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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지장기도 및 선지식 무비스님 초청법문
(범어사, 2008년 7월 25일)
부처님 말씀에 소먹이는 목동이 소가 도망을 가서 절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목동이 소 찾으러 절에 들어갔다가 절에 들어온 김에 부처님도 참배하고 또 법문도 들어서 부처님의 지혜를 배워가게 됐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더운 날 우리가 왜 이렇게 모였습니까?
지장백일기도, 소위 선망부모 영가를 천도하는 천도 의식을 위해서 이렇게 모였습니다.
선망부모 영가천도를 위해서 왔지만은 그 소 찾으러 갔던 목동이 소 덕택에 부처님을 참배하고 법문을 들었듯이 조상영가 천도를 인연으로 해서 사실 우리들의 영가를 천도하는 살아 있는 사람 영가를 천도하는 기회가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영가, 영가 하지만은 무엇이 영가입니까?
영가 누구 본 적이 있어요? 아무도 영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생각 돌이켜 보면은 우리 모두가 사실은 영가입니다.
부처님은 우리 살아있는 영가천도를 위해서, 선망부모 돌아가신지 수 십년 된 영가를 천도한다고 이렇게 명목을 붙이고 있습니다. 영가천도 문제에 대해서는
의처부목지정령 이런 말을 써요 보면은.
사람이 죽어서 제대로 순조롭게 다음 생의 몸을 인연 따라 받아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하고 자기 길을 가지 못하고 나무에 붙어서 살고 풀에 붙어서 살고 또는 바위에 붙어서 살고 그런 사례들이 있다, 그래서 의초부목지 풀에 의지하고 나무에 붙어 있는 그런 정령 이런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 살아있는 사람들의 영가는 모두가 생각해 보면은 여기저기에 의지해서 그야말로 풀에 의지하고 나무에 의지하는 영가들처럼 우리가 여기저기에 의지해서 삽니다.
그 여기저기라고 하는 것이 여러분들은 다 알 겁니다.
남편에게 의지하고, 아내에게 의지하고, 돈에 의지하고, 명예에 의지하고, 자식에게 의지하고, 세상에서 알아주는 내노라 하는 그 이름에 의지하고, 알고 보면은 전부 그런 여러 가지 주변상황들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보통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의지해서 산다고 하는 뜻은 다른 입장에서 살펴 보면은 나는 어디 가버리고 그 경계, 대상에 끌려가 다니고, 거기에 의지하고, 그것이 오히려 내가 돼 버리고.
다시 말해서 자식에 의지한다면 자식이 내가 돼 버리고 나는 어디가 버리고, 남편에게 의지하면은 나는 남편에게 의지해 버리고 나는 어디가 버리고, 아내에게 의지하는 것도 마찬가지요 명예나 돈에 의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에 대개 의지하는 사람들을 보면은 자기는 어디 가버리고 없어요, 오로지 돈뿐이야.
명예에 의지하는 사람은 오로지 명예뿐이지 그 사람에게 자기 자신은 없어, 자기 인생이란 없어 그냥.
의지하고 끌려 다니고 종노릇 하는 그것이 그 사람 인생이라, 그래서 살아있는 영가라 하는 거예요.
영가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누구 본 적이 있어요?
살아있는 영가예요 우리 모두가.
우리는 또 거기에서 이제 한 걸음 벗어났다 라고 생각을 하면서 부처님께 의지하는 거야.
등상불에게 의지하고 관세음보살에게 의지하고 모두가 나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해 삽니다.
이것도 의지하기는 마찬가지야, 의지하기는 마찬가지라고.
금이나 다이아몬드로 쇠고랑을 만들어서 사람을 그 쇠고랑에 채웠다고 해도 쇠고랑에 채워져서 자유가 없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게 오랏줄로 묶었든 아니면 무쇠로 만든 수갑에 채워졌든 금으로 만든 수갑에 채워졌든 채워져서 자유가 없기는 똑같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되돌아 볼 줄을 알고 이러한 점을 살필 줄 아는 것이 선불교적(禪佛敎的) 천도의식(遷度儀式)이예요, 선불교적인 천도의식이라.
((여러분들 범어사 이렇게 줄기차게 쫓아다니지만은 범어사 실체가 무엇인지, 또 그것을 누가 제대로 한 번 들추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는지 또 그것을 제대로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지 이런 것들이 또 한 번 우리들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범어사(梵魚寺)는 선찰대본산(禪刹大本山)이다 그러죠.
거기까지는 다 압니다.
불보사찰(佛寶寺刹)도 아니요 법보사찰(法寶寺刹)도 아니요 승보사찰(僧寶寺刹)도 아닙니다.
선찰대본산이야, 선불교(禪佛敎)를 주장하는.
