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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첫 시작인 1회부터 차례대로 보아야 내용이 이해가 됩니다. 첫 시작인 1회부터 차례로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14회. 한국을 증오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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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남자였다.
6살에 나는 하루에 3끼 먹는다고 엄마에게 귀싸대기를 맞았고, 다음 날 하루에 2끼를 먹었다고 아빠가 나의 배를 걷어찼다.
그때부터 난 하루에 1끼만 먹었다. 매일 오후2시30분에 1끼만 먹었다.
3년 뒤.
초등학교2학년이 되어서 행복했다.
집에서는 반찬이라곤 김 1봉지랑 밥이 고작인데, 초등학교의 급식은 무려 3가지씩 반찬이 나왔으며, 심지어 우리 집에선 볼 수 없었던 국까지 따뜻하게 나왔다.
그러나 학교의 급식비가 밀리자. 담임선생은 애들 앞에서 나를 망신시켰다.
담임선생은 아침조회시간에 항상 나를 째려보면서
“급식비! 안 낸 사람!”
이라고 말하고는 칠판에 커다랗게 나의 이름 ‘권승봉’을 적으며
“밥은 처먹으면서 밥값을 안 내는 인간은 뭐라고 부르지?”
라고 비꼬듯이 말하면, 아이들은 키득키득 비웃으며
“도둑새끼요!”
라고 말했다.
그러면 초등학교 담임선생이라는 작자가 나를 일으켜 세우며
“전교생에서 너만 유일하게 급식비가 밀렸단다. 엄마하고 아빠는 일도 안 하니?”
라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숙이며 속으로
‘엄마랑 아빠는 일 안 해요.’ 라고 삼킨다.
담임선생은 나를 바라보며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넌 학교에 밥 먹으러 오지?”
라고 꾸짖었다.
그 날. 점심시간.
나는 늘 그러하듯이 밥을 다른 아이들에 비하여 3배나 떴다.
식판이 비좁을 정도로 고봉으로 떴다.
반찬도 아줌마들에게 많이 달라고 애원했다.
그런데... 그날 하필 담임선생이 나의 뒤에 있었고, 담임선생은 언성을 높여 나를 바라보며
“밥값도 못하는 애가 먹기는 엄청 처먹네!”
라고 화냈다.
나는 주눅이 들었지만, 배는 고팠는지라, 식판을 반찬과 밥을 꽉! 채워서 구석에 도망가서 먹었다.
담임선생은 고개를 흔들며 혀를 “쯧쯧쯧” 찼다.
난 하교해서 엄마와 아빠에게 급식비를 내달라고 말했고, 그날 먼지가 나도록! 아니, 먼지가 모두 사라지도록 빗자루로 맞았다.
다음 날에 허벅지에 빨간 피멍이 들었고, 다시는 엄마와 아빠에게 급식비를 달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로부터 3개월 쯤 지났을 때,
담임선생은
“안 되겠다!”
라고 말하며 앞으로 급식비를 지불하지 않는 학생에게는 하루에 10대씩 때렸다.
지금은 시대가 변하였기에 처벌조차 못하는 시대였지만, 당시에 교사들은 걸핏하면 학생들을 분풀이 하듯이 회초리로 때렸다.
나는 등교하면 항상 10대씩 손바닥을 담임선생에게 회초리로 맞아야만 했다.
결국 담임선생은 밀린 급식비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 집까지 찾아왔다.
우리 집은 미군부대 뒷골목에 다 찌그러지는 컨테이너로 만든 집이었다.
그 모습을 본 담임선생은 충격에 빠졌고, 비만 오면, 지붕에서 물이 떨어지기 때문에 천막을 지붕에 치고 있는 아빠와 엄마를 바라보며 ‘한심하다.’ 라는 표정을 지었다.
담임선생은 엄마와 아빠에게 급식비를 무료로 지원해줄 수 있는 학교로 전학가기를 권했다.
원래 초등학생은 이사를 하여야만 전학이 가능하겠지만, 담임선생이 밀린 급식비 때문에 골머리가 아팠던 모양인지, 비공식적인 루트를 알려줬다.
