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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11년(1633년) 7월 17일, 한여름 밤의 적막을 찢고 솟구친 섬광은 이승의 빛이 아니었다.
한양 도성의 하늘을 덮은 시커먼 먹구름 사이로 푸른빛 뇌화가 뱀처럼 똬리를 틀더니, 곧이어 천지를 뒤흔드는 거대한 굉음이 법궁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쾅— 쿠구구궁!
지축이 울부짖으며 들썩였고 궁궐 처마의 용마루와 기와들이 산산이 부서져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침소에서 경악하여 털고 일어난 임금 인조는 핏기가 가신 창백한 낯빛으로 황망히 전각 밖으로 뛰쳐나왔다.
내시와 상궁들이 혼비백산하여 울부짖으며 왕의 주위를 에워쌌고, 대궐 안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수라장으로 변했다. 화약내가 진동하는 연기 속에서 드러난 참상은 참혹했다.
벼락이 떨어진 자리는 인적이 드문 야산이나 궁궐 뒤뜰의 수목이 아니었다. 임금이 백관의 하례를 받고 나라의 정무를 논하는 가장 신성하고 엄숙한 공간, 바로 법궁 정전의 대전(大殿) 한복판이었다.
문과 기둥인 주달(柱闥)은 새까맣게 타들어가 흉측한 숯검정이 되어 있었다.
"이, 이것이 정녕 무슨 하늘의 징조란 말인가……!"
인조는 무너져 내리려는 다리를 겨우 부여잡으며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것은 우연히 지나가던 뇌우가 빚어낸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하늘이 묵직한 분노로 내리친 서슬 퍼런 채찍질이었으며, 무능과 나태에 젖은 군신(君臣)을 향한 황천(皇天)의 준엄한 포효처럼 여겨졌다.
불과 십여 년 전, 광해군의 폭정을 몰아내고 종사를 바로 세우겠다며 결행했던 인조반정(1623년)은 백성들에게 요순의 태평성대를 열어줄 성스러운 개혁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쟁취한 권력의 향락은 달콤했고 썩어 문드러지는 속도는 빨랐다. 반정의 일등공신들은 논공행상에 눈이 멀어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었고, 조정의 기강은 송두리째 내려앉았다.
이괄의 난으로 도성이 짓밟히고 왕이 남쪽으로 피난하는 치욕을 겪었음에도 훈신들의 탐욕은 그칠 줄 몰랐다.
설상가상으로 국외의 형세는 낭떠러지 끝에 매달린 백척간두였다. 정묘호란(1627년)으로 형제의 맹약을 맺는 굴욕을 겪었건만, 북방 만주벌판에서 무섭게 세력을 떨친 후금은 날로 오만해져 머지않아 황제를 칭하고 조선의 숨통을 더욱 옥죄어 올 태세였다.
강역의 백성들은 전란의 상흔이 아물기도 전에 연이은 대기근과 역병, 그리고 탐관오리들의 혹독한 가렴주구에 피눈물을 흘리며 쓰러져 갔다.
그러나 대궐의 조정 대신들은 붕당의 색채에 눈이 멀어 옥석을 가리지 못한 채 오직 상대 정파의 발목을 꺾는 음모와 모함에만 몰두했다.
날마다 열리는 경연(經筵)의 자리에서는 공자와 맹자의 도덕과 의리가 쩌렁쩌렁 메아리쳤으나, 그것은 탐욕스러운 권력의 떡고물을 가리기 위한 위선적인 장식물에 불과했다.
정승판서들은 오직 군주의 안색만을 살피며 보신에 급급했고, 선비의 고결한 지조를 지켜야 할 사림의 언로(言路)는 편협한 당쟁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
보위에 오른 지 11년째를 맞이한 인조의 속마음 또한 시커멓게 숯이 되어 있었다. 반정으로 추대되었으나 공신들의 세력에 휘둘려 독자적인 통치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했고, 나라 안팎에서 망국의 징조가 빗발쳤다.
