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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미농의 금강경강의 책 한권을 읽고 책떨이로써 독후감을 올립니다.
매우 두꺼운 강의책이지만 한페이지 한페이지 새롭고 귀한 문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염불기도와 경전공부가 서로 보완하고 상승효과가 있기에
공부하시는 분들께 [강미농의 금강경강의] 일독을 권하며서 읽으면서 정리한 일부 내용을 공유해봅니다.
*혹 큰 글씨로 자세히 보고싶은 분들은 첨부파일 참조 바라겠습니다.
A. [금강경강의- 강미농] 한 권을 읽고
금강경을 독송, 사경하면서 한 권의 금강경 강의 책을 읽고 느낀점
[강미농의 금강경강의] 두꺼운 책 한 권을 몇 개월에 걸쳐서 다 읽었습니다.
금강경에 대해 이렇게 깊게 철저하게 해석한 책이 있을까? 감탄하면서 지은이의 수행과 깊은 지혜에 마음에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경전을 공부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견해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백년 천년을 사유해도 내지 못할 부처님 견해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다행이 부처님의 경전을 만나 시간을 뛰어 넘어 부처님의 견해에 다가갈 수 있으니 얼마나 소중한 기회일까요? 먹고 사는 일에 집중해야 하지만 잠시 휴식도 취하면서 일생에 머리가 굳어지기 전에 한번쯤 경전공부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저는 염불 기도를 통하여 수행도 하고 싶고, 불보살님의 바른 인도와 가피를 얻고 싶습니다. 다만 부처님의 견해를 바로 알고 기도하고, 수행함이 더욱 바르고 빠른 길일 것입니다. 부처님의 견해를 공부함과 염불을 통한 성장은 동시에 필요한 듯 합니다.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등 경전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어떠한 경우들을 뒤로 미루더라도 경전 공부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몇 개월의 목표를 정하고 [강미농의 금강경강의] 책 한권을 읽기로 하였습니다. 예전에 금강경을 읽을 때 해석이 되지 않아서 혹시나 하고 사 두었던 두꺼운 금강경 강의 책을 이제야 온전히 읽어 해석하기로 하였습니다. 뛰엄뛰엄 몇 군데 해설만 보다가 이번에 3~4개월에 걸쳐 다 읽겠다고 목표를 정하니 더 집중해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다른 일을 물리치고 6개월이 더 걸려서 한 권을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두꺼운 해설집을 한줄 한줄 밑줄 그으면서 읽고 또 사경하듯이 요약하면서 컴퓨터로 옮겨 쓰고 정독하면서 이해하느라 목표보다 더 시간이 걸렸으나 이렇게 다 읽게 되어 책떨이 겸 느낀점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강의 책에는 한 두 시간 말로써 강의할 때는 할 수 없는 치밀하고 깊은 사유의 견해가 가득합니다. 저자가 수 십년 금강경을 공부하고 강의하고 저술한 책이니 단 한자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습니다.그 두꺼운 해설집에서 반복되고 중복된다고 느끼는 글귀가 하나도 없습니다. 한페이지 한페이지가 새로운 해석과 견해를 열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지은이의 견해가 날카롭고 방대하여 다른 어떤 해설집도 그 깊이나 치밀함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수 십년의 수행으로 맑은 견해를 전해주시니 빨리 이해하지 못하고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빈둥대며 머리를 식히는 저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불지견, 부처님이 보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부처님을 믿고(信), 부처님께서 열어 보이신 본성을 깊이 이해하고(解), 그 관점에서 세상을 열심히 살아야(行) 바른 방향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證)
경전 독송과 염불, 참선 그 어느 수행도 서로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강미농의 금강경강의] 책 한권을 읽으며 느낀점, 배운점, 요약내용을 간략히 소개해 보겠습니다. 금강경을 공부하면서 해석이 어려워 의문을 품었던 부분들을 책을 통해서 이해한 수준만큼 옮겨 보았습니다.
대부분 강의 책 내용을 옮김이며, 일부는 검색에서 따왔습니다. 옮기면서 문장을 쉽게 이해하려고 편집하다 보니 책에서 습득한 저의 얕은 해석도 알게 모르게 문장속에 혼용되어 썩이게 된 부분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목차
A. [금강경강의-강미농] 한 권의 책을 읽고
B. 금강경 이해를 위한 몇 가지 문구의 해석
1) 즉비(卽非)~ ,시명(是名)~
2) 以福德無故, 如來說得福德多.
3) 生信心不? ~ 彼非衆生, 非不衆生.
4) 心不可得
5)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法相, 非法相
6. 무상, 허망의 이해
7) 복이란?
C. 금강경의 요점 – 부처님의 지혜, 견해(佛知見)
1)상없이 선행을 행하라.
2)본성의 자리를 보이다.
3)인연법을 설하다.
4)불지견(佛知見)을 열개하다.
5)죄업소멸
6)무념을 통해 본성에 합하다.
7)무량복덕을 얻어 본성에 합하다. (복과 공덕을 통한 본성의 삶을 살게 하다.)
8) 금강경의 요점을 표현한 설법
B. 금강경 이해를 위한 문구의 해석
1.즉비(卽非)~ ,시명(是名)~
‘卽非莊嚴 ,是名莊嚴’등 부정했다가 긍정하는 문구가 많이 나옵니다.
1)‘즉비 (卽非)~’는 상을 여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명자상 (名字相)과 언설상 (言說相)을 버리게 합니다. 이는 性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정을 통하여 이름 붙여진 현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게 하고 본래 성품 ‘본성’을 보게 합니다.
2)‘시명(是名)~’은 가명을 무너뜨리지 않음을 밝힌 것입니다. 인연으로 생한 법은 공과 유가 동시인 뜻을 나타낸 것입니다. 제법이 인연으로 생함을 밝힌 고로 즉비와 시명을 쌍으로 들었습니다. 긍정을 통하여 우리가 살고 집착하는 ‘현상계’를 인정합니다.
3) “즉비는 일여의 법성(法性)을 잡아 본래 공임을 밝힌 것이다. 시명은 인연으로 생한 법상(法相)에 대해 가명 아님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법성은 본래 공이고 법상은 다 환으로 나타난다.”