당시 무료로 급식비가 지원되는 초등학교가 있고, 아닌 곳이 있었는데, 돈도 없는 엄마와 아빠는 무료로 급식이 되는 초등학교로 나를 입학시킬 것이지, 왜? 유료인 초등학교로 입학시킨 것인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 말로는 집과 가까워서 그런 것이라고 하지만, 믿을 수 없다.
그렇게 난 뜻하지 않게 전학을 갔다.
급식비가 무상이라서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점심을 먹을 수 있어서 매우 행복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몇 년 후,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중학교부터는 무상급식이 아니었다.
매번 급식비가 밀려서 담임선생들은 나를 골칫덩어리로 여겼다.
그렇게 눈치를 보면서 자란 나였다.
교복도 선배들이 쓰던 헌옷을 물려받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친구들이 나를 무시했다.
그렇게 고등학생까지 무탈하게 버텼다.
고등학교는 이름 없는 공업고등학교를 선택했다.
그리고 하늘이 도운 것일까? 대통령 정책이 바뀌면서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급식비와 등록금을 국가에서 전액 지원해줬다.
그 덕분에 나는 눈치를 보지 않고, 급식을 먹을 수 있었고, 등록금 걱정을 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고등학교 등록금이 감당되지 않으면, 날 중졸로 만들려고 했다.
참으로 미친 부모들이다.
그러나 고등학교를 졸업 후에 난 엄마와 아빠를 원망하지 않았고, 대한민국을 원망했다.
하루에 1끼만 먹었던 나는 매우 마른 체형이었고, 무엇보다도 키가 매우 작았다.
그렇기에 아르바이트를 하려고 하여도 아무도 날 채용해주지 않았다.
편의점부터 시작하여 패스트푸드점 등을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 공고를 보고 왔다고 했지만, 나의 작은 키를 아래로 보면서
“학생, 생각해보고 연락 줄게.”
라고 나의 집 전화번호를 적었으면서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은 하지 않았다.
휴대폰도 없고, 키도 작은 나를 알바로 채용할 사장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대한민국이 싫었다.
외모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고개를 숙이고, 없는 사람은 짓밟는 개 같은 나라가 싫었다.
나는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미국에 가서 거지처럼 살아도 대한민국에서 쓰레기로 사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당장 미국을 가려고 하여도 항공권을 끊을 돈조차 없었다.
그나마 여권은 1년짜리 단수가 2만원 했었고, 5년짜리 복수가 5만원했다.
참고로 대한민국 남자는 군복무가 의무이기 때문에 10년짜리 여권조차 만들 수 없었고, 길어도 5년짜리 여권밖에는 신청할 수 없었다.
일단, 지옥 같은 대한민국을 벗어나서 천국 같은 미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만 했었고, 나는 진상들이 많은 술집 근처에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겨우 구했다.
그곳은 2개월가량 평일 야간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모집했지만, 결국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그 이유는 근처에 술집이 너무나도 많았고, 특히 진상들이 많았던 곳으로 유명했으며, 편의점 사장이 짠돌이라서 최저시급도 안 준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하지만, 난 선택권이 없어서 그곳에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했다.
편의점 사장은 처음에 날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자신도 아르바이트가 급했기에 할 수 없이 나를 채용했다.
난 등본과 엄마의 동의서를 받아서 제출한 뒤에 편의점에서 야간에 근무했다.
그러면서 깨달았지만, 대한민국은 돈이 최고인 역겨운 곳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가난한 알바에게 지폐를 얼굴에 던지는 진상들이 있기도 했고, 나는 친절을 베풀기 위하여 환하게 웃었을 뿐인데, 웃는 얼굴이 기분 나쁘다며 나의 뺨에 침을 뱉는 개새끼도 있었다.
그 외에도 자기들이 물건을 구입하기 때문에 나의 알바비가 지급되는 것이라며 유세를 부리는 개 같은 손님도 많았다.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세상 살기가 더욱 싫어졌다.’
나는 돈을 모아서 대한민국을 떠날 항공권만 끊자! 라는 생각으로 악착 같이 버텼다.
어떤 술집 년들은 술이 취해서 편의점 카운터에 있는 나보고
“학생! 고추 보여주면 팁 줄게!”
라고 말하는 미친년들도 많았다.