밤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던 인조는 스스로가 성군이 되기는커녕 나라를 파멸로 몰고 간 군주로 청사에 오명을 남길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날이 밝아 참상이 수습되자, 인조는 참담한 심경으로 즉시 팔도에 구언(求言)의 성지를 반포했다.
"법궁의 정전은 임금이 하늘의 명을 받들어 정사를 펴는 가장 거룩한 자리이거늘, 전례 없는 변괴가 대전 한복판에 떨어졌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요, 하늘이 과인에게 내리는 엄중한 경고일 것이다.
대신과 유생들은 털끝만큼도 숨기지 말고 과인의 허물과 국정의 폐단을 기탄없이 직언하라!"
하지만 조정 대신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겉으로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척 머리를 조아렸으나, 속으로는 이 비극적인 징조를 어떻게 제 파당에 유리하게 이용할 것인가에만 골몰했다.
서슬 퍼런 직언으로 성상의 노여움을 살까 몸을 사릴 뿐, 목숨을 걸고 군주의 뼈를 깎아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충신은 보이지 않았다.
성하(盛夏)의 벼락 소식과 임금의 애끓는 구언령은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을 타고 수백 리 떨어진 남녘의 영남 땅, 인동(仁同)의 깊은 산골짝까지 흘러들어갔다.
낙동강 물줄기가 유유히 굽이쳐 흐르는 그곳에는 세상의 권세와 잡음을 멀리한 채 학문에 침잠하던 한 원로 유학자의 초막이 있었다. 당대 최고의 역학(易學) 거두이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학맥을 통합하여 독자적인 우주관을 구축해 낸 대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년)이었다.
당시 여든의 고령에 이른 그는 단순한 사구(詞句)의 훈고에 매달리는 문약한 선비가 아니었다. 《주역》을 관통하는 철저한 역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천문, 지리, 의학, 산학 등 자연의 이치와 현실의 문제를 아우르며 독창적인 '이기경위설(理氣經緯說)'을 정립한 거유(巨儒)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학덕과 명망을 흠모하여 대사헌, 참판, 사헌부 지평, 부호군 등 숱한 관직을 제수하며 끊임없이 부름을 내렸다. 당장 한양으로 올라와 흔들리는 국본을 바로잡아 달라는 간청이었다. 그러나 여헌은 번번이 간곡한 사직 상소를 올린 채 초야에 머물렀다.
권력에 대한 욕망이 없었던 탓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파당의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국가의 존망을 외면하는 진흙탕 같은 조정 현실에 깊은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임금 또한 군주다운 결단력을 세우지 못한 채 공신과 당파의 그물에 갇혀 허우적거리는 형국이었기에, 헛된 관직으로 세상에 이름을 더럽힐 까닭이 없었다. 그는 차라리 고요한 강변에 앉아 우주만물의 궁극적 섭리를 탐구하며 시대를 향한 진정한 치유책을 벼리고자 했다.
그런 그의 은거지에 대전에 벼락이 내렸다는 변괴와 임금의 참회 섞인 구언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소식을 접한 여헌은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그는 정결하게 손을 씻고 의관을 바로 한 뒤 초막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책상 위에는 거친 백지가 펼쳐졌고, 그의 야윈 손끝에는 손때 묻은 낡은 《주역(周易)》 한 권이 놓여 있었다.
먹을 갈아 붓끝을 적시는 동안, 노학자의 혜안 속에는 불바다가 되었던 대전의 광경과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조선의 현실이 하나의 거대한 괘상(卦象)으로 겹쳐 지나갔다.
'진(震)괘의 상(象)이로다…….'
여헌은 마침내 붓을 들어 장구한 세월 동안 연마해 온 역학의 진수를 담아 왕에게 올리는 상소문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붓끝은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종이 위를 거침없이 내달렸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주역》 팔괘(八卦) 가운데 일양(一陽)이 이음(二陰)의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곧 우레의 형상이니, 이 까닭에 그 괘의 이름을 '진(震)'이라 하였습니다.
