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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시까지 서울 터미널 근처 카페에 남자를 만나러 가야하다니, 껄쩍지근한 뒷끝맛을 다시며 화장실을 나온다. 그날은 김교위에게 말을 잘해서 충분한 수면시간을 확보해야할 것 같다. 사무실에 자기 자리에 앉아 순찰일지를 꺼내서 지금 순찰을 마친 근무자들의 다음 순번을 준비한다.
주간 근무보다 오히려 보기싫은 사람을 안볼 수 있고 일도 별로 없는대다가 돈도 더 많이주는 야간이 더 나은것 같다고 느끼기 시작한것은 그도 이제 이생활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는 증거가 아닐까 스스로 질문하지만 그 생각을 누가 알면 벌써 군기가 빠졌다며 잔소리를 들을거 같다.
교대를 마친 경호는 캄캄한 운동장과 미등이 켜진 거실동 복도를 걸으며 머릿속에 잡다한 생각을 한다. 그 시간이 이 교도소에서 일하면서 가장 좋아하는 시간인대, 간섭없는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더이상 짙어지지 않는 밤의 어둠속을 홀로 걸어가며 자신의 발소리를 듣고았자니 누가 이 멋과 고독함을 알아줄까 의문이 들었다. 아내나 연인도 없는 그에게 아무 연락없는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지금 순간의 장면을 담기위해 주변을 카메라로 찍본다. 그러다가 부재중통화 한통과 문자 두개가 온것을 발견한다.
" 보험.. 들어볼까?"
어쩌다가 오는 가입권유 전화를 기억하여 번호를 확인한다. 어색한 이름 은선. 아니 별명까지 붙인 그번호가 캄캄한 거실통로속에서 경호의 눈을 부시게 한다.
( 이보세요? 왜 입금 안해주세요? 저 그돈 없으면 이번달 생활비 없거든요? 내일까지 입금 안해주시면 신고할거에요?)
다음 문자에는 그녀의 통장 사본 사진이 오늘 오전날짜로 들어와있다.
( 계좌를 안알려 드렸었내요.. 내일 아침까지 보내줘요.)
그 통장 사본에 그녀의 손까지 찍혀 전송되었다. 아, 왼손에 반지가 껴있지 않구나. 보통 왼손에 반지를 끼니까, 남자친구가 없는걸까? 내일 아침에 반드시 입금을 해주고..통화 한번 해보아야 겠다고 생각한다.
텅빈 복도와 차분한 공기. 창밖의 캄캄한 하늘과 졸음이 겹쳐 무한한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늘어지기를 반복한다. 졸음이 오면 강렬한 래드미디어를 보거나 간단한 운동으로 극복하곤 했는대 그날은 그녀와의 행복한 데이트나 가슴뛰는 고백장면을 상상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것이 꿈인지 상상인지 분간하기 힘들때쯤, 다음 근무자와 교대를 햐야할 시간이 다가왔다.
왔던길을 다시 되돌아가 교대장소에서 서로 나눌 인계사항을 이야기한 다음,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어 윗층으로 올라간다.
" 어 경호야 교대 하는길이냐?"
김교위의 눈도 졸음때문에 흐리멍텅하다.
" 사무실가서 눈 조금만 붙여라. 내일 오전에 일보려면 정신이 말짱해야하니까."
" 그러죠.."
사무실안. 회의실 문을 열어 바닥에 얇은 이불을 펴고 쪼그려 눕는다. 조금만 자라했지만 눈을 다시 뜬다면 틀림없는 아침일 것이다. 경호는 귀를 쫑긋 사무실을 의식하며 눈을 감는다. 눈을 감고나서 잠깐, 아주 잠깐만에 눈을뜬 경호는 화장실에 가기위해 몸을 일으킨다. 혹시나 핸드폰의 시계를 본다.
" 어씨? 뭐야."
오전 다섯시. 순찰을 돌아야할 그리고 아침점호를 참석해야할 시간이 임박했다. 사무실로 뛰어나와 교대장소로 내려간다. 아래층에는 점오진행 근무자들이 모여서 졸고있었다. 가장 연장자인 김교위가 복도책상에 엎어져 깊이 잠들어있는 모습이 경호의 눈에 들어온다.
" 김교워님."
그가 누운 책상 바닥을 손가락으로 탁탁 친다.
" 어.. 왜.. "
" 서울까지 아침시간에 맞춰 가려면 일찍 출발해야 할거같습니다."
" 일곱시쯤 출발하면 되지않아?"
" 씻고 준비하고 버스시간 맞추고 하려면 좀 일찍 가야하지 않을까요?"
" 그런가? 그럼 점호 끝나고 바로 퇴근해."
" 어딜 가려고 그렇게 부지런을 떨어?"
옆에있던 윤경이 끼어든다.
" 아 그게.."
" 경호한태 여자 소개시켜주려고. 다른일은 몰라도 이런일 만큼은 사정을 봐줘야지 않겠어? 우리는 시간이 많이 않으니까.."
" 그렇구나. 나한태는 한마디도 않하더니 . 안물어 봤으면 계속 숨기고있었겠네?"
" 잘된다는 보장이 없어서 조용히 다녀오려고 했어요. 오전에 금방 만나고 오려구요."
" 그 여자는 노는 사람인가봐? 평일날 아침에 만나자고 하는거보면. 배려도 없는거같고."
" 만나서 잠깐 이야기해보면 금발 알게 되겠죠."
" 아니다 싶으면 바로 나와버려. 예의 차릴거없이."
" 그래야겠어요."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고가는 사이 기상을 알리는 노랫가락이 흘러나온다. 각 거실동에 서있던 교도관들이 돌아다니면서 거실문짝에 달린 명부와 내부를 슬쩍 들여다보고 확인하느라 바빠진다. 경호는 카운터된 명부를 김교워에게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이 마저 끝내서 돌아오길 기다린다. 이상없음 사인이 떨어져 아침 일과 진행직원과 사무실 업무 마무리 직원이 갈린다.
" 경호 너는 바로 출발해."
" 넵 "
경호는 사무실에 들러 인수인계준비와 자리 정리를 하고 탈의실로 향했다. 탈의실로 갈때마다 매번 마주치는 교정관을 피하기 위해 화장실을 들러 10분간 명상을 하다가 대변실 밖에서 들리는 대화 소리중 교정관의 목소리가 있나 기다린다. 대부분은 하루의 힘찬 시작을 알리는 교도관들의 한숨 소리와 꽈리터지는 소리 말고는 없는것 같다.