4) 본성(空)에서 보는 관점과 현상계(가,假)에서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성과 현상계는 그 자체로 하나입니다. 중생이 상(假)에 집착하지 않게 하면서 현상도 인정하는 설법입니다. 예로 ‘卽非世界, 是名世界’라하면 ‘세계가 아니라 이름이 세계’라고 해석합니다. 이는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하여 ‘세계’를 비유하여 설법하나 그 세계는 동물도 ‘세계’라고 부르고 천상계 사람도 ‘세계’라고 부르는 하나의 고정되고 영원히 존재하는 본성을 가진 세계가 아니고 인연 따라 모이고 흩어지면서 만들어진 찰나의 형상이고 그 연속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사라지고 변하여 고정 불변이 아니기에 인연을 따르므로 ‘즉비’로써 진실성이 아님을 설하고 또 중생의 입장에서 집착하는 그 ‘세계’가 없는 것이 아니기에 설명을 위해 긍정의 ‘시명’을 들어 이름을 붙여 설법하지만 그 이름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을 포함 합니다. 또한 ‘미진’의 먼지도 같은 개념으로 영원 불멸의 먼지라는 하나의 고정된 형상은 없지요 그 미진도 더 깊이 쪼개어 들어가면 형상도 없고 에너지입니다. 찾을 수 없고 집착할 수 없기에 ‘즉비’로써 본성을 가진 미진이 아니라고 설하십니다.
5)고정된 상이 없다는‘무상(無相)’이라고 하는 것은 일체법이 인연법이므로 집착 할 곳이 없으므로 본성을 보게 하는 말입니다. 또한 어떤 상(相)이 인연 따라 변하기에 본성이 아님을 꿰뚫어 보아 집착하지 말라고 강조하는 설법이 ‘즉비~ 시명~’의 문구로 반복됩니다. 진실이다, 허무이다 양변을 떠나서 인연법임을 보라는 것입니다. ‘즉비~, 시명~’에 인연법이 내포되어 있음을 살펴야 한다.
6) ‘즉비~ 시명~’의 예로 신상, 복덕성, 불법, 반야바라밀,중생, 일체법, 장엄, 구족색신, 구족, 선법, 아, 마음, 범부, 아견, 32상, 반야바라밀, 중생, 세계, 미진 등등이 있으며, 설법할 형상들에 대하여 잠깐도 상을 가지지 못하도록 ‘즉비~’로써 본성이 아님을 강조 하면서도 ‘시명~’으로 반복하여 무너뜨리지 않습니다.
2. ‘以福德無故’ (제19분)
‘此人以是因緣, 得福 甚多 ~ 若福德有實, 如來不說得福德多. 以福德無故, 如來說得福德多.’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써 얻는 복이 매우 많습니다 . ~ 만약 복덕이 실상의 모습이 있다고 한다면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않을진대, 복덕이 없는 까닭으로 여래가 복덕이 많다고 설하노라”
이처럼 ‘복덕이 없는 까닭으로 여래가 복덕이 많다고 ’하는 구절은 무슨 뜻일까요?
- 한 구절의 복덕은 성품(福德性)을 가리키고 그 뒤 구절의 복덕은 과보의 형태를 말합니다.
-‘若福德有實’에서 복덕은 福德性을 뜻하며, 實은 복덕성의 실상으로 해석됨을 보아야 합니다. 즉 “복덕의 근본성품인 복덕성이 실로 존재한다면”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以福德無故’에서의 복덕도 복덕성을 뜻합니다. “복덕의 고유한 성품이 없으므로” 오직 인연 과보로 생멸함이 있을 뿐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복덕(성)에 대한 부정은 그 가명의 이름에 집착하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즉비~’에 해당합니다. 본성이 없음을 밝힙니다.
-‘如來說得福德多’에서는 과보의 복덕을 가리킵니다. “여래가 (인연 과보로 받는 가명의)복덕이 많다고 설하노라.” ‘시명 ~’으로 현상계를 긍정함에 해당합니다.
-복덕의 성품을 뜻하면 복덕이 없다고 했고 과보의 복덕을 뜻하면 복이 많다고 했습니다.
-복덕이란 없습니다. ‘시명 복덕’입니다.
-경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불설’, ‘여래설’,’세존설’로 차이를 두고 있습니다. “‘불설’이라고 한 것은 비록 응당 성을 알기는 하나 아울러 상을 무너뜨리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여래설’은 본성의 관점에서 설한 것이다. 불설이라 하면 相 변에 치우치고, 여래설이라 하면 수행의 변이 모자란다. 특별히 ‘세존설’이라 한 것은 사람들에게 본래 공한 성을 깨달아 수행을 일으키게 하기 위한 것이다.”
3.‘世尊! 頗有衆生, 於未來世, 聞說是法, 生信心不? 佛言: 須菩提! 彼非衆生, 非不衆生. 何以故? 須菩提! 衆生衆生者, 如來說非衆生 是名衆生.
“세존이시여, 자못 어떤 중생이 미래세에 이 법을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 수보리여, 저들은 중생이 아니며 중생이 아님도 아니니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여, 중생 중생이라 함은 여래가 설하되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이 중생이니라.”[제21분]
-물음과 답에 연관성을 찾기 어렵운 설법이 있습니다. 즉 ‘미래 중생이 이 법을 듣고 믿음을 내겠습니까?’ 하고 물었는데 ‘중생은 중생이 아니다’라고 답을 하지요. 물음을 봐서는 ‘믿음을 낼 것이다.’ 또는 ‘아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듯한데 맥이 다른 듯한 대답입니다.
-수보리에게 ‘중생’이라는 상을 내지 말 것을 설하십니다. ‘중생’이 있다는 생각이 망상입니다. 모두가 한 부처님 성품입니다. 인연 따라 설법을 듣고 바른 지혜를 냅니다. 부처님께서 물음에 따라 가명의 ‘중생’을 말하지만 그 가명에 집착하지 못하게 ‘즉비~’로써 본성을 보게 합니다. 대부분의 설법 구절에서 ‘즉비~, 시명~’의 형식으로 인연법을 살피게 하고 단어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합니다.
-(아래 강의내용 등 인용)
-[하지만 묻는 뜻에 이미 원만하게 답한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중생은 중생이 아니다는 말에 포함되어 있다. 중생이지만 본성은 부처님과 수보리와 같은 여여한 본성으로 본래 중생이 아니다. “이미 불성을 갖추었는데 어찌 부처님의 바른 지혜를 열지 못하겠는가! 즉 이 법을 듣는 자가 어찌 믿음을 내지 않겠는가!” 하는 뜻으로 “중생이라는 이름에 집착하지 마라. 그들의 본성에 본래 부처님의 지혜가 있어 인연 따라 응당 믿음을 낸다”는 뜻이다.
-장로가 중생이 깊은 법에 능히 믿음을 내지 못할까 염려한 것은 중생을 오인하여 중생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못 알면 이는 상에 집착하여 성에 어두운 것이다.
-중생이 무엇인지 바로 알면 그런 의문은 이미 잘못된 의문이며 저절로 답하게 된다. 중생은 인연으로 생한 것의 가명에 불과하다. 인연이 걷히면 불성이 그대로 드러나 무념의 설법에 진실로 믿음을 낸다.
-부처님이 비록 설함이 있으나 실로 무념이다. 부처님의 설법은 근기와 인연에 상대하지 아니함이 없다. 인연으로 생한 것은 체(體)가 공한 연고로 법은 본래 무법(無法) 이다.