공자께서 찬하신 〈계사전(繫辭傳)〉에 이르기를 '천둥으로써 온 세상을 진동시킨다' 하였고, '만물을 흔들어 깨우는 것으로는 우레보다 더 빠른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천둥과 벼락이란 천지가 침잠한 만물을 움직여 일으키는 지극한 조화의 상도(常道)입니다."
여헌의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다. 봄날의 우레는 초목의 싹을 틔우고 생기를 불어넣는 생명의 고동이지만, 음기가 만연하고 기강이 무너진 시절에 내리는 벽력(霹靂)은 막힌 것을 억지로 뚫고, 혼미한 자의 혼을 흔들어 깨우기 위한 황천의 거대한 경종이라는 해설이었다.
"하늘이 벼락을 바깥의 들이나 깊은 산림에 치지 않고 엄숙한 법궁 안에 내리쳤으며, 마당의 나무나 바위에 치지 않고 임어하시는 궁전의 기둥과 문에 내리쳤습니다.
이를 보건대 오늘날 천지의 깊고도 은미한 뜻은 오직 전하 한 분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전하를 진동시키고 전하의 심지를 격동시키려 하신 것은, 하늘이 전하를 차마 버리지 못하여 지극히 따뜻하게 아끼고 사랑하시는 자애로운 뜻이 아니겠습니까!"
노학자의 붓은 감언이설의 수사를 걷어내고, 인조의 지난 11년 재위를 향해 예리한 메스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반정으로 임금의 자리에 오른 지 11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경연에서 강론한 성현의 말씀과 신하들이 쏟아낸 구국의 방책은 실로 태산보다 높았을 것이다.
임금은 매번 "마음에 새기겠다", "깊이 경청하겠다"며 성실한 군주의 모습을 흉내 냈으나, 과연 그 숱한 배움과 들은 바를 단 하나라도 결단력 있게 행동으로 옮겨 요순의 심법(心法)에 도달한 적이 있었는가?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이래 스스로 지극한 덕을 쌓고 거대한 공업을 이루리라 수없이 격려하지 않으셨습니까. 하오나 성인의 마음을 본받지 않는 정치는 모두 격이 낮은 얕은 술수에 지나지 않으며, 하(夏)·은(殷)·주(周) 삼대의 올바른 정치를 모범으로 삼지 않는 정사는 모두 구차한 임기응변에 불과할 뿐입니다.
총명하게 사리를 통촉하고도 과단성 있게 결단하지 못하며, 신하들의 폐단을 살피고도 단호히 내치지 못하고, 시비(是非)를 꿰뚫어 보면서도 정작 취사선택의 기로에서 주저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신다면, 군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영영 행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병폐가 조정 전체를 갉아먹게 될 것입니다."
여헌의 일갈은 단순한 노여움이나 비판에 머물지 않았다. 하늘의 벼락이 음(陰)과 양(陽)의 뒤엉킨 기운이 부딪혀 터져 나오듯, 사람의 마음속에서도 사욕(私慾)과 천리(天理)가 끊임없이 싸우고 있음을 짚어냈다.
군주의 마음가짐 하나가 온 나라의 음양을 조화롭게 할 수도, 재앙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도 있다는 준엄한 성리학적 통찰이었다.
"마음에서는 한 줌의 사리사욕을 깨끗이 씻어내어 오로지 공변된 이성(天理)만을 따르시고, 정무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그릇된 것을 단호히 물리치고 오직 지극한 옳음만을 좇으셔야 합니다.
사물을 대할 때에는 간사하고 바르지 못한 것을 꺾어버리고 언제나 바른 도리(正)에만 의탁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닥쳐온 재앙을 돌이켜 복락의 상서로움으로 바꾸는 유일한 방도입니다.
지금 성상의 춘추는 지혜와 기력이 왕성한 중년에 이르렀으니, 지난날의 나태와 타성을 벗어던지고 우레처럼 분발하여 떨쳐 일어나실 절호의 기회입니다!"