대변실 문을 살짝 열어 사람들을 살핀후 후다닥 탈의실까지 뛰어간다. 다행히 가는도중이나 탈의실안에서 교정관과 마주치지 않았다. 땀이 흥건하게 등과 겨드랑이를 적시는 바람에 여자를 소개받았다가는 입구에서 퇴짜 맞을 차림세가 되어버렸다. 이상하게 처다보는 옆 동료의 시선을 무시하며 탈의실을 나와 입구 로비까지 또 뛴다.
" 야이씨? 조용히 안다녀?"
그 목소리. 교정관의 불길한 부름같아서 못들은척 입구를 뛰어나온다. 미리 잡아놓은 콜택시에 올라탄 경호는 그대로 서울로 갈까 터미널로 갈까 망설인다.
" 저기.. 기사님 서울 터미널까지 가려면 얼마나 나올려나요?"
" 응? 서어울? 거기까지 갈라면... 왔다갔다 해야하니까니 십오만원은 나오지? "
" 십오만원이요?! 그냥.. 읍 터미널로 가주세요."
기사도 딱히 아쉽지 않다는 듯 바로 출발해버린다.
"띠리링"
경호의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은선일까 ? 윤경일까? 아니면 교정관일까.. 은선. 그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슬쩍 액정을 확인한다.
" 나총명입니다. 출발 하셨습니까? 저는 여덟시 반쯤이면 도착할거 같군요. "
어떻게 답변을 해줄까 고민하던 경호는 터미널에 도착하여서야 답장을 한다.
" 저는 이제 터미널 버스에 오릅니다 정시에 도착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버스시간이 딱 맞물려 도착한 덕분에 얼마 기다리지 않아도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평일이라서 군인이나 젊은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는 버스 안은 시끄러운 라디오 소리만 왱왱 거린다. 예전 군대에서 서울로 휴가를 갈때와 비슷한 감정이 속에서 소용돌이 치는것 같다. 푸른 산과 바람에 실린 풀냄세, 파란 구름이 진저리 나도록 물린 그때쯤 한번씩 이렇게 매연냄새를 마시러 가줘야 마음에 평화가 오는 그런 기분말이다. 이제 눈을 감았다가 뜨면 콘크리트 기둥이 빡빡히 서있는 동서울 터미널에 도달할 것이다. 창문에 기대서 잔잔한 버스의 엔진음을 자장가 삼아 잠든다.
예상보다 삼십분 더 일찍 , 여덟시에 약속 장소에 도착해버린 총명은 경호에게 전화를 걸어 더 일찍 나와줄 수 있는지 물어보려 했지만 10통이 넘도록 받지않는 바람에 약속이 펑크났나 의심을 한다. 그냥 집에 가버릴까? 이사람 안나오는거 아니야? 마음속으로 갈등을 거듭한 총명은 약속 장소인 카페에서 삼십분만 기다렸다가 전화를 다시 걸어 보기로 한다.
아침 출근전 카페인을 보급받기위해 모여든 젊은 남녀가 저마다 개성있고 멋진 차림으로 계산을 하거나 커피를 받아들어 나가는 중 ,뿔태안경에 통넓은 청바지와 꾸깃꾸깃한 체크무늬 초록 셔츠를 입은 총명이 어설프게 서성거리고 있다. 바짝마른 얼굴과 그 못지않게 마른 상체를 가까스로 가려준 옷이 말려들어가게 팔짱을 끼고서 시선처리를 못해 안절부절 못한다.
"13번 손님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그말을 듣고 잽싸게 다가가 받아든다. 2층 햇살이 잘 들지않는 안쪽 2인석에 앉아 다리를 꼰다. 핸드폰으로 오늘 아침 뉴스를 슬슬 둘러보는 중 한모금씩 아주 조금, 커피를 머금는다. 10분후. 주위를 둘러보고 어떤 젊은 여성과 눈이마주처 황급히 시선을 핸드폰으로 옮기기를 몇번. 삽십분이 다가옴에따라 엉덩이를 의자에서 때고싶어 들썩인다. 그때마침 전화가 걸려온다.
" 여보세요."
" 네 저 경호입니다. 도착 하셨나요? "
" 진즉에 도착 했어요 여덟시에요."
" 엄청 일찍 나오셨네.. 저는 터미널에 도착 했구요 오분정도면 도착 할 거같습니다."
" 네 빨리 오세요."
" 네 "
통화를 마치고 반잔 남은 커피를 다시 입에 가져간다.이제 누군가 여기 앉을 거라는 안전감이 들어서 그런지 아까보다 더 자연스럽게 자세를 고쳐앉는다. 주변을 둘러볼때도 대담하다. 남은 커피를 모두 입이 들이부은 다음 올라오는 계단쪽을 응시한다. 일분, 이분, 이분 삼십초, 항상 약속 시간 십분전에는 도착해야한다는 신념으로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는 사람으로서 경호는 좀 예의가 없는 사람이지 않나 하는 선입견이 슬슬 총명의 마음을 채운다.
한가로운 시간. 계단을 올라오는 남자 하나가 눈에띈다. 이시간 저남자. 슬림한 청바지와 흰색 운동화, 단색 청남방을 입은 키큰 남자가 여자 두명이 앉아있는 자리와 총명이 앉아있는 자리를 번갈아 둘러보더니 총명쪽으로 다가간다.
" 저기 실례합니다만 나총명씨 되십니까?"
핸드폰을 만지는 척 하던 총명은 얼굴을 그대로 아래로 떨군체 눈만 위로 치켜든다.
"경호씨?"
" 맞군요. 자리좀 앉겠습니다."
총명 맡은편 의자에 털썩 앉는다.
" 서울행은 오래간 만이라 정신이 없네요. 길도 좀 바뀐것 같고. 총명씨는 좀 일찍 오셨죠?"
" 네. "
경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을 내민다."
" 저는 드릴 명함이 없군요."
" 괜찮습니다. 자리를 옮겨볼까요 아니면 차라도 하나 들고올까요?"
" 아니요 여기서 잠깐 있다가 갑시다."
