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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예레미야서의 말씀 23,5-8>
5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6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7 그러므로 이제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하지 않고,
8 그 대신 “이스라엘 집안의 후손들을 북쪽 땅에서, 그리고 당신께서 쫓아 보내셨던 모든 나라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자기 고향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 복음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시리라.”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 1,18-24>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묵상글
<또 하나의 요셉>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인과(因果), 곧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흔히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라고 질문을 던지는 그것입니다.
내게 좋은 일이 일어났을 때는 내가 이렇게 저렇게 잘해서 그 일이 생겼고, 내가 잘한 것이 없을 때에는 다른 누구의 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반대로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나의 잘못이나 죄 때문이라거나 나의 탓이 없다고 생각될 때는 조상 탓이나 남 탓을 합니다.
이것은 하느님은 생각지 않는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생각입니다.
이것의 대표가 바로 불교의 연기론으로서 인과응보, 자업자득, 업보와 같은 말들이 여기서 나온 거지요.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그 원인이 있으며 그 원인도 나든 너든 인간의 마음이나 행위가 그 결과의 원인이라는 것으로, 마음 안에 이미 결과가 있다는 유심연기론(唯心緣起論)까지 있지요.
예를 들어 마음보를 곱게 써야 좋은 일이 생긴다거나 복이 온다고 하지요.
인간이 마음만 먹었어도 그 안에 선 또는 악의 씨앗이 있어서 선 또는 악의 결과가 열매를 맺는다는 얘깁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교라고 해서 다른 것은 아닙니다.
원인과 결과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하느님의 구원계획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차이인 겁니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무신론이기에 하느님 없이 모든 인과 관계를 설명할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인간에 의한 인과 관계로 다 설명되지 않는 일들은 하느님의 개입으로 믿고, 이것을 하느님의 섭리라고 얘기합니다.
프란치스코는 페루지아와의 전쟁에서 져 포로가 되고, 감옥 생활 후 1년을 중병을 앓다가 살아난 뒤 다시 전쟁터로 나갑니다.
젊은 나이에 전쟁과 포로 생활과 병상 생활이라는 큰일을 내리 겪으면서도 이 일들이 왜 나한테 일어났는지 알아채지 못한 채 또 전쟁터로 간 겁니다.
사실 신앙인이라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자기 뜻과 다른 일이 벌어질 때 거기에 하느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채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거지요.
결국 환시를 보고서야 자기에 대한 하느님의 더 큰 계획이 있음을 알고, 처음으로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느님의 뜻을 여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요셉의 뜻과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알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을 복음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요셉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알지 못한 채 마리아와 약혼을 했습니다.
자기가 마리아와 결혼하는 것이 하느님의 구원계획임을 알지 못한 채 인간적인 이유로 그리고 자기 계획에 따라 약혼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나나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섭리와 계획을 모른 채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일이 벌어지거나 합니다.
어떤 때는 내 뜻대로 되고 어떤 때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데, 그것을 우리는 성공이라고 생각하거나 실패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를 기준으로 하면 성공이나 실패이겠지만, 하느님을 기준으로 하면 성공도 아니고 실패도 아닌 다만 하느님의 뜻일 뿐입니다.
내게 벌어지는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섭리를 보며 그 일들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그 일을 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요셉이 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 작은형제회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의 묵상글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예레미아는 주님의 오심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예레 23,5-6)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화답송을 바쳤습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시편 72,7 참조)
복음은 태어날 아기가 예고된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됩니다.
그렇다면 요셉 그는 어떤 사람인가?
복음에서 그는 “의로운 사람”(마태 1,19)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믿되,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행동하되, 순명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행하는 진정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마태 1,24)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결혼하기도 전에 아내를 포기해야만 했고,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구원의 협조자가 된다는 것은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는 ‘그분의 뜻’ 안에 머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위는 성령의 작용, 곧 은총에서 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모두 하느님의 도구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서 활동하시도록 하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믿음과 순명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이 모든 일에 대해,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마태 1,22)
그러니 우리 모두는 성 요셉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조력자요 협력자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곧 “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좋으신 계획이 완성되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
주님!
