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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9월 16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 1티모 2,1-8
복 음 : 루카 7,1-1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백성에게 들려주시던 말씀들을 모두 마치신 다음, 카파르나움에 들어가셨다.
2 마침 어떤 백인대장의 노예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
3 이 백인대장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유다인의 원로들을 그분께 보내어,
와서 자기 노예를 살려 주십사고 청하였다.
4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이렇게 말하며 간곡히 청하였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5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6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7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8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9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10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
치열熾㤠한 삶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와 믿음-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우스개소리 같지만 진정성이 담긴 다음 말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문병 차 온 수녀들이 기계적으로 묵주기도를 바치자
병상에서 눈을 뜬 주교님의 “열정이 없어! 열정이!”란 일갈입니다.
열정은 영성생활의 기본입니다. 열정의 불 꺼지면 영성생활도 끝입니다.
얼마 전 내심 다짐하며 써놓은 ‘치열한 삶’이라는 글입니다.
-“치열하기가/흡사 산불 같다
마라톤 할 때도/갈수록 속력을 냈던 나
산티아고 순례 때/갈수록 나르듯 빠르게 걸었던 나
누군가는 말했지/한 번 불붙으면 막을 길이 없다는 나라고
세월 흘러/나이 들어갈수록
날로 밝게 치열히/주님 향해 불타오르는 사랑이고 싶다”-
갈수록 무기력한, 열정의 불 꺼진 삶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타다 남은 불 꺼진 장작 같은 어둡고 무거운 삶이 아니라,
끝까지 밝게 빛을 내며 불태워 연소시켜야 하는 영적 삶이어야 합니다.
어제 어느 자매에게 준 조언도 생각납니다.
“한번 불붙었다 하여 평생 타오르는 불같은 삶이 아닙니다.
꺼지지 않도록, 잘 타오르도록 끊임없이 영혼에 ‘사랑의 불’을 붙여야 합니다.
하여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영혼에 사랑의 불이 잘 타오르게 하고자 끊임없는 기도입니다.
수사들의 공동전례기도는 공동체에 주님 사랑의 불을 붙이는 시간입니다.”
요지의 조언이었습니다.
기도와 삶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삶입니다. 삶의 꼴을 형성해주는 기도입니다.
인생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답도 항구하고 간절한 사랑의 기도뿐입니다.
하여 참으로 만나는 많은 사람들 마다 휴대폰에 붙여 주는
‘기도와 일’을 상징하는 ‘산과 불암산’의 수도원 로고입니다.
늘 하느님을 기억하여 기도하라는 표지가 바로 수도원 로고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교회규범 중 참된 예배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참된 예배는 모든 인간을 위한 기도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인류를 대표하는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의 관심은 하느님의 관심과 일치해야 합니다.
하여 필자는 권력자들이 어떤 종교를 믿건 또 교회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던 상관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이시니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여 매일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해 바치는 이 거룩한 미사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의 치유의 구원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은 그대로 입증됩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도 한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제1독서에의 고백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 백인대장을 치유하시는 중재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에 앞서 백인대장의 겸손한 믿음이 전제되고 있음을 봅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바로 여기에 근거한 미사 중 영성체전,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는 은혜로운 고백입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상기하며 믿음으로 모시는 주님의 말씀과 성체가 우리를 치유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탄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이어 노예는 건강한 몸이 되었다 합니다.
주님을 감동, 감탄케 하는 믿음입니다.
겸손하고 진실한, 간절한 믿음이 영육의 치유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문제는 주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 부족에 있습니다.
참으로 부족한 믿음을 더해 달라고 주님께 믿음의 은총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와 삶이 함께 가듯이 기도와 믿음도 함께 갑니다.
언젠가의 갑작스런 믿음의 은총이 아니라 항구하고 간절한 기도에 따른 믿음의 은총입니다.
임없는 기도로 영혼에 사랑의 불을 붙일 때 한결같이 유지되는 믿음입니다.