" 네 그러죠 "
경호는 자신이 들고온 호출기를 일층에 가져다 주고 녹차를 들고올라온다.
" 신철 박사님과는 어떻게 일고 지네신건지."
" 저희 소에서 복역중이신대요. 모범수 이시기도 하고 뭔가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시기에 약간 편의를 보아드리려고 핑게를 대겠지만요. 친분이 쌓여서 이런 저런 애기를 하다가 사업 분야에 발을 넣어보는게 어떻냐고 권유를 받았습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인지 알고계시구요?"
" 응용 과학? 맞나요? 개발단계에서 시범제품까지 완성이 되었다고 하시든데요? "
" 네.. 개발이야 박사님이 거의 하신거만 테스트용 제품 생산과 시행착오는 저의 몫이었죠. 돈이 그나마 넉넉해서 이렇게 일찍 마무리 할 수있었어요. "
"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
" 말도 못합니다.. 보조를 쓸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혼자 그 .. 하..차라리 제가 감옥에 있고싶드라니까요."
" 그렇군요. 그나저나 저는 신철씨 조수분이 이렇게 젊으신분인줄 몰랐네요.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십니까?"
" 서른 넷입니다."
" 아 제가 더 어리군요."
" 그래요?"
" 네 편하게 말 놓으시고 말씀하셔도 됩니다."
" 그럼 그러지. 신철 박사님이랑은 대학 2학년 때부터 알고 지내신 분인대, 석사랑 박사준비까지 내가 많이 도움을 받은 분이야. 그분이 하셨던 연구에 참여하면서 많이 뵈었지."
" 신철씨가 구속되기까지 전부 옆에서 보아오셨겠군요."
" 그렇지. 발품 팔아가매 연구비 구걸하실때도 중국에 건너가셨을때도 같이 있었지. 나말고 세명 더 있었는대 다 도망가고 지금까지 버틴건 나뿐이었어. 다들 불안불안 했었던거야."
그들은 다른사람이 엳들을까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이기를 30여분. 주위에 사람들도 제법 많아지고 수상한 눈들도 그만큼 많아진다.
" 그럼 일단 제품 시연을 좀 볼수있을까요. 저보다 위에 사수분도 엄청 궁금해 하시거든요."
" 믿을만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보여주기 어렵지만. 의심할 사람조차 주위에 남아있지 않은 마당이니.. 어쩔수 없지.. "
" 여기서 얼마나 가야하나요?"
" 버스타고가면 금방이야. "
" 그럼 갈까요"
" 그전에 알아야할게 있는대말이야.. 당신네 둘이서 우릴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뭘 해줄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
" 그건.. 음.. 저는 통역을 주로 해드릴 생각인대요. 만약 시범제품이 제 상상을 뛰어넘는다면 무슨짓이든 할 생각입니다."
" 무슨짓인든? 그러니까 뭐"
" 지금 형님이 생각하시는 그거말이에요."
" 내가? "
" 신철씨 석방일이 대략 오륙년 남았잔습니까. 시간이 더 지체되기전에 중국 측과 계약을 마무리 하시려면 그전에 빨리 나와야 하지 않겠어요?"
" 가석방이라도 해줄려고?"
" 아니요 그건 저희들 능력 밖이에요. 정상적인 적법절차로는 도무지 방법이 없다는걸 아셨으면 좋겠네요."
" 탈옥?"
" 그만한 가치가 있다면 뭘 못하겠습니까?"
" 그렇게까지 할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대.. 지금의 이룬것들을 다 버리고 갈수 있다는 말인가? 교도관이라면 그만한 각오나 꿈이 있었던거 아니야?"
" 누구나 처음엔 그렇죠."
"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네.."
" 피해자들에게 그말 해보십시오"
" 아니다.. 그만하자. 일단.. 너의 각오를 보았으니까. 가보자고."
그들은 슬슬 일어나 어색했던 카페를 나온다. 버스정류장으로 가다가 빈 택시가 멀리서 오는 것을 확인한 경호가 그 택시를 불러세운다.
" 여기서 얼마 안걸린다깐."
"그러니까 택시를 타야죠."
경호는 앞좌석에 먼저 들어간다.
" 나참.."
총명은 뒷자석에 타며 행선지를 알려준다.
" 오늘 날씨 참 좋네요."
" 이게 좋아? 구름한점 없어서 밋밋한 파랑천장 같잔아. "
" 우리집 천장보다는 좋다구요.."
총명의 말대로 약 15분. 이리저리 구불구불 도로를 누비던 택시가 아파트보다는 3배정도 커보이는 공장단지에 세워준다. 택시비를 계산한 경호는 건물 외관을 보며 감상평을 한다.
" 우리소랑 분위기가 비슷하군요. 깨끗한거 빼구요."
" 그냥 공장에 비하면 저건 vip야. 월세가 얼마나 비싼대."
앞선 총명의 뒤를 졸졸 따라간다. 대형 화물 트럭과 승합차가 빼곡히 주차장을 매우고 있어서 건물주의 마음을 흐믓하게 해줄것 같다. 저중에 시범제품이 있을까 하는 기대로 두리번 거리던 경호는 건물안으로 들어가는 총명을 보며 살짝 실망을 보여준다.
" 저많은 차중에 총명형님 차는 없는겁니까?"
" 연구비가 수도꼭지 틀면 나오는줄아냐? 아껴야지. "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이층에 도착한 두명은 캄캄한 공간에서 눈만 껌벅인다.
" 어씨 스위치 여기 있었는대?"
발에 치이는 공구나 깡통소리를 귀담아 들으며 총명의 뒤를 따르던 경호는 곧 하늘에서 깜빡이는 불빛을 느낀다.
" 연구비가 어쩌구 하시더니 층을 다 빌리셨네."
" 보안문제도 있고 부품 하나하나를 맨들여니 여간 힘들어서 말이야.. "
하얀 천장과 기름이 여기저기 찌들어있는 회색 바닥, 용도를 알고싶지 않는 이름모를 부품과 기계들이 여유없이 들어차있다.
" 여기서 먹고자고 하십니까?"
" 거의? 저쪽에 자는곳이랑 주방, 화장실 다있어"
경호는 그 저쪽이 궁금해서 넓은 작업실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중간에 큰 천으로 이것저것 덮어놓은것을 지나치며 두리번 거리다 느낌이 오는 문을 발견한다. 허락따위 생략하고 문을 벌컥 연다.
