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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追跡者)-34
“지금 막 샬랴핀 호텔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세요. 라비에 좀 기다리시겠어요? 제가 그리로 갈게요. 15 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어요.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요?”
“키 185cm 정도. 네이비 블루칼라 필드재킷. 블루진 팬츠. 오른손에 지도를 들고 있을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오케이. 잠시 후 만나요.”
경쾌한 목소리로 말하며 먼저 전화를 끊었다. 쎄지로가 어떻게 말해 두었기에 처음 만나게 되는 여자가 이렇게도 친절할까? 못내 궁금하였다.
호텔 라비에는 오전 시간이라서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몇 몇의 투숙객들이 아침 식사를 마치고 창가의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하고 있었다. 창밖의 거리는 평화로웠다. 바람은 거의 없는 듯 고요하였다. 이곳은 바쁜 것이 없는 듯 보였다. 대부분이 유럽에서 여행 온 사람들 같았고 일본인 비슷한 동양인들 네 명이 등산복 차림에 지도를 펼쳐놓고 무엇인가 찾고 있었다. 그들의 목에는 작은 카메라가 목걸이 처럼 걸려 매달려 있었다.
실내는 동남아의 호텔 처럼 그런 지역 특성적 냄새도 없었다. 쾌적하였다. 창가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은 이미 눈이 와 있는지 정상은 희게 보였다. 이 호텔은 다운타운의 언덕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라비에서도 거리가 보였지만 역시 한가하였다. 온타리오 북서쪽에 있는 구엘프의 구 타운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더 쾌적하고 공기가 맑았다.
나는 입구 가까운 곳의 테이블 앞 소파에 앉았다. 자리를 잡고 앉자 창 너머로 노란색 르망이 호텔 앞에서 유턴하여 길 건너편에 주차하는 것을 보았다. 보도는 공사를 끝낸 지 얼마 안 되어서인지 마무리가 안 된 보도블록 몇 개가 흩어져 있었다. 그 차는 분명 르망이었다. 테일램프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르망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였다. 현재까지 르망은 외관상 특별한 문제가 없는 것 같았다. 머플러에서의 매연도 거의 없었다. 관리를 잘한 것 같았다. 반가웠다. 르망. 이곳에서 한국의 대우에서 만든 르망을 보다니. 그 르망은 낡은 볼보 픽업트럭 앞에 날렵하게 주차하였다. 르망의 문을 열고 나온 여자는 풍만하였다. 큰 키는 아니었지만, 밉상은 아니었다. 청바지에 두툼한 회색 양털 재킷을 입었다. 신발 역시 양털로 된 부츠였다. 전형적인 추운 나라의 겨울을 지내기 위한 차림이었다.
그녀는 르망의 문을 닫고 거침없이 보도를 건너 샬랴핀 호텔로 걸어 들어왔다. 한눈에 나를 알아보고 그렇게 그녀는 내 앞에 나타났다. 미소도 없이.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이건 예의이다.
“제임스 리?”
“올가 미카엘?”
이상한 첫 인사였다. 서로가 무엇을 의심해서 확인하는 절차였다.
그녀는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내 주위를 천천히 한 바퀴 빙 돌아서 다시 내 앞에 섰다.
주위의 사람들이 이상한 눈빛으로 우리를 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의외로 아무도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나와 직접 관계없는 것에는 관심 두지 마라. 아마 이러한 것들이 공산권에서 살아 존재하는 방법이었으리라. 관심을 끈다는 것이 곧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함으로.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보며 미소를 다시 짓고는 왼손을 내밀었다. 오른손은 오른쪽 허리에 올려놓고 있었다. 나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으며 다음 행동이 무엇일까 하는 쪽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이 작은 여자가 나에게 적의를 품고 있을 이유는 없을텐데, 하는 짓이 무척 경계를 하는 것 같았다. 이것도 공산권 관료의 타성일까. 이제는 과거의 타성에서 벗어 났을텐데… 나는 그녀의 내민 왼손을 왼손바닥으로 잡았다. 그리고 오른쪽 손을 내 왼손 위에 올려놓았다. 일단은 당신에게 적의가 없고 당신에 대한 다음 행동도 호의적이다 라는 것을 알렸다. 그제서야 그녀의 오른손이 내 위에 있는 오른 손 위에 올려졌다. 우리는 이상한 악수로 의사소통을 시작하였다.
“만나게 되어 반가워요. 오시느라 힘드셨지요?”
그녀의 음성은 처음보다 부드러웠다.
“올가양. 당신을 빨리 이곳에서 만나게되어 아주 좋습니다. 그런데, 이대로 서서 이야기 할까요?”
그녀는 웃었다.
“저쪽 창가로 가서 자리를 잡아주세요. 뭘 드시겠어요?”
“커피. 트리플 트리플. 부탁합니다.”
