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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新羅)! 그들은 누구인가?
○ 반도사학(半島史學)이나, 대륙(大陸), 열도(列島), 그 밖의 세계사(世界史)에서, 『신라(新羅)』라는 옛 왕조(王朝)는 반도(半島) 땅, 동남(東南) 모퉁이 조그만 곳에서, 알을 깨고 나온 신인(神人)에 의해 건국(建國)되어, 소국(小國)으로 핍박(逼迫)을 받다가, 당(唐)을 등에 업고, 당군(唐軍)에 작은 군대를 파견(派遣), 원수(怨讐)와 같았던,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驪)를 쳐부수고, 삼국(三國)통일(統一)의 과업(課業)을 완수(完遂)했다.』고 하는 나라이다.
○ 당군(唐軍) 수십만(數十萬) 병력(兵力)이 정벌(征伐)할 당시, “몇 만”의 병력(兵力)을 보내, 후원(後援)한 것 치고는 대단한 성과(成果)를 낸 것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러한 신라(新羅)를 대륙(大陸)에 있었다고 하는 <대륙조선(大陸朝鮮)논자(論者)>들이 있고, 더 나아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지방의 <페르시아(사라센) 신라(新羅)>를 주장(主張)하기도 한다.
○ 대륙신라(大陸新羅)! 에 대한 많은 증거(證據)문헌(文獻)이나, 고증(考證)문헌(文獻)을 설명(說明)하고, 증거(證據)하며, 고증(考證)하고 우리 카페에 게재(揭載)도 하였다. 이것에 대해 이해(理解)하는 분도 계시고, 이해(理解)할 수 없다는 분도 계시지만, 한 가지 분명(分明)한 진실(眞實)은 “반도(半島) 땅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역사(歷史)사건(事件)”이란 점이다.
○ 인류(人類)가 현세(現世)의 인간(人間)과 닮은꼴로 변화(變化)과정(過程)을 거친 것이 정확(正確)하게 “언제부터였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어, 그저 추정(推定)만 할 뿐이다. 이때 지구(地球)상의 인간(人間)개체(個體)는 증가(增加)세(勢)가 획기적(劃期的)이었다고 보는데, 이것은 스스로를 보호(保護)하기 위한 무리(群)를 이루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 지구(地球)상에서 어떤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 인종(人種)들이었던 간에, “태양(太陽)”은 경이(驚異)로움 그 자체였다. 따라서 “태양(太陽)”을 숭배(崇拜)하는 많은 무리들이 생겼으며, 이것은 후대(後代)로 이어지면서 변형(變形)과정(過程)을 거친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종교(宗敎)”였으며, 원시종교(原始宗敎)냐, 고등(高等)종교(宗敎)냐 하는 문제는, 근세기에 만들어진 신자(信者)들의 자신(自身)들을 위한 떼거리 문화(文化) 곧 자신(自身)들만이 우월(優越)하다는 것에서 기원(起源)한다.
○ 현세(現世)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약 일만(一萬)년 전의 역사(歷史)이야기도 전해오는 기록(記錄)이 없기 때문에, 그저 추정(推定)한다거나, 짐작(斟酌)하는 수준(水準)에서 생각한 것들이다. 따라서 “일만(一萬)년 조선사(朝鮮史)”란 말 역시, 아주 어려운, 조심해서 사용(使用)할 수밖에 없는 말이다. 오천(五千)년 이전(以前)의 역사(歷史) 기록(記錄)이 없기 때문에 누구도 당시(當時)를 말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 지구(地球)의 곳곳에 현존(現存)하는 유물유적(遺物遺跡)중에서, 궁전(宮殿)이나 궁궐(宮闕)과 같은 것들은, 대개 그곳의 통치자(統治者)인 “왕(王)”이 사용했던 것들이며,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많다. 이 말은 “조선왕조(朝鮮王朝)만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하지 않다”는 증거(證據)다.