" 이거.. 신철씨한태 전부 말씀을 드려야 겠는대요?"
심플한 인테리어와 조명들, 사치스런 가구와 최신 가전제품들, 번들거리는 은색 식기와 만만치않는 욕실, 4인용 욕조, 무슨 무슨 타워나 어쩌구저쩌구캐슬의 내부를 방불케한 주거공간은 경호를 실소하게 만들었다. 언제 뒤에 왔는지 총명이 변명을 한다.
" 이거는 말이지.. 일종의 작은 보상이랄까.. 외로움과 노고 아니면 누명의 보상이라고.. 그리고 보이는 것처럼 그리 돈이 많이 든것도 아니야.."
" 어허?"
" 크흠.. 이걸보러 온게 아니잔냐? 이쪽으로와봐."
하얀 천으로 무언가를 덮어놓은 곳으로 경호를 대리고 간다.
"저기 반대쪽에서서 나랑같이 걷자고"
시키는대로 반대쪽에 선다. 길이와 높이를 볼때 마치 커다란 트럭이 컨테이너트레일러를 달았을 법직한 크기로 보인다. 펄럭 소리를 내며 힘겹게 반씩 모습을 나타낸다.
" 트럭이네요? 비싸보이는대요?"
" 내가 손재주가 좀 있어."
" 그게아니라, 이거 유명한 회사에서 출시한 트럭 새것같은대요?"
" 디자인에는 좀 약해.."
" 좀 살펴볼게요?"
" 뭐 만지거나 누르지만마"
경호는 핸드폰 카메라를 동영상찍기로 바꾸어 이리저리 촬영한다. 타이어휠부터 넙적한 철판대기가 바둑판처럼 붙어있는 바닥, 연료분화구처럼 생긴 이상한 것들, 사각형 짐칸내부, 운전좌석과 비행을 위한 항법조종장치, 등등 경호가 보기에 어설프게 덕지덕지 붙인것이 아닌 정식 출시체품이긴한대 처음보는 그런느낌의 트럭이었다.
" 잘 만드셨네요. 뭔지 모르겠지만.. 혹시 시범운행같은건 해보셨어요?"
" 보여줘? 어렵지 않은대"
" 오 부탁드릴게요 "
" 조수석에 타봐"
" 아니요 저는 외관이 나오게 전체적인 모습을 찍어야 해서요."
" 교도관이라는 사람이 겁이 많네? 이거 찍고 어디에 올리는거 아니지? "
" 그런거 할줄도 모릅니다.."
총명이 조종석에 올라가서 이것저것 누르고 돌리고 비틀고 바쁘게 움직인다. 조금있으니 트럭에서 웅웅웅 하는 소리와 바닥의 진동이 전해온다. 피스톤 엔진음과는 다르게 전자레인지 돌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밤에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같기도 하다. 이 공장의 천장이 높아서 어느만큼 움직여도 상관없다싶어 경호의 기대가 아주 커진다.
" 조그만 기다려. 역중력장이 충분히 발산되려면 충전이 되야해!"
" 얼마나요?"
" 이십분정도!"
" 오래걸리내,,"
" 뭐라고! 크게말해!"
경호는 손을 절래절래 흔들다가 등받이가없는 의자를 가져다가 앉는다. 충전이 되고있는 모습을 담고있는 핸드폰 액정을 생각없이 보고있다가 문득 자신이 왜 이자리이 앉아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저 물건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공직자인 자신이 선배 공직자의 모습을 통해 보게된 자신의 미래 때문이다, 라는 변명을 하지만 바보같다는 양심의 목소리가 떠나지 않고 계속 속삭인다.
" 정말... 뜨긴 하는건지.."
혼잣말로 중얼거리림을 총명이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십분이 지나는 동안 총명또한 불안하긴 했었다. 하필 그날 고장이 나거나 오류때문에 멈춰버리면 얼마나 쪽팔릴까. 사기꾼이라고 대놓고 말하진 않겠지. 눈으로 말할태니까. 경호는 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느라 잠시 촬영을 멈춘다. 사기꾼은선이라고 적힌 핸드폰 액정을 손가락으로 미는 경호는 입가의 미소가 싱겁게 띈다.
" 여보세요?"
" 아 왜 입금 안해주세요? 지금 어디에요?"
" 맞다... 계좌 보내주셨죠?"
" 보낸지가 언젠대요!! 진짜 사람이 너무하시네요? 저같으면 바로당일 입금했겠어요! 그거 얼마나 한다고!"
" 정말 죄송해요.. 야간 근무라서 낮에는 정신없거든요.. 일부로 그런게 아니고 까맣게 잊고있었어요.. 오늘 오후에 당장 입금해드리겠습니다. "
상대방의 목소리는 더이상 들리지 않았다. 통화를 일방적으로 끉어버릴만큼 화가 난걸까?
" 어이! 다됐어!"
총명은 트럭 창문을 내려서 얼굴을 내밀고 고개를 까딱거린다.
" 넵 한번보여주세요"
내밀었던 얼굴이 다시 들어간다. 트럭의 웅웅거림이 점점 더 심해지는듯 싶다가 경호 자신의 몸이 약간 뒤로 밀리는 느낌을 받는다. 밀리는 느낌이 착각이 아니었는 듯 주변의 작은 수공구나 비닐들이 대굴대굴 굴러다닌다.
" 이거 안전한거 맞나요? 비행기처럼 바람이 훅하고 부는거 아니에요?"
" 바람이라니! 이건 수면장력 같은 원리가 아니라니까. 지금 느끼는 중력현상 이상의 것은 없으니까 겁먹지마."
" 허 겁을 먹다니요. 단지 몸의 안전을 생각한것 뿐이에요."
경호의 눈으로 보기에 트럭이 살짝 들썩인건지 들린건지 뭔가 달라보였다. 경호는 쭈그려않아 트럭의 바닥을 확인한다.
" 오! 떠있는대요? "
" 이게 기본 주행단계야 이상태로 자동차처럼 도로를 주행 할 수 있어. 그다음은,"
트럭에서 들리는 묵직한 음색이 더 짙어진다. 마치 우주에 동동 떴는것처럼 쉽게 위로 떠오른다.
" 얼추. 이미터정도 떠올랐나봐요! 괜찮은거에요? 떨어지면 큰일나겠어요!"