채소 모종에 자주 물 주듯 영혼에 물 주듯 하는 기도이고,
영혼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자주 영혼에 불붙이듯 하는 기도입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은 남자나 여자 할 것 없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필히 명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에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화를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어울리지 않고 부끄러운 일입니다.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는 외적 표현은 바로 거룩한 마음가짐으로,
특히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 사람들은 손을 들어 기도했습니다. 화답송 시편도 이와 일치합니다.
“당신께 도움을 청할 때, 당신 지성소로 두 손을 들어 올릴 때 간청하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두 손 들어 기도하라 있는 두 손임을 깨닫습니다.
미사 중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나 사제가 경문기도를 바칠 때,
두 손을 들어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런 기도 전통에 바탕을 둔 것임을 깨닫습니다.
기도중의 기도가 이 거룩한 성체성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시며
우리 영혼에 다시 사랑의 불을 붙여주십니다.
끝으로 아주 오래 전에 써놨던, 지금도 여전히 제 소망을 반영하는 시를 나눕니다.
-“당신/언제나/거기 있음에서 오는/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색깔은 바랜다지만/당신 향한 내 사랑/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안으로/끊임없이 타오르는/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새로워지고/좋아지고/깊어지는/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아멘.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난달 초에 있었던 일입니다. 기도하는데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좋아하는 책을 읽다가도 졸고 있고,
심지어 고해소에서도 사람들이 없을 때는 저도 모르게 졸고 있습니다.
잠을 덜 자는 것도 아닙니다. 예전보다도 더 많이 자는데도 불구하고 피곤함이 계속해서 밀려듭니다.
저는 이 피곤함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금방 알아챘습니다.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일이 많아서 그럴까요? 하는 일의 종류는 많지만 그렇게 피곤할 정도는 아닙니다.
어디가 아파서 피곤한 것일까요? 이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피곤함을 느낄까요? 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솔직히 운동하는 것이 귀찮아서 한동안 전혀 운동하지 않았습니다.
여름이라 너무 덥다고, 또 장마철에는 비가 온다는 이유로 며칠씩 운동을 하지 않다 보니
자연스럽게 운동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운동하지 않으니 체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약간의 집중만 해도 피곤함을 쉽게 느꼈던 것이지요.
이런 체험은 처음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도 매일 하던 운동을 하지 않아서
어느 날 갑자기 허리에 이상이 생겨서 병원에 입원했던 일도 있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매일 새벽에 25Km 이상의 거리를 자전거로 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더 피곤하고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을 넘겨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힘들어도 참고 견뎠습니다.
지금 현재 피곤함은 거의 사라졌고 힘차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운동에 대한 믿음이 있으므로 힘든 상태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도 이렇습니다.
그 믿음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떤 상태에서도 이 믿음을 버리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이 그러했습니다.
주님이 크신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그분 앞에 겸손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말합니다.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겨졌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스스로 자격 없는 자라고 고백하는 겸손이 그를 합당한 사람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주님을 모실만한 곳으로 여기지 않았지만,
그럼으로써 더욱 영예롭고 주님을 모실만한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주님 몸소 그의 집으로 가지 않았어도, 그분의 치유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굳은 믿음을 통한 겸손이 이루어낸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생각해보십시오.
굳은 믿음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희망을 두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
빈영억 라파엘 신부
“저는 기도를 잘 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부족합니다.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잘 안됩니다.
마음은 간절한데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기도를 하는 대로 들어 주신다면 매달려 보겠는데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일에나 성당을 찾는 발바닥 신자가 되고 말았습니다.”하고 말씀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저를 두고 하는 말씀으로 알아들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성무일도를 바치는 것에 급급해 하는 자신을 보면서
기도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바 대로 행함으로써
하느님을 체험하라고 강조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의 끝맺음에 서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한 가지도 못하고 후회하며 부끄러워합니다.
‘내일은 잘해야지’하고 결심하고서는 아무 의식도 없이 또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러고서도 굳센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바라고 있으니 뻔뻔합니다.