○ 유물(遺物)이란, 그것이 장성(長城)이나 궁궐(宮闕)과 같이 거대(巨大)한 축조(築造)물과 같은 움직일 수 없는 형체(形體)는, 일정(一定)한 곳에 존재(存在)할 수 있으나, 일반적(一般的) 유물(遺物)은 인간(人間)의 이주(移住), 이동(移動)에 따라 자연스럽게 옮겨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페르시아나 지중해 연안>의 토기(土器)나 세공품(細工品)이나, 무덤형태 등은 얼마든지 그곳 사람들의 이동(移動)과 함께 따라다닐 수 있다는 점이다. 고향(故鄕)과 조국(祖國)을 사모(思慕)하는 과정(科程)에서 “의복(衣服)과 나라이름, 언어(言語), 생활양식(生活樣式), 풍속(風俗), 종교(宗敎)”등등은, 언제, 어디서든 이동(移動)되며, 토착민(土着民)들의 것과 서서히 융화(融和)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 비슷한, 유사(類似)한, 동일(同一)한 것들이 몇 천리(千里) 또는 더 먼 곳에 존재(存在)한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몇 천리(千里), 또는 더 먼 곳으로 이주(移住)했다고 보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수천(數千), 수만(數萬)의 무리가 이동(移動), 이주(移住)하는 과정(科程)은 소수(小數)가 이동(移動), 이주(移住)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樣相)을 띄기 때문이다.
○ 소수(小數)가 이동(移動), 이주(移住)했다고 해서, 나라가, 온 백성(百姓)이 이주(移住)했다고 하는 것과는 차원(次元)이 다르기 때문이다. 뛰어난 몇 사람이 이동(移動), 이주(移住)하여 그곳에서 뛰어남을 인정(認定)받아 무리들의 지도자(指導者)가 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로, 그것은 나라, 백성(百姓)들과 땅, 모두가 이동(移動)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意味)가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것을 가지고, 조선(朝鮮)의 선조(先祖)가 “몇 만 리(萬里)에 있었다.”는 식(式)의 말은, 확대해석(擴大解釋)하면, 지구(地球)는 조선왕조(朝鮮王朝)만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存在)라는 말과 같을 수 있다. 이것은 예를 들어 본 것이다.
○ 기록(記錄)은 아주 구체적(具體的)이기 때문에, 우선(于先) 자연환경(自然環境)인 토착민(土着民), 지세(地勢), 방위(方位)와 위치(位置), 기후(氣候), 토산물(土産物)등등으로 그 영역(領域)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옥저(沃沮)의 많은 현인(賢人)들은 지금의 총령(蔥嶺) 서쪽 지방(地方)에 대한 많은 정보(情報)를 습득(習得)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옥저(沃沮)”라는 나라는 “총령(蔥嶺)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정보(情報)를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전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자(者)가 어찌 많은 소식을 갖고 있을 수가 있겠는가! 유치원(幼稚園)생도 자신이 맛있게 먹는 사탕이나 아이스크림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아니 말이다. 이런 것들은 상식(常識)에 속하는 문제(問題)이나, 자신(自身)의 주관(主觀)만을 가지고 논한다는 것에 있어서, 주관(主觀)이 강하면 강할수록, 오류(誤謬) 역시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신라(新羅)에 대해 몇 가지를 논해 보기로 하자. 이것은 원전(原典)에 의한 신라(新羅)의 정체(正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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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한서(前漢書)에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다.
기록하기를,《是 故 劉 氏 承 堯 之 祚 ,氏 族 之 世 ,著 乎 春 秋> : 옛 “유(劉)씨는 제요(帝堯)를 계승한 하늘이 내린 천자의 자리이며 【祚 : 복 조. 하늘이 내린 행복. 천자의 자리】, 대대로 이어온 씨족으로, 춘추(春秋)에 분명하게 기록하여 놓았구나! 》또 말하기를,
“한고조(漢高祖)가 일어나게 된 것에 다섯 가지가 있다.” 고 하였는데, 《 蓋 在 高 祖, 其 興 也 有 五 : 一 曰 帝 堯 之 苗 裔, 二 曰 體 貌 多 奇 異, 三 曰 神 武 有 徵 應, 四 曰 寬 明 而 仁 恕, 五 曰 知 人 善 任 使. 첫 번째는 제요(帝堯)의 묘예【苗裔 : 여러 대를 거친 후손, 또는 묘족의 후손이라고 하는 분도 계시다.】이고, 두 번째는 체모【體貌 :신체의 모양】이 기이(奇異)하였고, 세 번째는 사람을 불러들여 응하게 하는 뛰어난 무용이 있었으며, 네 번째는 인(仁)으로 용서하는 밝은 너그러움이 있었고, 다섯째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➊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유(劉)씨”는 “제요(帝堯)”의 계승자(繼承者)란 말은 혈통(血統)이 같다는 것일까? 아니면 “제요(帝堯)”의 이상(理想)과 사상(思想)을 계승(繼承)하여 이어온 씨족(氏族) 가문(家門)이란 말일까? 이 말은 어찌 보면 “역사서(歷史書)”란 승자(勝者)의 기록(記錄)임을 감안(勘案)하면 시골 “패향”의 농민(農民)이었던 “유방(劉邦)”을 과대평가(過大評價)해 기록(記錄)한 것이라는 점도 유의(有意)해야 할 것 같다.
