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0년~18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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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5년 세조, 단종 폐위하고 즉위
세조
조선 제 7대 왕이자 세종의 차남으로 이름은 유, 자는 수지. 어린 단종이 즉위한 후로 대신들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왕권이 약화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왕권과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집현전 폐지, 군현제 정비, 직전법 시행 등의 여러 사회, 경제 정책들을 시행했다. 또한 민족 의식의 고양을 위해 불교를 진흥시키고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통사 편찬 사업을 진행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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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9년 로제타 스톤 발견
로제타 스톤
1799년 7월 19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대가 나일강변 전략요충지 로제타에서 요새 터 파기를 하던 중, 한 장교가 문자들이 빽빽하게 적혀있는 가로 72㎝·세로 114㎝ 크기의 검은 현무암 석판 하나를 발견했다. 돌에는 54행의 그리스 문자와 이를 번역한 이집트 상형문자, 서민들이 즐겨쓰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폴레옹이 중요한 돌이란 사실을 모를 리 없었건만 2년 뒤 영국군에 패배하는 바람에 돌은 영국으로 넘어가 대영박물관에 보관됐다.
그때까지도 이집트 상형문자가 해독되지 않은 터라 많은 학자들이 달려들었다. 프랑스의 샹폴리옹도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 해독에 매달렸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상형문자가 `의미`를 표현하는 표의(表意)문자라고 생각한 데 반해 샹폴리옹은 `소리`를 나타내는 표음(表音)문자일 수 있다며 주류와는 다른 연구방법을 선택했다. 돌에 쓰여진 그리스 문자는 돌이 기원전 196년에 제작됐고 프톨레마이오스 5세의 공덕비임을 확인해주었다. 상형문자에도 반드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름이 들어있을 것으로 믿은 샹폴리옹은 유독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한 기호에 주목했다. 어렵게 해독한 결과 왕의 이름이었던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제2의 로제타 스톤`으로 불린 오벨리스크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이름도 찾아냈다. 이로써 로마인의 역사책에서나 등장하던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이집트 역사에서도 생생하게 살아나게 됐다. 샹폴리옹의 발음기호 찾기는 1822년이 되어서야 27개 파라오(왕)의 이름과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音價)를 모두 밝혀낼 수 있었다. 이집트 5000년의 신비가 풀리는 극적인 순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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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59년한국 최초로 찬송가를 간행한 언더우드 선교사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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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발발
1870년 7월 19일 독일제국을 형성하려는 비스마르크와 이를 저지하려는 나폴레옹 3세 사이에 발생한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인 보불전쟁이 발발했다. 스페인 국왕 선출을 둘러싸고 양국간의 불화가 불거졌고 비스마르크가 프랑스를 자극시킬 목적이었던 엠스전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5일 후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했다.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이 지휘한 프로이센은 북독일과 남독일제국의 지지를 얻어 4주 만에 바젠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을 무찔렀고 급기야 프랑스국내까지 쳐들어갔다. 그 후 프랑스는 나폴레옹 황제까지 직접 가담한 스당전투도 패하고, 마침내 9월 2일 프랑스 군대는 프로이센에게 무릎을 꿇어야 했다. 그 후에도 프랑스국민들은 프로이센에게 완강히 저항했으나 10월 27일에는 메츠가 함락되고 1871년 1월 28일에는 파리마저 함락됐다.
보불전쟁의 결과로 2월 26일에는 평화조약이, 5월 10일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는 50억 프랑이나 되는 전쟁배상금을 독일에게 지불해야했고, 알자스-로렌 지방도 넘겨줘야했다. 또, 1871년 1월 28일에는 프로이센의 빌헬름1세가 베르사유궁전에서 독일제국 성립을 선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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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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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년 도량형기 제작 검정 🌲04년 경성상업회의소 설립 🌲07년 고종, 양위조서 발포 🌲26년 상해 교포 200여명,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조직 🌲32년 상해서 독립운동청년단 결성 🌲38년 문세영, 최초의 우리말사전 발행 🌲45년 조선기독교단 발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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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년 여운형 피살
항일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 선생.
해방당시 국내 정국을 주도했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여운형 선생이 1947년 7월 19일 혜화동에서 한지근에 의해 피살됐다. 향년 61세였다.
1886년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한 여운형은 식민지시대에는 국권회복을 위해 서간도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29세 때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에 수학했으며 김규식 등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당수로 일했다.