" 어허.. 수십번도 더 해본거야. 이정도보다 더 떠오를 수 있어! 아마 ..에베레스트 할아버지 수염정도 뽑아올 수 있을걸?"
" 내려와봐요."
"왜"
" 저도 한번 타봅시다."
" 그래 "
트럭이 아까처럼 바닥위로 아슬아슬하게 내려온다. 조수석 문을 열고 올라앉은 경호는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 흥분했냐? 이정도가지고 뭘.."
" 이거이거.. 아까처럼 올라가보세요.."
수많은 조작버튼중 유난히 빨간색 버튼을 시계방향으로 돌리니 몸이 순간 무거워 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 어어어.. 이거 밖에서 시운전 가능해요?"
" 아직안돼. 시운전이 불가능 하다는게 아니라 세간에 공개하기는 좀 일러서. 신철박사님이 의리가 있으신 분이라 국내에선 공개 안하기로 했어"
" 그.. 중국에 있다는 회사와 말이죠?"
" 그래 우리 스폰서이자 고객이지. 여기 공간이 어느정도 넓으니까 한바퀴 돌아봐?"
" 네.."
트럭이 공장 옆면 외벽쪽으로 슬슬슬 다가가다가 앞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아득히 먼 옛날 경호가 처음 놀기기구를 탓었던 그당시의 느낌이 살아나는 바람에 소리를 지른다.
" 우어어! 천천히! 이거 느낌 이상해요!"
" 뭐가이상하다는거야? 지금 속도가.. 20킬로구만? "
공장 외벽을 따라 한바퀴 뱅글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다.
" 어때 진동도 적고 소리도 조용하지? 이상태로 하늘 높이 떠오르면 외압이랑 온도에 맞춰서 조절이 된다? 산소까지 나오고. 기막히지?"
" 우주에는 갈수있어요?"
" 실내 생존장치나 실외 보강을 좀 해야하고, gps를 손봐야 겠지만 가능해. 이 시범제품은 어디까지나 시범용이잔아? "
" 속도는요? 빨라요?"
" 공기저항을 고려하지 않고 외관이 설계되서 초음속 비행기처럼은 빨리 못가.. 그거는.. 손만 좀 보면 되겠지?"
" 그렇군요.. 그 영감님 다시 봐야겠는대요?"
" 나는?"
" 총명이 형님은 처음부터 그렇게 보였어요. 전형적인 팬잡이... 신경이 날카로운 그런 이미지 있죠?"
" 내가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가보다.."
트럭은 바닥에 내려온다. 놀이기구에서 내리고 싶지않은 마음처럼 걸음이 무겁다.
" 이런? 영상을 안찍었어요.. 살짝 뜬것만 찍혔겠네요.. "
" 그정도면 충분하잔아? 직접 시승도 했으니까 말만 잘하면 되는거 아냐?."
" 그래요. 뭐 이거면 되겠죠. "
둘은 하얀 천을 다시 트럭 워로 덮는다.
" 충분히 본것 같으니까 전 이만 가볼개요 버스시간 때문에.. 내일 출근하려면.. 일찍 가야겠어요."
" 벌써가? 점심이나 같이 먹을려고 했는대. 피자랑 치킨 시키고 맥주 한잔 안해?"
" 정말 땡기는대요. 오늘 볼일이 더 남았네요. 다음에 만나면 그때 한잔 하시죠."
" 그래그래. 평소처럼 혼자 시켜먹뭐. "
엘리베이터까지 마중을 나간 총명이 손을 흔들어주며 비밀번호를 눌러준다.
" 다음에 봅세"
" 네 쉬세요."
문이 닫히고 금세 일층에 도달한다. 12시39분. 오늘 볼일을 다 보았음에도 시간이 넉넉하다. 점심을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과 대학생일것 같은 사람들 틈에 합류하여 무념인 체 인도를 걷는다. 수많은 편의점과 카페중 하나를 골라 간단히 점심을 먹고싶었던차에 은행건물 옆 이층짜리 카페를 눈여겨본다. 점심을 간단히 먹은다음 바로 은행에 들러 입금을 해주자.. 아니? 저녁쯤 그녀에게 저녁을 대접하고 돈을 직접 건내줄까? 이상하리만큼 그녀에게 집작하는 자신이 한심해보여서 처음 생각대로 하기로 마음먹는다.
카페일층에서 불고기맛샌드위치 한개와 라때한잔을 주문한다. 진열된 보틀과 원두를 구경하던경호는 자신의 주문번호를 호명하는 소리에 점심거리를 챙긴다.
일층은 이미 들어올때부터 앉을 자리가 없었으므로 이층을 노려본다. 이층도 만만치않게 붐비는것 같았지만 통로쪽 2인석이 비어있어 잽싸리 앉는다. 빠르게 흐르는 음악에 취하며 먹고 마시던 경호는 거의 다 먹을때즘 다시 핸드폰을 바라본다.
아... 한번.. 시도해볼까... 거절하면 뭐.. 다시 얼굴 마주칠 일은 없을것 같은대.. 아닌가.. 이번에 이 여자 못잡으면 평생 윤경과 아침을 맞이하게 될지 누가알겠어? 매일매일.. 교소도로 함께 출근하고. 근무스케줄을 똑같이 맞추고.. 밤에 잠들기 전까지 수다를 들어야하고.. 반면에 은선은 아마 수다스럽지 않을것이다. 나이도 좀더 어리고 주말마다 선을보러 다니지 않을것이다. 잠깐. 교도소를 평생 다녀야하나?
경호는 은선에게 저녁약속 문자를 보내기로 마음먹는다. 한글자 한글자 찍을때마다 평소와 다르게 엄청 오타가 난다. 두줄도 안되는 내용임에도 다 작성하는대만 10분넘게 걸렸다. 내용이 이상하지 않나? 번호는 이번호가 맞나? 다 작성한 경호는 전송을 누른다음 핸드폰액정이 안보이게 뒤집는다. 쿵쾅거리는 마음때문에 라때가 맹물인지 인삼다린물인지 전혀 맛이 느껴지지않는다.
약 5분.. 핸드폰의 진동을 애타게 기다려보았으나 전혀 미동이 없다. 이건. 거절인건가? 거절이면 최소한 죄송하다고 문자라도 보내주지.. 실망스런 마음을 추스리며 일어나려는대 진동이 이잉! 하며 탁자를 흔든다.