-부처님은 어떻게 염을 일으키지 않고 인연을 따라 법을 설했는가? 이른 바 인(因)을 닦을 때 자비와 원의 훈습의 힘이 이것이다.
-非衆生 : 중생이 아니라는 것은 性을 말한 것이다. 非不衆生 : 중생이 아님도 아니다는 相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일체 중생이 다 인연으로 생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衆生衆生者, 如來說非衆生 是名衆生’: 인연으로 생한 즉 진실이 아니지만 중생이라는 가명의 相이 없는 것도 아님을 체득해 알게 한 것이다. ]
4. 심불가득(心不可得)
‘爾所國土中, 所有衆生, 若干種心, 如來悉知. 何以故? 如來說諸心皆爲非心, 是名爲心.
所以者何? 須菩提!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제18. 一切同觀分)
“이와 같은 국토 가운데 있는 중생의 가지가지 종류의 마음을 여래가 다 아느니라. 어찌 그러한가? 여래가 설한 모든 마음이란 다 마음이 아니고 이 이름이 마음일 뿐이다. 무슨 까닭인가? 수보리여! 과거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현재의 마음도 얻지 못하며 미래의 마음도 얻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非心, 是名爲心. ‘즉비~, 시명~’의 구절로 ‘마음’이라는 것도 본성의 변치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非心), 인연 따라 생멸하는 찰나의 염이 있을 뿐이므로 ‘是名爲心’입니다. 찰나의 ‘念’도 ‘미진’처럼 모였다 흩어져 망상도 되었다가 참마음도 되었다가 무념도 되겠지요.
-염은 무엇이고 마음은 무엇일까요?
念念相續(염염상속)으로 본성에서 무명의 생각(念)이 쉬지 않고 찰나찰나에 연이어 일어납니다. 찰나(刹那)는 인도불교경전의 표현을 해석하면 약 0.013초라고 합니다. 무명의 업으로 형성된 나의 마음자리에서 일어난 생각(妄念)은 인연을 따라 끊임없는 연속되어 일어납니다. 나의 마음자리는 무명이 일으키는 念念相續으로 하나의 업을 형성하고 하나의 我相이 되어 나의 본성을 덮고 있습니다. 외부 경계를 요달하려 하지 말고 염을 쉬어서 깨끗해지면 모두와 하나가 되는 본성이 드러나 그대로 같고 같은 하나의 자리 ‘여여’가 됩니다. “觀 無念이 진실로 깨달음에 드는 방편이다.”
-어떤 연고로 여래는 일체 중생의 마음을 다 알까요?
“‘여래’ 두자에 있다. 여래는 제법이 진여임을 뜻하는 말이다. 如는 진여이다. 동체의 性이다. 동체의 성을 증득하면 곧 대원경지를 이룬다. 일체 중생이 마음을 일으키고 마음을 움직이는 까닭이 부처님 마음의 거울에 분명하고 뚜렷하다.” “동체(同體)란 모습은 다르나 성품은 실로 같음을 말한다. 이른바 일법계이다.”
-어찌 과거,현재,미래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心不可得’이라고 설하셨을까요?
본성에서는 본래 시간이란 없다고 합니다. 시간개념을 내려놓고 때리면‘아야!’하고 반응하는 본성을 보세요 그 순간에서는 생각이 멈추어진 곳으로 시간과 공간이 없는 본성의 자리입니다. 망념이 멈추어진 순간 ‘심불가득’입니다. 무명의 찰나의 念이 허공에 흩어 뿌려지지만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기도 하고 ,또 인연이 나타나면 따라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念’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는 그 무엇이 아니기에 ‘심불가득’입니다. 무명의 念이 반연하여서 업을 만들어 가지만 그 재료가 되는 ‘찰나의 念’들이 근본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심불가득’입니다.
-“일념이 생하지 않으면 실상이 생기는데 어찌 한번에 초월하여 바로 들어가는 수행의 功이 아니겠는가? 고로 이 과는 부처님의 바른 앎, 부처님의 정각(불지견)을 열게 하기 위한 것이다.”
-‘心不可得’을 통하여 본성에서 일어나는 염과 염의 연속과 본성의 마음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란 고정된 성품이 있는 그 무엇이 아니고 본성이 없이 인연 따라 일어나므로 진실이 아니기에 잡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무명을 걷어내어 염을 쉬어주면 일체가 하나되는 본성이 드러남도 알 수 있습니다. 그 본성에는 시간도, 공간도, 무명의 念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본성자리와 일체 중생의 본성자리가 하나입니다. ‘同體의 性’입니다. 그래서 ‘若干種心, 如來悉知’입니다.
-다른 강의를 참조하면 상에 집착하는 마음, 환경에 따라 요동치는 마음을 버리고 일체가 한 뿌리를 이루는 진짜 마음을 보게 한다고 했습니다. 또 온갖 사물에 찰나찰나마다 생각을 갖다 붙이고 멈추지 않는다 했으며 그 인연적인 마음에 이름을 붙여주자니 ‘마음’이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마음이란 없기에 ‘是名爲心’이며, 본성이 없으므로‘心不可得’입니다. 본성은‘무념’입니다.
5. 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法相, 非法相
-중생이 짓는 상에는 아상(아, 인, 중생, 수자상) , 법상, 비법상이 있다.
-경계에는 내부 경계(마음)와 외부경계( 법상, 비법상)가 있다. 아상은 마음을 좇아 일어나 집착을 일으키고 법상은 외부 경계의 법을 좇아서 집착을 일으킨다.
-아상(我相) : 나라는 본성이 따로 있다는 생각 , 외부 경계를 탐내는 마음에서 비롯함, 탐(貪)
-인상(人相) : 너, 상대방이 있다고 분별하는 마음, 성내는 마음, 진(嗔)
-중생상(衆生相) : 많은 중생이 있다는 생각, 여러명이 있으면 차별이 생기므로 차별상이며, 서로 비교하여 어리석은 중생이 있다는 생각. 치(癡)
-수자상(壽者相) : 시간 개념으로 탐진치가 계속 이어지는 것.
-사상은 다 我에서 나왔다. 사상은 하나의 아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상이 있으므로 상대적인 인상이 있다. 인상은 하나에 그치지 않고 중생상이 된다. 我에 집착하는 견해는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는데 즉 수자상이다.
-법상에는 인연법으로 수행하여(行) 증득(果)할 수 있는 32상등 신상이 있고 증득함이 없는 물질세계(境)가 있다.
-법은 무가 아니고 성품이 공하다. 인연법이므로 고정된 법이 없다.
-일체 법은 境, 行, 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境은 오온(색수상행식), 육근육식(안이비설신의), 육진(색성향미촉법) 등이다. 육근과 육식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行은 육바라밀등이다. 果는 증득한 십주,십행,십회향, 십지에서 더 나아가 무상보리 등이다.