선불교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드날리고, 또 선불교를 위주로 수행을 하고 중생 교화하는 사찰이다 하는 그런 뜻이 선찰대본산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가천도도 선불교식으로 천도를 해야 돼요.
선불교식으로 천도하고 있을 겁니다 틀림없이. 그건 그럴 수 밖에 없어요.
정토종에 가서 영가 천도 하면 정토종식으로 천도를 하고
법상종에 가서 영가 천도를 하면 법상종식으로 천도하고
천태종에 가서 영가 천도 하면 천태종식으로 천도하고
그와 같이 우리 범어사는 선찰대본산인 관계로 선찰대본산 차원으로 영가를 천도하는 거야.
그래야 맞습니다. 여기가나 저기가나 천편일률적으로 똑같은 방식이라면 영가가 굳이 멀리 범어사까지 올 필요가 없어요.
아무 절에나 이웃에 가까운데 가 가지고 천도하고 말지,
그러니까 선불교식 천도라고 하는 것은 다른 의미로 보면은 이 선불교가 여러 가지 불교 중에서 여러 가지 불교라고 하는 것은 소승불교, 대승불교, 부파불교, 상좌부불교 수많은 불교가 있습니다. 그런 불교들 중에서 가장 명품 불교 최고도로 발전한 불교가 선불교입니다.
그래서 그 선의 정신과 선수행이 전 세계를 통틀어서 가장 잘 살아 있고, 그나마 제일 세계적으로 선수행이 여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그런 나라가 어디냐?
바로 한국이라고 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크게 만족스럽지가 않은데 그러나마 전세계적으로 불교를 살펴보고 그리고 또 차원높은 선불교적인 안목으로 살펴볼 때 한국의 선불교가 제일 그 정신이 살아있다는 거예요. 제일 괜찮다는 것입니다. 전세계적으로.
그런 제일 괜찮은 선불교의 종주국 대한민국에서 또 유일한 선찰대본산 범어사, 아 이런 사찰에 여러분들이 오신 거예요. 이러한 범어사의 실체를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고, 거기에 준하려고 거기에 가까워지려고 여러분들도 생각을 하고 마음을 먹어야 범어사에 다니는 보람이 있지. 그렇지 않는다고 하면 아무 절이나 다니는 것하고 하나도 진배 없습니다. 다를 바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 범어사는 옛부터 범어사에 가서 아는 소리 하지 마라 그런 게 있어요. 또 어느 절에 가서는 뭐, 무슨 국수 잘 먹는다는 소리 하지마라 하는 그런 사찰도 있어요.
또 이웃 사찰 어느 절에는 그 절에 가서 살림 잘 산다는 소리 하지마라 그런 소리가 있어요. 여러분들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절마다 그런 특색이 있어요. 살림 잘한다는 소리 하지마라, 참 지금 들으면 옛날에 가난할 때 들으면 좋은 소리 같았는데, 지금 밥술이나 먹는 이 시대에는 그 소리 참 치욕스러운 소리야 알고보면은 그런데
범어사는 일찍부터 범어사에 가서 아는 소리 하지 마라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사찰이 범어사입니다. 그래서 범어사에 사는 자부심, 범어사에 사는 긍지는 바로 그런 세계적인 선불교 종주국인 대한민국에서 그 중에서도 유일한 선찰대본산에 산다고 하는 이 사실, 이 긍지 하나 가지고 범어사에서 살아요 저도.
이것 아니고 다른 것 하고 비교하면은 도대체 비교를 할 수가 없어, 살림 사는 문제라든지, 신도 숫자 문제라든지 무슨 뭐 재산 상황 문제라든지 여러가지 포교하는 문제라든지 무엇을 가지고 비교해도 도대체 부끄러워서 낯을 들 수가 없어.
그런데 당당하게 낯을 들고 범어사에 산다고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선의 정신, 그것도 한국불교의 가장 최고 정신인 선불교의 종가가 바로 범어사라고 하는 거.
선불교의 종가가 범어사라고 하는 이 사실, 이 긍지 이 자부심 하나로 산다는 거죠.
여러분들도 범어사의 실체가 무엇이냐, 범어사의 특징이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범어사 신도답고 또 범어사에 다니는 그런 의미와 보람이 있다고 하는 것 이걸 가슴에 꼭 새기셔야 될 줄로 믿습니다. ))
우리가 부모에게 효도한다 하는 그런 사실에 대해서 부처님은 일찍이 효도에는 세 가지가 있다 그랬어요.
영가이야기를 시작을 하면서 ‘영가는 내가 아니고 저기 이름 써서 붙여놓은 저 종이가 영가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라는 말씀을 처음에 ‘살아있는 영가’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살아있는 영가.
