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중수의 글을 또, 한 편 소개하겠다.
*곱게 늙은 왕벚나무 - 최중수
대덕사 뒤편, 곱게 늙은 왕벚나무 앞에 선다. 어떤 사연으로 수명을 다해가는 고목과 교감하게 되었을까. 기력을 소진해 갔던 노친처럼 미덥게 느껴져 마주하게 되었다.
한 그루의 왕벚나무는 영고성쇠의 세월을 살아오다 노쇠로 기운이 쇠잔하여 5% 정도만 살아있다. 모든 생명체는 부여받은 시간을 뛰어 넘기 힘들다. 때가 되면 싫어도 떠나가야 한다. 이런 현실 앞에서도 천 년이나 살 것처럼 으스댄다
’늙으면 저렇게 추해지는구나. 알맞게 살다가 돌아서는게 보이다.‘ 따스한 봄날 고목이 된 왕벚나무를 바라보니 뜬금없이 이런 생각이 든다.
’적당하게 살다가 아깝다 할 때 떠나야지‘ 만날 때마다 고향 어른이 하시던 말씀이다. 이젠 그런 소리도 들을 길이 없다. 어른들은 거의 떠났고, 나도 그 나이로 다가서기 때문이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왕벚나무 한 그루를 무심하게 보아온 지도 여러 해째다. 바빠서라기보다는 차분한 마음으로 성찰하지 못하는 성정 때문이다. 이젠 마음의 여유쯤은 갖고 살 나이도 되었다. 그래도 부질없는 욕심은 남았는지 머리는 늘 복잡하기만 하다.
힘겹게 목숨을 부지하는 노목의 지엽에선 때가 되면 몇 송이의 붉은 벚꽃을 피워낸다. 처연해 보이긴 해도 생명력이 느껴져 반갑다.
귀한 목숨으로 지구를 지키는 일은 축복이다. 동식물 모두 그렇다. 나는 주어진 생명의 가치를 위해 하는 일에 열정을 다 한다. 사람들은 애면글면 모은 재산으로 좋은 일을 하고 부귀영화도 누린다. 빈손인 사람은 더 편한 삶을 위해 열심히 땀을 흘린다. 선의의 경쟁은 언제 봐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늙어서 쇠약해진 왕벚나무는 살아남은 한쪽 표피의 세포조직에서 뽑아올린 수액으로 모진 생명을 지탱해간다. 이별의 시간이야 알 길이 없지만 표피 쪽에 조금 남은 세포조직이 안쓰럽게 느껴진다. 누구로 힘겨운 삶을 지탱해가는 왕벚나무를 바라보니 훗날 내 모습이 떠오른다.
한 생을 온전히 지키려는 동식물의 의지를 값지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벌과 나비 모두 떠난 왕벚나무를 지켜보니 측은하다. 이웃들 관심 가져 줄 때 떠났으면 좋겠지만 그저 바람일 뿐이다.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노목에선 생명의 불씨가 남았다는 확인마저 쉽지 않다.
이렇게까지 어기차게 살아야 할까. 따뜻했던 봄날이 어제 같은데 벌써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삼복이다. 어느 봄 날 늙고 병든 왕벚나무 앞에 서서 했던, 죽음에 대한 기원은 염치없이 생명력으로 바뀐다. 앞산을 가득 채운 녹음을 바라보니 살아있다는 사실이 고맙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썩을대로 썩어서 수명을 다해 푸석푸석해진 왕벚나무의 살점은 수시로 떨어져 내린다. 화구에서 갓 나온 뜨끈뜨끈한 분골처럼 느껴진다.
마지막 순간까지 살으려는 애착은 생명을 준 창조주에 대한 예의이다. 추하게 보여도 좋다. 임종 순간엔 어쩔 수 없는 모습이라면 곱게 들일 수 있다.
늙고 병들어서 어설프게 보여도 누군가 살아온 가치를 인정해준다면 귀한 생애라 여겨진다. 푹푹 썩어서 떨어지는 목질(木質) 그 속으로 파고들어 얼마 안 남은 속살에서 생명의 힘을 찾아 낼 수만 있다면 값지게 대접해 주고 싶다.
동분서주하다 보니 찬바람이 불고 낙엽이 지는 계절이 왔다. 등산객의 발길이 빨라진다. 산야를 물들이던 단풍의 색깔도 천차만별이다. 양지에서 햇빛을 잘 받아 고운 빛깔로 바뀌는가 하면 음지해선 겉늙어 추한 모습도 많다. 모두 자신을 위해서 최선을 다 했으리라 믿는다. 성장 여건에ㅠ 따라 단풍의 빛깔도 차이가 나듯 사람들의 노후도 다르지 않다.
수목도 생존을 위해서 경쟁하고 스트레스도 극복해야 한다. 아름다운 음악을 좋아하고 여건이 나빠지면 신경쇠약이나 병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꽃을 못 피우거나 열매를 못 맺을 수도 있다. 어떤 생명이든 쉬운 삶은 없나보다. 부여받은 마지막 순간까지 온갖 시련을 잘 견뎌낸 생명체는 모두가 곱게 늙는 걸로 보인다.
고목이 된 왕벚나무도 생존경쟁에 유순하게 임했을 것이다. 스트레스도 적게 받고 자연의 심술에도 순응했지 싶다. 때문에 또래들 디 떠난 뒤에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있는 줄 안다.
편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고 싶다.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며 매사를 긍정적으로 맞고 보낸다. 장례 때마다 빈소 앞에 모여 앉은 대소가 어른들로부터 ’편안한 모습으로 가셨노라.‘는 얘기를 들어왔다. 순리의 삶을 살다가 떠났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등산로를 지키며 곱게 늙어가는 길을 일러준 왕벚나무, 그 정을 쉽게 잊지 못한다.
(최중수의 4 수필집 못 벗는 가면’에 수록)
늙은 왕벗나무를 자기를 빗대어서, 글을 썼네요. 이 수필을 읽으면, 노년이 된 작가의 마음의 자세가 읽어집니다.
시가 상징과 은유이듯이 수필도 이런 표현방식을 많이 사용합니다. 참고로, 수필에서는 두 개의(A와 B) 이야기를 병렬로 나타내는 것'이 '이중노출'입니다. 비유의 기법이기도 합니다. 최중수는 이 작품에서 전형적이지는 않지만 잘 이용하여 노년이 된 자신을 표현했다 하겠습니다.
다섯 번 째 수필집 ‘꽃보다 고운 침묵’도 지금까지 소개한 최중수의 수필세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꼼꼼이 따진다면 앞의 수필과는 다르게 읽어지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건너 뛰기로 하겠다.
첫댓글 앞에서 야웅(서정은) 선생께서 대구 문학상을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는 시인이시니 우리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선생님께서는 대구 문학상 일반을 말씀하신거라 생각이 됩니다. 이처럼 독자가, 우리 회원이 추천하는 형식도, 위에서 결정하는 문학상이 아니고, 밑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방식도 괜찮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