편의점 사장은 진상들이 괴롭히면 수화기를 5초간 내려놓으면, 경찰이 올 것이라고 했지만, 막상 깡패들 여러 명이 들어와서 나에게 협박하여 수화기를 내려놓았지만, 경찰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깡패들에게 실컷 두들겨 맞았고, 깡패들은 카운터에 있는 돈은 훔치지 않았지만, 술과 안주 여러 개를 훔쳐서 도망갔다.
그리고 아주~ 한참 뒤에 경찰들이 귀찮은 표정으로 편의점을 방문했다.
대한민국의 공무원들은 놈팡이보다 못한 놈들이다.
정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혐오스럽다.
그렇게 힘들게 6개월을 버텨서 항공권을 끊을 금액을 모았다.
그런데 더욱 웃긴 것은 국가가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데? 군대를 입대하기 위하여 신체검사를 받으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누군가는 나를 바라보면서 ‘국가에서 급식비랑 고등학교 등록금 내줬잖아?’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작 그것을 내줬다고 3년 가까이 군대에서 썩으라니? 난 싫었다.
아무튼 난 미국으로 도망갈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신체검사의 날짜를 뒤로 연기했다.
집에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PC방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항공권을 끊으려고 했다.
그런데 휴대폰 번호가 없으면 항공권조차 끊을 수 없었기에 나는 인터넷으로 항공권 발권하기를 포기하고 근처에 여행사로 들어갔다.
여행사 직원들은 나의 허름한 차림을 보고선 누구하나도 나를 바라보며 인사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면서
“샌프란시스코 가는 비행기 표를 끊으려고 하는데요.”
라고 말했다.
그 제서야 마지못해 한 여직원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여기 앉으세요.”
라고 자기 모니터 앞의 의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는 그곳에 앉았다.
그 여직원은 ‘어차피 끊을 돈도 없으면서’ 라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경유하여 최고로 저렴한 항공권을 알아봐달라고 요청했다.
여직원은 성의 없이
“네.. 네...”
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중국인 북경을 경유하는 중국항공사가 가장 저렴하다고 안내를 받았고, 나는 여권을 건네주면서
“예약해주세요.”
라고 말했다.
여직원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지으면서
“정말 예악해드려요?”
“네. 해주세요. 그러면 제가 여기 왜 왔겠어요?”
“아.. 네..”
라고 말하며 예약을 해주었다.
여직원은 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특가 항공요금이기 때문에 발권 후에는 취소하거나 날짜를 변경하려면 취소료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생각해보시고, 내일까지 전화주세요.”
라고 말했다.
난 알겠다고 말하며 예약확인서를 받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여직원은 내가 핸드폰이 없다는 말에 충격을 먹은 표정을 지었고, 나는 집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난 집에서 엄마와 아빠를 바라보며
“난 미국으로 가서 잘 먹고 잘 살 거야!”
라고 통보했고, 엄마는 나를 바라보며
“그 돈이면 우리가 밥을 몇 개월 동안 먹을 수 있는 돈인데!”
라고 말했으며, 아빠는
“미친 놈! 미국도 한국이나 똑같아! 그곳은 뭐? 별 천지인 줄 아냐?”
라고 말했으며, 누나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라고 비꼬면서 모두들 날 말렸다.
그런데 사람은 말리면 말릴수록 욕구가 불타올랐다.
나는
“내가 돈 벌었는데 왜?”
라고 말했고, 아빠는 나의 뺨을 강하게 때리며
“새끼야! 그동안 먹이고 입히고 키워준 거 내놔!”
라고 말했다. 나는 소리를 지르면서
“해준 게 뭐가 있어?!!”
그렇게 아빠와 나는 대판 싸웠다. 누나와 엄마는 우리를 말리기 바빴다.
나는 월급통장과 배낭을 메고 집을 뛰쳐나왔다.
그러곤 여행사로 향했고, 항공료를 지불하고선 발권된 전자티켓을 여행사 직원에게 받았다.
그 직원은 미국이 지금으로부터 무비자가 되었지만, 그래도 전자비자인 esta를 받으라고 안내해줬다. 나는 PC방에서 받겠다고 말한 뒤에 나가려고 하자.
그 여직원이 날 가엽게 바라보며
“그냥 서비스로 제가 해드릴게요.”
라고 말하며, 자신의 컴퓨터로 나의 여권을 보면서 esta를 받아줬다.