살아있는 우리 영가 내 영가부터 제도해야지 무슨 벌써 세상에 태어났다가 다시 돌아가셨을지도 모를, 누구 부모가 되어서 세상에 살다가 다시 돌아가셨을지도 모를 그런 멀고 아득한 그 영가, 그 영가 문제가 지금 급한 게 아니라고요.
내 영가가 급한 거라. 그래서 살아있는 영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에 효도한다는 것도 부처님이 세 가지 효도방법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들어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보통 관례에 따라서 부모를 공양하고, 또 세상 관례대로 장례를 치르면 그건 보통효도다 그랬어요. 그런데 두 번째 좋은 효도가 있어요. 좋은 효도는 살아서 부모의 뜻을 따라 주는 것, 내 뜻대로 부모를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게 아니고, 내 체면 세워 달라고 부모에게 조르는 게 그게 효도가 아니야 그건 불효지.
부모의 뜻을 따라 주는 것, 부모가 무얼 하자고 하든지 부모의 뜻을, 내 체면이야, 자식이 부모 앞에서 체면 세우면 되나요? 말도 아니지 그거는 호로자식이나 그렇게 하는 거지.
내 체면을 세우는 게 문제가 아니라 부모 뜻을 따라 주는 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부모 뜻을 따라주고, 돌아가신 뒤에는 그 이름을 빛내주는 것이 두 번째 큰 좋은 효도예요.
돌아가신 뒤에도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부모에게 욕을 먹일 수도 있고, 칭찬을 들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누가 무슨 행동 하면 ‘저거 누구집 자식이냐?’ 그러잖아요.
그 말이 무슨 뜻이냐? 돌아가신 부모 욕 먹이는 일이거든요.
또 그 사람이 잘하면 ‘하 그 누구집 자식인지 참 훌륭하다’고 그럼 부모에게 돌아가신지 수십 년 된 부모에게도 그 명예를 바치는 일이 되는 거라, 부모 이름을 빛내주는 거예요 그게, 그게 훌륭한 효도라고 했어요 부처님은.
그런데 그 보다 진짜 좋은 효도가 있다, 그 세 가지 중에 마지막인데 한 가지, 마지막 이것은
살아있을 때 이 세상의 존재의 원리
세상과 인생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그 원리를 알아서
그 원리에 입각해서 살 줄 아는 것
그 원리대로 살 줄 알도록 다시 말해서 진리의 길로 인도해 줄 수 있으면은 그것은 참 훌륭한 효도다 그랬어요.
자식이 부모를 그렇게 인도하든지 부모가 자식을 그렇게 인도 하든지. 정말 세상에는 주의 주장도 많고 종교도 많아요.
그런데 정말 삶과 죽음의 문제
또 이 세상의 존재 원리에 대한
바른 깨달음에 의해서 가르쳐진 그런 진리의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자식이 부모를 안내하든지 부모가 자식을 안내하든지 형제 사이에 안내를 하든지 아니면은 친구 사이에 안내를 하든지 그렇게 진리의 길로 안내해 주는 것, 이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 다음에 돌아가신 뒤에도 정말 생과 사의 실체를 꿰뚫어 보고 그 생과 사의 이치에 맞도록 영가를 천도해주는 것이 그게 가장 훌륭한 효도다 그랬어요.
그래서 효도의 그 세 가지를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을 우리가 살아있는 영가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은
살아있는 영가 입장에서는 말하자면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진정으로 바른 이치에 의해서 사는가? 바른 이치에 의해서 사는가?
그리고 삶과 죽음의 문제를 우리가 바르게 이해하고 사는가?
이것이 살아있는 영가에게는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사실은.시급한 문제예요.
의송지갈(依松之葛)은 직용천심(直聳千尋)이라고
소나무에 의지한 칡넝쿨은요 소나무 높이만치 올라갑니다.
소나무 타고 올라가면은 소나무 높이만치 올라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가르침, 어떤 종교, 정말 존재의 이치를 제대로 꿰뚫어 보고 사람들에게 베풀었는가, 사람들을 가르쳤는가 하는 것
이것을 제대로 우리가 선택을 해서 공부를 하고 거기에 신앙심을 갖는다면은 그야말로 칡넝쿨이 소나무를 의지한 거와 같이 높이높이 올라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칡넝쿨이 그런 소나무에 의지하지 못 하면은 땅을 기고 말아요. 1미터 높이도 못 올라갑니다.
우리도 어딘가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자꾸 쫓아다니고 하는데 과연 그것이 칡넝쿨에 있어서 소나무 역할을 해주는가?
내가 의지하는 그것이 소나무 역할을 해주는가?