“What’s triple triple?”
그렇다. 그들이 알 턱이 있겠는가. 토론토의 전형적인 주문 방식을.
“3 스푼의 커피메이드와 3 스푼의 설탕. 토론토주문 방식입니다.”
“아. 그래요? 하나 배웠어요. 근데, 설탕 너무 많이 드시는 것 아니에요?”
이렇게 대화의 시작은 부드럽게 풀려나갔다. 처음과는 달리 서로에게 호의가 주고 받아졌다.
웃음과 함께. 새로운 사람과의 관계시작은 언제 웃음이 나오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진다. 우리는 호의적인 대화를 부드럽게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뜨거운 녹차를 한 입 마신 후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건 어디에서나 잘 교육받은 공무원들이 처음 내뱉는 인사말인데… 국경 없이 이 지구상에 퍼져있었다. 또한, 이 첫 물음의 대답이 중요하다. 승패를 가름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이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쉽게 대답하였다가는 상황을 금방 악화시킬 수 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보면 항상 처음 맞닥뜨리는그 나라의 공항 입국 심사대에서의 질문이었다. 중요하다. 기선을 제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한국과의 관계는 잘 되어 가고 있습니까?”
“제가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당신은 한국의 여러 사람을 알고 계시더군요.”
됐다. 그녀가 나를 무시할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처음을 잘 넘겼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우선 당신을 만나라 하였고, 당신을 만나면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줄 거라 말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을 이곳에서 만날 약속이 되어 있어요?”
“아직은 아닙니다.”
“그럼 됐어요. 이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말해봐요. 이곳은 내 손 안에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에요. 저는 이곳에서 자라 이곳에서교육을 받고 이곳에서 결혼하여 이곳에서 직장을 가지고 이곳에서 불편없이 잘 지내고 있어요. 나를 떠나서는 외지인이 이곳에서 무엇을 하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녹차가 담긴 유리잔을 왼손바닥에 올려놓고 오른손으로 매만지며 자신있게 말하였다.
“올가양. 나는 지금 곧 1940~1944 년 사이의 움스크에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특히 그 당시 러시아 황실의 수호대와 바이칼호과 연관된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자료와 그들 제정 러시아 수호대들이 군자금을 왜 움스크로 가져가려 했는가와 어디에 사용하려 하였는가를 알고 싶습니다.”
그녀의 얼굴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놀라는 모습을 읽었다.
“제임스. 당신. 어디서 누구를 위해 일하고 있어요?”
그녀는 한국으로 부터는 무엇을 도와주라는 부탁만 받았지 더 이상 나에 대한 상세한 것은 모르고 있음이 당연하였다. 알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현재 나는 어느 국가나 누구를 위하여 일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캐나다의 사립탐정입니다.
움스크와 한국의 관계가 경제 발전적 성장을 위한 투자단계로 들어가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길 바라는 사람의 요구로 새로운 투자환경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려 합니다.”
“그것은 제가 처음 듣는 이야기 같은데요?”
“예. 당신이 처음 듣는다는 것 마저도 저에게는 부담입니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투자자들의 초기 습성이지요. 아직은 초기 단계이며 협조의 질에 따라 상황 발전 상태가 달라질 것입니다.”
말이 잘되었다. 과거 해외 시장개척을하며 습득한 상황대처 경험들이 급속도로 머리에서 정리가 되어 입안에서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협박까지 하시는군요. 제임스. 좋아요. 저도 그렇게 복잡한 것은 당장 알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다만, 당신이 필요한 요구를 제 능력껏 돕겠어요. 그러면 되겠지요? 저는 이 자리에서 리타이어 하고 싶어요. 더 바람직한 것은 한국과의 관계 발전을 위한 칸설턴터가 되어 리타이어 후에도 일 할 수 있다면 하는 것이에요.”
그녀는 웃었다. 이야기는 잘 되어 가고있었다. 그녀의 꿈이 야무졌지만, 바람직하였다. 그렇게 되길 나도 바란다. 올가 미카엘이여.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 창밖의 르망 넘어 맑고 푸른 청아한 늦가을 11 월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길 가던 한 노인이 르망 안을 차 유리창을통하여 살피고 있는 것도 함께.
“저도 그런 당신을 희망합니다. 이미 한국에서 무엇을 도와주라는 간단한 말을 들었을 걸로
짐작합니다만.”
“예. 맞아요. 그런 것이라면 정리가 된 것이 있어요. 4 개월 전 칼림교라는 러시아정교 분파의 사람들이 와서 찾고 요구한 것들을 모아 둔 것이 있어요. 아마 그것이 참고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놀라운 정보였다. 이미 칼림교 그들이 여기까지 손을 뻗쳤다는 사실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올가에게 말하며 이유를 알기 위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지금 곧 준비될 수 있을까요?”