당시 esta는 승인 받는 것에 별도의 비용이 들지 않았다.
다만, 여행사에서 대행할 경우 수수료로 1만 원 정도를 받았다. 그러나 그 여직원은 배낭을 메고 눈물에 젖은 나의 눈동자를 보고선 ‘여행은 가고 싶은데, 가족들이 반대해서 싸우고 왔구나.’라는 표정으로 esta를 무료로 받아줬다.
난 그 여직원을 바라보며
“감사합니다.”
라고 말하며 여행사를 나왔다.
그리고 남은 아르바이트 비용은 누나와 엄마에게 줬다.
난 징그러운 대한민국을 떠난다는 행복감에 도취되었다.
그렇게 인천국제공항에서 북경으로 가는 중국비행기를 제주도도 한번 못 가본 내가 탑승하려고 중국국제항공 카운터에서 줄을 서서는 나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인천공항의 중국국제항공에는 대기한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니, 중국국제항공뿐만 아니라, 인천공항에 많은 항공카운터의 줄이 엄청나게 길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나의 차례가 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수화물을 붙였는데, 난 캐리어가방도 없이 배낭만 기내에 가지고 탑승할 것이라고 말하자. 항공사 직원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몇 번씩이나 나를 바라보며
“손님 정말 붙이실 짐이 없으세요?”
라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이주씩이나 있는데, 수화물로 붙일 짐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항공사 직원은 당황하면서 계속 나의 얼굴을 보았다.
그렇게 북경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가는 탑승권을 받았고, 나는 보안검색을 통과한 뒤에 탑승게이트까지 향했다.
그러곤 출발 1시간 전쯤이었던가? 탑승 게이트의 문이 열리면서 기내에 사람들이 탑승하기 시작했다.
나 역시 따라서 탑승했다.
인천공항에서 북경으로 가는 비행기는 마치 국내선 제주도 비행기처럼 작다고 승객들이 수군수군 말했다.
그렇게 난생처음 비행기를 탔고, 북경에 도착한 뒤에 내려서는 나의 편명을 전광판으로 보고 북경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편수의 게이트로 향했다.
그렇게 14시간 정도를 탑승하여 북경에서 샌프란시스코로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렸지만, 돈이 한 푼도 없었던 나는 공항에서 나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렇게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배낭만 메고 밖으로 나가기 위하여 끝도 없이 걸었다.
그런데 왜 그럴까? 갑자기 엄마와 누나가 떠올랐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였다.
엄마와 누나는 그래도 돈을 가지고 가라면서 달러로 환전한 돈을 나에게 주려고 했다. 20달러로 여러 장과 10달러로 여러 장을 나에게 건넸지만, 나는 오히려
“왜? 바꿨어! 환전 수수료만 아깝게!”
라고 화를 내면서 다시 은행에서 한화로 바꿔서 집에 보태라고 말했다.
엄마와 누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 푼도 없이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 어쩔 것이냐며 나를 꾸짖었다.
엄마는 초콜릿과 먹을 과자를 배낭에 넣어놨다면서 배가 고프면 그거라도 먹으라고 말했다.
나는 그 비상식량을 아끼기 위하여 매우 배가 고플 때 꺼내서 먹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샌프란시스코공항에서 한참을 걸었지만, 고속도로만 나오지. 도저히 사람들이 사는 동네는 나오지 않았다.
너무나도 지쳤고, 힘들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샌프란시스코공항에 연결된 철도인 바트를 이용하여 도시로 향했지만, 난 바트의 표를 구입할 돈이 없어서 무식하게 걸어서 공항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때는 내가 참 어리석었다.
부유한 여행객들은 샌프란시스코공항 앞에 있는 택시들을 타고선 밖으로 향했다.
나는 한참을 걸어서 샌프란시스코공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의 걸음을 주행하던 흑인이 보고선 영어로 말했다.
“어디가? 태워줄까?”
그러나 영어가 짧았던 나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자. 흑인은 몸으로 차에 타라고 표현했다.
나는 다리도 너무 아팠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마음에 흑인의 차를 탑승했다.
난 흑인을 바라보며
“하이.”
라고 환하게 인사했다.
흑인은 아저씨로 보이는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하이.”
라고 인사해줬다.