내 자신의 영혼을, 나 자신의 정신세계를
이 여름날 식물이 자라듯이
무럭무럭 자라게 과연 하는 것인가?
이런 것들을 한 번 점검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저런 가벼운 생각, 그야말로 목동이 소 찾으러 절에 갔던 그런 가벼운 생각도 훌륭하지만은
그러나 그 목동은 소 찾으러 간 그 덕에 부처님을 참배하고 부처님 법을 듣고 진리의 눈을 뜨게 됐다고 하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피서를 왔든 시간 때우려고 왔든 어떤 가벼운 인연으로 왔든, 이 작은 인연이 정말 내 영혼을 내 정신세계를 확 뒤바꿔 놓을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하나가 다 무시할 것이 아니고 소중한 내용이예요 사실은.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알고 보면은
참으로 소중한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선불교적인 소위 그 천도는
어떻게 하는 것이 선불교적인 천도냐?
부처님께서 가장 많이 말씀하신 법문이 자등명 법등명이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열반경에서 부처님이 열반을 하실 때도 그 법문을 하셨어요. 그리고 또 어떤 때 그 법문을 하셨는가 하면은
부처님도 오래 사셨으니까 그 당시 나이로 80을 사셨으니까 상당히 오래 사셨어요.
그래서 사리불이니 목건련이니 하는 훌륭한 제자들이 전부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그 훌륭한 형님 같은 제자들이 돌아가실 때마다 그 밑에 후배 되는 제자들이 통곡을 하는 거예요.
사실은 부처님에게 의지하는 것 보다 그 큰 제자들에게 의지하는 것이 더 컸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제자들이 돌아가셨을 때 정신을 잃고 통곡을 하는 거야.
슬퍼서 이루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때 부처님이 그런 통곡하는 제자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하신 말씀이 또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당신이 열반에 드신다고 이야기 해놓고 대중들이 모두 슬퍼하고 기절을 하고 그럴 때도 일러주는 말씀이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아라.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진리의 가르침을 의지하라.
자기 자신을 편히 쉴 곳으로 삼고
진리의 가르침으로 편히 쉴 곳을 삼아라.
그 말이예요. 그래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자귀의 법귀의(自歸依 法歸依)
자주법주(自洲 法洲)
한문으로 하면 그래요. 세 마디로 똑같이 그렇게 했습니다.
내 자신을 의지하고 진리의 가르침을 의지하라,
그리고는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 이랬어요.
내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아라
그리고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 그랬어요.
내 자신을 편히 쉴 곳으로 삼고, 진리의 가르침을 편히 쉴 곳
삼아라 그리고 다른 것으로써 편히 쉴 곳으로 삼지 말라, 하지 말라는 말씀까지 했습니다.
부처님 큰 제자들이 돌아가셨을 때 그 밑에 제자들이 슬피 크게 슬피 울고 통곡을 하고 이제 우리가 누구를 의지해야 된단 말인가, 이런 꼴을 부처님은 여러 번 봤습니다 여러 번 봤어요. 그 수많은 제자들을 거느리고 살았으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을 봤겠습니까? 그리고 그 제자들끼리 친한 사이에 얼마나 슬퍼하고 통곡하는 것을 부처님이 지켜 보았겠습니까? 한 번 상상해 봐요.
그럴 때 일러주신 법문이 바로 그겁니다.
너 자신을 등불로 삼고 너 자신을 의지하고 다른 것을 등불로 삼거나 다른 것을 의지하지 말라.
그리고 열반경에서는 당신이 열반에 든다 라고 선포를 했습니다. ‘내가 오늘 저녁에 열반에 들 것이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야. 물론 부처님이 80이나 자셨으니까 언젠가 가시리라고 하는 생각을 했지만은 그래도 부처님 같은 위대한 성인이 오늘 저녁에 돌아가신다고 하니까 이게 너무나도 슬픈 일인 거야.
그래서 제자들이 통곡을 하고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하고, 그야말로 장례 준비를 치뤄야 할 텐데 장례준비 치루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슬퍼하고 통곡만 하고 있었다고.
그때에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그것은 부처님의 최후의 말씀이지만은 우리들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우리가 최후로 의지해야 할 것은 진정한 나입니다 진정한 나. 가짜 나가 아니라 참나, 진아예요.
참나가 그야말로 우리가 최후로 의지해야 할 곳입니다.
그리고 법귀의, 법등명, 진리의 가르침에 의지하고 진리의 가르침으로써 등불을 삼아라.
부처님이 평생 동안 진리의 가르침을 많이 남겨 놨으니까 내 이 육신 죽는 거 크게 슬퍼 할 필요 없다 이거야.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누가 안 죽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그거 크게 슬퍼하지 말라.