“잠깐 기다리세요. 차 안에 서류들이있어요. 곧 가져올게요.”
“올가. 저도 잠깐. 당신의 차는 르망이군요. 움스크에서 운행되는 르망이 많습니까?”
“왜 그러시죠? 지금은 수십 대 정도예요. 몇 년 전에는 영업용 택시 대부분이 한국 대우의 르망이었어요.”
“누가 당신 차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져오겠습니다. 열쇠를 주십시오. 서류는 어디에 있지요?”
그녀는 놀라서 창 밖 길 건너에 주차된 르망을 바라보았다. 그 노인은 아직 르망 곁에 있었다.
나는 출구를 나가며 회전문 밖에 서 있는 호텔 도어맨에게서 건물 뒤편에 주차장이있음을 확인하였다. 노인은 내가 르망에 다가가자 한발 물러서며 뭐라고 말하였다. 아마 러시아말 일 것이다. 그 목소리는 앙칼지고 협박적이었다. 내가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말이어서 난감하였다. 그는 물러설 기세를안보였다. 호텔 안에서는 이 광경을 많은 사람이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노인은 뭐라고 떠들었다. 오래 시간을 끌 수 없었다. 호텔을 바라보니 호텔 좌측 벽 쪽에 두 사람이 기대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키가 작았고 등을 보인 채 벽을 짚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 섰던 것은 남자였고, 등을 진 사람은 여자였다. 검은색 베레모에 아래 등 뒤로 넘긴 까만 머리카락은 바람결에 날렸다. 짙은 초록색 파이럿 점퍼를 입고 있었다. 점퍼는 그녀의 가녀린 허리까지 겨우 덮고 있었다. 옅은 청색 진은 바지에 꼭 끼듯 붙었고 동그스런 힙을 탱탱하게 감싸고 있었다. 회색 양털 부츠는 굽이 없었다. 전체가 날렵하고 날씬해 보였다. 야생마가 벽에 기대어 다음 단계의 행동을 위하여 숨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자 나는 놀랐다. 케롤라인과 닮았다. 처음 보는 순간 몸짓과 형태에서 예사롭지 않았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이미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러시아의 움스크가 아닌가. 그래도 케롤이었다. 그녀는 다시 벽을 향하고 있었지만. 옆의 남자에게 뭐라고 지시하고 있었다. 벽에 기대어서 나를 본 그 남자는 곧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일촉 측발의 난처한 상황이 전개되려 하고 있었다. 노인을 밀칠 수도 없었다. 길 건너온 사람은 30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남자였다. 그는 청바지에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스포츠형이었다. 예사로운 놈은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들과 공개된 장소에서 싸울 수는 없었다. 나는 바로 아래 보도 가장자리에 널브러져 있는 보도블록 중 가로세로 30 센티 두께가 6 센티 정도 되는 보도블록 한 장을 주워들었다. 노인은 놀라 나를 보며 한 발짝 더 물러났으며 입을 다물었다. 길건너온 놈이 그 노인 옆에 섰다. 나를 보며 두 손을 가죽점퍼에서 꺼낸 채. 나는 그들 두 사람을 마주보며 보도블록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을 어깨까지 올렸다가 수도로 그 보도블록을 힘차게 내려쳤다. 순식간이었다. 그 보도블록은 퍽 소리를 내며 반이 갈라져 한쪽이 보도로 떨어져 나갔다. 그들이 놀랄 틈도 없이 나는 연속으로 나머지 반을 다시 수도로 내려쳐 반으로 갈랐다. 그리고는 눈도 깜박하지 않고 그들을 노려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라는 모습이 가득하였다. 가죽점퍼 놈이 허리를굽혀 깨어져 있는 보도블록 한쪽을 주워들고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아무 말 없이 노인의 팔을 잡고 뒤 돌아 빠른 걸음으로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사실, 보도블록을 손으로 깬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려치는 손바닥 옆 부분이 보도블록과 닿는 순간에 쏟는 집중된 힘. 그리고 내려치는 곳의 위치와 정신 집중이 일치가 되었을 때 가능하다. 물론, 그런 것에 대한 많은 수련이 이미 쌓여있음을 전제로. 싸움을 막는것 중에는 상대의 강함을 적에게 보여 주어서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나는 그것을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들은 올가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올가와 만났거나 혹은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을 알고 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케롤같은 여성과 그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다시 호텔 주차장에서 뒷문을 통해 들어와 올가 앞에 앉았을 때 나를 기억하는 몇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별 것 아니라는 것을 미소로 알려주었다. 르망을 호텔 주차장에 세워두었다.
“제임스! 멋졌어요. 아주 멋졌어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아주 멋졌어요.”
올가가 두 손을 들어 엄지를 위로 치켜세우며 놀라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