-일체 법은 세간, 출세간의 경계(심, 신, 세계), 행, 과를 통틀어 가리킨다. 일체 법이 다 옳음을 나타낸 것이 ‘제법일여’이다.
-반야는 삼공 즉 아공, 법공, 구공의 이치를 나타냄으로써 집착을 보낸다. 아공과 법공을 보내고 이어서 空 또한 비워야 한다.“ 第一義空”이라 한다.
-부처님은 아상도 법상도 비법상도 없다고 설하셨다. (無復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無法相, 亦無非法相) 실로 본성에는 상이 없으므로 무명의 탐진치로 생한 상에 대한 집착을 보내야 한다.
[육식, 칠식, 팔식 ]
-6 식(육식,묘관찰지) : 육근을 통해 육진을 보고 상을 받아들여 인식함. 노랗다. 맵다. 아프다 등
-7 말나식(의식, 평등성지) : 본질적인 성질은 끊임없는 사량(思量) 이다. 상상도 하고, 집중도 하고, 창조도 한다. 사량은 자기중심주의 또는 대자비심등으로 나타난다. (6식이 염불할 때 7식이 관을 지을 수 있다. 즉 염불하면서 ‘이 무엇고’를 동시에 할 수 있다. 일념염불로 말나식을 쉬게 한다. )
-8 아뢰야식(마음, 대원경지) : 개별 유정의 아뢰야식은 무시이래(無始以來)로부터 상속하여 각자 자신의 우주 만상을 변현 한다. 즉 하나의 소우주(小宇宙)를 이룬다. 그리고 모든 유정의 각자의 우주는 서로 교섭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변현을 이루기도 한다. 그리고 서로 교섭하여 공통된 변현을 이루기도 한다. 아뢰야식 연기설에서는 유루(有漏)의 아뢰야식 가운데는 이미 선천적으로 무루의 종자[無漏種子]가 들어있다고 본다. 8식의 무루의 상태는 완전한 깨달음의 상태이다
(위키백과)
-심, 의, 식 : 마음은 제팔 아뢰야식, 의(意)는 제칠 말라식, 식(識)은 제육식을 말한다.
-제 8 아뢰야 무기식(無記識)까지도 벗어나 대원경지가 현발(現發)한 그 때가 선(禪) 이다.
-[능엄경] 만약에 식음(識陰)(제8아뢰야식)이 만일 다하면 둥굴고 밝은 청정한 묘심이 그 가운데서 피어나니 십지(十地)와 등각을 뛰어넘어 묘각(妙覺)인 여래의 묘장엄 바다에 들어가서 보리를 원만히 성취하여 무소득(無所得)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육식은 외경계를 인식한다. 말나식은 사량 분별하므로 아.인.중생.수자 사상의 마음을 짓는다. 외경계를 분별하여 법상,비법상을 짓는다.)
6. ‘무상(無相)’, ‘허망(虛妄)’의 이해
‘본성(本性)’은 어떤 모습일까?
금강경에서 본성에 대한 설법으로 ‘無我相’, ‘無法相’등의‘무상(無相)’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凡所有相, 皆是虛妄’, 공(空)등으로 달리 표현되기도 한다. 또 본성에 합하는 실천행의 표현으로 ‘아개영입무여열반 이멸도지’, ‘심불응주색보시. ~ 위이익일체중생, 응여시보시’등이 있다.
본성이 인연법으로 상이 영원하지 않음을 표현하고 탐욕을 버리고 일체 중생을 위하여 행을 하라고 설법하고 있다.
그런데 중생들이 ‘허무하다’, ‘인생무상이다’ 하고 의욕을 멈추는 상을 낸다. 집착하고 탐욕하여 시간을 낭비하는 모습을 쉬어야 하는데 중생을 위하는 의욕을 쉬려고 하기도 한다. 본성의 표현을 잘못 이해하여 의욕을 멈추는 방식으로 상을 내어서는 번뇌를 제거할 수 없다.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본성을 깊이 이해하고, 상 없이 일체선법을 닦아서 대자비심의 본성에 계합해 들어가야 한다. 본성의 성품을 바로 보아 영원한 수행을 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리라’ 하는 마음을 내라고 했다.
성품이 비어있어 집착할 수 있는 영원한 것이 없으니‘방하착(放下着)’번뇌와 탐욕의 마음은 내려놓고 중생을 위하는 자비심의 원력으로 행하는 본성에 합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7. 복에 대하여
금강경에는 복덕(福德)에 대해 설함이 많다. 복덕은 금강경에서 추구하는 본성의 지혜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복에 대하여 또한 지혜에 대하여 잘 알고 복덕을 구족해서 고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복은 삶의 에너지이고 욕구를 충족해주기에 중생의 고통을 덜어준다. 그러므로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공감하는 것이 福을 닦음이다. 중생과 함께함이 복이다. 즉 중생이 곧 복이다. 복을 통하여 지혜를 닦아 영원한 행복을 추구한다.
1)복의 의미는 무엇일까?
2)복덕과 공덕의 차이는 무엇인가?
3)금강경에서 복덕과 공덕
4)복과 인연법
5)육바라밀과 보시: 복은 어떻게 닦고 얻는가?
6)복덕성(福德性), 금강경에서 설하는 복덕의 근본 성품은 무엇인가
7)복덕과 공덕을 밝히는 이유
8)보현행원과 공덕
9)지장본원경과 공덕상호
7-1. 복이란 무엇인가?
-복은 육체적, 정신적 삶의 욕구를 채우는 도구로 재물로 대표되며, 삶의 근간이 된다.
-욕구에는 신체적 욕구로 수면욕, 식욕, 색욕등 3대 생리적 욕구가 있고 (안.이.비.설.신 - 5 감각적 욕구) 의식적인 욕구인 주거, 재정, 건강, 명예욕 등이 있다. (6 의식적 욕구) 그리고 영원한 행복을 위한 마음의 욕구인 자아실현 욕구가 있다. (심적 욕망, 7식,8식)
-복은 일체의 선행과, 그 과보(果報)로서 얻는 행복과 이익을 말한다.
-행복은 몸의 욕구(身)와 마음의 욕망(心)이 충족되어 만족하는 상태, 그리고 그 욕망의 충족이 이어지고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 상태(無畏, 안정)등이 있다. 즉 욕구의 성취와 그 안정이 복이다.
-5가지 복(사서삼경) : 수명, 부자, 덕이 있는 것, 천수를 다하는 것.
-복덕의 영원성을 위해 지혜를 갈구한다.
-중생에게는 지혜가 필요하듯이 복에 지혜가 더해져야 영원한 복덕 즉 공덕이 된다.
-복의 상대 개념은 배품, 배려, 보시이다. 복은 인연법으로 보시등 선행의 과보로 얻는다. 그러므로 시간개념을 줄이면 보시와 배려가 복을 닦는 것이며, 그자체로 복이다.