➋ 여기서, “묘예(苗裔)”란 말로 보면, “유(劉)”가 제요(帝堯)를 계승(繼承)한 혈통(血統)이라는 이야기며, 이로 보면, “제요(帝堯)”는 제곡고신(帝 嚳 高 辛)씨의 아들(3자)이므로, 유방(劉邦) 가문(家門)의 혈통(血統)은, 고구려(高句麗)와 똑같은 혈통(血統)이요, 한(漢)은 고구려(高句驪)보다 아래 항렬(行列)이다. 그래서 “한(漢)”이 “고구려(高句驪)”란 주장(主張)을 하는 것이다. 이는 영역(領域)으로 보아도 “한(漢)”이 존재(存在)할 곳이 없다.
➌『제곡(帝嚳)』은 ‘희(姬)성’이며, 이름은 <제고 또는 준(俊)>이라고도 하며, 호는 <고신 씨(高 辛 氏)>이다. 전하는 바로는 70년간 재위(在位)하였다고 하며, “염제(炎帝)와 황제(皇帝)의 혈통(血統)”으로 <황제(黃帝)의 장남 현효(玄 嚣)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소호【小 昊 : 소호금천이며, 신라(新羅)의 시조(始祖)라 전한다.】이며, 아버지는 교극(蟜極)이며 전 욱(顓頊) 과는 4-8촌간이다.
“첫째 비(妃)인 강원 씨”는 주(周)를 건국시킨 주(周)시조가 된 기(棄: 즉 후예<后稷후직>)를 낳았고, “둘째 비(妃)인 간(簡)”은 상(商)의 시조가 된 설(契)을 낳았으며, “셋째 비(妃)인 경도(慶 都)”는 요(堯)를 낳고, “넷째 비(妃) 상의(常 儀)”는 지(摯)를 낳았다. 제곡고신(帝嚳高辛) 씨가 병으로 죽자, 아들 지(摯)가 왕위(王位)를 이어받았으나, 제대로 통치(統治)를 하지 못한 무능(無能)으로 쫓겨나고, 동생이었던 <방훈(放勳) 즉 요(堯)>가 뒤를 이어 받았는데, 이 분이 <제요(帝 堯)>이며,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최초의 “단군(檀君)”이시다. 그래서 한(漢)은 고구려(高句驪)라고 말하는 것이다.