1919년 11월에 일본정부의 초청으로 동경제국호텔에서 일본 지도자에게 조선독립의 필요성을 연설했으며 그 뒤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3년 간 징역을 살기도 했다. 출옥 후 국내에서 조선중앙일보 사장, 조선체육회장 등의 일을 맡으면서 국내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해방이 되자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했고 이어 인민당 당수로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1947년 8월 3일, 여운형 장례식. 추모인파는 60여만명이 몰려와서 애도의 물결을 이루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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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미국 , 한국백서(대한정책) 발표 🌲52년 한강철교 완전 복구·개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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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년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개막
제15회 헬싱키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인간기관차` 에밀 자토펙.
인구 36만7천명에 불과한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제15회 올림픽이 1952년 7월 19일부터 8월 31일까지 개최됐다. 69개국 5,871명의 선수가 출전했다.
최대의 화제는 처음 참가한 소련이었다. 소련은 폭발적인 힘을 발휘해 스포츠 대국 미국의 76개 금메달에 이어 71개의 금메달을 획득, 스포츠세계에서도 미소대립의 시대를 열었다.
개인으로는 체코슬로바키아 `인간기관차` 에밀 자토펙이 화제였다. 자토펙은 육상 5천m, 1만m 우승에 이어 마라톤에서도 우승, 세계를 감동시켰다. 자토펙 부인 다나도 투창에서 금메달을 차지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헬싱키올림픽 참가 한국 선수단
한국은 6·25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육상·역도·복싱·사이클·레슬링·승마 6개 종목에 참가하여 37위를 차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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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년 이승만 전(前) 대통령 하와이서 별세
망명지 하와이에서 별세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해가 1965년 7월 23일 김포공항으로 환국, 군 의장대가 운구하고 있다.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에서 별세했다. 황해도 평산 출신으로 배재학당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영어 교사가 되었다가, 1897년에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 협회’ 간부로 활약했다.
1910년 일본이 우리 나라의 주권을 빼앗자 귀국해 이상재 등과 ‘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활약했으며, 1912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에 기독교 학원과 독립 군관 학교를 세웠다. 1919년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세워져 초대 대통령에 추대됐고, 1948년 제헌국회 의원에 당선되고 이어 초대 국회의장, 초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1951년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자유당을 창당, 이듬해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에 재선됐다. 1954년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조항 철폐를 골자로 한 사사오입 개헌으로 대통령에 3선됐고, 1960년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로 하야,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 마우나라니병원에서 요양 중 90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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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년 남북적십자 제23차예비회담 개최 (1차 본회담을 8월5일 수행원은 70명 자문위원 7명등 합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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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 등소평 복권
덩샤오핑(鄧小平)
모택동이 사망하고 4인방이 체포된 이듬해 1977년 7월 22일 `부도옹` 등소평이 세 번째로 부활하여 당 부주석으로 복권됐다. 등소평은 1976년 제1차 천안문사태를 초래한 책임으로 세 번째 실각했었다. 첫 번째 실각은 1933년 왕명 등 좌파의 당 중앙에 의한 모택동 비판 때문이었고, 두 번째 실각은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때였다. 급진적인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파탄을 가져온 1960년대 초 등소평은 `백묘흑묘론`으로 알려져 있는 현실주의적인 경제조정책을 중시했으나,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 때 유소기 다음가는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내 제2의 실권파`로 지목되어 실각했었다. 연금과 노동으로 연명하다 1973년에 모택동의 배려로 국무원 부총리로 부활, 1975년에 중앙군사위 부주석, 해방군 총참모장, 당 부주석, 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되었으나 강청 등 `4인방`과의 첨예한 대립으로 제1차 천안문 사태 때 배후자로 지목되어,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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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년 김진호(女), 세계양궁선수권대회서 60m 더블라운드 세계신기록 수립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운 김진호 선수. 당시 18세의 앳된 소녀였다.
1979년 7월 19일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가 열린 베를린 마이펠트 그라운드. 세계대회에 첫 출전한 한국선수단에는 18세의 앳된 소녀 김진호(예천여고 3년)가 있었다. 간간이 비바람이 몰아친 이날 김진호는 여자 60m 더블라운드에서 643점을 쏴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다. 한국 기록경기 사상 첫 세계 제패였다. 김진호는 이튿날 30m와 50m에서도 우승한 데 이어 개인종합과 단체종합도 석권해 여자부문에 걸린 6개의 금메달 중 5개를 휩쓸었다.