-중생의 고통을 덜어주고 공감하는 것이 보시이며, 福을 닦음이며, 복이다.
-복은 중생과 함께하고 중생을 수순함에도 필요하다. 중생을 위하는 원력은 본성과 합하기에 깨달음을 향하는 보리심, 지혜이다. 고로 중생과 함께하는 복은 깨달음이다. 만약 널리 육도만행을 닦지 아니하면 보리심이 부족하여 반야정지 또한 열지 못한다. 왜 그런가? 다만 지혜만 닦고 복을 닦지 않으면 여전히 아상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육도만행을 닦아야 아상을 제거하고 보리심을 얻는다.
-보시에 지혜를 더한 무주상보시는 무량의 복, 무루복을 얻는다. 영원한 복, 영원한 지혜이다.
7-2 보시와 배려(덕)
보시는 재물로써 배풀어 줄 수 있는 것도 있고 재물 없이 배풀어 줄 수 있는 것도 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중생을 이익 되게 하기 위하여 상을 여의고 보시를 행하면 이로써 복과 덕을 쌍으로 닦아 자비와 지혜를 구족하게 되고, 불가사의 불가칭량 무변공덕을 얻는다. 이른바 무상보리의 과이다.
1)보시: 배풀어 주는 것을 보시라 한다.
-재시(財施) : 재물로써 남을 도움. 본래부터 나의 것이 아니기에 필요한 이에게 가져다 주는 것.
-법시(法施) : 타인의 마음을 이익되게 함. 정신적인 배풂으로 미혹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것.
-무외시(無畏施): 두려움을 없게 해주는 것,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것
2) 재시는 법시에 미치지 못한다.
-재시는 베푸는 자와 받는자가 반드시 지혜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법시는 지혜가 있지 않으면 능히 베풀 수 없고, 또한 지혜가 있지 않으면 능히 받지 못한다.
-재시는 베푸는 자가 대복을 얻는다. 받는 자는 다만 눈앞의 작은 이익을 얻는다. 법시는 베푸는 자와 받는 자가 다 대복을 얻는다.
-재시는 다만 인생의 목숨을 이익 되게 한다. 법시는 사람의 지혜의 목숨을 이익 되게 한다.
-재시는 탐욕을 항복 받고, 법시는 번뇌를 끊는다.
-재시는 배푸는 자와 받는자 쌍방이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법시는 쌍방이 생사를 깨닫는다.
-재시는 베푸는 자와 받는 자 쌍방의 수용이 다함이 있다. 법시는 쌍방의 수용이 무궁하다.
-재시는 베푸는 것이 적으면 이익 되는 바가 적다. 법시는 베푸는 것이 적어도 큰 이익을 얻는다.
-법보시는 체공(體空)의 소식을 나타낸 것이다.
-보살이 중생을 섭수함에 재시 또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다만 종지는 법시를 행하는 데 있다. 재시는 몸의 양식에 비유되고 법시는 마음의 양식에 비유된다. 몸도 마음도 양식이 필요하지만 지혜가 몸과 마음을 이끌어 고에서 벗어나게 하므로 법시를 종지로 삼는다.
3) 무재칠시(無財七施) [잡보장경] : 재물이 없어도 배풀 수 있는 방법
-화안시(和顔施) : 부드러운 얼굴
-언사시(言辭施) : 부드러운 말
-심시(心施) : 배려하는 마음
-안시(眼施) : 부드러운 눈빛
-신시(身施) : 예의바름과 몸으로 도움
-좌시(座施) : 앉는 자리를 내어줌. 남의 몸을 편하게 함.
-찰시(察施) : 상대방의 마음을 살핌.
7-3. 복과 덕과 공덕
-복(福) : 결과물이다. 어떤 선한 행위의 결과로 받게 되는 선한 측면을 복(福)이라 한다.
-덕(德) : 배려하는 마음의 자비심이 덕이다. 복(福)을 닦는데 탐욕으로 행할 수도 있고 덕으로 행할 수도 있다. 덕으로 복을 쌓는 과정을 통하여 복을 얻고 덕을 얻는다. 복덕(德)을 얻는다. 선한 의지를 통하여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덕이다. 중생과 같이 아파하는 자비가 덕이다. 덕은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여 마음을 얻는 것이다.
-복덕(福德)은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복을 쌓고 그 과보로 얻는 복이 복덕이다. 탐하는 마음으로 행한 보시는 복을 받더라도 탐욕과 번뇌, 무명의 과가 있다. 일으킨 마음에 따라 보시를 통하여 무명의 苦를 얻기도 하고, 지혜를 일으키기도 한다. 탐욕을 따르면 유루의 복이다.
-복덕에도 그 성품의 차별이 있다. 그 발원의 마음에서는 차이가 있어 복덕에도 차이가 있다.
-복에는 유루의 복과 무루의 복이 있다. 복이 다하면 다시 윤회와 苦가 있다. 다함이 없는 영원한 무루(無漏)의 복덕은 어떻게 짓는가?
-공덕(功德) : 공덕은 복과 지혜를 다 포괄한다. 복덕에 지혜를 더함이다. 공덕은 복덕에 더하여 마음의 성품을 깨닫는 것이다. 공덕은 복덕의 성품까지 근본에 합하게 하는 것이다. 공덕은 선행을 행함에 원력에 따라 마음에 집착이 없어 탐착이 없는 선행만이 있을 뿐이므로 무루의 공덕이다. 복에 지혜가 있어야 영원한 복이다.
-‘양족존인 부처님께 귀의합니다’이때 양족은 복덕과 지혜를 의미한다.
-현실에서 구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힘이 곧 복덕이고, 견해가 바르고 어리석지 않아 세상사를 걸림 없이 통찰하는 힘을 지혜라고 한다. 복덕에 지혜를 더하여 공덕을 짓는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복덕을 쌓되 지혜를 더하여 머무름 없는 보시로써 무루의 복덕을 쌓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양무제가 불사의 공덕이 크냐고 물었을 때 달마대사는 ‘소무공덕(小無功德)’이라 했다. 내가 있는 마음에서 행하였는가! 내가 없는 마음에서 행하였는가! 의 차이가 있다.
-모름지기 복과 지혜, 두 바퀴를 갖춰야 피안에 이를 수 있다. 만약 복을 닦지 않으면 이미 중생과 인연을 맺지 못하여 비록 보살은 이루나 중생을 섭수하지 못한다. 복을 구족하지 않으면 중생과 함께하고 중생과 하나되는 자비를 구족하지 못한다.
-평등하지 않고 자비롭지 않으면 제불이 호념해 주지 않는다. 반드시 장애가 발생하여 수행하고자 하나 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것이 ‘응당 머무르지 말고 보시를 행하라’한 까닭이다.