" 어.."
대학 수시 합격자 발표 확인하듯이 액정을 손으로 가린다음 천천히 손을 내린다. 윗부분을 보았을때 분명 이글자는 스팸과 같지 않았다. 조금더 내린다. 장문의 글은 아니었고 상단의 한줄 중에서 반을 조금 넘긴것 같다. 긍정적인 대답치곤 이거 너무 짧은대? 라고 생각한 경호는 손을 훅 치운다.
( 왠돈? 돈빌려줬든가? 몇시?)
이 여자. 반말로 답장을 보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설마 내가 입금을 지금 했고 또 뭔 돈을 주겠다고 착각한건가? 하는 복잡한 생각이 이어폰마냥 꼬인다. 어찌되었든 마지막 말은 분명히 오늘 저녁을 같이 먹겠다는 긍정이 확실했다. 은선이 답장을 기다릴지 모르니까 바로 답문자를 쓴다.
(저 지금 볼일이 있어서 서울에 왔거든요. 거기 도착하면 다섯시쯤 될거같아요. 여섯시 삼십분에 xxx영화관 앞에서 보는거 어때요?)
이번엔 1분도 안돼서 답문을 완성했다. 오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전송을 막 눌렀는대. 그 번호 뒷자리가, 이상하게 익숙했다. 아니 은선의 번호를 자신이 외우고 있었던가? 경호에게 답장이 왔던 번호를 확인해 보았는대.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로 뜬다. 그러나. 외우고있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눈과 입에 익은 번호였다. 왜 그번호로 저녁약속을 잡은걸까. 실수로 은선의 번호를 두번 저장하는 과정에서 한번을 이름없이 저장했나? 가슴한켠 직관이라는 놈이 속삭인다. 은선이 아니라 자신이 저장해두지않은 직장동료중 한명일 거라는. 얼마나 꼴보기 싫은 사람이었으면 저장을 안했을까. 그보다도 이사람은 누구지? 어쩌면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고 긍정적인 결론을 내린다. 분명히 은선에게 보냈다면 씹히거나 거절당했을 것이다. 거절당했을 때보다도 지금 느끼는 실망이 더 가볍다 확신한 경호는 천천히 터미널로 향했다.
돌아가는 버스안에서 내내 누굴까. 고민해본 결과 적어도 교정관이 아닐것이라는 점에 안도했다. 이층 일반수형자 교도관중 한명이거나 친하지않은 다른소 동기이거나. 있다가 약속장소에 누군가는 나오겠지. 지금이라도 약속을 취소한 후 은선에게 말을 걸어볼까 ? 직관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그렇게까지 하기는 귀찮았나보다.
허름한 터미널에 내린 그는 다른 여타 휴가복귀 군인들과 같은 표정으로 먼산을 바라본다. 택시를 잡아서 그나마 문명화 되있는 자신의 거처로 향한다. 애초에 입고가려 했던 옷 대신에 상대방이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는 한도 내에서 그나마 편안한 청바지와 셔츠를 고른다. 나름 예의를 갖추어 세탁하고난후 한번도 입지 않은 것을 고른것이다. 동기라면 꿀리지 않아야 하므로 머리도 손을 본다.
약속시간 한시간 전. 택시를 타면 일찍 도착할 것 같아 버스를 선택한다. 아직 퇴근시간이 맞물리지 않아서 비교적 한산하다. 낮이 길다해도 아까와 달리 하늘은 누럿하게 물들어가고있다. 기분도 주말 저녁 싫은약속에 끌려가는 딱 그 기분을 느낀다.
약 40여분 졸다깨다를 반복하다가 신기하게 내릴때즘 눈이떠진다. 정류장에서 영화관까지 기껏해야 걸어서 5분. 15분전에 도착해서 혼자 뭘할까. 느긋느긋 주위를 둘러보며 걸아가던중. 은선과 부딯혔던 장소를 지나간다. 물론 은선이 그곳에 있지 않았지만 그녀의 얼굴이 아리아리하게 떠오른다.
천천히 간다고 늘창댔으나 십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5개의 출입구중 사람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가장 오른쪽 문옆에 서서 다른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서성대기 시작한다. 작자의 의도를 알수없는 조각상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가 다시 일어나서 그 둘래를 빙글빙글 돈다. 그때. 누가 나왔을까. 라는 질문에 예상했던 사람이 아닌 다른 아는 사람이, 아니 어쩌면 그냥 비슷한 사람일지 모르는 인물이 영화관 입구에서 두리번 거리는 모습을 목격한다.
윤경. 설마 저사람인가? 작은눈과 억지로 짜집은 쌍커풀. 눈못지않게 실같은 눈썹과 과하게 짧지않은 검은 단발머리. 수영으로 다져진 어깨와 허벅지, 자신과 비슷한 키인 174정도 되는 사람이었다.
꽉끼는 연한 청바지에 런닝화 그리고 야구티셔츠는 윤경이 당연 입을만한 매칭이었으니 경호는 더이상 기다리지 않고 그녀에게 다가간다. 가장 일어날 수 있을 최악의 상황중에 그나마 나은것 같았다. 젊은 여자니까..
경호가 그녀에게 다가가지만 그녀는 알아보지 못한건지 계속 두리번 거린다. 설마 오늘 선보러 나온날인대 기가막힌 우연으로 마주친거면 어쩌지? 선보러 온사람 옷차림치곤..? 왜 못알아보지? 경호는 그녀 등 뒤로 다가가 오른쪽 검지로 윤경의 오른쪽 어깨를 톡톡 건드린다.
" 선배님.."
" 네??"
고개를 좀 오버해서 휙 돌리니까 그녀의 단발머리가 찰랑거리며 휙 돌아간다. 경호는 그녀의 샴푸냄세와 화장품 냄세를 눈치채고 자신의 우연에 대한 가능성이 정확 했음을 알게된다. 그녀는 평소 아줌마와 아가씨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지닌 모습과 달리 완벽한, 이십대 후반. 뽀얗고 붉은 색깔의 꽃 같은 아름다움을 입고 있었다.
" 아. 아... 죄송합니다.. 사람을 잘못 본거같네요."
" 뭐? "
그녀는 금세 누나가 어린 동생에게 지을때 쓰는 미소로 경호에게 대답한다.