외신은 한국양궁의 세계 제패를 다투어 전했다. 국내언론도 "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곳에서 43년 만에 태극기가 펄럭였다"며 "국궁에 눌려 빛을 못본 양궁에 투자하면 올림픽 금메달도 가능하다"고 흥분했다. 김진호의 세계 제패 이후 한국 여자양궁은 1984년 서향순, 1988년 김수녕, 1992년 조윤정, 1996년 김경욱이 연이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20년째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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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제22회 모스크바올림픽 개막
레닌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제22회 모스크바올림픽 개막식 모습. 왼쪽으로 사람들로 수놓아진 대회 마스코트 미샤가 보인다.
인류최대의 스포츠제전인 제22회 모스크바 올림픽대회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항의, 미국을 위시한 세계 약 60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레닌 스타디움에서 그 화려한 막을 올렸다. 브레즈네프 소련 당서기장은 올림픽에 참석한 선수들과 관람객들을 통제하기 위해 레닌 스타디움 주위를 경찰과 군인들로 벽을 쌓은 뒤 개막을 선언, 동서 냉전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이 대회는 1896년 근대 올림픽경기가 시작된 이래 사상최초로 공산권에서 개최되는 것이었다.
전해인 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 침공, 서방국가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철퇴하려는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자 이에 미국을 위시한 서독 일본 등 스포츠 강국이 올림픽대회를 보이콧함으로써 스포츠제전이라는 본래의 의미를 잃고 반쪽짜리 올림픽이 되고 만 것이다. 당초 소련은 최고 최대의 올림픽을 준비했지만 모스크바올림픽은 1952년 핀란드 헬싱키올림픽 이후 가장 적은 81개국 선수 5326명만이 출전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고 말았다.
Leonid Brezhnev greets participants and guests during the opening ceremonies.
이 대회 스타는 소련의 남자체조 선수 디디아틴이었다. 그는 금메달 3개, 은메달 4개, 동메달 1개를 얻어 가장 많은 메달 획득수를 기록했다. 이로써 소련은 6백30개의 메달 중 1백95개, 1백27개의 금메달 중 80개를 따내며 1위를 차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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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 은행ㆍ보험ㆍ증권기관 임ㆍ직원 431명을 사회정화작업으로 숙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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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 김환진, WBA 주니어플라이급 타이틀 획득 (대구)
1981년 7월19일 김환진 WBA 주니어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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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년 한국,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 (미국)
▶1981년 한국,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전 우승
서울시 청소년야구대표팀이 2018 U15 세계보이스야구대회에서 정상에 올랐다. 대표팀은 7일 호주 시드니 블랙타운 인터내셔널 스포츠파크에서 열린 대회 결승전에서 일본을 8-4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대표팀은 1회 대거 6득점에 성공한 후 효과적인 피칭으로 승리했다. 4이닝 3피안타 2실점으로 호투한 이주영(충암중)이 승리투수가 됐다. 1982년 시작된 세계보이스야구대회는 U14 이상의 중학생 대회로는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한국은 2016년 처음 우승한 이후 2년 만에 두 번째 우승을 거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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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한국과 자메이카 양국,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에서 경제·기술협정 체결 🌲84년 고려병원 집단발병 쉬쉬-레지오넬라세균 감염-역학조사 🌲84년 외환은행, 경남기업(주)을 대우에 1년간 위탁 경영하겠다고 발표 🌲84년 바르레타 파나마 대통령 당선자, 내한 🌲85년 부산 지하철1호선 1단계구간(범어사∼서면) 개통 🌲85년 남북적 제2차실무대표 접촉(판문점), 이산가족 고향방문. 예술공연단교환방문추진문제등 -합의 못봐 🌲86년 경찰, 신민당 등 33개 재야단체가 개최 부천 경찰서 사건등 폭로대회(명동성당) 저지, 김대중 등12명 자택연금 🌲88년 최광수 외무장관, 해외에 생활근거를 둔 영주권 소지 교민에게 북한방문을 허용하겠다고 발표 🌲88년 정부, 홍명희 등 5명 제외한 월북작가 100여 명의 해방전 작품 해금 🌲89년 미국의 방위비분담요구에 90년 3000만달러, 🌲91년 4000만달러, 92년부터는 5000만달러씩 추가지원 🌲89년 대도시 주차난 해소를 위해 옥외수영장, 골프 연습장, 테니스장에 주차장 설치를 의무화하는 입법 예고 🌲89년 노태우 대통령, 안기부장 및 내무·건설·보사· 노동·체신·정무1 장관 등 6부 장관 경질,안기부장 서동권, 내무 김태호 🌲90년 야권 3자통합추진 실무대표, 통합논의를 위해 '통합추진협의기구'구성키로 합의 🌲90년 정부, 일본 조선학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할 학자의 북한주민 접촉신청 승인 🌲91년 한미 양국정부는 용산의 미군기지를 96~97년 까지 오산과 평택에 있는 미군기지로 이전한다고 발표. 