-복덕은 다분히 유위(有爲)를 말하고 공덕은 무위(無爲)를 말한다. 공덕을 닦으면서 상에 집착하면 복덕을 이룬다. 만약 복덕을 닦으면서 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공덕이 된다.
-상에 집착하여 보시하는 것보다 이 경(금강경)을 지니고 설하는 것이 수승한 까닭은 상에 집착하지 않는 이치를 통달했기 때문이다.
7-4. 금강경에서 복덕과 공덕
1) 不住相布施, 其福德 不可思量 ~ 無住相布施, 福德 亦復如是 不可思量. (제4 妙行無住分)
: 상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을 헤아릴 수 없다 .
2) 有持戒修福者 ~ 能生信心 ~ 得如是無量福德. (제6. 正信希有分 )
: 계를 지킴은 곧 복이다. 깨끗한 믿음이 곧 복이다. 계를 지키고 복을 닦아 능히 깨끗한 믿음을 내고 또 이것으로써 실다움을 삼으면 사상과 법상, 비법상이 없으므로 여래를 보아 무량복덕을 얻을 것이다.
악을 짓지 않는 것이 계요 선을 행하는 것이 복이다. 계를 지키고 복을 닦는 것이 반야를 닦는 근본이다. 대심을 발했으면 중생을 제도하여 공에 떨어지지 않으며, 실로 제도한 중생을 없음을 알아 상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행하지 않으면 공에 떨어진다. 공에 떨어지지 않아야 발심하고 수행할 수 있다. 계를 지키고 복을 닦으면 공에 떨어지지 않는다.
3)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多.(제8. 依法出生分)
: 복덕의 본래 성품은 없다. 본성에는 많고 적음의 분별이 없다. 인과의 복덕은 많이 배풀면 많이 받으므로 많다고 말한다.
4) 若菩薩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布施 ; 若復有人, 知一切法無我, 得成於忍, 此菩薩勝前菩薩所得功德. 須菩提! 以諸菩薩不受福德故. ~ 菩薩所作福德, 不應貪着, 是故說不受福德(제28. 不受不貪分)
-보살은 응당 무아법을 통달해야 한다. 복덕이 무수히 많아도 무아법을 통달해야 보살이다.
-무아법을 아는 보살보다 법인을 이루고 인욕을 성취한 보살의 공덕이 수승 하다고 했다.
-득성어인(得成於忍) :득성어인(得成於忍)의 인〈忍>은 어긋나고 모순되고 거슬리는 경계를 잘 참고 성내지 않으며 좋다 싫다는 생각이 없어서 갚음이 없는 것을 말하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생멸(生滅)이 없는 진리에 머물러서 그 마음이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으로 움직이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 :인욕선인은 자기 몸을 칼로 도려내고 베어내는 가리왕에 대해서 미워 하는 원한심(怨恨心)을 내지도 않았고 사지백해(四肢百骸)를 붙여서 목숨을 살려준 제석천에 대해서 고맙다는 생각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증애(憎愛) 집착(執着)을 여읜 무심(無心)의 경계인 데, 이것을 짜르고(割) 바르는데(塗) 다 마음이 없었다고 하여 도할양무심(塗割兩無心)이라 한다.
- 공덕이 수승한 이유는?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인가? 마땅히 알라. 이 과는 수용하지 않음(복덕을 받지 않음)으로 법인을 이룸을 밝혔다. 법인을 이루는 것은 이른바 증득이다.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 무아여야 한다. 보살은 어떻게 복덕을 수용하지 않는가? 널리 육바라밀을 행해도 마음에 그 일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미 참으로 我를 잊은 자가 아니면 판별할 수 없다. 이에 그 공행이 이미 최고의 봉에 오른 고로 득성이라고 했다. 복을 닦아 수용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무아의 법인을 이룬다.수용하지 않음을 밝힌 고로 지은 복덕이 다 무루의 공덕을 이룬다.
-만약 복덕을 보아서 매우 많고 매우 성하면 이미 마음이 경계를 따라 굴리게 된다. 마음에 경계가 있으면 수용하는 것이다. 수용하지 않음은 마음이 공하여 경계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얻는 복덕이 곧 공덕임을 밝힌 것이다.
-의문1. 복덕을 지었으나 복덕을 수용하지 않으면 구태여 복을 지을 필요가 있을까?
-답: 복덕을 짓는다는 것은 육바라밀을 닦는 것으로 대비심을 좇아 나온다. 모든 불 여래는 대비심으로 체를 삼아 중생에게 대비심을 일으키고 그로 인하여 보리심을 낸다. 어떻게 느슨하겠는가!
-의문2. ‘수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거부하여 받아들이지 않는 것인가?
-답: 不應貪着 오는 것을 거부함이 아니라 탐착하지 않는 것이다. 탐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복덕의 유무를 절대 생각에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복덕을 구하며 육바라밀을 닦는다면, 그것은 바로 탐착이다. 이것은 자기를 이익되게 하나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대비심이 아니면 무상보리가 아니다. 고로 不應이다.
-의문3. 법인을 얻는 것은 수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말했다. 어떻게 수용하지 않는가?
-답: 복을 지어 空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대비(大悲)이다. 복을 지어 탐착하지 않고 유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대지(大智)이다. 이 구절의 뜻을 합하면 ‘어법 응무소주 행어보시’로 이 경의 처음 설한 바를 돌이켜 비추는 것이다.
-[대지도론] ‘일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것의 이름이 정수다’정수는 곧 삼매다 또 이를 일러 정(定) 또는 인(忍)이라고 한다. 수용하지 않는 것은 일심청정하여 섬진에도 물들지 않는 것을 형용한 것이다. 즉 자비와 지혜의 구족이고 정과 혜의 균등으로 분별 집착의 아상과 아견을 교화하고 제거하여 거의 다하게 된다. 이 지위에 이르러 무엇으로도 이름할 수 없어서 득성어인(得成於忍) 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보살의 경계이지 부처는 아니다.
-만약 일념이 생하지 않는데 이르면 생하지 않음 또한 없어서 즉 수순하여 여래 평등법계에 들어간다.
-수행을 본격적으로 하는 사람에게도 ‘복은 삼생(三生)의 원수’라고 합니다. 복 짓느라 일생을 보내고 복 쓰느라고 일생을 보내고, 복을 다 쓰고 나면 하천하게 일생을 보내니 삼생을 복 때문에 헛되게 보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유위복에 빠져 있으면 참된 수행자가 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복을 받지 마십시요. 머물러 생각을 남기지 마십시요. 오로지 마음가는 데로 즐겁게 보시할 뿐 그 자체가 반야의 행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고 중생을 이익 되게 하며 부처님의 종자를 키워 진여에 부합하여 무량겁토록 괴로움을 떠나는 것이 최상의 복이 됩니다.
