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무엇을 볼 때 보면
그것이 그리 쫓아가지 말고, 또 귀로 무엇을 들으면
듣는 데로 끌려가지 말고, 눈으로 무엇을 보는 그 찰나에, 귀로 무슨 말을 들은 찰나에 바로 ‘이 뭣고?’
자기, 자기를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화두를
눈으로 무엇을 보자마자 찰나에 ‘이 뭣고?’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험으로 해서 무량겁에 윤회의 사슬로 부터서 깨달음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복잡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힘이든 것이 아닙니다.
철저히 무상을 깨닫고 발심만 했다면 우리는 행주좌와
어묵동정 어디에서라도 ‘이 뭣고?’는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썽이 날 때도 그리 쫓아가지 말고
바로 그걸 발판으로 해서 ‘이 뭣고?’ 이렇게 ‘이뭣고’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자꾸 허다보면 그것이 나중에 저절로 될 때가 오는 것입니다.
오늘 산승(山僧)은
무자화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왜 무자화두를 말씀을 드리게 되았냐하며는,
산승이 조실스님으로부터 무자화두를 타가지고
십 년 동안을 묵언(默言)을 허면서 무자화두로 정진을
했습니다.
그래서 무자에 대해서는 유독 마음속에 감명이 깊고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헌 감동을 바탕으로 해서 무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께개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조주스님은 “무(無)” 그랬습니다. -우리말로는 없다’하고 번역을 허게 되겠습니다마는-
그러니 그 「부처님 말씀에는 ‘일체중생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는데 왜 조주스님은 ‘무(無)’라고 하셨는가
그것이 의심이 날 수밲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어째서 무라 했는고?’ ‘무?’ ‘어째서 무?’
이렇게 무자화두를, 화두를 탄분은 그렇게 화두를 들고 정진을 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 ‘이래이래 해서 무라고 허셨을
거다.’ ‘아니 그것이 아니고 이래서 했을 것이다.’
그것을 이론적으로 따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無)?’ ‘어째서 무?’ 어떠헌 분은 무자화두를 들면서 ‘무-’ 허면서 항상 무자만 들여다보는, 그렇게 허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것은 사구참선인 것입니다.
의심이 없이 무자만 들이다보고
무’ 그렇게 허는 공부는 죽은 참, 죽은 참선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갖고는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신통일은 허는 데에는 도움이 될는지 모르나
절대로 의심이 없이 무자만 들이다 보고 있으면
그것은 죽은 참선이요
사구참선이라 깨달음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무 ’ ‘어째서 무?’ 이렇게 해서 알 수 없는 의심을,
의심(疑心)의 무(無)자를 관(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화두 신청헌 사람은
그렇게 철저히 정진을 해갈 것이고,
이 몸띵이에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타고 있으나, 눈으로 무엇을 볼 때나, 귀로 무슨 소리를 들었거나,
코로 무슨 냄새를 맡거나, 혀로 무슨 맛을 보거나, 몸으로 춥고 더운 것을 느끼거나, 누구한테 욕을 얻어듣거나
칭찬하는 말을 듣거나,
육체에 안이비설신의가 있음으로 해서 그 안이비설신의의 상대가 되는 것이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인데,
색성향미촉법을 대(對)하게 되면 거기에 육식(六識)이
일어나는데
그 육식을 어떻게 단속해나가느냐에 따라서
앞으로 무량겁을 생사윤회를 허느냐,
금방 말씀드린 화두로써 떠억 정진을 해나가느냐에
따라서 생사(生死)의 해탈(解脫)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첫댓글 일체 중생 참 나를 깨달라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 나기를 발원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