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이르기도 하고, 너무 늦기도 해서 제때를 맞추기가 어려운 것이 꽃구경이다. 여행작가 김수남 선생이 주최하는 <명사와 함께 걷는 서해랑 길>에 초청을 받아, 조금 일찍 도착한 고창, 고창읍성은 온통 꽃 잔치였다. 봄 꽃 맞이에 나선 사람들이 나라 안에서도 아름답기로 소문난 고창성을 걷는 모습이 한 폭의 풍경화였다. 모양성이라고 불리는 고창읍성은 어떤 역사와 이야기를 품고 있는가?
조선시대의 학자이며 전라감사를 지냈던 이서구가 지었다고 전해지는「호남가」에 “고창성 높이 앉아 나주 풍경을 바라보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고창성을 이 고장 사람들은 모양성이라고 부른다. 해미읍성, 낙안읍성과 더불어 나라 안에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모양성은 단종 1년(1453)에 세워졌다고도 하고 숙종 때에 이항이 주민의 힘을 빌려 8년간에 걸쳐 쌓았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성벽에 새겨진 글자 가운데 계유년에 쌓았다는 글자가 남아있으며「동국여지승람」에 “둘레가 3008척 높이가 12척이고 성내에 3개의 연못과 세 개의 하청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이 성종 17년에 발간되었기 때문에 그 전에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고창성은 여자들의 성벽 밟기로 유명한데 성을 한 바퀴 돌면 다리의 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게 되며 세 바퀴를 돌면 저승길이 환히 보며 극락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윤삼월이 가장 효험이 좋고 초엿새 열엿새 스무엿새 등에 성 밟기를 하기 위해 도처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지만 지금은 가을에 열리는 고창 모양성 축제 때에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성의 높이가 만만치 않아 떨어지면 불상사를 입는다. 그 예가 오래 전에「산골소녀 옥진이 시집」이라는 시집을 펴냈던 김옥진씨는 고창여고 재학 중 성 밟기 중에 떨어져 반신불수가 되어 시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모양성에는 봄 햇살이 완연하고
모양성 바로 입구에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초가집 한 채가 있고, 방안에는 신재효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옹기종기 앉아 있다. 그 집이 판소리 여섯 마당 중「춘향가」,「심청가」,「흥보가」,「적벽가」,「변강쇠가」등의 판소리 이론을 정립한 신재효의 집이다. 그 자신이「동리가」에서 “시내 위에 정자 짓고 / 정자 곁에 포도 시렁 ‘ 포도 곁에 연못이라........”했던 것처럼 그는 본래 광대 노릇을 한 사람이 아니었고 재산이 넉넉한 양반이었는데 풍류를 즐기는 성품을 타고나서 판소리와 함께 민속음악들은 연구하고 체계화시키는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신재효는 집안에 ’노래 청‘을 만든 다음 수많은 명창들과 교류를 나누었고 김세종, 정춘풍, 진채선, 허금과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신재효와 진채선 사이에는 애틋한 이야기가 한 토막 전해진다. 고종 4년에 경복궁景福宮이 세워지자 경회루慶會樓에서 축하잔치가 벌어졌다. 그 자리에서 진채선이「방아타령」을 불러 이름을 날리게 되자 대원군大院君은 진채선을 포함한 기생 두 명을 운현궁으로 데려간 다음 ‘대령 기생’으로 묵어 두었다. 갔다가 금세 돌아올 줄 알았던 진채선이 돌아오지를 않자 외로움을 느낀 신재효는 그 외로움을「도리화가」라는 노래로 엮어 진채선에게 보냈다. 그때 신재효의 나이는 59세였고 진채선의 나이는 스물넷이었다. 진채선의 추천으로 대원군에게 오위장이라는 벼슬을 받은 그는 1876년에는 흉년이 들어 사람들을 도와준 공으로 통정대부를 받기도 하였다. 신재효는 판소리 여섯 마당의 사설뿐만이 아니라「도리화가」,「광대가」,「오십가」,「어부사」,「방아타령」,「괘씸한 양국 놈가」같은 풍부한 표현력으로 분명하고 완벽한 사설을 정리한 한국의 ‘세익스피어‘라고도 하고 한편에서는 그가 정리한 판소리 사설이 지나치게 한 문투로 만들어져 민중적이고 토속적인 판소리의 맛을 크게 줄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방안에 앉아 있는 여러 제자 중에 진채선은 누구였을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그의 소리 한 대목도 듣지 못하고 떠나온 고창읍성과 신재효 고택, 지금쯤 한 잎 한 잎 꽃잎들이 떨어지고 있겠지, 2023년 4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