의심을 떨치고 신비를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의 개입을 맞아들이게 하소서.
기이하고 황당하게 보여도 ‘당신의 뜻’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어처구니없고 터무니없게 보여도 ‘당신의 뜻’을 품고 살아가게 하소서.
제 안에 ‘당신의 뜻’을 세우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도회
♠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소리기도와 관상기도 사이에서의 묵상기도의 역할>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와 결혼하라고 말하며 이름을 ‘예수’라고 지으라 말합니다.
‘예수’는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태오는 이 예수라는 이름을 이사야서에 예언된 ‘임마누엘’과 연결합니다(이사 7,14 참조).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고, 그 함께 계셔주심은 곧 우리를 죄에서 해방해 준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예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우리와 함께 계셔주시면 우리가 죄를 짓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와 함께 머물며 나를 바꾸려 한다면 나의 의지보다는 그 사람의 의지가 강하게 작용하는 것입니다.
자칫 이것은 의처증이나 의부증처럼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타인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피그말리온’에 관한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피그말리온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로 키프로스의 조각가였습니다.
피그말리온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의 여사제들의 문란한 모습을 보고 여인과의 사랑에 환멸을 느낍니다.
그는 순결한 여성을 만들기를 원했고 상아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을 조각하여 갈라테이아로 이름까지 지어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모든 면을 갖춘 여인이라 믿으며 갈라테이아를 사랑하였습니다.
그 조각상에 키스하거나 포옹하기도 했으며 비싼 옷과 꽃과 보석으로 장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상을 아내라 불렀습니다.
아프로디테를 위한 축제의 날, 피그말리온은 자신의 의무를 다한 후 아프로디테에게 한 가지 청을 합니다.
‘상아로 만든 처녀’를 자기 아내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아프로디테는 그러겠다고 약속했고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에게 키스하자 갈라테이아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프로디테는 둘의 결혼을 축하해주었고,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는 훗날 파포스라는 이름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잘못된 사랑의 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갈라테이아는 한 인격체가 아니라 인간이 되어서도 여전히 조각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녀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사랑 이야기가 제대로 완성되려면 인간이 된 갈라테이아가 피그말리온을 선택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그 시간이란 피그말리온이 갈라테이아를 혼자 남겨두어 곰곰이 생각할 시간을 의미합니다.
만약 피그말리온이 계속 눈앞에 있다면 갈라테이아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변화시키시기 위해 ‘임마누엘’이 되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인간과 함께하시기 위해서는 당신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잠시 떠나있으며 인간에게 묵상할 시간을 주시는 것이 맞습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함께 있어서 변화시킬 수 있는 한계는 육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은 육체의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계에서도 이런 일이 적지 않게 일어납니다.
감독이 여배우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만들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요제프 폰 스턴버그’ 감독과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관계입니다.
스턴버그 감독은 당시 무명 배우였던 디트리히를 과감하게 ‘푸른 천사’의 롤라 역으로 캐스팅합니다.
그리고 그 영화는 디트리히를 완벽하게 스타로 재탄생시킵니다.
스턴버그는 디트리히를 할리우드로 데려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변신시킵니다.
우선 몸무게를 13kg이나 빼게 했고 이를 뽑아 광대뼈가 더욱 두드러지게 하였습니다.
눈썹을 잡아당겨 높게 하고 코에 명암을 주어 콧방울이 좁아 보이도록 했으며 머리에는 금가루를 뿌려 빛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의상도 손수 골라서 입혔습니다.
스턴버그는 카메라와 조명,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낸 디트리히의 얼굴만 있으면 숨 막히는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둘의 관계는 오래 갔을까요?
그나마 오래갔습니다.
둘은 8년을 연애했습니다.