➍ 이러한 혈통(血統)으로 가계(家系)를 올라가보면 “한(漢)과 고구려(高句麗)는 동일(同一)의 혈통(血統)으로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이 말은 고구려(高句驪)와 한(漢)이 같은 국가(國家)라는 말이 성립(成立)될 수 있다. 이러한 혈통(血統)관계(關係)는 <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 및 <회남자(淮南子) 전> 및 <대내 례>등의 기록(記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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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회남자 전(淮南子傳)>의 한 구절을 보자 “五星”에 대한 것인데,
➀ 東方木也,其帝太皥,其佐句芒,執規而治春,其神爲歲星,其獸蒼龍,其音角,其日甲乙 : 동방은 목(木)이다. 그 제(帝 : 임금)는 태 호 (太 皥)이며, 구 망(句芒)이 그를(임금) 돕는다. (중략)
➁ 南方火也,其帝炎帝,其佐朱明,執衡而治夏,其神爲熒惑,其獸朱鳥,其音徵,其日丙丁 : 남방은 화(火)이다. 그 제(帝 : 임금)는 염 제 (炎 帝)이며, 주명(朱明)이 그를(임금) 돕는다. (중략)
➂ 中央土也,其帝黃帝,其佐后土,執繩而制四方,其神爲鎭星,其獸黃龍,其音宮,其日戊己 : 중앙은 토(土)이다. 그 제(帝 : 임금)는 황 제 (黃 帝)이며, 후 토(后土)가 그를(임금) 돕는다. (중략)
➃ 西方金也,其帝少昊,其佐蓐收,執矩而治秋,其神爲太白,其獸白虎,其音商,其日庚辛 : 서방은 금(金)이다. 그 제(帝 : 임금)는 소 호 (少 昊)이다, 욕 수(蓐 收)가 그를(임금) 돕는다. (중략)
➄ 北方水也,其帝顓頊,其佐玄冥,執權而治冬,其神爲辰星,其獸玄武,其音羽,其日壬癸. : 북방은 수(水)이다. 그 제(帝 : 임금)는 전 욱 (顓 頊)이다. 현 명(玄 冥)이 그를(임금) 돕는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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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에서 ➃번에 대한 것을 보자. 《西方金也,其帝少昊,其佐蓐收,執矩而治秋,其神爲太白,其獸白虎,其音商,其日庚辛 : 서방은 금(金)이다. 제(帝)는 소 호 (少 昊)이다, 욕 수(蓐 收)가 그를(帝) 돕는다. 가을을 다스리며, 구(矩)를 집행한다. 그 신(神)은 태백(太白)이고, 그 짐승은 백호(白虎)이다. 음악은 상(商)이며, 그 날(日)은 경신(庚 辛)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분은 서방(西方)을 상징(象徵)하는 임금이었다고 전한다. 【위키-백과 : 소호(少昊)는 중국 고대의 오제의 한 명이다. 청양 씨(青 陽 氏), 금천 씨(金天 氏), 궁상 씨(窮 桑 氏), 운양 씨(雲 陽 氏), 주선(朱 宣)으로도 불린다. 전설에서 성은 기(己), 이름은 철(摰) 또는 질(質)이었으며 황제(黃帝)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
● <본인 주(注)> : 동이(東夷)의 천제(天帝)였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新羅)의 시조(始祖)이다. 또한 이 분의 상징(象徵)은 봉황(鳳凰)이며, 고구려(高句驪)의 유리명왕(瑠璃明王)은 황조【黃鳥 : 봉황(鳳凰)이다.】가를 불렀으며, 동이(東夷)의 사신(使臣)들은 모자, 투구 등에 새 깃털을 꽂고 다녔으며, 현 한국(韓國)의 최고(最高)권력자(權力者)의 것도 “봉황(鳳凰)”으로 상징(象徵)한다.>
위의 ➀-➄항목에서 말하는 “동서남북(東西南北)”과 그 가운데를 말하는 “중토(中土)”는, 당시 사해(四海)를 통치하던 영역(領域)을 상징(象徵)적으로 나타낸 것이며, 당시(當時) <조선(朝鮮)의 영역(領域)>을 말하는 것이며, 사해(四海)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라(新羅)의 전신(前身)은 “서쪽”에서 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며, 이는 곧 진(秦)과 같고, 진(秦)은 서방(西方)의 진(震=辰)과 같으며, 이는 진방(震方)과 같기 때문에, 서방(西方)에서 “정동(正東)”을 중심(中心)으로 동북(東北)과 동남(東南)지방을 일컫는다.
이곳으로부터 진(辰)은 많은 세월(歲月)을 유랑(流浪)하게 되며, 그 세월(歲月)은 수백(數百)년이 될 것이다. 이를 보다 못한 “마한”【馬韓 : 당시(當時) 마한(馬韓)은 현 중아(中亞)지방으로부터 동방(東方)에 이르는 큰 나라였다.】왕(王)이 동(東)쪽 땅 일부(一部)를 이들 “진(辰)”인들에게 주어 살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곳에서 살면서 체제(體制)를 갖추기 시작하였으며, 당시(當時)의 이름은 스스로 “진한(秦韓)”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때 진(秦)은 서방(西方)의 나라였다.】이들이 떠나온 서(西)쪽 지방의 고향(故鄕)과 조국(祖國)을 잊지 못해, 나라이름까지도 “진한(秦韓)”이라고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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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한(馬韓)왕(王)이 “동쪽의 땅 일부를 이들에게 주었다.” 고 했을 때, 그것은 또 『6 세기 경 북제(北齊)의 위수(魏收)가 기록한 “동파지장도(東坡指掌圖)”가 이를 고증(考證)해 준다.