내가 너희들에게 줄 것은 이미 다 주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처님의 영가 천도 법문이예요.
훌륭한 제자들이 죽었을 때 그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했습니다. 그럴 때 부처님이 영가 천도의 법문으로써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누구에게나 자등명 법등명입니다.
자귀의 법귀의야, 내 자신에게 의지하고 진리의 가르침에 의지하고 내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는 것, 이것밖에 달리 다른 게 없다 이거예요.
나라고 하는 존재는 뭐냐?
선찰대본산 입장에서 선불교적 입장에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게 살아있는 영가를 천도하는 거예요.
저는 사실은 저기 벽에 붙어있는 글자로 써 놓은 영가 잘 모릅니다. 어떻게 되는지,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 경전에 이러고 저러고 써놓긴 했어요.
나도 지장경 번역도 하고 강의도 하고 감수 책도 내고 그랬어요. 하지만 사실은 그것 확신이 없어요. 그냥 경대로만 이야기 했을 뿐이지.
그런데 확실한 것은, 확실한 것은 바로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이 사실, 말하는 소리를 유심히 듣고 있는 여러분들 그 모습 이렇게 더운 날 아 왜 이렇게 더운가 왜 이렇게 더운가 그 더움을 아는 그 존재
이것보다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분명한 사실이예요.
너무나도 확실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무량대복입니다. 어떻게 더운 것을 알아요? 이 부처님 더운 것 알 줄 알아요?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알아요. 내 소리 하는 것 부처님은 하나도 못 알아 듣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다 알아들어요.
여러분들 신통묘용이 기가 막혀요.
여기 와서 간혹, 도둑놈들이 불전 훔쳐가요. 불전 훔쳐간다고요. 부처님은 멍청이라 그 불전 훔쳐가는 놈을 잡을 줄도 몰라 종무소에다 알릴 줄도 몰라요 이 부처님은.
이 부처님만 그런 게 아니야,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처님이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석굴암 부처님.
석굴암 부처님 역시 멍청이야.
불전 훔쳐가도 불전 훔쳐 간다고 신고할 줄도 몰라. 추우면 추운 줄을 아나, 더우면 더운 줄을 아나, 그런데 여러분들은 다 기가 맥혀요 너무너무 잘 알아.
이보다 더 신통묘용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 기가 맥힌 신통묘용이예요.
이 실체, 이 사실에 대한 눈을 띄워 주는 것,
이것이 선불교적인 천도입니다.
선찰대본산에서는 이렇게 천도하는 거예요 영가를.
그것은 곧 부처님이 말씀하신 자등명 법등명 하고 딱 맞아 떨어지는 말이라 똑같은 말이예요. 똑같은 뜻입니다.
하나도 다른 게 아니예요.
석굴암 부처님 아, 예술적으로 얼마나 위대합니까?
정말 훌륭하죠? 정말 잘 생겼죠?
그래서 전 세계에서 예술가들이 와 보고 탄복을 합니다 탄복을 해요. 탄복할 거 하나도 없어요.
꼬집으면 아플 줄 아는 거기에 그 부처에게 탄복을 해야 돼.
부르면 대답할 줄 아는 그 존재에게 탄복을 해야 돼.
부르면 다 대답할 줄 알지.
이렇게 싱싱하게 살아있고, 정말 활발발한 살아있는 부처,
이제 어느새 살아있는 영가가 살아있는 부처로 승격됐어요.
이런 살아있는 부처 이것이야 말로 신통묘용이고 무량대복이야. 여기에 눈을 떠야, 여기에 여러분들이 눈을 떠야 우리들의 영가가 천도 되고, 덩달아서 저기에 종이에 붙여놓은 그 영가도 천도 돼 덩달아서.
((아들이 대통령 되면 부모대접이 저절로 융숭해지죠. 그 동네가 완전히 딴 동네가 돼 버리잖아요. 촌놈 하나 대통령 되면은 그 동네가 완전히 딴 동네가 된다니까?))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이 중요해요. 여러분들이 지금 이 존재에 대해서 눈을 뜨면은 뭐 선망부모, 선망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천대만대 부모까지 다 눈을 떠, 다 눈을 뜬다고.
촌놈 하나 대통령 되니까 선조들 묘 다 뜯어 고치더라고요 내 다 봤어요 그거. 묘 다 뜯어 고쳤어 좋은 데 갖다 다 써.
그러니까 여러분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이 이 존재 이 사실에 눈을 뜬다면은 여러분들의 선망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 고조부모 위엔 뭐라케요? 대대로 올라가면서 천대 만대 부모들 다 눈을 뜹니다.