나는 혹시나 태워준 보수를 바랄까봐 돈이 없다고 열심히 강조했다.
그러자. 괜찮다고 흑인 아저씨가 말했다.
난 속으로 ‘어차피 가는 길이니깐, 태워주는 거겠지?’ 라고 안심했다.
그렇게 흑인아저씨는 사람들이 많고, 뮤니 버스와 메트로 역이 있는 곳에 나를 내려주곤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에게 고맙다고
“땡큐”
라고 말한 뒤에 그의 차가 점점 시아에서 사라지기까지 지켜봤다.
돈도 한 푼도 없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만 할지 막막했다.
샌프란시스코는 매우 추웠다. 당시에 6월임에도 불구하고, 햇빛은 강했으나, 날씨가 매우 쌀쌀했다.
샌프란시스코는 겨울에는 엄청 춥고! 여름에도 쌀쌀하다는 정보를 한국에서 듣긴 했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걸으면서 돌아다녔다.
발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걸었다.
그러다가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없어졌고, 노숙자들만 가득했다.
노숙자들은 나를 째려보면서 영어로 욕을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무서워서 얼른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내가 있을 곳은 없었다.
무작정 대한민국만 벗어나면 해결될 것 같았던 나의 인생은 오히려 시궁창으로 빠졌다.
밤이 되자. 너무나도 추워서 얼어 죽을 것만 같았고, 어디든지 들어가서 잠을 청해야만했다.
지하철로 들어가면 따뜻하기는 했지만, 나보다 덩치가 3배는 큰 무시무시한 흑인들이 벽을 치면서 나를 위협하였기에 그곳에 남을 수 없었고, 지상으로 올라오면 칼보다 날카로운 바람들이 나의 온몸을 차갑게 벤다.
결국 지상에서는 얼어 죽을 팔자였고, 지하에서는 어둠의 무리에게 몹쓸 짓을 당하여 시체가 될 것 같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나의 신세가 한심스러웠고, 난 금문교다리로 향했다.
금문교다리는 매우!! 추웠다!!
금방이라도 나의 온몸이 날아갈 것 같았고, 다리의 중앙에서 아래를 바라보니, 어두운 물들이 나를 차갑게 삼킬 것만 같았다.
“이곳에서 뛰어 내릴까?”
한국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금문교 다리에서 엄청난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고 들었다.
이렇게 추울 바에는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물에 빠지면 더욱 추울 것만 같았기에 발길을 돌렸다.
배가 너무나도 고팠고, 나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엄마와 누나가 챙겨준 초콜릿과 과자 같은 비상식량을 먹기 위하여 배낭의 안주머니 지퍼를 열었다. 그런데!!
그곳엔 20달러짜리 지폐와 10달러짜리 지폐가 가득했다.
나는 너무나도 반가운 돈들이었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엄마와 누나에게 너무 고마웠고, 나는 그 돈으로 근처에 가장 허름한 남녀공용인 호스텔에서 숙박했다.
그렇게 이주동안 호스텔에서 생활을 했으며, 밥은 최대한 굶어 죽기 직전까지 참았다가 가장 값싼 햄버거나 부피가 큰 음식들로 배를 채웠다.
그렇게 귀국 날 바트를 탑승하고 샌프란시스코공항에 도착해서 한국으로 무사히 귀국했다.
인천국제공항에는 엄마와 누나가 마중을 나왔다.
나는 엄마와 누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고, 주어진 일에 투정을 부리지 않으며, 앞으로 열심히 살 것을 맹세했다.
6개월 전.
((( 나, 권희은은 올해 24살인 여자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소기업에 경리로 취직하여 가난하지만 알뜰하고 평범하게 삶을 버티고 있었다. )))
그러나 나에게 큰 고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밖에 없는 친 남동생 승봉이가 문제였다.
나의 남동생 권승봉은 너무나도 가난한 부모님들을 원망하고 미워했으며, 못난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사회와 국가를 증오했다.
나 역시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도 가난한 집이 싫었고, 부모님이 싫었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원망한들 변하는 것은 없고, 오히려 상황만 악화될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드리기로 결심했다.
친구들 모두 가는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나는 고졸자로 중소기업에 경리로 취직했다.
월급도 적고, 대접도 별로 받지 못하지만, 나름 인생을 지키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버티며 살아왔다.