문제는 둘 다 유부남, 유부녀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그녀에 대한 스턴버그의 소유욕과 집착이 둘의 관계를 파경으로 치닫게 하였습니다.
훗날 디트리히는 “그는 나를 자기의 갈라테이아로 만들 생각밖에 없었다.”라고 토로하였습니다.
그녀가 떠나자 스턴버그는 불면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렸으며 감독으로서도 퇴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와 비교하여 닉 부이치치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팔다리가 없었던 닉 부이치치는 8살 때 이미 자살 시도를 했고 아내의 손을 잡고 걸을 수도 없는 자신과 누가 결혼해 주겠느냐는 걱정을 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닉 부이치치’는 일본계 미국인 ‘카나에 미야하라’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는 미야하라에게 첫눈에 반하여 사랑을 고백했지만, 미야하라는 평생을 그 사람과 함께 살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때 닉 부이치치는 자신들의 사랑을 하느님께 맡겨보자고 합니다.
1년 동안 만나지 말고 1년 뒤에 다시 만났을 때 서로의 사랑이 더 증가하였다면 그것을 하느님께서 사랑을 허락해 주신 표징으로 믿자고 하였습니다.
어쩌면 미야하라는 단 몇 번 본 그 팔다리 없는 사람을 1년 뒤 더 사랑하게 될 것이란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1년 뒤 그녀는 하루하루 닉에 대한 사랑이 더 증가한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상대를 깊이 생각하며 내린 결정은 나중에 거의 바뀔 일이 없습니다.
나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지금 우리 눈에 보이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도 묵상하여 주님을 자의로 받아들일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멀어지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사랑한다면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사랑이 더 증가합니다.
만약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사랑이 감소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기에 일찍 그 관계를 접는 게 낫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때 참사랑은 비로소 시작됩니다.
- 수원교구 영성관장, 수원가톨릭대 교수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오늘은 ‘예수’라는 이름의 뜻과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 라는 이름은 ‘하느님은 구원이시다’, ‘하느님은 구세주시다’라는 뜻을 갖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라는 말로 그 뜻을 암시하였습니다. (마태 1,21)
죄에서 구원된다는 것은 우상 숭배나 이단뿐 아니라 노예살이로부터의 해방이며,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는 포괄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어버렸습니다.” (로마 3,23)
바로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보면 ‘죄’라는 말은 인간이 구원받아야 할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자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삽니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이요, 희망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구원에로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이사야서 7장 14절에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하고 예언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항상 함께 계신다는 지식은 이스라엘의 신앙 속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이스라엘의 특징이자 영광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러하였듯이 예언자들이 선포하는 미래에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실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성조들이 전쟁중에 있을 때, 판관들의 시대에 제사당에 모인 군중 속에,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기름을 부을 때, 예언자들이 사명을 수행할 때, 그리고 당신 약속을 지키시어 구원을 베푸실 때 하느님은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생활을 할 때에도 여전히 함께 하셨고,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를 통한 구세주의 잉태를 알려 주었을 때도 함께 하셨으며, 그 예언의 성취를 이룬 오늘 예수님을 통해 우리 삶의 여정에도 함께하십니다.
“내가 너를 구원하였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나의 것이다.
네가 물 한가운데를 지난다 해도 나 너와 함께 있고 강을 지난다 해도 너를 덮치지 않게 하리라.
네가 불 한가운데를 걷는다 해도 너를 타지 않고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하리라.”
(이사 43,1-2)
하느님께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또한 내일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과 더불어 모든 시련과 고통, 어려움을 이겨내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분은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나신 적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고, 숨었을 뿐입니다.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원장
♠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요셉은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대림 시기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한 인물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살짝 등장하는 요셉 성인이십니다.
