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람쥐의 눈빛
최중수
앞 산을 오르다 길섶의 간이 의자에 앉는다. 바위에 앉은 다람쥐와 눈이 마주친다. 두 발로 도토리 한 개를 든 채 바라보는 눈빛이 애증으로 느껴진다. ‘당신은 우리의 식량을 앗아간 파렴치범이지.’ 이런 원성이 들려온다.
달포 전인 10월 중순 어느 날, 두툼한 비닐봉지를 들고 내려오는 아주머니와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떨어진 도토리’라 했다. 알차게 영근 놈은 떠나야 할 계절에 다 떨어졌을 것이다. 잔병치레를 많이 한 늦둥이처럼 마지막에 낙하를 서둔 것 같았다.
부실한 영양으로 제 때에 여물지 못해 외롭게 남았다가 바람의 힘에 의지했을까. 익으면 떨어지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 자연에 대한 순응이다. 끝까지 자리를 지킨 열매는 어딘가 부실한 데가 있다. 과일도 끝물이면 상품성이 떨어져 체 값을 받지 못 받는다. 그래도 농부들은 한 해 동안 흘린 땀의 대가라 빠짐없이 거둔다.
일전에 도토리를 주워 본 적이 있다. 도토리 묵에다 밥, 부침개, 국수 등 갖가지 요리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구미를 당기게 했던 강원도 산촌이 그리웠다. 하기야 식당에 가면 도토리묵 맛쯤은 어렵잖게 볼 수 있다. 먹어봐야 그저 그렇다.
소유의 기쁨이란 게 다 그렇지만 맛보다 줍는 재미가 그만이다. 낙엽 위에 떨어진 도토리를 한 두 개씩 주워들었다. 거래대금으로 빈 주머니를 채우는 상인들의 즐거움도 이와 같은 기부일게다. 낚시터에서 부지런히 물고기를 낚아 올릴 때나, 산야에서 나물을 채취했을 때의 기쁨도 이랬다. 낙엽 속까지 헤집어 떨어진 도토리를 집어들 때마다 저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가치의 있고, 없음을 따질 필요는 없다. 찾고 싶은 걸 찾아 들 땐 작아도 기분이 좋았다.
나무의 생육 정도에 따라 도토리는 튼실하거나 빈약하게 여문다. 때가 되면 미련없이 떨어진다. 다람쥐가 와서 먹어주고, 벌레의 밥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까지 별미를 즐기겠다면서 덤벼든다.
숱한 눈을 피해 제자리에 남은 도토리는 낙엽더미 속에 숨어서 새싹을 틔워낸다. 노목은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 생애를 마무리한다. 더러는 병충해로 살 만한 나이에 고사되기도 한다. 새싹은 자라서 그 빈자리를 메운다. 조손(祖孫)으로 대를 이어가는 인간사와 다를바 없다.
볼품 없는 도토리는 다람쥐와 벌레, 그리고 사람에게까지 먹을거리로 제공돼 흔적없이 사라진다. 귀한 대접을 받는 알밤에 비하면 도토리에 주는 정은 보잘 것 없다. 그래도 어김없이 열매를 맺어 열매를 맺어 멸종위기를 피해가는 생명력에 용기를 얻는다.
3일 동안 앞산을 헤멘 끝에 손에 들어온 도토리는 반 됫박쯤 되었다. 비닐 봉지에 담아 햇볕이 드는 탁자 위에 놓아 두었다. 단단한 껍질을 뚫고 벌레가 나왔다. 꼬물거리며 거실을 기어다니는 놈을 봐라보니 죄책감이 느껴졌다. 놈의 밥그릇을 넘보았기 때문이다. 벌레는 다람쥐와 사람을 원망햇을지도 모른다.
대자연 속에 살아가는 생명체는 모두 귀한 존재이다. 지구촌을 지키는 가족 중엔 각종 오염 물질로 멸종돼가는 친구는 많다. 앞으로는 계속되는 생태계 파괴로 엄청난 비극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원인을 제공했다면 후유증을 말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람쥐와 벌레에게 도토리는 없어서는 안 될 주식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별식에 불과하다. 주식은 생사를 좌우하지만 별식은 식욕 충족에 그친다.