민수기 14장 28절을 보면 하느님께서는
“내가 살아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간절한 청은 물론 불평 불만하면서 뱉어버린 말도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이루어 지지 않는다고 해서 투덜대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때가 아니라 당신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당신의 뜻을 이루어 주십니다.
따라서 오늘 이루어 주실 수도 있고, 내일 이루어 주실 수도 있으며
내 세대가 아니라 다음세대에 이루어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저 믿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은 자기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께
‘저는 제집에 주님을 모실 자격도 없고,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청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당신을 의심하는 고향 사람들 앞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지만(마태13,58)
믿음으로 준비된 사람에게는 당신 말씀의 능력이 살아났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자신을 낮추는 그곳에서 큰 힘을 만났습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할 일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의 능력은 늘 작용합니다.
다만 내가 믿음으로 준비되지 못한 탓으로 그 능력을 체험하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연민의 정신과 사랑의 정신으로,
때로는 그자가 믿든지 말든지 일방적으로 기적적인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신앙이 합쳐질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창조 역사가 일어납니다”(김정원신부).
그러니 열린 마음과 겸손으로 그분의 능력을 믿고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구하는 바대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얻게 될 것입니다.
열매는 행동하는 데서 맛보게 됩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능력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한국에도 큰 태풍이 있었고, 이곳에도 태풍이 있었습니다.
태풍이 불면 나무들이 큰 소리로 웁니다. 전선들도 소리를 냅니다. 바람이 먼저 유리창에 인사합니다.
새들은 모두 안전한 보금자리로 찾아갑니다. 태풍은 지구가 살아있다는 표징입니다.
태풍이 뜻하지 않는 피해를 주지만, 태풍은 살아있는 지구가 큰 숨을 쉬는 겁니다.
태풍이 지난 하늘은 더욱 푸르고, 태풍이 지나면 보금자리에 숨어있던 새들도 파란 하늘을 날아오릅니다.
아무리 큰 태풍도 이삼일이면 지나갑니다. 태풍은 바람이고, 바람은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우리 마음에도 태풍이 불곤 합니다. 침소봉대(針小棒大)라는 태풍이 있습니다.
작은 근심이 큰 근심으로 자라는 걸 봅니다.
근심은 의심이 되고, 의심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 큰 벽을 쌓게 됩니다.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태풍이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을 얻으려다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손등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항아리 안에 있는 과일을 움켜쥔 원숭이는 결코 항아리를 떠날 수 없습니다.
원숭이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신기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未得先愁失(미득선수실) 當歡已作悲(당환이작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걱정과 근심으로 기쁨이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걱정과 근심의 태풍을 잠재우는 길을 알려줍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백인 대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몰랐지만, 마음은 이미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삶은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을 위해서 회당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 병든 종을 내치지 않고 정성껏 돌보아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은 피부색, 신분, 학식에 따라서 커지는 것’이 아님을 늘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 시로페니키아 여인, 백인 대장’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분들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 해도, 교만과 욕심에 사로잡혀있으면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야단치셨습니다.
예전에 미사 복사를 서시던 요셉 할아버지가 생각납니다.
할아버지는 성체를 영하면 몸을 많이 떠셨습니다.
걱정도 되고, 의아한 마음에 ‘어르신 왜 몸을 떠세요?’라고 물었습니다.
어르신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제 몸에 오시니 몸이 이렇게 반응을 합니다.’
저는 어르신의 대답을 들으면서 반성 많이 했습니다.
매일 미사를 집전하면서, 매일 성체와 성혈을 축성하면서 할아버지처럼 진한 감동과 전율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신앙의 순수함
이종훈 마카리오 신부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감탄하시는 장면이 두 번 있다.
마귀 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청했던 한 가나안 부인(마태 15,28)과
사랑하는 노예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청했던 로마군대 장교(루카 7,1-10)이야기이다.
