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기도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모두 물리쳐 주시어
저희가 평안한 몸과 마음으로
자유로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1독서
<우리는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며 경건하게 살고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말씀입니다.2,1-8.11-14
사랑하는 그대여,
1 그대는 건전한 가르침에 부합하는 말을 하십시오.
2 나이 많은 남자들은 절제할 줄 알고 기품이 있고 신중하며,
건실한 믿음과 사랑과 인내를 지녀야 합니다.
3 나이 많은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몸가짐에 기품이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고, 술의 노예가 되지 않으며,
선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4 그래야 그들이 젊은 여자들을 훈련시켜,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며,
5 신중하고 순결하며, 집안 살림을 잘하고 어질고 남편에게 순종하게 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모독을 받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6 젊은 남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신중히 행동하라고 권고하십시오.
7 그대 자신을 모든 면에서 선행의 본보기로 보여 주십시오.
가르칠 때에는 고결하고 품위 있게 하고
8 트집 잡을 데가 없는 건전한 말을 하여,
적대자가 우리를 걸고 나쁘게 말할 것이 하나도 없어
부끄러운 일을 당하게 하십시오.
11 과연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나타났습니다.
12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13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우리를
그렇게 살도록 해 줍니다.
14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해방하시고 또 깨끗하게 하시며,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복음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7-10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그리스도인이 십자가의 순종 중에서도 항상 기쁠 수 있는 이유
영화 ‘폭풍의 시간’을 조금 각색한 줄거리입니다. 1989년 폭풍우가 심하게 치던 어느 날, 엄마는 일을 나가고 혼자 남겨진 니코는 자신이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것을 녹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웃집 앙헬의 집에서 크게 다투는 소리를 듣고 조심스럽게 앙헬의 집으로 가봅니다. 그곳에는 앙헬의 부인 힐다가 쓰러져 있었고 칼을 든 앙헬을 본 니코는 도망치다 차에 치여 죽고 맙니다.
25년 뒤 자상한 남편 다비드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예쁜 딸 글로리아와 함께 베라라는 여성이 니코가 살던 집으로 이사 옵니다. 새로 이사 온 집에서 오래된 티브이와 비디오카메라를 발견합니다. 베라는 호기심에 비디오를 틀어보고 니코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25년 전 오늘 살인사건을 목격하고 도망치다 사망했던 아이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날 밤 갑자기 꺼둔 비디오가 작동하면서 베라와 니코가 서로를 보고 말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니코는 앙헬의 집에서 크게 다투는 소리를 듣고 나가려고 합니다. 니코가 안쓰러웠던 베라는 니코에게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라며 밖에 나가면 죽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니코는 뛰어나가고 연결이 끊깁니다.
베라는 자상한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고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어떤 형사가 다가와 혹시 힐다의 시신이 어디 있는지 묻습니다. 그녀는 지금은 역사가 바뀌어 앙헬이 붙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원래는 니코의 죽음으로 앙헬이 그 자리에서 붙잡혀서 자살하고 아내의 시신은 도축장에 묻을 것이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이렇게 경찰과 베라는 시신을 찾아내고 다른 여자와 살고 있던 앙헬을 체포합니다. 그리고 그 경찰은 말합니다. 자신이 니코라고. 생명을 구해줘서 감사하다고.
니코는 베라의 말에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구해 준 베라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고 그림으로 그리고 베라가 이사를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경찰이 되어서 말입니다. 베라는 바람을 피우는 다비드와 헤어지고 니코와 결혼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니코의 25년간의 삶은 어땠을까요? 죽을 뻔한 자신을 구해준 베라에게 고마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베라가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경찰이 되어서 정의를 바로잡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경찰이 되어 베라를 기다렸습니다. 25년 뒤에 자기가 살던 집으로 이사 올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은 베라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괴롭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베라를 만날 것에 기대에 차 있었습니다. 결국 베라를 만나서 그 행복을 나눕니다.
누군가의 말에 순종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감정에 순종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말할 때는 그러면 나처럼 행복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순종이 비록 십자가의 길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행복에 참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께 순종하라고 하시면서도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라고 하십니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도 그분의 기쁨에 벌써 참여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이 에사우의 옷을 입고 에사우로 20년간 살며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기쁠 수 있었던 이유와 같을 것입니다. 언젠가 만나게 될 에사우에게 환영받기 위해 에사우가 살았을 법한 삶을 살며 많은 열매를 맺으며 에사우가 기뻐할 것에 자신도 기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도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리스도의 감정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https://youtu.be/RK38LtRWiVo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주변에 코로나 확진자가 많이 있습니다. 확진된 적 없는 사람을 만나기가 더 힘든 것 같습니다. 하긴 국민 두 명 중 한 명은 확진 경험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확진 경험이 없습니다. 이번에는 분명히 ‘코로나가 맞다’라고 생각해서 병원에 가보고, 자기 진단키트로 검사를 해도 늘 ‘음성’입니다. 혹시 ‘슈퍼항체 보유자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매일 미사와 안치 예식으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데 3년째 코로나 팬데믹 안에 살면서도 아직까지 확진 없이 건강하게 있다는 자체를 떠올려 보니 거의 기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는 “대인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이 확진되지 않더라.”라고 농담하기도 하지만,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하지 않았던 저였기에 이렇게 확진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큰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하지만 이를 그렇게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대신 ‘내가 건강해서.’, ‘내가 조심해서.’라는 이유를 붙이면서, ‘나 때문에’라는 생각만 했었음을 반성합니다.
그 누구도 바이러스를 이길 수 없음을 이번 팬데믹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겸손해야 하는 이유고, 또 감사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됩니다. 즉, 우리는 주님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주님의 뜻에 따라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주님 뜻보다는 내 뜻을 더 내세우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 시대에 대한 이해를 먼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온종일 밭에서 힘 빠지게 일하고 돌아와서 또 집안일을 해야 하고 배고픔을 참고 먼저 주인의 밥상을 차려야 하는 종이 등장합니다. 이를 보면 그가 노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당시의 노예는 이런 일들을 하기로 하고 고용된 것으로 자기 할 일을 하는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고 주인은 주인대로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현대와 같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그런 주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분명히 악덕 주인일 것이고 신고 대상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이와 같은 주인과 종의 관계는 당연하게 여길 정도로 너무 흔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배경으로 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지금 하는 하느님의 일 모두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힘들다고 하지 않고, 내 일이 바쁘다고 하지 않고, 내키지 않는다고 하지 않고, 내게 물질적인 이득이 없다면서 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하느님의 일을 미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당연히 하고 있었을까요? 주님 뜻보다 내 뜻을 더 내세우는 사람은 당연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시련이란 꼭 방해 거리만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우리의 발아래 놓으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다(C.F 블렌차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