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2023)
성대하게 선포된 화답송(시편 67장)에서 하느님의 축복이란 우리가 이 세상을 살기 위해 필요한 힘을 얻는 것이며, 구원으로 이해합니다. 구원이 알려지는 방법은 하느님께서 당신 얼굴을 인간에게 드러내시는 것이기 때문에 시편 저자는 하느님의 얼굴을 뵐 수 있는 은총(축복)을 주신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새해를 맞아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기겠다고 새롭게 다짐한 이들에게는 마음에 와닿을 수 있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굳게 섬기겠노라고 자신을 봉헌한 이들을 축복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시고 은혜와 평화를 베풀어주십니다(민수 6,22-27).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축복을 주실 것이니, 백성에게 당신의 축복을 전해주라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올바른 믿음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를 때 축복이 와 닿을 것입니다. 축복의 내용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이스라엘)을 지켜주신다는 것이고, 축복의 방법은 하느님의 얼굴을 드러내시고, 자비를 베푸시면서 평화를 가져다주신다는 것입니다.
성탄 8부 축일의 마지막 날, 새해 첫날에 교회는 빛으로 오신 구세주께서 너무 초라하고 가난한 모습으로 당신의 얼굴을 드러내셨으나 올바른 믿음으로 섬긴다면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루카 2,16-21). 하느님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많은 이들이 그분을 맞아들지 않았고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요한 1.5.10-11). 그런데 양들을 지키느라 깨어있던 목동들은 베들레헴으로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죽음을 미리 알려주는(입관)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이들은 아기를 생명의 참 빛으로, 하느님과 함께 계시는 말씀으로 즉시 알아보고, 그 아기에 관하여 온 세상에 알려주었습니다(요한 1,1-5).
인간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를 구세주로 알아본 목동들의 믿음과 인간 생명에 대한 그들의 겸손한 태도는 물론 구약의 예언을 믿고 한낱 어린 아기에 지나지 않는 생명체를 바라보면서 무한한 가능성과 구원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목동들의 믿음과 지혜는 본받을 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공적으로 활동하실 때 이들이 다 죽었는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집니다. 처음으로 축복의 기쁜 소식을 듣고 아기 예수님을 보았던 목동들의 증언이야말로 힘이 있었기에 사람들이 놀라워했다는데, 성경 저자들은 이 목동들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습니다.
마리아는 때가 차자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자기에게서 태어나 율법 아래 놓이게 되었음을(갈라 4,4-7)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고 합니다. 황금 궁전이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하느님의 아드님, 임마누엘의 탄생은 거룩한 힘(성령)에 의한 것이며, 인간을 향한 축복과 구원의 역사가 자신에게서 시작되었고,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얻게 하는 계약의 궤(櫃)가 되었음에 마리아 스스로 놀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분께서 마리아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에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마리아를 행복하다고 노래했던 것이 실제로 이루어졌음에 마리아의 마음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는 순간입니다(루카 1,48-49). 그래서 복음사가는 구유에 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는 마리아의 모습을 주목하게 만듭니다.
동정녀임에도 하느님의 총애를 받아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천사의 전갈에 놀라면서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을 절감했습니다. 산악지방(아인카림)에 사는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들었던 인사와 자기가 불렀던 찬미가, 호구조사 때문에 긴 여행 끝에 허름한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아야 했던 불안감과 부끄러움, 그리고 건강한 아기를 바라보는 안도의 기쁨이 교차하는 순간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는 말씀이 뇌리를 스쳤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묵묵히 견뎌내면서 늘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애썼던 열 달의 지난날을 되새긴 것입니다. “황금 궁전”이 왜, 하필이면 나였는지, “계약의 궤”가 된다는 것을 순식간에 어떻게 깨닫고 하느님(천사)의 말에 순종했는지 돌아보면서 “장차 이 아기가 살아갈 운명이란 어떤 것일까?”를 되새겼던 것입니다.
여드레가 차자 유다인의 풍습대로 아기에게 할례를 베풀어주고 예수라고 이름을 붙여줄 때,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3)라고 했던 천사의 말이 귀에 스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루카 2,34-35)이라는 시메온의 예언을 들으면서 하느님께 또다시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응답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순명으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의 영을 우리 마음에 보내시면서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로마 8,15).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임마누엘) 우리에게 당신의 자녀가 되는 자격을 주셨고, 구원의 상속자가 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런 영광과 축복은 바로 모세가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전해준 축복과 같은 것이며, 마리아의 순종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뜻입니다. 마리아의 희생과 용감함, 그리고 굳건한 믿음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 또는 하느님의 어머니로 부르면서 공경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8부 축제 마지막 날인 오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는 이유는 4세기 초부터 예수님을 순수하게 인간으로만 보려는 이들 때문이었습니다. 일부 이단자들은 예수님을 오직 하느님이라거나 단지 인간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성모 마리아를 단순하게 인간 예수의 어머니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들에 맞서 교회는 일찍부터 성모 마리아를 그리스도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고백하면서 성대하게 대축일로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성모 마리아는 분명 하느님이 아니라 인간이십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우리가 해야 할 신앙생활의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공경하는(veneration) 것이지, 그분을 마치 하느님처럼 흠숭하는(adoration) 것이 아닙니다. 공경은 인간에게 향하고, 흠숭은 오로지 하느님께로만 향하는 말입니다. 또한 성모 마리아께서 구원의 축복이 이 세상에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시면서 황금(임금)의 궁전이 되셨고, 하느님의 일(계약)에 기꺼이 협력하셨기(궤가 되심) 때문에 그분을 하느님 섬김과 하느님 체험의 원형으로 공경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성모 마리아께서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구세주를 낳아주셨듯이, 교회는 비신자를 받아들여 말씀을 들려주고 하느님의 자녀로 낳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 교회의 모범으로 공경합니다. 그래서 교회와 마리아 공경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마리아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신앙의 모범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교회가 예비신자를 받아들여 말씀을 듣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공동체를 보호하는 어머니 역할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그분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그분의 벗이고(요한 15,15), 그분의 형제입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예수님과 함께 공동 상속자로 세워주셨음에 감사드리는 당연한 외침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 마리아를 우리의 어머니로 고백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우리 모두 모세처럼 이웃에게 축복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합시다. 모세가 빌어준 축복이나 우리가 빌어주는 축복은 자기 소유의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 축복을 전해주는 우리는 축복받는 이들이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또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곰곰이 되새길 수 있는 마음을 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곰곰이 되새기는(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다짐합시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께 우리를 위해 빌어주시는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서 이웃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기 위해 기꺼이 봉사하고, 희생할 줄 아는 신앙인으로 한 해를 살았으면 합니다.
- 방효익 바오로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