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까지는 스승님의 준말인 "스님"으로 불리다가 조선에 와서는 "중" 으로 불리워지고 천민 계급으로 추락하였다. 그 뿌리가 얼마나 깊었으면 제가 국민학교와 중학교 다닐때도 선생님은 삼국유사 저자를 중 일연으로 가르쳐 왔다. 그래서 저는 어릴때 성씨가 중인줄 알았다.
사찰에서 연등회, 팔관회등 의식을 집행하던 악사들이 사찰이 없어지면서 직업을 잃고 떠돌면서 음악을 연주해 주고 먹고사는 "건달바우" 로 전락했다. 오늘날 건달의 어원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명당에 대한 집착은 통일신라 때 까지는 왕족이나 상층귀족만이 풍수 지리를 신봉하였다. 고려때는 일반귀족 까지 확대되었고, 조선시대 부터는 서민층까지 확대되어 너도나도 명당을 찾게 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불탄절터는 무주 공산으로 주로 힘있고 돈있는 사람이 차지 하였다.
전북 고창 소요산 연기사는 명당을 차지 하려는 권력자에 의해 강제로 폐사된 절이다
연기사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소요산 에 신라 경덕왕때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 조사가 백제 위덕왕때 창건했다. 고창에는 동백꽃 북방 한계선(지금은 온난 화로 한계선이 북쪽 으로 이동)으로 동백꽃이 유명한 선운사가 있기도 하다. 고창의 옛이름은 흥덕현인데 옛 지도 에는 도솔산 선운사는 없으나 소요산 연기사 가 표시될 만큼 연기사는 유명 했었다. 1630년경 전라감사 임씨가 장성부사를 지낸 아버지의 묘터로 명당인 연기사터를 차지하기 위해 관군을 동원해서 절에 불을 지르고 불을 끄려 나온 스님들을 끓는 물에 삶아 죽이고 하여 절은 폐사되었 다. 사천왕문은 멀리 떨어져 있어 멀쩡 했으나 세월이 흘러 허물어져 사천왕은 장연강 갈대밭에 버려져 있었다.
설두스님이 영광 불갑사를 1870년 고종7년에 창건할때 일이다. 꿈에 연기사 사천왕이 나타나 장연강 갈대밭 에 있으니 데려가라고 했다. 그때 영광군수 도 한날 한시에 꿈을 꿔 두사람은 장연강 갈대밭에 있는 사천왕 을 현재 불갑사 사천 왕으로 복원하였다. 그후 어느교수가 장성부사 묘지를 발굴한 기록을 보면 구렁이 두마리가 들락날락 했는데 땅꾼 이 잡아서 약장수에게 팔았다. 약장수는 나무궤짝에 가두고 구렁이 쇼를 보여주고 약을 많이 팔아 돈을 많이 벌었 다. 땅꾼이 구렁이에 관한 얘기를 해주자 약장수는 강원도 산골에 암자를 짓고, 불전을 세워 두부자의 참회 기도를 대신 했다고 전해온다. 예로부터 죄를 지으면 구렁이로 환생한다고 불교에서는 전해온다.
현재 연기사 터는 연기재 댐 건설로 절터 대부분이 수몰 되었으며 장성부사묘는 잡초만 무성하고 그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