밥그릇 쟁탈전의 현장은 냉혹하다. 인간사나 동물계 모두 다를 바 없다. 백설로 뒤덮인 산야에서 허기에 지쳐 떨고 있는 짐승을 바라보면 동정시이 인다. 시련을 견뎌내며 살아남는다는 건 이만큼 힘겹다. 부여받은 삶도 마찬가지이다. 승리했을 때의 뿌듯한 감회만은 쉽게 잇지 못한다. 이런 환희 때문에 어떤 고통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모든 성취에는 때가 있다. 시기를 놓치면 몇 배나 힘이 든다. 도토리 줍기에 관심이 있었다면, 제철에 남보다 먼저 나서야 했다. 준비성이 있는 사람들은 벌써 도토리 줍기를 끝냈다. 때늦은 시기에 불쑥 나선 발길로는 어떤 일도 이루기 힘들다.
농사와 제조업 모두 다를 바 없다. 남들따라 하다 보면 과잉생산이 된다. 빚만 진 채 헛수고로 끝나기 쉽다. 남들이 해서 재미봤다는 사업으로 성공하기 어렵다. 다람쥐도 월동 준비쯤을 하는 걸로 안다.
동짓달 친지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다. 포크레인으로 얼어붙은 땅을 팠다. 돌 틈 사이로 도토리가 쏟아져 나왔다. 부지런한 다람쥐가 준비해 놓은 겨울 양식이었다. 알뜰한 농부의 곳간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푸근했다.
날개를 달아주고 재빠른 동작으로 살아남게 해 준 창조주의 배려가 고맙다. 깊은 산속 양육강식의 세계, 이곳에 귀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바위에 앉아 도토릴ㄹ 씹으며 바라보는 다람쥐의 눈빛이 다시 망막에 떠오른다. 강하게 느껴지던 생명력을 가슴속 깊이 간직해보고 싶다. 느슨해진 삶에 활력소가 될 것 같아서다.
비닐 봉지에 보관하던 도토리를 배낭에 넣었다. 어느 날과 다름없이 칼바람을 헤치며 앞산으로 향했다. 도토리나무 밑에 흝어 놓았다. 잠시 후 다람쥐들이 몰려들어 시장기를 해결할 것이다. 혼란스럽던 마음이 편안해진다. 까치밥을 남겨 놓았던 마음의 여유, 혹한을 넘겨야 할 산짐승의 굶주림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다.
(최중수의 제 3 수필집, ‘모정으로 피는 꽃’에서)
나는 그의 제 3 수필집을 읽으면서, 강석호의 평글을 떠올렸다. 강석호는 ‘지적 감동’이 부족하다고 했다. 작가는 그때의 평글을 기억하는지는 몰라도, 제 3 수필집의 글은 지적으로 접근하는 글들이 많았다. 위에 전 편을 소개한 ‘다람쥐의 눈빛’에도 지적 내용을 소개한 부분이 많다.(이건 순전히 나의 의견이지만, 작가가 내세우는 지적 내용은 조금 줄여도 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만큼 최중수의 수필이 성숙하였음을 보여준다. ‘다람쥐의 눈빛’에서도, 사람들은 심심풀이로 주워온 도토리에서 벌레가 기어나오는 것을 보고, ‘아 하, 이건 벌레들의 주식이구나. 라고 느꼈다는 것은 얼마나 수필다운 발상인가.
나는, 수필쓰기에서 나만의 의식세계를 표현해야 좋은 수필이라고 강조한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토리는 다람쥐의 밥이다. 사람들이 도토리를 주워 감으로 다람쥐의 식량을 뻬앗는 것이다. 그런 글도 보았다. 그러나 최중수는 벌레가 기어나오는 것을 보고, 아하, 벌레의 양식으로 알고, 도토리를 다시 제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얼마나 재미 있는 내용인가. 나는 이런 것이야말로 자기만의(작가의) 사유세계이다. 이것이 바로 작가의 수필세계인 것이다.
네 번 째 수필집은 3년 뒤에 나왔다. 그가 인생의 후반기는 글쓰기에 전념하겠다고 하였으니, 회고조의 서정성 짙은 글에서는 많이 탈피하였다는 생각이다. 변해버린 사회상을 다룬 것이 많았다. 글쓰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어떤 대상이 작가의 시선에서 정상적이지 않는 모습일 때이다. 정말 비정상적일 때가 많지만, 더러는 작가가 바뀌어가는 세상 분위기를 내가 따라가지 못해서 일 때도 있다.