여헌은 상소문 말미에 자신이 평생 동안 공력을 다해 천착해 온 《주역》 64괘 가운데, 우레와 분발을 상징하는 '진괘'와 관련된 열여섯 개 괘의 철학적 해설을 담은 별책을 조심스럽게 함께 묶었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로지 천지의 도리와 지극한 충정만으로 벼려낸, 군주의 폐부를 찌르는 대문장(大文章)이었다.
수백 리 역참을 거쳐 도성에 당도한 여헌의 상소문은 마침내 구언에 지쳐 있던 인조의 어안에 올려졌다. 그날 밤, 인조는 좌우의 시종들을 모두 물리치고 홀로 침전의 희미한 촛불 아래 꿇어앉았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노학자의 글을 펼쳐 들었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서슬 퍼런 문장들에 인조의 얼굴은 붉어졌다가 이내 파랗게 질려 갔다.
한 글자 한 구절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힐 때마다 등줄기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신하들이 제 파당의 이익을 도모하며 올리던 구태의연한 상소문이나, 군주의 비위를 맞추려 늘어놓던 알랑거리는 아첨 따위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우주의 운행 질서인 역학의 엄정한 법칙을 빌려 자신의 유약함, 우유부단함, 그리고 개혁 의지의 결여를 낱낱이 해부하고 도려내는 추상같은 질책이었다.
"과연…… 원로의 혜안이 과연 그러하구나."
인조는 길고 긴 탄식을 토해 내며 마침내 상소문을 양손으로 공손히 받쳐 들었다. 즉위한 지 십여 년, 백성들을 굶주림과 전쟁의 공포에서 건져내지 못한 채 공신들의 세력 다툼에 휘둘리며 갈팡질팡하던 군주 자신의 부끄러운 초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학식이 모자라고 덕이 부족하여 밤마다 번민하며 뜬눈으로 새우던 고독한 군주의 내면을, 천 리 밖의 늙은 학자는 마치 눈앞에서 들여다보듯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인조는 벼루에 먹을 갈고 떨리는 손으로 친히 붓을 들어 비답(批答)을 써 내려갔다.
"상소를 읽어 내려가매, 전후에 걸친 경의 정성스럽고 간절한 뜻이 참으로 가상하도다. 과인이 즉위한 이래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경계하며 무언가 나라를 위해 뜻있는 정치를 이루고자 밤낮으로 고심하였으나, 타고난 재주와 학문이 턱없이 미치지 못하여 온갖 정사가 뜻대로 펴지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깊은 밤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홀로 탄식만 거듭해 왔을 뿐이다.
경이 진언한 바른 가르침은 단 한마디도 천고의 격언과 지론이 아닌 것이 없으니, 내 어찌 감히 이를 옥좌의 오른편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눈에 새기며 뼈저리게 반성하지 않겠는가."
비답을 적어 내려간 인조의 먹물이 마르자, 대궐의 밤은 이전보다 한층 더 깊은 침묵 속으로 잦아들었다. 멀리 영남의 외딴 벽계에서 날아든 벼락같은 충언과,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인 군주의 진솔한 자기반성은 혼탁한 정국에 거대한 파란을 당장 일으키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
곧 닥쳐올 병자호란의 거대한 비극과 조선 왕조의 기구한 운명을 일거에 뒤바꾸기에는 권력의 골이 너무나 깊고 험악했다.
그러나 당쟁의 오물로 뒤덮여 있던 한 시대의 암흑 속에서, 여헌 장현광의 상소는 도덕적 불감증에 빠져 있던 군주와 위정자들의 심장에 내리꽂힌 한 줄기 섬광이었다.
그것은 썩어가는 사림의 양심을 흔들어 깨우고 정치가 나아가야 할 궁극적인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를 엄숙히 웅변한, 결코 꺼질 수 없는 도의(道義)의 거룩한 불씨였다.
*참고: 인조실록28권, 인조 11년 10월 19일 무인 2/3 기사 / 1633년 명 숭정(崇禎) 6년
“부호군(副護軍) 장현광이 대전에 벼락이 친 일에 대해 상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