" 아닌가? 저기 윤경 선배님 맞으시죠?"
" 너 왜그래 오늘? "
경호는 윤경이 자신과의 약속때문에 나온건지 선때문에 나온건지 종잡을 수 없다는 혼란을 이유로 당황했다 믿고싶었다. 허나 그날 윤경은 분명 은선 못지 않았다고 느꼈다. 그렇다면 은선이란 여자도? 화장을 지우면 평소 윤경처럼 비슷해질까?
" 오늘은 평소모습이랑 너무 달라보여서.. 대답해주지 않으셨으면 그냥 갈뻔했어요."
" 뭐가다른대?"
" 어.. 그게... 분위기가 조금?"
" 구체적으로 뭐가 다르냐고."
" 아. 지금 보니까 안다른거같아요."
" 이놈이?"
경호의 왼쪽 볼을 손으로 살짝 꼬집는다.
" 그런대 내가 너한태 돈받을게 있었던가? 기억이 안나네?"
뭐라고 대답해야 엄한 자신의 돈을 지킬 수 있을까?
"그건 그냥.. 구실이구요.. 우리 한번도 개인적으로 만나서 밥한끼 먹어본적 없었잔아요? 그래서 간단히 저녁이나 함께 먹었으면 해서요."
말을 하고보니 마치 자신이 이사람에게 좀더 다가가려는 의도로 오해할 수 있겠다 싶다.
" 그렇려면 좀더 꾸미고 왔어야지."
" 아니. 그게. 집에 세탁기가 요즘 시원치않아서 이러저러하네요.."
" 뭐야 그 뭉뚱거리는말투는?"
" 윤경선배님은 뭐 드시고 싶으세요?"
" 나? 아무거나. 너가 미리 정하고 왔어야지 그걸 이제 물어보냐?"
" 이근처에 파스타 맛있는곳 있다는대 가볼래요?"
" 옷에 튀면 어떻해? 다른거"
" 그러면, 베트남쌀국수는 어때요? "
" 시큼해서 싫어."
" 음... 철판 볶음밥은요?"
"그거 냄새좀 심하지않아? "
" 볶어서 나오니까 괜찮을거에요."
" 지금 몇시야?"
" 여섯시 삼십분이요."
" 그럼안되."
" 네? 왜요?"
" 여섯시 넘어서 밥먹으면 안되. 살찌는거 모르니?"
" 선배님은 한참 더 찌셔도 되요. 지금 충분히 말라서.. "
" 니눈에나 그렇게 보이겠지. 어쨌든 안돼."
" 그럼... 스무디마실래요? 거기 먹을거도 팔아서, 전 거기있는거 먹으면 될거같아요."
"나는 굶는대 너만 먹겠다고? 내가 불쌍하지도 않냐?"
윤경은 마음을 정했는지 걷기 시작한다. 경호는 그 뒤를 따라간다.
" 간단한거 시켜서 같이 먹으면 되죠. 양이 많지 않아서 부담안가실걸요?"
" 가서 생각해보자."
" 네.. 선배님 내일 휴무셨죠? "
" 응 넌?"
" 저는 .. 주간이요.. "
" 그렇구나."
" 내일 뭐하세요?"
" 내일.. 글세.. 저녁에 남자 소개받기로 했는대 어떻할까. 분명히 또 이상한 아저씨같은 사람 나와서 추잡떠는거 아니야? 하 .. "
그 물고가 터진 것을 시작으로 신세한탄과 처지가 아직 괜찮은 것이라고 재확인을 바라는 질문이 반복된다. 걸어서 15분가량 매장에 들어서 주문을 하고 자리를 잡아 음료를 받기까지 그칠생각이 없어보인다. 경호의 입에서 연신 네네 그렇군요 아이고 저런 이 세가지 문장이 떠돈다.
" 그럼 내일 가지말아요."
" 가지말라고? 그럼 내일 나 뭐하냐?"
소에와서 일이나 하라고 하고싶었지만 마음에 없는 말을 한다.
" 내일 저녁도 같이먹어요. 오늘 저녁 안먹었으니까 내일은 괜찮잔아요."
" 매일매일! 지켜야 효과가 있는거야. 안그럼 배나온 올챙이된다? 너 배좀 봐봐."
" 전 배 안나왔어요! 저녁을 먹는대신 운동하잔아요. 먹을건 적당히 먹고 운동을 해야죠."
경호는 셔츠 밑부분 단추만 풀어서 복근을 살짝 보여준다.
" 어머.. "
손으로 입을 가려서 가려봐야 의미없는 행동을 취한다.
" 의외다 너?"
" 의외라뇨.. "
남녀는 그렇게 9시까지 평소에 하지 않았던 대화주제로 시간을 보낸다.
"야야 지금 몇시냐?"
" 한 아홉시 넘었을걸요?"
" 너 그거봤어? "
" 뭐요?"
" 영화. 공포영화인대 남녀가 몸이 바뀌어서 미제사건 케내는거 있잔아."
" 아.. 뭔지 알것같이요. 안봤죠. 같이 보러갈 사람도 없는걸요."
" 가자. 너가 이거 사줬으니까 영화 보여줄게."
계획에 없는 일정이지만 이상하게 싫진 않았다. 화장때문인가. 분위기 탓인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대답한다.
" 저 그런거 잘 못보는대.. 선배님 있으니까 괜찮겠죠."
" 사실 나도 잘 못봐. "
" 그럼 다른거보지 왜 그걸.."
" 외국인 남자주인공이 처음보는 사람인대 잘생겼드리고."
" 아아.."
영화 시작시간을 우추해볼때 12시를 넘길것 같다.
" 저 버스끉기면 선배님이 태워주실건가요? 차로 가면 20분이면 가는대."
" 택시타."
" 그래도.. 밤에 택시잡기가 요즘 좀 힘들잔아요.. 요금도 훨씬 비싸고.."
" 아증말! 너네집이랑 내집이랑 방향이 완전 반대쪽인건 아냐?"
" 그래요? 그건 몰랐어요. 그럼 제가 알아서 가져뭐.."
열시 시작인 영화를 보기위해 영화관 내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때운다. 팝콘과 콜라를 들고서 썰랑한 상영관에 들어간다.
" 어머 사람들 왜이렇게 없어?"
