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면 떠오르는 그림. 세상에서 가장 많이 불리우는 이름의 화가, 동양인들이 특히 더 좋아하는 빈센트 반 고흐의 '꽃피는 아몬드 나무'이다. 한쪽 귀를 자르고 권총자살을 한 비운의 천재로 어떤 삶의 확신도 없었던 초라했던 이 화가에게도 잠깐이지만 봄이 환하게 피어 오른 때가 있었다. 1890년 2월. 그가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내적인 고통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고 그 감정들을 그림으로 표출해내고 있을 때,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동생 테오가 자신의 첫 아기 탄생을 알리면서 형처럼 끈기와 용기를 지닌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는 뜻에서 이름을 형의 이름으로 지었다고 전해왔다. <꽃피는 아몬드 나무/ 빈세트 반 고흐/유채/73.5 X 92cm /반 고흐 미술관> 고흐는 생을 마칠 때 까지 668통에 이르는 편지를 주고 받았던 영혼의 동반자이며, 적극적인 후원자인 동생의 편지에 너무나 기뻤다. 한편으로,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조카에게 평탄치 않은 자신의 삶이 전해질까 두려워 거절했으나, 결국은 그 의견을 받아들이고 조카의 방에 걸어줄 그림을 그린다.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하며 무한한 사랑을 조카에게 보내고 싶은 고흐는 봄이 오기 전 다른 나무보다 먼저 꽃이 피는 아몬드 나무를 그려 보냈다. 이 작품은 고흐가 그렸던 이전 그림과는 사뭇 다르다. 생명을 의미하는 이 그림에서는 그 당시 고흐를 대변하는 치열한 삶과 깊은 고뇌를 엿볼 수 있는 역동적이고 거친 붓자국은 전혀 느낄 수 없고 대체로 부드럽고 평화로운 느낌이다. 첫 직장을 헤이그에 있는 삼촌의 미술상에서 시작했다. 20세 때 그는 런던의 사무소로 전근을 갔고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에겐 약혼자가 있어 사랑을 이루지 못했고 그 후에도 실연의 경험이 있다. 네덜란드로 돌아와서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입학을 못하고 정식 학교가 아닌 전도사 양성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보리나주 탄광촌으로 전도하러 갔으나 그 곳에서 '광신' 오해로 전도사직을 발탈 당한다. 되는 일이 제대로 없었던 고흐가 27세에 마지막으로 택한 직업이 화가의 길이다. <출처: 아를의 붉은포도밭/고흐/1888/푸슈킨 미술관> 그러나 고흐는 생전에 한 작품밖에 팔지 못할 정도로 화가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1888년 아를에서 제작한 <아를의 붉은 포도밭>은 보색관계의 빨강. 청록과 노랑이 함께 표현된 작품으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 일하고 있는 농부들의 분주한 모습을 수평선과 호선구도로 생동감 있게 표현한 작품이다. 1890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열린 레벵 전시에 출품했고, 그 곳에서 400프랑에 팔게 된다. <렘브란트/야경/1642/네덜란드 왕립박물관> <고흐/감자를 먹는 사람들/1885/반고흐 미술관> 고흐의 일생 37년 중 그림을 그린 기간은 10년이다. 붓을 들었지만 독학으로 그림에 입문한 고흐는 처음에 17C 바로크시대의 대표화가인 렘브란트와 19C 바르비존 파의 대표화가 밀레의 그림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1980년부터 85년까지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시기에는 스스로 농민화가로 부를 만큼 농부. 광부 등 척박한 환경의 사람들을 주로 그렸다. 인상파와 일본 판화 우끼요에의 영향을 받아 밝고 생기있는 후기의 그림에 비해 초기의 작품들은 전체적인 색감이 어두운 편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감자를 먹는 사람들>로 힘든 하루를 이겨내고 감자를 먹는 농부들을 그렸는데, 땅을 일구어 온 정직한 모습을 강조한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색감과 명암이 뚜렷한 기법으로 렘브란트의 <야경>과 비교해보면 분위기가 많이 닮았음을 알 수 있다 <밀레/1850/보스톤 미술관> <고흐/1889/해프트 컬렉션> 고흐가 특히 존경한 화가는 농민들의 고달픈 모습을 품위있게 그려낸 밀레였다. 