((그리고 한 집안에 대통령 하나 나면은 그렇게 아무리 머저리 같은 자식이라도 대통령의 아들이예요. 대통령의 손자예요. 병신이라도 대통령의 손자야. 계속 대접 받는 거야. 호의호식하고 훌륭한 집에서))
지금 여러분들이 이 순간 정신 차려서 이 문제에 대해서 눈을 뜬다면은 여러분들의 자자손손, 자자손손 다 진리의 눈을 뜨게 돼 있어요.
((이치가 딱 맞잖아요. 한 사람 대통령 되니까 묘역조성도 그렇고 옆으로 그냥 온 동네도 그냥 정화가 다 되어 버리고 자자손손 전부 대접 다 받는 거예요.))
멀리 있는 거 생각할 거 없어요. 현재 이 순간 내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 이 훌륭한 부처님 법을 만났고, 또 그 중에서도 한국 불교의 최고가는 선불교 명품불교인 선불교의 종주사찰인 선찰대본산 범어사에 왔을 때 이러한 불교의 최고의 안목인 바로 이 종지에 대한 가르침에 눈을 뜬다면은
선대부모 천도는 뭐 그냥 갖다 굳이 없는 돈 갖다 들여서 붙여 가면서 할 것 없어, 앉은 자리에서 저절로 돼.
그 동네는 누가 돈 내서 한 거 아니야. 그 동네 사람 돈 한 푼도 안 냈어. 한 푼도 안 내도 그 동네 정화가 다 돼 버려. 지 돈 내서 하는 것 아니예요 자자손손 다 그래.
이치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로 눈귀코입혀 이런 모든 우리 기관을 통해서 작용하고
좋고 나쁜 것 다 느끼고 차고 더운 것 다 느끼고
일체사 다 분별하고 하는 이 사실에서 흠소십마(欠少什麽)오? 부족한 게 도대체 무엇이냐?
더 이상 무엇이 부족하냐?
더우면 더운 줄 알고 차가우면 차가운 줄 알고 아프면 아픈 줄 알고 배고프면 밥 먹을 줄 알고 내 자리 자꾸 침범하면은 화낼 줄 알고 가까운 친구 죽었다 하면 통곡하고 슬퍼할 줄 알고 기기묘묘한 존재 아닙니까? 얼마나 신기한 존재예요?
이것 밖에 달리 무엇이 있습니까?
뭐가 있어요? 이것밖에
이것밖에 달리 아무것도 없는 데
있는 것처럼 알고 거기에
그 환영에 사로잡혀 가지고 거기에
없는 것에 자꾸 의지하는 거예요 없는 것에 자꾸 의지한다고.
돈 훔쳐가도 신고할 줄 모르는 그런 불상에게
저 다른 절에서는 그렇게 설법 안 하지 나도
부처님 영험 있다고 거기 가서 절하라고,
선찰대본산이니까 선찰대본산다운 이야기 하는 거지.
((선찰대본산에서 시시한 소리 하면은 여기 조실스님 주지스님이 용납 안 해. 법사 당장 내려오라 그래. 선찰대본산 격에 맞는 법문 하라고, 어디서 시시한 법문 하냐고 그러지 그런 소리 할라면은 저기 무당 비슷한 그런 절에 가서 하라고 그럴거야 틀림없이.
격이 달라요. 같은 줄 알고 다니면 안 돼.
그러니까 한국의 선불교는 불교는 종교 중에 최고 종교고,
그 중에 선불교는 여러 가지 불교 중에서도 제일 명품 불교야. 그 중에서 종주사찰이 범어사인데 범어사는 최고가는 명품 사찰이야. 뭐 식당이 어떻다 화장실이 어떻다 법당이 어떻다 그걸 따질게 아니라고.
정신세계가 가장 우수한 어느 불교 어느 사찰보다도 앞서가는 최첨단 불교를 지향하는 사찰이 바로 선찰대본산이기 때문에 우리도 어깨가 무겁지만은 어쩔 수 없어, 어깨가 무겁지만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짐을 지고 가는 거야))
부처님과의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값지고 소중합니다.
인생난득(人生難得)이요 불법난봉(佛法難逢)이라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부처님 법 만나기 어렵다
이런 말은 우리가 익히 들어왔습니다.
부처님 스스로 경전에서 당신이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 너무나도 소중한 까닭에
어떻습니까? 왕자의 몸으로 태어났죠.
금쪽 같이 귀여운 라후라 라고 하는 아들이 있었죠.
세상에 최고 절세미인 야수다라가 있었죠.
어머니는 비록 일찍 돌아가셨지만은 아버지가 있고, 한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왕 노릇을 앞으로 해야 할 그런 고귀한 자리 그것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출가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금지옥엽 귀하신 몸으로 6년이라고 하는 고행을 했습니다. 여러분들 좀 덥거든 부처님 6년 고행을 떠올리세요. 인도 더위는요 살인적인 더위입니다. 우리나라 더위는 이건 아무것도 아니예요. 그야말로 더위 때문에 죽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예요.