《黑 水 沃 沮. 按 東 坡 指 掌 圖.......辰 韓 之 北, 有 南 北 黑 水(中略). 指 掌 圖 黑 水 在 長 城 北, 沃 沮 在 長 城 南 : 흑수. 옥저 / “동파 지장 도”에서 이르기를........진한(辰韓)의 북쪽, 남(南)쪽과 북(北)쪽에 흑수(黑水)가 있다.(중략). “지장 도”에 흑수(黑水)는 장성(長城) 북(北)쪽에 있고, 옥저(沃沮)는 장성(長城)의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진한(辰韓)=진한(秦韓)”이 있었던 곳은, 옛 장성(古長城)이 있었던 ‘실크로드’의 하서회랑(河西回廊) 땅을 말하는 것이다. 곧 『옥문관(玉門關). 돈 황(燉煌). 주천(酒泉). 장액(張掖)』등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한(馬韓)의 동(東)쪽 일부 땅이다. 이곳에서 이들은 그 서쪽지방에 있었던 “진(秦)”을 잊지 못하며, 진한(秦韓)으로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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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를 보면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성종(成宗) 임 오(壬午) 원년(元年) (서기 982년) : 於 是, 値 金 雞 自 滅 之 期, 乘 丙 鹿 再 興 之 運, 不 離 鄕 井, 便 作 闕 庭, 定 遼 浿 之 驚 波, 得 秦 韓 之 舊 地, 十 有 九 載, 統 一 寰 瀛, 可 謂 功 莫 高 矣 (中略). : 이에, 금계(金鷄 : 신라)가 멸망하는 시기를 만나고, 병록(麗 즉 고구려)이 다시 일어나는 운수를 타고 나서, 향리(井: 1리 사방의 땅)를 떠나지 않고, 편리하게 조정의 대궐이 되어, 요수ㆍ패수(遼, 浿)의 놀란 물결을 안정시키고, 진한(秦韓)의 옛 땅을 얻어서, 19년 만에 천하를 통일하였으니, 이보다 높은 공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이 글은 고려(高麗)의 대학자 최승노가 성종(成宗)에게 올린 내용(內容) 중의 일부(一部)이다.】
➊ <得 秦 韓 之 舊 地 : 진한(秦韓)의 옛 땅을 득하였다.> / 반도(半島)나 그 북방(北方)에 “진한(秦韓)”이라고 불렸던 나라가 있었는가? 만약(萬若) 이때까지도 “신라(新羅)”가 “중아(中亞)”지방에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만(一萬)리가 아니라, 이만(二萬)리였다고 기록(記錄)되어야 한다.
➋ <統 一 寰 瀛 :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하였다.> / 환(寰)은 기내(畿內)를 말하는 것이며, 영(瀛)은 큰 바다를 뜻한다. 즉(卽), 고려(高麗)는 천자(天子)나라로서, 기내(畿內)를 차지하고 있으며, ‘큰 바다와 같은 넓은 땅’ 곧 ‘사방(四方)의 광활(廣闊)한 땅’을 모두 얻어, 통일(統一)을 했다는 뜻이다.
<통 일 환 영(統一寰瀛)>이란 곧 『사방(四方 : 동서남북)과 가운데(中國), 모두를 하나로 했다』는 말로, 현 대륙 사(大陸史)라고 말하는 25사를 포함(包含)해도 이런 세부적(細部的)이며, 거창한 단어(單語)는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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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우이도 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
<우이도 행군총관(嵎夷道行軍總管)>이란, 백제(百濟) 정벌(征伐)시, 신라(新羅) 왕(王) “김춘추(金春秋)”에게 당황(唐皇 : 高宗)이 내려준 관직(官職) 이름이다. 이를 풀어보면 “우이도(嵎 夷 道)로 가는 행군(行軍)사령관(司令官)”이란 뜻일 게다. 그렇다면 “우이(嵎夷)”란 곳은 어딘가? 후한서(後漢書)에서는 구이(九夷)중의 한 종류로 “우이(嵎夷)”가 있다.