밀레는 (1814~1875)는 19세기 프랑스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화가로 농부였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농부들의 고달픈 일상을 그린 농민화가로 명성이 높았다. 대표작으로 <씨 뿌리는사람>(1850), <이삭 줍기>(1857), <만종>(1859) 등이 있다. 고흐는 밀레가 세상을 떠난 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밀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농민들에 초점을 맞추어 자연의 풍경과 함께 노동의 가치를 표현하는 ‘밀레’의 작품과 정신이 자신과 잘 맞는다는 생각으로 밀레를 존경하며 그의 그림을 많이 모사하였다. <씨 뿌리는 사람>은 밀레의 판화작품을 보고 1981년도에 똑같이 드로잉 했으나, 1889년도에 고흐가 그린 <씨 뿌리는 사람>은 밀레 풍이 아닌 자신만의 기법으로 표현했다. 1889년에는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요양 중이었므로, 원화보다는 이전의 판화 작품을 보고 그렸을 확률이 높다. <고흐의 자화상/1889> <별이 빛나는 밤/ 1889년/뉴욕현대미술관> 고흐는 간절히 바라던 화가 협동조합도 고갱과의 생활에서 귀를 자르는 사건으로 끝이 난 후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정신이 황폐한 가운데서도 그림은 계속 그렸고 이 기간 동안 그린 작품 중 고흐의 대표작들이 많다. <'꽃피는 아몬드 나무' 일부> 테오가 아기의 탄생을 알렸을 때 고흐는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있었으나, 그가 보낸<꽃피는 아몬드나무>에서는 격정적인 붓터치는 찾아볼 수가 없고 평화로움과 환희만이 넘친다. <꽃피는 아몬드 나무>에 새 생명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듬뿍 담아 보냈다. 고흐에게 조카의 탄생 소식은 새 봄을 알리는 아몬드 나무처럼 기쁨이 넘치는 듯 했다.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기쁨으로 승화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했으나 삶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지금 내 작품이 팔리지 않지만, 언젠가는 내 그림들이 그림을 위해 사용된 물감보다, 그 리고 내 인생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될 날이 올 것이야." -1988년 10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가난에 갇혀 모든것이 뜻대로 되지 않은 상황속에서도 자신의 예술세계 구축을 위해 붓을 놓지 않았던 고흐, 꿈을 놓지 않았던 그가 <꽃피는 아몬드 나무>를 그린지 5개월 후인 1890년 7월 29일, 정신적 고뇌를 이기지 못하고 권총 자살을 했다. 그는 800여점의 유화와 700점 이상의 스케치한 작품들을 남기고 다시는 아름다운 꽃과 하늘을 보지 못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모두에게 잊혀지고, 고흐의 작품은 동생 테오에게 상속되었으나 6개월 뒤 테오도 사망했다.
1960년에 빈센트 반 고흐 재단이 설립되었고, 1973년에는 반 고흐 미술관이 개관 되었다. 고흐는 서양 미술사 중 가장 위대한 화가로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다. 1890년 2월에 그린 <꽃피는 아몬드 나무>의 그림처럼 생전에 그토록 갈망하던 고흐의 봄이 펼쳐진 것이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지만, 그림을 꿈꾸고 끊임없이 그린 ‘고흐’처럼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봄은 반드시 온다. 벽을 눕히면 다리가 된다고 하듯이 견디기 힘든 고통도 잘 이겨내면 희망의 다리가 되는 것이다. 글 / 우경주 미술 인문학 강사 |
출처: 국민건강보험 블로그「건강천사」 원문보기 글쓴이: 건강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