최중수의 글에는 그런 점도 다분히 있다. 그러나 노인들이 보기에도 이건 아닌데, 싶은 사회 분위기도 많다. 이번 수필집에는 그런 내용을 다룬 것이 많다. 노인들이 다룬 글을 두고 젊은이들이 ’꼰대‘라며 비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시각에서 글을 써야 한다고 믿는다.
이 수필집의 특징을 꼽으라면, 가까운 사람들이 멀리 떠나갔다는 내용이 많다. 내 몸의 여기저기가 삐거덕거린다는 내용도 많다. 나이가 들어가면 노인이 되고, 노인이 되면 몸으 여기저기에 탈이 나는 것은 정상이다. 정상이더라도 본인이 비정상으로 받아들이면 비정상이 된다. 최중수의 글에는 정상으로도, 비정상으로도 다루지 않았다. 담담하면서, 우리들 보통 사람처럼 걱정도 담고 있다.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유년시절의 시골 이야기도 나온다.
최중수는 수필집의 앞 머리에 이런 글을 올려놓았다.
“재직 시에는 퇴임하면 고향에 가서 노년을 보내려 했다. 하지만 그리워했던 고향엔 반겨줄 사람이 없다. 언덕길을 지켜주던 노송마저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건너 마을의 재궁(齋宮)에서 들려오던 수탉 소리도 들을 길이 없었다. 젊은이들은 살길을 찾아 떠났고 어른들은 저승객이 되었다. 봄이면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던 앞산 정상으로는 도로가 개설되어 자동차가 꼬리를 문다. 낯선 노친 몇 분이 지키는 설렁한 유년의 땅, 잃어버린 고향이라 혀를 차며 발길을 돌린다.”
이 수필집에는 (대구의)앞산을 오르는 이야기가 유난히 많다.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의 사회 분위기도 많이 다루었다. 나는 그가 쓴 이 글을 여기에 가져오면서, 최중수의 마음 밑바닥을 흐르는 향수 심리라고 읽었다. 고향은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사라진 고향은 마음 속에서 머물고 있다. 이와 같은 향수 심리는 그의 수필의 기저를 이룬다고 말하였다. 그의 마음 안속에 침잠되어 있는 향수 심리는 대명동 5동의 집과 앞산으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대명 5동의 집은 다시 아들 내외로, 손자손녀로 대치되었을 뿐이다.
대명동에서 현재의 삶을 꾸려가면서, 안동이 아닌 대구에서 겪는 여러 사회현상이 그에게는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 앞산, 자기의 가족, 그리고 대구의 거리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이 그의 글을 통하여 나타난다. 우리는 최중수의 글을 읽으면서 이러한 그의 주변 분위기도 함께 읽어야 할 것이다.
이번 수필집에는 몸이 아픈 이야기, 병원을 찾아다닌 이야기, 등등이 많았다. 노년이 되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다. 사람들의 인간살이를 보는 것 같았다.
또 하나는, ’바보네 골방‘에서, 그는 쓰지 않고는 못 베기는 자신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마음으로 글을 쓰는 것은 아마도 대구의 문인들 대부분의 심경일 것이다. 최중수는 돈을 위해서도 아니고, 의무감에서도 아니고, 오로지 쓰고 싶은 욕망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런 자기를 바보라고 했다. 물론 나는 바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가 문학상을 이야기하면서, 글쓰기보다는 몸으로 설치면서 얼굴 알리기에 더 부지런한 사람에게 돌아가니 ------. 글은 쓰지 않고 감투만을 쫓아 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내가 최중수의 수필세계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조용하게 글만 쓰니 대구의 문인들이 수필집을 8권이나 낸 수필가에게 너무 무관심하다는 생각에서 이다.
첫댓글 최중수 수필가에게도 대구문학상을 수여하자...
묵묵히 쓰기만을 고집하는 욕심없는 그에게 그리고...
대구를 무진장 사랑하는 그에게, 문학만을 위해 문학을 하는 그에게... ^^*...
모든 문학상이 뒷말을 남기는 것은---, 그렇다고 예술작품을 수능시험 점수 매기듯이 할 수는 없고, 어떤 작품이라도 심사의원으 시선에서 뽑는다면, 시비를 걸 수는 없습니다.
문학상 이전에, 다른 사람의 작품도 읽어주었으면 합니다. 문인들이 작품제작에만 열심이고, 타인의 작품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더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최중수의 글도 많이 읽어주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