그렇다면 “우이(嵎夷)”란 구이(九夷)중의 하나인 “우이(嵎夷)”가 살고 있었던 땅의 지명(地名)으로도 쓰였다는 증거(證據)다. 이곳은 어디일까?
➊ 後 漢 書 卷 十 一 . <劉 玄 劉 盆 子 列 傳> : 凡 賊 所 發, 有 玉 匣 殮 者 率 皆 如 生 ,故 赤 眉 得 多 行 婬 穢 。 大 司 徒 鄧 禹 時 在 長 安 , 遣 兵 擊 之 於 郁 夷 ,〔三〕 反 為 所 敗, 禹 乃 出 之 雲 陽 。 九 月 , 赤 眉 復 入 長 安 , 止 桂 宮 。【注 〔三〕郁 夷 , 縣 , 屬 右 扶 風 也 : 욱 이(郁夷)는 현(縣)으로, 우부풍(右扶風)에 속했다.〕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는, 《 ➀ 史 記 : 堯 命 “義 仲” 居 郁 夷 (五 帝 本 紀) ➁ 集 解 : “駰” 案, 郁 夷, “尙 書” 作 “嵎 夷.” 孔 安 國 曰, 東 表 之 地 稱 (嵎 夷). ➂ 索 隱 : 郁 夷 亦 地 之 別 名 也. (五 帝 本 紀) 嵎 夷, "今 文 尙 書 及 帝 命 驗 竝 作“. “禺 銕”, 在 遼 西. “銕” 古 “夷”字 也. ➃ 正 義 : 禹 貢 靑 州 云. 嵎 夷 旣 略. 按, 嵎 夷, 靑 州 也. (五 帝 本 紀)》라고 하였는데,
이는 『욱 이(郁夷)가 곧 우이(嵎夷)』라는 말이며, 동(東)쪽의 땅을 지칭(指稱)하며, 욱 이(郁夷)는 또한 땅의 별명(別名)이라고 하였다. 곧 지명(地名)이라는 이야기다.
〔이곳은 우부풍(右扶風)에 속해 있었던 “현(縣)의 이름이며, 이곳이 동쪽의 땅”이며, 본래 “요서(遼西) 땅”에 있으며, 우공(禹貢)청주(靑州)에서 이르기를, 우이(嵎夷)는 벌써 경략하였는데, 살펴보면, 우이(嵎夷)는 청주(靑州)이다.〕라고 하였는데, 『청주(靑州)는 곧 우이(嵎夷)=욱 이(郁夷)가 있었던 우부풍(右扶風)에 속(屬)해 있었다.』는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當時)를 말하는 것이다.】
➋ 당시(當時) “신라(新羅)”는 “대륙(大陸)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證明), 고증(考證)해 주는 자료(資料)다. 반도(半島) 땅, 서남(西南) 모퉁이에 있었다는 “백제(百濟)”를 치기 위해, 대륙 땅 장안(長安) 서(西)쪽의 우부풍(右扶風) 관할(管轄)지역으로 진격(進擊)했다? 는 말은, 『당(唐)의 영역(領域)은 그 서(西)쪽 수천(數千)리에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것은 역설적(逆說的)으로 당(唐)이 곧 신라(新羅)라는 주장(主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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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또 다른 원전(原典)으로 보는 신라(新羅)
➀ 梁 書 列 傳, 諸 夷 篇 : 新 羅 者 其 先 本 辰 韓 種 也, 辰 韓 亦 秦 韓, 相 去 萬 里, 傳 言 秦 世 亡 人, 避 役 來 適 馬 韓 馬 韓 亦 割 其 東 界 居 之 以, 秦 人 故 名 之, 曰 秦 韓 : 신라의 그 선조는, 본시 진한(辰韓)이 근본이다. 진한(辰韓)은 또 진한(秦韓)인데, 서로 만 리(萬里)나 떨어져 있다. 전하는 바 진(秦)의 세상이 망할 때 난을 피하다가 마한(馬韓)이 적당한 것 같아 왔는데, 마한(馬韓)에서 그 나라 동쪽의 땅을 쪼개주어 살게 하였다. 진인(秦 人 : 진(秦)나라 사람)들이 옛 이름을 이르기를, “진한(秦韓)”이라 하였다.❳
