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라는 마지막 꼬리 (우과창릉 牛過窗欞)
송나라 시대, 수많은 수행자를 꼼짝 못 하게 만든 오조 법연(五祖法演) 선사의 유명한 화두가 있습니다. 바로 '창살을 지나가는 물소', 우과창릉(牛過窗欞)의 공안입니다.
"비유하자면 물소 한 마리가 창살로 된 창문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머리와 뿔, 네 발굽은 모두 지나갔는데, 어찌하여 꼬리는 지나가지 못하는가?"
상상해 보십시오. 거대한 물소 한 마리가 좁은 창틀을 비집고 빠져나갑니다. 그 커다란 머리도, 날카로운 뿔도, 육중한 몸통과 네 다리까지 모두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몸집에 비하면 한없이 가늘고 작은 '꼬리' 하나가 창살에 걸려 꼼짝을 하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거대한 몸통마저 다 통과했는데, 고작 꼬리 따위가 걸릴 리 만무합니다. 그러니 선사가 묻는 것은 물리적인 현상이 아니라, 수행의 마지막 한 걸음에 선 수행자 마음의 미세한 경계를 찌르는 물음입니다.
여기서 물소는 우리의 본래면목을, 창살은 우리를 옭아매는 번뇌와 분별을 가리킨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머리와 몸통이 창살을 지났다는 것은, 수행자가 거친 번뇌를 여의고 마침내 깨달음의 문턱에 이르렀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왜 하필 마지막 '꼬리'가 문제일까요?
선가(禪家)에서는 흔히 그 꼬리를 '내가 깨달았다'는 생각, 곧 은밀한 자만심으로 풀이합니다. 그러나 더 깊이 들여다보면, 진짜 걸림은 자만심이라는 감정 하나가 아니라 '지나갔다/걸렸다'를 가르는 분별심 자체에 있습니다. 온갖 거친 번뇌를 놓아버리고 해탈의 문턱에 이르렀다 해도, '내가 넘어왔다'고 여기는 마음 한 자락이 남아 있다면, 바로 그 마음이 다시 창살이 됩니다.
“아, 이제 드디어 다 지나왔구나.”
“내가 마침내 해탈의 경지에 올랐구나.”
수행을 마쳤다는 그 안도감, 내가 무언가를 이뤄냈다는 은밀한 자의식, 깨달음 자체를 대견해하며 움켜쥐는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창살에 걸린 꼬리의 정체입니다.
거대한 몸통이 다 빠져나갔다 한들, 꼬리가 잡히면 결국 온몸이 잡힌 것과 같습니다. 그 미세한 한 생각이 남아 '나'라는 존재를 다시 규정하는 한, 물소는 아직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이 아닙니다.
온갖 세속적 욕망을 다 놓아버렸어도, 마지막 남은 한 생각의 아상(我相)이 수행자를 다시 '깨달음'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가둡니다.
오조 선사는 매섭게 묻고 있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그 마지막 한 조각, '나'라는 흔적마저 놓아버리지 못하는가?”
진정한 자유는 창살에 걸린 꼬리를 억지로 빼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꼬리가 걸렸는지 빠져나갔는지조차 문제 삼지 않는 툭 터진 자리, 애초에 나를 가로막을 창살도 없었고 그곳에 갇혀 있던 소조차 없었음을 꿰뚫어 보는 데 있습니다.
진리는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얻었다는 그 착각마저 남김없이 비워내는 것입니다. '깨달았다'는 그 마지막 생각조차 내려놓을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달음이라는 가장 견고한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첫댓글 촬영 장소 및 시기: 인도 북동부의 웨스트벵골주(또는 시킴 지역)에서 약 1903년경에 촬영되었습니다.
당시 이 지역은 영국 식민지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사진 속 인물:여성: 시킴 지역의 부티아(Bhutia)족 여성으로, 당시 히말라야 산악 지대에서 짐이나 사람을 운반하던 짐꾼(porter)이었습니다.
남성: 주로 영국인 상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각에서는 당시 인도에서 활동하던 그리스 무역 회사(Ralli Brothers) 소속의 상인이거나 프랑스 관리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역사적 의미: 이 사진은 대영제국 시절 식민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불평등한 권력 관계와 가혹한 노동 착취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자주 인용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