" 평일이라서.. 그렇겠죠? 저쪽에 두사람 보이네요."
"커플인가보다. 짜증나.. 사람 얼마 안올거 같으니까 아무대나 앉자."
아무대나 잘 보일만한곳을 윤경이 찾아서 먼저 앉는다. 지정석과 크게 위치는 다른거같지 않았다.
" 사람들좀 더 왔으면 좋겠다."
" 맞아요.. 열명만 더 왔으면.."
영화 시작할때까지 두커플이 더 들어왔을뿐 이 이상 늘지 않는다. 상영관이 캄캄해지자 마치 그공간에 그 두사람만 있는것 같은 착각이 든다.
12시 30분, 영화관 앞 도로에 차가 드믄드믄 지나다닌다. 그시간 영화를 보고나온 커플들 사이 경호가 혼자 터덜터덜 서성인다. 영화관 주차장을 막 나온 노란색 경차 한대가경호앞에 선다.
" 경호야 먼저갈게."
경호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인다.
"넵 조심히 들어가세요."
경호는 몸을 돌려 그차가 가는지 안가는지 확인하지도 않은체 차량 운행 반대 방향으로 걸어간다. 월급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경호는 한주간을 9만원으로 버텨야 했었다. 택시를 타고가느니 걸어서 40분거리 바로 교도소 근처 방문객과 수형자가 잠을 잘수 있게 만든 특별 접견실에서 잠을 자는게 나을 것 같았다. 집까지 걸어가려면 2~3시간. 접견실까지길어야 1시간. 가로등과 차량의 전조등이 지나갈때마다 경호의 찡그린 얼굴과 처진 등을 비춰주면 걸음이 조금씩 더 빨라지는 것 같다.
다음날, 가장 일찍 소에도착해서 야간 근무자들을 구경하던 경호는 어제 촬영한 동영상을 떠올린다. 김교위가 본다면 동영상을 조작했냐며 내심 흥분할 일이 아닐까 기대한다.
업무시작 30분전 호봉이 낮은 동료 직원들이 속속 도착하는 와중에 김교위가 껴있다.
" 좋은 아침입니다. 일찍 나오셨네요?"
" 응 너도 일찍 나왔네?"
" 어제.. 소 부근 접견용 숙소에서 잣거든요.."
" 엥? 멀쩡한 집놔두고 거기서잣냐?"
" 그게..."
" 경호 너 어제 소개받으러 서울 갔다왔다며? 어때? 잘됐어? 이쁘디?"
누가물어봤는지 모르지만 누구든 상관없었다. 그가 막내니까. 큰소리로 고분고분 설명했다.
" 서울 터미널에서 봤는대요 오전에 헤어졌어요.. 이쁜건 모르겠고.. 다음에 만나자고만 하고왔는대 .."
" 쫑이네.. 맘에 안들어? 최소한 밥이라도 같이 먹고왔어야지.."
" 다음에 먹기로 했어요."
" 날을 확실히 잡아야되는거야. 다음에가 어디있어"
" 무슨소리야 아침부터?"
문교정관의 특유 목소리 때문에 사무실은 확 조용해졌다. 바쁜업무따위 있을리 없지만 한동안 타닥타닥소리만 사무실을 맴돈다. 다만 문교정관의 호기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풀어 졌다.
" 경호 어제 좋은대 갔다왔어? 무슨소리야 아까?"
" 서울 갔다왔습니다. 볼일이 있어서요."
" 무슨볼일? "
" 개인적인거라서.."
경호자리에 전화가 울린다.
" xx교도소 xx과 경호입니다. 무었을 도와드릴까요?"
약 3분. 교정관의 관심을 피하는대 성공했다. 경호는 전화를 받고 일층 본관 입구를 나와서 소내 근로작업장으로 향한다. 아침을 먹고 오전 작업 준비에 한창이어야할 작업장은 기계소리 대신 사람들의 술렁임이 가득하다.
" 어 경호야 이리로."
경호가 사람들로 둘러쌓인곳을 헤집어 상황을 목격한다.
" 야 이거 심각한대? 나랑 같이 이사람좀 들처매자."
" 넵."
마른체구에 키가 좀 작고 성깔좀 있어보이는 수형자 한명이 바닥에 드러누워서 끙끙댄다.
" 아으. 일일구좀 불러달라니깐."
" 일단 치료소에 가서 응급조취를 취한다음 보내줄태니까 좀만 참아봐요."
" 미치것네.."
경호와 동료 교도관이 함깨 간단한 들것에 그 수형자를 올려놓고 급히 작업장을 나선다.
" 어? 이분 조신철씨 아닌가요? 작업신청 하셨나?"
" 아 또그러네. 아니라고요.. 그 늙은이랑 나랑 어디가 닮았다는거여 도대체?"
" 얼굴이.. 아닙니다.. "
치료소에 도착하여 그 수형자를 병상에 올려놓자 상주 의사가 간단히 진찰을 한다.
" 선생님 여기요.. 아고고.. "
허리를 가리키며 얼굴을 힘껏 찡그린다.
" 어쩌다가 이리 돼셨대?"
" 바닥에 있는.. 자재를 들어올리다가 허리가 찌릿 하지 뭡니까? 무거운건 아니었는대 , 요즘 작업량을 너무 밀어붙인다했지요.. 몸이 배겨납니까? "
" 어느부분이 아파요? 평소에는 어떠셨어요? 허리나 다리가 저리지는 않았어요?"
" 글쎄요.. 허리는 평소에도 좀 쑤셨는대 요즘 부쩍 오른쪽 다리가 저린거 같기도 하고.. "
" 씨티촬영을 해보면 간단하겠는대.. 여긴 그런게 없으니까.. 요번주 주말에 한번 외진을 받아보시죠? 오늘은 근육 이완제 한대 놔드릴게요."
" 이거 디스크 아니에요? 지금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어요!"
" 주사맞고 삼일정도만 누워계시면 좀 나을거에요. 여기 입실하고 내려가세요."
" 아. 이거 너무 아픈대.."
경호는 이사람이 작업에 신물이 나서 가끔 자해를 하기도 하는 다른 수형자들처럼 몇일 편히 있어보려는 꼼수가 아닐까 의심이 들었으나 심증뿐, 오전에 사건사고가 이것이 마지막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생각 깊숙한 곳에 뭍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