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운 분들을 뵈어
간밤 가을비가 내리고 날이 맑게 갠 시월 셋째 주말이다. 토요일 새벽잠을 깨 고향에서 햅쌀이 부쳐 오면서 따라온 누렁 호박을 잘라 껍질을 벗겨 놓았다. 갈아 으깨 전으로 부쳐질지 죽으로 끓여 나올지는 내 소관이 아니라 기다려볼 참이다. 평소와 같으면 주말이라도 아침 식후면 이른 시각 바깥으로 나가기 일쑤인데 집에서 미적대며 머물다 세탁소가 문을 열 때 세탁물을 맡겼다.
이후 내가 속한 문학 동아리에서 동인지를 펴낸 회원들과 함께 갖는 조촐한 점심 자리로 나가게 되었다. 이웃에 사는 전에는 사무국장으로 불리던 이가 회장으로 직을 옮겨 중책을 맡은 분 차에 탔다. 지난봄 이웃으로 이사 오고 차가 바뀌었음에도 서로 바쁘게 살아서인지 그 차를 처음 봤고 뒷좌석을 차지했다. 외동반림로 퇴촌삼거리에서 같은 생활권의 원로 회원 두 분을 모셨다.
이번 문집 지령이 30호로 동인지에서 한 획을 긋는다. 1988년 지역에서 시조 전문 동인으로 출범해, 그로부터 수년 후 장르를 개방하고 회원 수도 늘었다. 젊은 날 밀양에서 교직에 입문해 창원으로 옮겨 와 같은 학교 원로교사로부터 입회를 권유받아 얼떨결 합류했다. 여태 내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단체는 가입을 머뭇거리는데 유일하게 소속되어 외부와 교류하는 모임이다.
되돌아보니 초기 회원으로 작고한 분이 셋이고,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 원로가 두어 분 된다. 기존 얼굴이나 새로이 영입된 분이거나 회원 면면 필력으로나 인품에서 모두 반듯하고 본받을 데 있는 분들이다. 차는 도청 뒤를 돌아 정병터널을 빠져 눈에 익숙한 동읍 일대가 펼쳐졌는데, 집행부에서 예약한 동인지 발간을 기념하는 행사장은 창원 향토자료전시관과 같은 건물이었다.
시작 시각보다 일찍 행사장에 닿았다. 식당 입구에서 양해광 선생이 운영하는 창원 향토자료전시관으로 올라가 봤다. 계단부터 꽤 넓은 2층 실내는 웬만한 박물관급으로 자료들로 빼곡 채워져 있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양 선생은 오래전 공직 은퇴 후, 현직 시절부터 관심을 가진 사진 기록물과 민속자료 수집에 열정을 쏟아 우리 지역에서 명망 있는 향토사가로 인정받는 분이었다.
2층 전시관 자료들을 둘러보고 1층에 내려오니 식당 밖에서는 회원들이 속속 나타나 문집을 분배하고 행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지난봄 문학기행에도 동참하지 못한 죄밑으로 뭐든 거들고 싶었으나 나에게는 주어진 일거리가 없었다. 식당에서는 점심상이 차려지면서 집행부에서 문집을 출간한 의식을 진행했다. 원로분 회고담과 집행부 마음을 읽을 수 있었고 편집진 소회를 들었다.
출간 자축 의식 후 자리 앞 식탁의 맛국물에 채소와 버섯을 끓여 소고기를 익혀 먹으며 사리면과 볶음밥이 이어졌다. 가볍게 반주를 드는 분이 있기는 해도 예전에 비해 주량이 줄었음이 확연했다. 지난주 예식을 치러 새 식구를 맞은 회원이 보내온 떡이 후식으로 나오기도 했다. 자주 가지지 못한 회동이라 함께 한 옆자리 회원들과 그간 밀린 안부로 담소를 나누는 식사를 마쳤다.
식사 후 식당 바깥에서 행사장 전면 펼침막을 걷어와 손에 맞잡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바쁜 몇 분은 자리를 뜨고 다수는 바로 이웃한 주남저수지 둑으로 향했다. 간밤 비가 와 아침은 날이 개어 점심나절까지 꽤 덥게 느껴졌는데 오후는 구름이 물려오면서 날씨가 달라질 기미였다. 회원들은 차를 람사르관 근처로 옮겨 놓고 속속 둑으로 올라 물억새가 일렁이는 산책로를 함께 걸었다.
수위가 낮아진 드넓은 저수지 수면은 시든 연잎과 수생 식물이 가득 덮여 있었다. 멀리는 종을 알 수 없는 겨울새 선발대가 날아와 선회 비행하는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회원들은 낙조대 근처 쉼터에 이르러 무심히 스쳐 지나려는 가을을 단체 사진 속에 가두어 두었다. 배수문에서 탐조대로 되돌아 몰려온 먹구름은 끝내 빗방울로 후두두 떨어지기 시작해, 모임 산회와 맞아떨어졌다. 24.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