예수님의 양부이자 성모님 인생의 동반자셨던 요셉은 구세사 안에 꽤 중요한 인물인데도 복음서 안에 거의 등장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을 소개할 때 언제나 교회는 그를 의인, 과묵한 사람, 침묵의 성인으로 칭송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침묵의 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침묵은 그저 입 다물고 아무 말 않는 침묵이 아니라, 하느님의 육화강생이란 큰 신비 앞에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취한 차원 높은 침묵이었습니다.
만일 요셉이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 앞에서 입을 다물지 않고 크게 떠벌렸다거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면,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큰 지장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침묵하고 또 침묵했습니다.
침묵 속에 육화강생의 신비를 묵상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예수님의 이해하지 못할 언행들 앞에서 또 침묵했습니다.
지금은 비록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알려주실 것임을 굳게 믿으면서 침묵하고 또 침묵한 것입니다.
당시 유다 결혼 문화 안에서 약혼 기간 동안 두 사람은 각자 부모의 집에서 거주했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로 간주되었습니다.
요셉은 이미 법적으로 마리아의 남편이었습니다.
만일 그 기간 동안 약혼녀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든지, 고무신을 바꿔 신어버렸을 경우 큰 범죄로 간주되었습니다.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의 경우 요셉은 당시 혼인법에 따라 마리아에게 이혼장을 써주고 두 증인 앞에서 차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될 경우 마리아와 그녀의 부모가 받게 될 모욕과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인간의 의지를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천사의 말을 굳게 믿고, 큰 곤경에 처한 마리아를 끝까지 보호했습니다.
마리아의 생애에 발생한 이 특별한 사건 앞에서 요셉이 겪었던 내적인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셉은 닭쫒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된 것입니다.
어찌 보면 사랑하는 약혼녀를 일순간에 하느님께 강탈당한 것입니다.
마리아와 꿈꾸던 단란한 가정도 물 건너 가버린 것입니다.
요셉은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이고 고뇌했을 것입니다.
마음이 크게 동요되어 밤잠도 설쳤을 것입니다.
배신감에 치를 떨기도 했을 것입니다.
의심도 하고 심사숙고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의롭고 신심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명하고 협조한 요셉 덕분에,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은 큰 무리 없이 첫 삽을 뜰 수 있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침묵의 사랑, 침묵의 훈련 - 침묵 예찬>
요셉 수도원 성탄카드의 배경 그림과 수도형제들의 얼굴 모습들의 구성이 참 깊고 신비롭고 평화롭고 아름답습니다.
깊은 사랑의 침묵중에 태어난 성가정의 예수님 아기와 더불어 동안의 미소띤 수도형제들의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무엇보다 감지되는 사랑의 침묵의 분위기입니다.
오늘 강론 제목은 ‘침묵의 사랑, 침묵의 훈련-침묵 예찬’입니다.
옛 사막 수도자들은 예외없이 사막의 침묵과 고독을 사랑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들의 생래적 특징이 침묵과 고독에 대한 사랑이요 이 또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사랑하는 관상적 성향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침묵과 고독을 사랑합니다.
아주 예전 써놨던 둥근 달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푸르른 밤 하늘
휘영청 밝은 달 하나
온누리
환히 밝힌다
푸르른 깊은 침묵이
휘영청 환한 사랑
둥근 달 하나
낳았구나!
푸르른 깊은 침묵의 하늘이!
얼마 전 수확이 끝난 텅 빈 충만의 배밭, 광야의 수도승들같은 겨울 동안거에 들어간 배나무들을 보며 쓴 글입니다.
“일체의
부수적인 것들은
미련없이
다 떠나 보내고
본질로 남아
동안거
깊은 침묵중에
봄꿈을 꾸는
겨울나무들
겨울은 이렇게 지내는 거다.”
대림2부 강론은 저녁 성무일도 마리의 노래 중 “오” 후렴을 나누고자 합니다.
흡사 깊고 아름답기가 하느님의 깊은 침묵중에 태어난 “오” 후렴처럼 생각됩니다.