➁ 晉 書 辰 韓 本 文 : 辰韓在馬韓之東,自言秦之亡人,避役入韓,韓割東界以居之,立城柵,言語有類秦人由是或謂之爲馬韓,初有六國,後稍分爲十二有弁辰,亦十二國,合四五萬戶,名有渠師蓋屬於辰韓,辰韓常用馬韓入作主 :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의 망인(亡人)이라했다. 한국(韓國)이 피난하기에 적당하여 들어가니, 한국(韓國)에서 동쪽의 땅을 나누어 주어 살게 하였다. 울타리로 성을 만들었다. 언어(言語)는 진인(秦 人)들로 말미암아 같았으며, 혹 마한과도 같았다. 처음에는 6국이었으나, 후에 조그마하게 12국으로 분리되었으며, 변진 역시 12국이었고 대략 4, 5만 호이었으며, 거수(渠 帥)라는 이름이 있었는데, 모두 진한(辰韓)에 속했다. 진한(辰韓)은 일상적으로 마한(馬韓)인이 들어와 왕(主)이 되었다.❳
➂ 통전(通典) 변방(邊防)전 신라(新羅) / 魏 將 毋 丘 儉 討 高 麗, 破 之, 奔 沃 沮. 其 後 復 歸 故 國, 留 者 遂 為 新 羅 焉, 故 其 人 雜 有 華 夏, 高 麗, 百 濟 之 屬, 兼 有 沃 沮, 不 耐, 韓, 濊 之 地。其 王 本 百 濟 人, 自 海 逃 入 新 羅, 遂 王 其 國. 其 國 小, 不 能 自 通 使 聘。: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毌 丘 儉)”이 고려(高麗=高句驪)를 쳐, 파하자 옥저(沃沮)로 도주하였다. 그 후에 다시 옛 나라로 돌아왔으나,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자들이 신라(新羅)이다. 그 사람들은 화하(華夏)인. 고려(高麗=高句驪)인들이었고, 백제(百濟)에 속했는데, 아울러 옥저(沃沮), 불내(不耐), 한(韓), 예(濊)의 땅에 있었다. 그 왕은 본래 백제(百濟)인이었다. 바다로 도망쳐 신라(新羅)에 들어가,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 나라는 조그마하여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공할 수 없었다.
● 신라(新羅) / <백제(百濟)인 + 화하(華夏)인 + 고려(高驪)인 + 연(燕)인>들이 함께 이룩한 나라이다.
通 典 邊 防 傳 / 辰 韓 : 辰 韓 , 耆 老 自 言 秦 之 亡 人 , 避 苦 役 來 適 韓 國 , 馬 韓 割 其 東 界 地 與 之 。 有 城 柵 。 其 言 語 有 類 秦 人 , 由 是 或 謂 之 為 秦 韓 。 其 王 常 用 馬 韓 人 作 之 , 世 (世) 相 係 襲 。: 진한(辰韓), 나이 많은 노인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의 망인(亡人)이라 하였는데, 몹시 힘든 고역이었는데, 한국(韓國)의 적당(適當)한 지역(地域)으로 피난을 왔는데, 마한(馬韓) 왕(王)이 동쪽의 땅을 나누어 그들을 살게 했다. 성책(城柵)도 있었다. 언어(言語)도 진(秦)사람과 같았는데, 이로 말미암아 혹 부르기를 진한(秦韓)이라 하였다. 진한(辰韓)은 일상적으로 마한(馬韓)인이 들어와 왕(主)이 되었는데, 대대로 서로 이어졌다.