그런데 남동생인 승봉이는 텔레비전으로 항상 미국이나 유럽의 서양영화 및 드라마를 즐겨서 보았고, 항상 대한민국이 싫다고 외치면서 미국에 가서 성공할 것이라는 허황된 꿈만 가득했다.
그런 동생이 너무나도 걱정되었다.
허파에 바람이 든 사람처럼 미국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고, 성공한다는 착각 속에 빠진 녀석이 심히 불안했다.
그렇게 남동생은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6개월 동안 힘들게 벌었던 돈들을 샌프란시스코 혹은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는데 사용한다고 말했다.
우리 가족들은 충격을 먹었고, 남동생을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남동생은 혼자서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가는 비행기 표를 알아보았고, 뉴욕보다는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항공권이 저렴하기에 샌프란시스코 가는 항공권을 발권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꿈꾸었다.
그러나 철없는 승봉이를 말려야만 했다.
하지만, 녀석 꼴에 20살이라고 자신도 성인이라며, 나와 엄마의 충고를 거부했다.
결국 나와 엄마는 깊은 고민에 빠졌고, 나는 회사의 동료들 중에 가장 친한 언니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그 언니가 명함을 하나 건넸다.
명함에서는 ‘고민을 해결해주는 상담소’ 법인명 ‘해결사’라고 기재되어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향했고, 동생이 미국에 미쳐서 위험하다고 고민을 말했으며, 해결해줄 것을 부탁드렸다.
해결사 수수료가 무려 50만원이라는 큰! 돈이 들었지만, 그래서라도 위험에 빠질 동생을 살릴 수만 있다면, 아깝지 않았다.
그 돈을 지불한 뒤에 컴퓨터가 없었던 우리 집이기에 우편으로 해결방안을 받기로 했다.
일주일 뒤에
해결방안이 우편물로 함께 날아왔고, 해결사는 동생을 말려봤자. 언젠가는 미국으로 무모하게 갈 것이라는 충고의 말이 있었고, 어차피 여행경비를 지급해도 받지 않을 것이므로 배낭의 안주머니에 초콜릿과 비상 간식을 넣어두었다고 말하며, 달러를 넣으라고 조언했다.
엄마와 나는 해결사가 조언해준 글을 읽고 그대로 실행했다.
그렇게 남동생은 엄마와 나의 가슴을 찢으면서 미국행으로 향했다.
남동생은 입국심사 때문에 할 수 없이 왕복 항공권을 끊어서 가지만, 한국으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했다.
이주 뒤.
엄마와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동생의 귀국시간을 알고는 있었으나, 입국장에서 동생이 보이지 않자. 엄마와 나는 불안했다.
엄마는 벌벌 떨면서
“승봉이 큰일 생기진 않았겠지?”
나는 엄마의 어깨를 안으며
“괜찮을 거야.”
그때 입국장에서 반가운 얼굴인 승봉이가 보였다.
승봉이는 외국에서 고생하였는지. 얼굴이 핼쑥했고, 우리를 보자마자 반가운 표정으로 웃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엄마와 나도 승봉이를 보면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슬펐고,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승봉이는 우리 품으로 돌아왔고, 그 뒤엔 성실하게 일을 하면서 가족들과 생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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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15회에 이어집니다. **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
첫댓글 1편부터 읽어보진 못했지만, 재밌게 잘 읽었어요!! 처음엔 승봉이처럼 대한민국이 싫어지다가..나중엔 걱정도 되었다가, 누나 시점을 읽을땐 살짝 눈시울이 붉어지네요..어쩐지 짠하고..^^;; 시간 내서 처음부터 읽어볼게요!! 푹 빠져서 읽고 갑니다^^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제가 기쁩니다.^^ 푹 빠져서 읽어주셔서 매우 감사합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시길 바랄게요.~^^
ㅠㅠ..첫 시작 대목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설마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진짜로 우리 현실이 냉혹하다는걸 알기에 ㅠ.ㅠ
맞습니다. 위 에피소드는 제 주변에 있었던 실제의 이야기를 쓴 것입니다.^^ 예리하시네요.^^ 지금 제가 쓰는 글 자체가 모두 주변에 실제로 있었던 고민들을 토대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저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