그런 더위에 6년이라고 하는 세월을 스승들을 찾아다니면서 가시 속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물 속에 몸을 던지기도 하고 땅 속에 몸을 파묻기도 하고 하루에 일마일맥(一麻一麥)이라고 해서 보리쌀 한 두 개 먹고 그야말로 피골이 상접해 가지고 부처님의 고행상을 보셨죠?
그런 모습으로 부처님이 고행 하시면서 얻어낸 것이 이 진리의 가르침, 깨달음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것은 너무나도 큰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깨달음이다, 이렇게 내가 큰 희생을 치르고 얻어낸 깨달음을 나는 어떻게 하더라도 좀 널리 전해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하루도 쉬지 않고 80노구를 이끌고 불철주야 그 인도 뜨거운 햇빛을 무릅쓰고 다니면서 중생교화를 했습니다. 하나라도 이치를 깨우쳐 주기 위해서
인생에 바로 눈을 떠서, 인생을 좀 의미 있고, 보람되고 행복하게 살라고. 그 소원 하나로써 부처님은 그렇게 전법의 길을 다니셨어요.
그러면서 스스로 ‘내가 깨달은 이 법을 전하는 것은 너무나도 다급한 일이다, 너무나도 절박한 일이다’고 하면서 비유를 하십니다.
사형수가 형무소에 들어가 가지고 며칠 안 있으면 사형집행이 떨어져 그래서 죽어야 할 몸이라. 그런데 살고 싶다 이거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살 길이 없어.
살 길이라고 하는 것은 형무소 화장실 변소 구멍 그거 하나더라 이거야. 그래서 그 변소 구멍 속으로 들어가 가지고 한 참 몇 미터를 똥 속으로 수영을 해 가지고서 헤엄쳐 가지고 저기 옛날 절 화장실 생각하면 다 떠오를 거예요, 지금 아파트 화장실이 문제가 아니고 옛날 형무소 화장실은 그래 돼 있어.
그래서 그 똥 속으로 헤엄쳐 나가가지고 겨우겨우 담구멍으로 빠져나가서 생명을 건지는 거예요. 그렇게라도 생명 건지는 것이 좋은 거죠 중요한 거지.
아유 그게 싫어서 거기서 죽는 것 그건 인간도 아니죠.
죽을 사형수가 똥통 속으로 수 미터를 헤엄쳐서 나가가지고 자기 생명을 살리는 거와 같이 이와 같이 절박한 마음으로 나의 깨달음을 여러 사람들에게 전한다 그랬어요.
부처님이 법을 전하는 일이 그와 같다고 했습니다 스스로.
당신이 그 깨달음을 위해서 치른 희생이 얼마입니까? 그럴 만 하잖아요. 그 어여쁜 자식 아내 왕자의 자리 그 호화로운 자리를 다 버렸으니까
그리고 6년 고행을 하셨으니까 거기에 보상을 받고 싶겠죠. 보상을 받는다는 것은 당신의 깨달음을 여러 사람들에게 나누는 일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깨달음을 전하는 일이 그와 같이 절박한 마음으로 불철주야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 뜨거운 햇빛을 무릅쓰고, 전법을 위해서 포교를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거예요.
또 어떤 경전에는 배를 타고 항해를 갔다가 배가 파선이 됐어. 같이 타고 온 사람들이 전부 물에 빠져서 다 죽었어, 그런데 겨우겨우 헤엄을 치다 보니까 옆에 같이 타고 온 친구의 시체가 붕붕 떠 있는 거야.
그래서 그 시체를 타고 헤엄을 쳐서 저 바닷가로 헤엄쳐 나가야 할 그런 상황이라. 그렇지만 시체라도 타고 헤엄을 쳐서 나가야 돼. 그것도 얼굴을 아는 친구의 시체를 타고 헤엄쳐서 나가야 그래야 살거든?
부처님은 법을 전하는 일이
불법을 널리 펴는 일이
그와 같이 송장을 타고 헤엄쳐서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이와 같이 절박한 심정으로 법을 전했답니다.
그게 경전에 역력히 나와 있어요.
그런 절박한 심정으로 법을 전하는 부처님의 원력으로
불교가 3천년이 지난 이 순간까지도 여기에 이렇게 도달해 있고, 우리 모두는 그 부처님의 그 원력 속에 이렇게 동참해 있습니다. 이 간단한 인연이 아니예요.