🌲91년 국제통화기금 (IMF) 한국경제협의단, 재정 긴축과 함께 통화공급을 축소할 것을 한국정부에 권고. 🌲91년 민주당 박찬종의원,오대양 사건은 세모사장 장인 권모목사가 교주인 기독교복음 침례회와 관련폭로 🌲91년 고당조만식, 6.25전쟁중 유엔군의 평양입성 전날 북한군에 의해 평양에서 총살-북 고위관리증언 🌲91년 영국 셰필드 91유니버시아드 남자 뜀틀에서 여홍철선수(경희대) 금메달 북한 체조10개의 금메달 획득 🌲92년 김달현 북한정무원부총리가 수행원 10명과 함께 10시 판문점을 경유 서울에 도착-최각규 부총리 초청 🌲93년 정승화 前육참총장 등 22명,12ㆍ12사태와 관련 전두환ㆍ노태우 前대통령 등 34명을 대검에 고소 🌲93년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현대자동차와 중국 대련市 정부가 합작, 자동차 생산공장 건립 체결 🌲93년 문화체육부, 지난 90년 제정된 서울평화상 폐지 확정. 기금 100억원 체육진흥기금으로 환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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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북한, 김일성 장례식 치러 (금수산의사당(주석궁)에 안치)
1994년 7월19일..북한, 김일성 장례식 치러(금수산의사당(주석궁)에 안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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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년 전남 광주 지역 38.5℃ 기록 🌲96년 정부ㆍ여당, 평생교육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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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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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7월 19일 헌법재판소, 전국구 선출방식 위헌 결정 헌법재판소(헌재)가 2001년 7월 19일 선거법의 비례대표(전국구) 의석 배분 방식(189조 1∼7항)과 기탁금 납부조항(56조 1항 등) 등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다. 현행의 비례대표제가 유지되는 한, `1인 1표제`도 위헌이라는 한정(限定) 위헌 결정도 함께 내렸다. 따라서 일정 득표를 못하면 기탁금을 국고에 귀속하도록 한 조항(57조 1항 등)과 지역구 득표비율에 따라 비례대표의석을 배분토록 한 조항 등도 자동적으로 효력을 잃게 됐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당 조순형 의원 등은 이 같은 선거법 조항이 위헌이라며 2000년 2월 헌법소원을 냈었다. 헌재의 위헌 결정에 따라 앞으로 비례대표제를 유지하려면 지역구 의원과 정당에 대한 투표권을 함께 주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인 `1인 2표제`로 하거나, `1인 1표제`를 유지하려면 비례대표제를 없애는 방향으로 선거법 개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헌재가 현행 비례대표제 방식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가장 큰 이유는 이같은 방식이 유권자 의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때문이다. 유권자가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자가 엇갈릴 경우, 어느 쪽을 기준해서 투표하든 절반의 선택권은 뺏길 수 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국회는 10월 4일 본회의를 열어 헌재가 위헌으로 결정한 `국회의원 지역구 후보자 등록 때 2000만원을 기탁하도록 한 조항`을 완화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기탁금을 현행 2000만원에서 1500만원으로 낮추고, 기탁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요건도 유효투표 총수의 100분의 20에서 100분의 15이상 득표한 경우로 완화하는 개정안이 통과되자 군소정당과 시민단체는 헌재의 위헌 취지에 어긋난다며 강력히 반발, 다시 헌재에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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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독일 아우토반 259중 추돌사고
259중 추돌사고 현장.
2009년 7월 19일 속도 무제한 고속도로인 독일 아우토반에서 259대의 자동차가 연쇄 추돌하는 사상 최대 사고가 발생했다. 19일 오후 하노버에서 페이테 구간의 아우토반에서 259중 추돌 사고가 발생해 10명이 중상(重傷)을 입고 66명이 다쳤으며 중상을 입은 10명은 위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사고는 고속으로 달리던 자동차들이 폭우에 미끄러지면서 발생했다. 날도 어두워 운전자들이 앞서 추돌한 차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속도를 유지해 대형 사고가 빚어진 것으로 보인다. 수백대의 자동차가 엉켜있는 사고 현장에는 300여대의 구급차와 소방차가 출동해 밤새 구조작업을 벌였다. ‘고속 운전자들의 최후 피난처’로 불리는 독일 아우토반의 너비는 18.5~20m이며, 총연장 1만2000㎞에 이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