“오, 하느님이여,
이스라엘 집안을 다스리시는 분이여,
불타는 가시덤불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산에서 그에게 당신 법을 주셨으니, 오소서, 팔을 펴시어 우리를 구원하소서.”
20세기의 가톨릭교회의 대표적 영성가를 꼽으라면 저는 주저없이 토마스 머튼을 꼽고 싶습니다.
참으로 침묵과 고독을 사랑했던 트라피스트 수도승이요 그의 주옥같은 무수한 글들은 이런 깊은 침묵중에 태어난 것임을 깨닫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침묵 예찬과도 같은 침묵의 소중함이란 시도 나눕니다.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온전히 하느님께 맡길 때
바로 침묵은 양선함입니다
침묵은 자비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치 않고 마음속 깊이 변호해줄 때
바로 침묵은 자비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불평없이 고통을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 때
하느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춰졌을 때도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든 어떻든 내버려둘 때
바로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 믿음입니다
그분이 행하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 안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바로 침묵은 믿음입니다
침묵은 흠숭입니다
“왜”하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옹할 때
바로 침묵은 흠숭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관상가이자 침묵의 사람입니다.
침묵의 관상과 사랑의 활동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침묵의 관상에서 샘솟는 사랑의 활동입니다.
그러니 침묵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저절로 훈련이 뒤따릅니다.
기쁨도, 희망도, 사랑도, 기도도 훈련이고 침묵도 바로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깨어 침묵의 훈련에 전념하는 대림시기입니다.
저는 21세기를 대표하는 가톨릭교회의 살아 있는 성인이자 영성가를 꼽으라면 주저없이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꼽겠습니다.
어제는 마침 교황님의 85세 생신날이었습니다.
전전주 수요일 일반 알현 시 교황님 강론도 참 깊고 아름다웠습니다.
침묵의 사람, 성 요셉에 대한 내용으로 성 요셉뿐 아니라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침묵의 사람임을 깨달았습니다.
통째로 번역하여 나누고 싶은 강론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번 침묵에 대한 강론은 그러했습니다.
침묵의 여정 중의 성 요셉으로 묘사했습니다.
특히 공감하는 감동적인 부분을 나눕니다.
“침묵, 얼마나 자주 우리는 침묵을 필요로 하는지!
침묵은 중요하다.
나는 다음 지혜서 말씀에 충격을 받았다.
‘온유한 침묵이 만물을 감쌌을 때, 당신의 전능의 말씀이 하늘로부터 뛰쳐나왔다.’
바로 침묵의 그 순간에 하느님은 자신을 계시하신다.
복음은 나자렛의 요셉이 발설한 말은 단 하나도 언급하지 않는다.
nothing! 무(無)다!
그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말없음(tacitum)’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왜 복음이 한마디도 말하지 않는지 거기에는 깊은 사유가 있다.
자신의 침묵으로 성 요셉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 말씀(the Word)’이 우리 안에 자라나면서 ‘말들(words)’은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영성생활은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자라나는 정도에 따라 말들도 사라지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말했다.
‘그분은 커져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
바로 이것은 그분은 말씀하셔야 하고 자신은 침묵해야 함을 뜻한다.
요한은 자신의 침묵을 통해 말씀이 살이 되신 분의 현존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드리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성 요셉의 침묵은 결코 말없음의 침묵이 아니라 경청으로 가득한 침묵, 근면한 침묵, 그의 위대한 내면을 보여주는 침묵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말한다.
‘아버지는 한 말씀을 하셨고 그 말씀은 바로 그의 아드님이다.’
삶의 관상적 차원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침묵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계속 말을 쏟아내며 라디오를 텔레비전을 찾는다.
그들은 두렵기에 침묵을 받아들일 수 없다.
철학자 파스칼은 말한다.
‘사람들의 모든 불행은 단 하나의 사실에 기인한다. 그들은 자기의 방안에 고요히 머물 수가 없는 것이다.’
침묵의 훈련 없이, 침묵의 수행 없이 우리의 혀는 우리를 괴롭힌다.
