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구참선법과 의리선 어디에 분간(分揀)이 있느냐하면,
이론으로 따지고 분별심으로 따져서 이리저리 따져가지고 알아들어가는 참선, 이것이 바로 의리선이요
죽은 참선, 사구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활구선은
이론을 사용허지 아니하고 분별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심지어 경전에 있는 말씀, 부처님께서 설하신 경전에
있는 말씀까지도 이 참선을 허는 데에 동원이 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리 따지고 차츰차츰 따져서 더듬어 들어가는 거,
이러헌 참선은 아무리 따져서 그럴싸한 결론을 얻었다하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분별심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
분별심이 벗어...
남아있는 동안에는 그것은 중생심이요, 생사심이요,
따라서 그것은 생사해탈은 못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어디까지나 아는 것이지 그것은 깨달음이
아닌 것입니다.
깨달음은 분별심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버리는 곳에서 깨달음에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분별심을 어떻게 허면 버리느냐?
화두 , 공안(公案). ‘공안’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일종에
수수께끼 비슷헌 것이지만 세상에 수수께끼라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상식을 총동원해가지고 이렇게도 따져보고 저렇게도 맞춰보고 해가지고
‘아, 이것이로구나.’ 이렇게 알아맞힐 수 있는 것은
이것은 수수께낍니다.
그러나 이 공안은, 화두는, 그러헌 분별심으로 알아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다못 무조건 하고, 거두절미하고 ‘이 뭣고?’ ‘
부모미생전본래면목이 무엇인고?’ ‘
어째서 정전백수자라 했는고?’
‘어째서 판치생모라 했는고?’
다못 그렇게만 의심을 해가는 것입니다.
무슨 조건도 필요 없고 이러쿵저러쿵 전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불법(佛法)에 경전을 읽은 사람이건 안 읽은
사람이건, 유식헌 사람이건 무식헌 사람이건,
그저 바보가 되아가지고 ‘어째서 판치생모 했는고?’
‘무자화두(無字話頭)’를 하는 사람은 ‘어째서 라 했는고?’ ‘이뭣고’를 하는 분은 ‘이 뭣고?’
다못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그렇게 의심을 일으켜서
그 일으켜진 의심을 관조해갈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무슨 문제냐?
인삼 녹용이 아무리 좋고 몸에 좋다고 하지만
그러헌 중한 약을 체질도 감안하지 아니하고 병에 증상도 고려허지 아니하고 무조건 많이 사다가 진허게 달여서
날마다 먹어재끼면
혈압이 터진다든지 혈압이 오른다든지 그래가지고
백이면 백 다 약으로써 곤치기 어려운 무서운 병이 걸려가지고 죽게 되는 것입니다.
참선이 좋다 좋다 하지만
그 방법을, 묘하게 닦아가는 그 묘한 요령을 알지 못하고 덮어놓고 밤잠을 안자고 밥을 굶고 용맹정진을 헐 때에 백이면 백 다 상기병 아니며는 소화불량 그렇지 아니허면 신경통, 그렇지 아니허면 미친병, 온갖 그러헌 부작용이 일어나가지고 공부를 중단헐 수밲에 없고,
‘참선이 좋다더니 그렇게 사람을, 멀쩡한 사람을 갖다가 곤칠 수 없는 병신을 맨들았다’고 그 사람으로 인해서
오히려 이 최상승법 정법으로 욕이 돌아오게 맨들고 마는 것입니다.
첫댓글 일체 중생 참 나를 깨달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 나기를 발원합니다 _()_
감사합니다.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_()_
고맙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