둘 다 이방인이었고, 예수님이 환자들을 만나지 않고 말씀만으로 치유하셨다.
그런데 두 이야기가 다 나의 삶의 자리와 경험세계와 너무 달라서 그런지 잘 공감되지 않는다.
두 이야기의 초점은 치유자이신 예수님이 아니라 두 이방인의 믿음이다.
기적이 믿음을 만들지 않고 믿음이 기적을 만듦을 알려준다.
그도 그럴 것이 치유 받은 그 딸과 노예는 어쩌면 그 후에 다시 병에 걸렸을 수도 있지만
그 엄마와 장교는 예수님을 절대로 잊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그 딸과 노예가 치유 받지 못하고 죽었어도 그랬을 것이다.
오늘날 아프면 병원과 약국에 가고, 마음의 상처를 받으면 심리치료사나 각종 치유프로그램을 찾는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은 무슨 일을 하시나?
예수님은 환자와 그 가족 그리고 치유자들 곁에 계신다.
병이 낫든 아니든, 마음의 상처에서 해방되든 아니든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치유되면 감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원망하면서 우리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고백한다.
신의(神醫)는 환자를 보기만 해도 병의 원인과 그 치료법을 알지만
환자를 안심시켜주려고 문진과 진맥을 한다고 한다.
그것이 그에게는 불필요한 행동이지만 환자에게는 아주 큰 위로가 된다.
응급실에 도착해서 이름과 아픈 곳을 물어보는 간호사의 말만 들어도
벌써 아픔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과 같다.
예수님이 병자들을 만지시고 마귀에게 호통을 치신 것,
아니 치유행위가 사람들에게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알고 믿게 하시려함이었을 것이다.
믿는 이는 구원을 받는다.
그런데 믿으면 앓는 병이 낫고 삶의 어려움이 해결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기도와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뿐만 아니라 주님께 대한 모독이다.
그들은 그의 병과 삶의 고통을 없애주지 못해서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프셨고,
그런데도 주님 곁에 끝까지 머물렀던 그의 순수한 신앙을 몰랐기 때문이다.
예수님, 저에게 믿음을 더해주소서.
저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저를 고통스럽게 하실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고통은 저의 믿음을 시험해서 더욱 순수하게 만드는 좋은 도구가 됩니다.
낫든 안 낫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주님께서 저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신앙의 길에서 지쳤을 때 위로해주시고 포기하고 싶을 때 용기를 얻어 주소서. 아멘.
하느님보다 이웃을 먼저 설득하라
전삼용 요셉 신부
전쟁터의 바닷가에서 더위에 군복 상의를 벗어놓고 진지를 구축하던 병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옷을 바다로 날려 버렸습니다.
때마침 적기가 출현하여 공습경보가 울렸고 상관은 즉시 참호로 대피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사병은 옷을 건지기 위해 상관의 명령을 뒤로하고 달려가 물속으로 뛰어들어
무사히 겉옷을 건져 가지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이 병사는 명령 불복종 죄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유죄판결을 받게 되고 마지막 진술을 하기에 이릅니다.
모든 잘못을 시인한 이 사병은 가만히 그 군복 주머니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사진은 제게 마지막 남은 돌아가신 어머니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제 생명보다 귀한 사진입니다.
명령을 어기는 줄 알았지만 저는 이 사진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저를 벌해 주십시오.”
재판정에 한 동안 정적이 흘렀습니다. 이윽고 재판장이 마지막 판결을 내립니다.
“어머니를 이토록 사랑하는 병사는 조국도 그렇게 사랑할 것입니다. 무죄를 선고합니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마음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결국 같은 것이라는 판사의 판결은 공정한 것이었을까요?
그의 마음 안엔 ‘결국 사랑은 하나다’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옳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웃을 미워하고 이웃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께도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웃을 대하는 모습이 내가 실제로 하느님을 대할 모습과 같습니다.
유다인들은 로마인들을 싫어했습니다.