5)경을 지니는 공덕이 위대한 이유
(제8 依法出生分)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 於此經中, 受持乃至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勝彼 ~ 一切諸佛 ,及諸佛阿뇩多羅三먁三菩提法, 皆從此經出. (삼천대천세계 칠보 보시)
(제11 無爲福勝分) 如恒河中所有沙數, 如是沙等恒河, ~ 以七寶滿爾所恒河沙數 三千大千世界, 以用布施 ~ 於此經中, 乃至 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항하사수 삼천대천세계 칠보 보시)
(제12 尊重正敎分) 隨說是經, 乃至四句偈等, ~ 盡能受持讀誦. ~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 若是經典所在之處, 卽爲有佛, 若尊重弟子 ( 수지독송 ~ 성취최상제일희유지법)
(제13 如法受持分) 以恒河沙等身命布施. 若復有人, 於此經中,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其福甚多 (항하사수 목숨 보시)
(제15 지경공덕분) 以恒河沙等身布施 ~ 如是無量百千萬億劫, 以身布施.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其福勝彼. ~ 是經有不可思議, 不可稱量, 無邊功德. ~ 皆成就不可量, 不可稱, 無有邊, 不可思議功德. ~ 如是人等, 卽爲荷擔如來阿뇩多羅三먁三菩提. (항하사수 목숨을 무량겁 보시)
(제24. 福智無比分) 若三千大千世界中所有諸須彌山王, 如是等七寶聚 ~ 若人以此般若波羅蜜經, 乃至四句偈等, 受持, 爲他人說. 於前福德, 百分不及一. 百千萬億分,乃至算數譬喩所不能及
금강경을 지니는 복덕이 수승함을 나타냄.
-보시를 행하나 상을 여의어야 함을 알지 못하면 하늘에 태어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수지한다는 것은 경에 의지해 관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범부를 벗어나 성인이 되는 것이 복인 이유와 같다. 하나의 사구게 등을 지니고 설함으로써 금강의 지혜를 얻어 염을 끊을 수 있을 것이다. 염(念)을 끊으면 범부를 초월하여 성인에 들어갈 것이다. 성인에 들어가는 길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멀기 에 이 경의 사구게 등을 지니고 설하는 복덕이 물질의 보시보다 수승하다.
-발심이 수승한 것은 그것이 바로 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행을 일으킨 후에 그 복이 더욱 수승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발심이 복이다.
-칠보로 보시한 공덕이 많지만 우리의 본성자리에는 하등의 이익이 될 것이 없다. 본성자리는 분별을 떠나 공적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한계가 없는 무량 무변의 본성자리가 영원히 새지 않는 청정한 복덕이다. 금강경 사구게의 가치가 삼천대천세계 칠보 보시공덕보다 수승함은 영원히 새지 않는 복덕의 본성자리를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물질적 유루복이 모체가 되어야 무루복을 닦을 수 있어 복덕은 중요하다. 복(福)과 지혜(智慧)를 쌍으로 닦아야 한다. 부처님은 대비(悲)심으로써 체(體)를 삼았다. 비(悲)는 복(福)이다.
-이 경은 부처님께서 나유타제불께 공양하고 수행하고 닦은 결정체를 바로 열어 보여 주는 불지견이므로 과거 수행의 공덕을 온전히 갖추고 있다. 수지독송하는 사람은 그 모든 과정이 포함된 불지견을 바로 찾아 들어가 수지독송하므로 모든 공덕을 뛰어 넘어 불지견과 하나가 된다. 무량겁의 수행과 공양을 거치지 않고 바로 무량공덕의 불지견에 들어가 불지견을 증득하므로 무량복덕이 있다. 또 이 경을 수지독송함은 천만불소에 선근이 있음이니 무량복덕을 받는다.
-경의 공을 나타내는 것은 반야의 바른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지혜는 부처님의 지혜이다. 무상정등정각이다. 세존께서 중생을 위한 고로 부지런히 닦아 증득해 얻은 바이다. 무실무허의 법이다. 이 법을 있는데로 다 내놓아 이 경을 이룬 것이다. 견성하지 못한 자에게 정확한 방안을 보이기 위해서다.
-하루를 셋으로 나누고 항하의 지극히 많아 셀 수 없는 모래 수 만큼의 목숨을 각각 보시하며 1겁에 그치지 않고 무량백천만억겁에 보시한다고 했다. 무량한 수의 최고로 중요한 가치를 무량한 시간동안 보시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길고 지극하며, 보시가 무겁고 지극하며, 행원 역시 지극하다. 이에 ‘경의 공덕을 지극히 나타낸’것을 최대 종지로 드러낸 것이다.
-경의 공덕은 여러 차례 비교해 나타냈으나 그 뜻을 다 전하지 못했다. 다시 설함은 이 경의 뜻이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7-5. 복과 인연법
1)복은 어떻게 닦고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일체 법이 생하는 것은 인연을 벗어나지 않는다. 무단히 일어나는 것은 없다.’ 법은 인연으로 생한 결과이다. 즉 ‘일체법이 인과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인연법이므로 복은 곧 보시이며 보시는 곧 복이다. 영원한 보시는 영원한 복이다. 탐욕이 없는 보시, 상이 없는 보시는 원력에 의해 발원된 보시로 영원한 복, 무루의 복이다.
-원력이 없는 복을 닦음은 성인의 원만한 결실을 기대하기 어렵다. 중생과 함께 하나되는 대자비심에서 원력으로 행하는 보시는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으로 마침내 성불하게 되는 최고의 수행이다. 원력에서 복을 닦음이 성불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복은 인연법에 따른 결과(果)이다. 원인(因)은 보시이다. 뿌린 만큼 거둔다. 자업자득(自業自得), 복덕은 자기가 짓고 자기가 되돌려 받는다. 남에게 줄 수 없다. 인연을 벗어나서 까닭 없이 무단히 복덕을 얻을 수 없다. 노력 없는 복은 없다.
-복덕이 연이 모여서 생한 것인데 어찌 실다움이 있겠는가? 실다움이 있는 것은 인연으로 생하는 것이 아니다. 복덕이 곧 공이고 가여서 실다움이 없다는 것이다. 항상하고 여여한 본성만이 실답다.
-표면적으로는 복덕을 설하나 뼛속에는 보시를 설하는 것이다. 만약 보시의 인을 닦지 않는다면 어떻게 복덕의 과가 오겠는가? 부지런히 보시를 행하면 복덕이 저절로 이른다.
2)금강경 구절 해석 (복덕과 인연법)
若有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以是因緣, 得福多不? (제19분)
-보시는 중생의 목마름을 적셔주어 ‘이익일체중생’이 된다.
-복덕이 인연으로 생하여 상(相)이 있고 성(性)이 없다. 당체가 공하다. 많이 배풀면 많이 돌아오고, 자비심을 배풀면 자비심이 오고 기쁨을 주면 기쁨이 올 뿐이다. 인연을 벗어나 특별한 것이 생기지 않는다.
