는데 방해가 됩니다. 그 지식의 노예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도 신학을 공부하면서 어느 샌가 기쁨을 잃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지식이 쌓이면 그분을 더 알게 되어 행복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무언가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지식이 쌓일수록 교만해져 동시에 내가 배운 지식을 뽐내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식이 나 자신을 높이는 도구가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바로오 사도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신학도 잘못 공부하면 믿음을 잃게 만든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공부가 자신의 ‘겸손과 사랑’을 증가시키지 않으면 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교만은 사랑의 반대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참다운 가치는 하느님뿐이고 하느님께 가는 길은 겸손과 사랑뿐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넘지 못하는 위대한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이
‘신학대전’을 끝마쳐갈 무렵 하느님을 체험하고는 자신이 쓰고 있는 신학대전이
‘지푸라기’와 같은 쓰레기였다며 바로 집필을 멈추고 미완성으로 남겨놓게 된 것입니다.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식은 쌓일수록 자신을 겸손하게 해야 되는 것입니다.
코린토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게 된 이들이 자신들의 지식을 남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지 말라는 구약의 계명이 지금의 시대에 와서는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들을 먹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바오로는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정말로 그렇게 알고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럽혀집니다.”
아무리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을 꺼리는 것입니다.
그런 이들을 조롱이라도 하듯 자신들의 지식을 뽐내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짓게 하지 않도록 차라리 고기를 영영 먹지 않겠습니다.”
비록 죄가 아닐지라도 이웃과 약자들에 대한 배려 없이
자신의 지식만 믿고 살아가는 이들은 오히려 죄를 짓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뱀이 먹으면 독이 되고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됩니다.
그 사람의 본질은 지식이 아니라 겸손과 사랑이 만드는 것입니다.
잔소리는 옳은 말을 기분 나쁘게 하는 것이랍니다.
아무리 옳은 지식이라도 사랑이 결핍되어 있으면 잔소리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서울 도심에서 오토바이를 훔쳐 달아나다 잡힌 1년 새 14건의 절도를 했던 A양(16세)은
당연히 소년보호시설에 들어가야만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서울가정법원 김귀옥 부장판사는 다정한 소리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라는 말만 재판정에서 A양에게 외치도록 부탁했습니다.
그 아이가 처음에는 아무 말도 못 하다가
결국 이 말을 다 마쳤을 때 모든 사람들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그렇게 된 이유는
그 전년도에 아이들로부터 집단적으로 폭행을 당했었기 때문입니다.
법이 아닌 사랑을 지녔던 판사는 법대로만 하려고 하는 이들보다
법의 참다운 의미를 깨달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모든 지식을 완성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식을 쌓아가면서도 결코 그것에 겸손과 사랑이 결핍되어 있으면
교만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하느님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이름 모르는 풀벌레 소리에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맑은 하늘을 가르며 노래하는 새들이 마음을 맑게 한다.
어미 입에 물려 들려가는 새끼 고양이는 집에 가면 야단을 맞을 것 같다.
지붕이 뚫어질 것처럼 내리는 빗소리와 어두운 방을 순간 환하게 만드는 번개는
나를 놀라게 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한다.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밝은 보름달은 낭만을 선물한다.
이 모두가 참 좋으신 우리 하느님 작품들이다.
한 사람의 완전한 내어줌과 희생 이야기는 언제나 깊은 감동을 준다.
그것이 지어낸 이야기여도 그렇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나무’는 그에게 마지막에는 앉아 쉴 수 있는 자리까지 되어 주고,
‘키다리 아저씨’는 언제나 늘 그렇게 그 자리에서 드러나지 않게 그를 도와준다.
‘워낭소리’의 그 듬직한 늙은 소는 마지막으로 주인이 추운 겨울을 날 땔감을 한 가득 해 놓고서
비로소 그 코뚜레를 풀고 눈을 감았다.
어머니란 말만 들어도 숙연해지고 그립고 눈물 난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의 생애가 아니라
참으로 사랑했던 사람들의 작은 이야기들이다.
우리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자연에서 느끼는 평화와 경외심, 남모르는 희생과 사랑 이야기에서 받는 깊은 감동
모두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의 희생으로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보여주셨다.
아무런 보답을 바라지 않고 내어주시고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 하느님이시라고 알려주셨다.
그리고 우리도 그렇게 되라고 하셨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루카 6,28)고 하셨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그러고 싶지 않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아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인가?
하느님 나라는 이곳저곳에 보이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곳은 참 좋으신 하느님이 다스리시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다.
비폭력, 보답을 바라지 않는 베풀음, 차별하지 않는 사랑,
원수를 용서함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낸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기에(루카 6,36) 완전하시고(마태 5,48) 거룩하시다(레위 11,44.45).
우리 하느님은 우리도 당신처럼 자비로워서 완전해지고 거룩해지기를 바라신다.
이 불가능한 사랑에 도전하는 것은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해 되어주어 커진 나의 되에
하느님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 나에게만 주실 그 선물을 기대하고
또 그리해주시리라 믿기 때문이다.(루카 6,38)
예수님,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지요?
저는 할 수 없지만 제 안에 계신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죄인이지만 주님을 따라 주님의 나라로 들어갑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하느님께 불가능이란 없음을 듣고 믿으셨으니 저에게도 그 믿음을 얻어 주소서. 아멘.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박 마리피앗 수녀
무슨 일이든 할 때 기준이 있으면 쉽다.
대부분의 경우
오늘 말씀에 사랑의 기준?, 경계?, 한계? 를 보여 주신다.
그런데 쉽거나 편하지 않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기준이시다
하느님의 자비만큼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 요구하신다.
그분의 사랑 안에 사는 자
그분의 자비를 맛보고 살아가는 자의 몫
부담스럽지만
살아내고 싶다
"그 느낌 아니까~"
출처 : ‘한모금’ /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 수녀원)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