진리가 빛나게 하는 대신 우리의 혀는 위험한 무기가 된다.
실로 우리의 말은 아첨, 허풍, 거짓말, 험담, 모함의 말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대선을 앞둔 오늘의 현실에서 수없이 목도하는 이런 공해와 같은 쓰레기 같은 말들이요 가짜 뉴스들입니다.
오죽하면 기자들을 기레기라 하겠는지요!
내면을 그대로 반영하는 혀의 말들이요 그만큼 내면의 침묵이 고갈되어 있다는 반증입니다.
정말 영성가들은, 성인들은 침묵의 사람들입니다.
성 요셉, 세례자 요한, 십자가의 요한, 오늘 복음의 의로운 성 요셉, 프란치스코 교황, 또 제1독서의 예언자 예레미야 예외 없이 모두가 침묵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셉의 태몽입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요셉을 신뢰했는지 감지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얼마나 성 요셉을 흠모하는지 요즘 배웁니다.
예전 마음 순수했을 때는 태몽도 많았는데 오늘날 태몽을 꾸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모두가 침묵 중에 일어납니다.
주님 천사를 통해 밤의 침묵의 꿈 중에 나타나 마리아에 관한 비밀을 소상히 밝히는 하느님입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환대, 겸손과 경청, 그리고 마지막 섬김과 순종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거룩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하느님은 얼마나 성 요셉이 고맙고 사랑스러웠겠는지요!
정말 하느님과 요셉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는 한없이 깊어졌을 것이며 성 요셉의 무궁한 내적 힘의 원천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 요셉 역시 예수님을 키우면서 이 태몽의 꿈을 결코 잊지 못했을 것이며, 하루하루 날마다 침묵과 경청의 하느님 환대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 했을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예레미야 예언자 역시 깊은 침묵의 영성가입니다.
깊은 침묵 중에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음이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서 서두 말씀은 얼마나 고무적이고 은혜로운지요!
언젠가의 그날은 바로 대림시기 오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됩니다.
매일매일의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바로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 부르시는 주님을 모심으로 우리 모두 정의와 평화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과 침묵의 결정체인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침묵의 사람, 정의와 평화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
이 시대에, 우리나라에, 우리 공동체에, 우리 하나하나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시편 72,7 참조)
아멘.
- 성 베네딕토회 성 요셉 수도원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만 원을 투자해서 만 원을 버는 사람과 만 원을 투자해서 백만 원을 버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잘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큰 이익을 보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능력 있고 지혜롭다는 평가가 주어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번에는 행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백만 원을 투자해서 일주일의 행복을 얻는 사람과 한 푼도 쓰지 않고서 한 달 이상의 행복을 얻는 사람 중 누가 더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당연히 후자의 모습입니다.
행복은 물질적 가치가 아닌 영적인 가치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으로 그 가치를 채우기란 쉽지 않습니다.
행복 연구가 대니얼 길버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행복은 사소한 일을 쌓는 과정에서 나온다.”
감사의 인사하기, 작은 것을 소중하게 여기기, 불필요한 소비재 사지 않기, 친절 베풀기, 밝게 웃어주기 등등….
돈 들이지 않고 행복할 방법이 참 많습니다.
소위 ‘명품’이란 이름이 붙은 물건을 산다고 해서 행복이 오래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나 자신이 소중한 ‘명품’이 될 때 행복도 오래 지속됩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복음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법대로 사는 올곧은 성격을 가진 것으로 나오지요.
하지만 그의 약혼녀 마리아에 대한 사랑도 지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크게 벌여서 마리아가 곤욕을 보는 역경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고 남모르게 파혼할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마태 1,21.22)
겉으로 보여지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면 당연히 사람들에게 ‘간음한 여자’로 신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메시지를 듣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의로운 요셉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소중한 ‘명품’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쉽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진정으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사랑에 기초한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가장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면서 그 안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 인천교구 갑곶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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