-복덕과 신상(身相)을 구족한 것은 성이 없는 소식을 나타낸 것이다. 본래의 성품이 없기에 인연으로 좋은 상호도 좋지 않은 상호도 얻을 수 있고 복덕이 구족한 원만상호를 증득할 수도 있다.(무복덕성)
-법과 법이 인연으로 생한 바가 아님이 없는 고로 복덕이 인연으로 생한 것이고, 보시 또한 인연으로 생한 것이다. 그러면 복덕의 인연은 보시인데 보시의 인연은 무엇인가? 보시의 인연은 발심이다. 발심이 크면 보시도 크고 복덕도 크다. 발심을 크게 하려면? 상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
-보시함에 상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반드시 먼저 복덕에 대한 상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대개 보시할 때 상에 머무르는 이유는 복덕을 탐하기 때문이다. 보시 인연으로 복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상에 머무르는 인연 탓에 얻은 바가 삼계내의 세속적인 복이 아님이 없다. 비록 하늘에 태어나더라도 (지혜가 적어)끝내 고의 인(因) 이다.
-복덕에 집착하면 안되는가? 종종의 마음은 진실이 아니며 얻을 수 없고 실다운 것이 아니므로 끝내 고의 윤회이다.
7-6. 복덕성(福德性), 금강경에서 설하는 복덕의 근본 성품은 무엇인가
무복덕성이다. 복이라는 어떠한 고정된 성품이 없다. 복이라 이름할 뿐 복덕성은 없다. 진정한 복은 복에 대한 생각들을 비워서 맑은 생각으로 원력을 행하는 일에 있음을 알게 된다. 본성에 합하기에 무루의 복이다.
“ 是福德, 卽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多.” (제8분)
“이 복덕은 곧 복덕의 성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 복덕의 본래 성품은 없다. 본성에는 相이 없기에 많고 적음의 분별 또한 없다. 중생에게 재물이나 욕구충족의 선한 결과들은 인과의 법칙에 따라 많고 적음의 분별상이 있다. 범부의 분별심에 따른 경우 有와 無의 양변에 머무르는 복덕으로 복덕성이 아니므로 영원하지 못하다. 시간이 지나면 고통을 가져오는 유루복이다. 무루복은 무주상보시를 통한 법성을 알아가는 과정이며 지혜를 얻음이다.
“ 若福德有實, 如來不說得福德多. 以福德無故, 如來說得福德多” (제19분)
“만약 복덕이 실상의 모습이 있다고 한다면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않을진대 , 복덕이 없는 까닭으로 여래가 복덕이 많다고 설하노라”
무복덕성: 모든 법이 인연으로 생한다는 것은 일체 법이 본래 무생임을 말한다. 인연의 모임으로 제법이 임시의 상이며, 진성이 아니다. ‘무성(無性)’이라고 한 것이다. 복덕이라는 법도 임시의 상이며, 다만 상이 있고 성이 없다. 고로 성품의 관점에서 복덕이 본래로 없다고 하며 (以福德無故), 연생(緣生)의 관점에서 많고 적음을 말한다. (如來說得福德多)
7-7. 복덕과 공덕을 밝히는 이유
-복을 통하여 본성을 보게 한다. 진정한 복은 머무름 없이 지혜로 중생을 제도함임을 알게 한다.
-복과 혜를 쌍으로 닦기를 요한다. 이는 자비와 지혜를 구족하라는 의미다.
-중생이 설법 듣기를 기뻐하지 않는 것은 복덕이 결핍된 탓으로 복덕은 매우 요긴하다.
-보현행원을 닦음에 먼저 대비심을 발해야 한다. 중생과 함께 함에 복이 필요하다. 중생과 함께하는 힘이 복이다. 중생과 함께 함으로써 복을 닦고 지혜를 닦는다. 중생과 함께 하며 원력에 따라 행을 하여 법성으로 사는 모습을 지혜라 한다. 복을 통하여 지혜를 얻는다.
-선정의 고요함도 무주상보시도 모두 마음의 고요함 속에 갖추고 있는 지혜가 저절로 더러남이다.
-무주상보시 실천행에서 선정의 수행은 머무르지 않음을 더욱 명확하게 뒷받침해 줄 것이다.
-중생제도가 복입니다. 재물보시, 법보시등 모두가 복입니다. 복은 행함이되 보살행이어야 합니다. 무주상보시는 복과 지혜를 한꺼번에 닦습니다. 무주는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선정입니다.
-복덕이 이와 같이 중요한 것은 의당히 대비심을 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가 없으면 보살도를 행할 수 없다. 복과 지혜는 두 바퀴와 같다.
7-8 보현행원과 공덕
사람은 본래로 청정하고, 불생불멸이며, 지혜와 복덕이 충만하고, 우주만유를 창조해 내고 있다. 그 근본 마음을 우리는 모두 구족했으니 그 마음을 영원히 유지하는 것이다. 보현행원을 하는 것이다.
사람 사람들의 내면에 존재하는 무한한 보물의 공덕. “만일 그와 같은 공덕을 성취하려면 마땅히 열가지 크나큰 행원을 닦아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공덕을 성취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공덕이지만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표현하며 사는 방법이며, 그 방법을 보살행이라 한다. 보현행원을 닦음에 먼저 대비심을 발해야 한다.
[보현행원품]에 이르기를 ‘ 이 선남자가 좋은 사람의 몸을 얻는다.’고 했다. 보현의 공덕을 원만히 하면 오래지 않아 마땅히 보현보살과 같이 속히 미묘한 색신을 성취하여 32대장부상을 갖추는 것이다. 마땅히 알라 상호는 다 대비대원으로 성취된 바이다. “보현행원의 대원을 수지독송하면 오무간업을 멸제하고 또 설하면 속히 미묘한 색신을 성취하여 32대장부상을 갖출 것이다.”라고 하였다.
7-9 지장본원경과 공덕 상호
‘그때 세상에 부처님이 계셔서 호를 사자분신구족만행여래라 하셨느니라. 그때, 장자의 아들이 부처님 상호가 천복(天福)으로 장엄하심을 보고서 그 부처님께 <어떤 수행과 서원을 세워야 이런 상호를 얻나이까? >하고 여쭈었다. 이에 사자분신구족만행여래께서 <이 몸을 얻고자 하거든 마땅히 오랫동안 온갖 고통받는 중생들을 건져 주어야 되느니라>고 일러 주셨더니라. 그때 장자의 아들이 맹세를 하되, <제가 이제부터 미래제가 다 하도록 헤아릴 수 없는 겁에 저 죄고받는 육도중생을 위하여 널리 방편을 베풀어서 다 해탈케 하고서야 제 자신이 불도를 이루리다>하고, 저 부처님 앞에서 이 대원을 세웠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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