이방인이기 때문에 접촉을 해서도 안 되고 그 집에 들어가도 몸이 더럽혀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을 변호하는 이들이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백인대장이 유다인들에게 얼마나 명망이 높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유다인들은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는 백인대장을 위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증언을 들이시고 그의 종을 고쳐주시기 위해 길을 나서셨습니다.
백인대장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었습니다.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는 인물이었습니다.
속국의 백성들을 위해 그들의 종교를 잘 믿도록 회당까지 지어준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 많은 백인대장을 이렇게 칭찬하십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는 사랑과 겸손함의 사람이었습니다.
속국의 백성들을 사랑했고, 주님 앞에서는 한없이 겸손하였습니다.
그러니 주위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시고 당신도 사랑하는 사람임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믿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있는 이의 청은 주님께서 무엇이든 들어주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래서 혼자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저만은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꼭 한 번만 만나자고 합니다.
저도 시간의 한계가 있는지라 그 사람을 만나야할지, 거절해야 할지 분별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스스로 주위 사람들이 아무도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결코 그 사람의 인품을 좋게 판단할 수는 없게 됩니다.
이웃을 사랑했다면 이웃에게도 사랑받을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요한 사도는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청할 때 이 말씀을 바꾸어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느님을 설득할 수 있겠느냐고.
부활에 대한 증언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그분을 목격한 제자들이의 몫이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다녔던 이들의 증언이기 때문에 예수님 본인의 증언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나 자신이 직접 설득하려하지 말고 주위 사람들이 나에 대해 증언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마지막 심판 때 나를 증언해 줄 사람들은 내가 함께 살아온 나의 이웃들입니다.
수도자매일복음묵상
백인대장의 믿음
김 조안 수녀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그리스혹’이라는 말이 있는데 ‘잿더미 속의 불’을 뜻하는 것으로,
그들은 불을 보존하기 위해 잿더미 속에 깜부기불을 밤새 석탄 속에 묻어 둔다고 한다.
이들은 젊은이가 결혼하거나 이사를 가면 먼저 쓰던 난로에서 뜨거운 석탄을 가져가
새 난로에 첫 불을 피운다고 한다.
어떠한 불도 영원하지 않고, 새 불은 어디선가 와야 하며
불은 가정에서 힘을 주는 중심임을 알고, 이전에 자신들을 따뜻하게 해주던 불이
앞으로도 따뜻하게 해줄 것임을 아는 것이다. (‘재 속의 불씨’ 참조, 조안 키티스터 수녀)
오늘의 복음을 읽으면 과부, 외아들, 죽음과 슬픔,
그리고 예수님의 연민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재 속의 불씨’와 함께 ‘말씀 속에 꿈틀거리는 생명의 불꽃’이 생각났다.
예수님은 2천 년 전에 사셨던 분이며 우리는 그분을 따른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믿고,
그분을 우리들 삶의 중심에 놓고 살려고 노력한다.
아일랜드인이 소중하게 여겼던 그 불씨처럼
예수님의 말씀 또한 세기에 세기를 걸쳐서 이어져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이어질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가엾은 이들의 마음을 놓치지 않으시고 함께 아파하시는 분,
슬퍼하는 이들의 마음에 빛과 생명을 다시 돌려주시는 분,
그분께서 보여주신 기적이 그러하듯이
오늘의 복음은 그 이면에 드러나는 그분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내 안에 아무것도 없는 듯, 까맣게 탄 흔적만이 남아 죽은 듯 보여도,
그분의 손길과 그분의 말씀이 내 안에서 작은 숨이 되어 내 안에 있는 여린 불씨를 살려내고,
그 순간 그 불씨는 빠알간 불꽃으로 다시 피어오를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 말씀이 내 이웃의 모습으로, 살면서 순간순간 만나는 모든 상황 안에서 숨이 되어
나에게 생명을 줄 수 있음을 예수님은 보여주신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출처 : ‘한모금’ / (툿찡 포교 베네딕도수녀회 대구 수녀원)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