소 찾으러 절에 갔다가 법회에 참석했지만은, 조상 영가 천도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왔지만은
부처님의 그런 지독한 어찌 보면 참 무서운 그리고 절박한 부처님의 원력으로 이런 자리가 마련됐고, 그 자리에 우리는 이렇게 동참을 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제 절에 다니신지 여러 해 되고, 부처님 은혜도 알게 모르게 많이 입었고, 그렇다면은 인연 닿는 대로 또 인연이 안 닿으면 인연을 지어서라도 열심히 이웃 사람들에게 친구와 친척들에게
범어사에 일주일마다 한 번씩 큰스님들이 와서 법회가 있다. 또 조상 천도도 그냥 거기는 선찰대본사라고 해서 이름만 갖다 써 붙이면은 저절로 된다 그냥, 이렇게 권해가지고 많이 동참하게 권하는 것도 하나의 포교요 하나의 전법입니다.
((아마 그런 마음으로 이렇게 전례없이 참으로 범어사 전례없이 이렇게 많이 위패가 올라와 있고, 신도들도 많이 동참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한 번 더 생각을 돌려서 마음을 좀 가다듬고,
부처님 보십시오. 송장을 타고라도 나가서 헤엄쳐서 살아야 되겠다 하는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포교를 했잖습니까?
똥통 속으로 몇 미터를 헤엄쳐서 나가서 겨우겨우 사형당할 생명을 구하는 그와 같은 절박한 마음으로
부처님은 법을 전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아니면 그 80노구가 그 뜨거운 인도 햇볕 속을 어떻게 걸으면서 다니면서 중생제도를 했겠습니까? 한 번 생각해 봐요.
부처님은 분명히 그러한 마음으로 했습니다.
이게 간단한 일이 아니예요.
그래서 그런 원력으로 이렇게 우리들 이 순간 여기까지 미쳤으니까 여러분들도 많은 사람에게 더욱더 많이 권해가지고 법회에 참석하게 하고 ((영가도 지금 붙은 것 보다 몇 배 더 많이 접수하게 해서))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 주는 거
이거 큰 포교예요, 큰 포교예요.
((그거 뭐 앞에서는 무슨 살아있는 영가 제도 한다카더니 또 끝에 가서는 무슨 뭐 부모 천도 하는데 동참하라고 이렇게 해싸니까 앞 뒤가 안 맞지 않느냐? 하나도 안 맞아요.))
그런데 이 자리에게 있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이 자리에 있는 사람에게 할 법문은 다 했어 지금 앞서까지 다 했다고. 그런데 이 자리에 참석 못한 사람이 아쉬워 내가.
아쉬워서 여러분들이 전부 전법사가 되고 포교사가 되어서
앞으로도 수없이 여기에서 재가 행해지고 또 법회가 이루어질 것인데 너무 아깝잖아요. 여러분들만 듣기 아깝잖아요.
그래서 모두모두 많이 권해서 좋잖아요? 조상천도 한다는 미끼, 얼마나 잘 물어? 백발백중 물린다고 저거는. 저 미끼 최고야. 아 조상천도 하면 내가 좋다는데 뭐 그거 안 할 사람 누가 있어? 제일 좋은 미끼라고.
일단 그 미끼를 착 던져가지고 오게 하는 거야.
오면 최상승 법문을 또 갖다 그냥 여름날 폭우 쏟아지듯이 그냥 쏟아 붓는 거지. 좋잖아요? 그렇지요?
다음 법회날 내가 와 볼거라 얼마나 더 불었나.
아 참 부처님 인연은, 그 부처님의 법력, 너무나도 환희롭고 또 어디가나 참 감사하고 행복한 시간을 마련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시간이 두고두고 오래오래 이 설법전에서 지속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법문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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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영상법문의 <100일 지장기도 및 선지식 무비스님 초청법문> 과 같은 내용인데 라디오에선 괄호로 묶은 것을 편집누락시켰더군요^^ 마침 법화경의 선물테이프로 주신거라고 7강에서 말씀하셔서 조금씩 녹취하고 있었던 법문이라 오늘 다 정리해보았습니다. 역시 녹취방에도 올릴거구요^^....쿤다리카님 덕분에 불교라디오에서 다시 듣기 했습니다.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감로수 법문 올려주신 慧明華님 성불하세요~~()
요즘 게을러져서 아니면 이사하느라 바빠서인지 모르지만 통 법문을 듣지 않고 있었는데 우리 꽃물님 덕분에 큰스님 법문 두 개를 순식간에 들어버렸네요. 고맙습니다. 저 이사했으니까 언제든지 놀러오세요. ㅋㅋㅋ
저도 불교방송에서 큰스님 법문 듣고, 다시 듣기 했습니다.혜명화님 수고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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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혜명화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