➃ 史記 秦本紀 / 秦之先帝顚頊之苗裔,中略.秦趙以母族而祖顚頊,小昊之後嬴姓蓋也,則秦趙宜祖小昊氏. : 진(秦)의 선조(先祖)는 천자(天子)였던 ‘전 욱 고 양 씨(顚 頊 高 陽 氏)’의 후예(苗裔)이다. 진(秦)나라와 조(趙)나라는 모계(母系: 어머니 혈통)로 전해진, ‘전 욱 고 양 씨(顚 頊 高 陽 氏)’가 조상(祖)이다. ‘소호금천 씨(少昊金天 氏)’의 뒤에 모두 성(姓)이 영(嬴)이다. 진(秦)나라와 조(趙)나라는 당연히 소호(少昊金天 氏)씨가 조상(祖上)이다.
<진(秦)나라. 조(趙)나라. 신라(新羅 : 辰韓=秦韓). 가야(伽倻)는 같은 조상(同祖)에서 내려온 왕조(王朝)이다.> 고구려(高句驪) 역시 윗대 조상은 똑같다. ‘헌 원 황 제(軒 轅 黃 帝)’의 손자(孫子)인 ‘전 욱 고 양 씨(顚 頊 高 陽 氏)’나 ‘소호 금천 씨(小 昊 金 天 氏)’의 손자(孫子)인 제곡(帝嚳)인 “고신(高辛)”씨로 인하여, 고구려(高句驪)의 성씨(姓氏)가 “고(高)”씨가 된 것이다.
➄ 三國史記 百濟本紀 義 慈 王 / 新 羅 人 自 以 小 昊 金 天 氏 之 後 故 姓 金 氏 : 신라(新羅)인들은 스스로 “소호금천(少昊金天)”씨의 후예(後裔)라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였다.
➅ 三國史記 列傳 金庾信 / 金庾信,十二世祖首露,羅人自謂小昊金天氏之後,故姓金,庾信碑亦云.軒轅之裔,少昊之胤,則南加耶始祖首露與新羅同姓也. : 김유신(金庾信)은, 수로왕(首露王)의 12세손인데, 신라(新羅)인들은 스스로 “소호금천(少昊金天)씨”의 후예(後裔)라 하여, 성(姓)을 김(金)이라 하였다. 김유신(金庾信)의 비에서 또한 전하기를, 헌 원 황제(軒轅黃帝)의 후손인, 소호(少昊)의 대를 이었는데, 남(南)가야(伽倻)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은 신라(新羅)와 동성(同姓)이다.
➆ 後漢書 30 烏 丸 等 傳 / 秦 韓 者 始 有 六 國 : 진한(秦韓)은 처음 여섯 개 나라가 있었다.
➇ 晉書 97 西夷 傳 / 秦 韓 者 始 有 六 國 : 진한(秦韓)은 처음 여섯 개 나라가 있었다.
➈ 三國遺事 辰韓 / 後漢書云辰韓耆老自言,亦作秦韓,秦之亡人適韓國,而馬韓割界地以與之,相呼爲徙,有似秦語,故或名之秦韓,有十二國,小國.各萬戶,稱國,又崔致遠云.辰韓本燕人避之者,故取涿水之名,稱所居邑里,云沙涿,漸涿等.羅人方言,讀涿言爲道,故今或作沙梁,梁作讀道,新羅全盛之時,京中十七萬八千九百三十六戶,一千百六十方,五十五里,三十五金入宅,言富潤大宅也. : 후한서에 말하기를 ; 진한(辰韓)의 나이 많은 노인 스스로 말하기를, 또한 진한(秦 韓)이라 했으며, 진(秦)나라가 망(亡)해 한국(韓國)의 적당(適當)한 지역(地域)으로 피난을 왔는데, 마한(馬韓) 왕(王)이 동쪽의 땅을 나누어 그들을 살게 했다. 서로 불러 이사하였는데, 언어(言語)도 진(秦)과 같았으며, 혹 이름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하였다. 12개 나라가 있었으며, 소국은 각각 만호정도로 스스로 나라를 칭했다. 최치원이 말하기를 본시 진한(辰韓)인들은 연(燕)나라에서 피난 온 자들이며, 옛 탁수(涿 水)에서 이름을 취했다. 각 곳에 읍과 리(里)를 칭했으며 전하기를 <사탁 沙 涿> 또는 <점 탁 漸 涿>등으로 불렀는데 이는 신라인들의 사투리였다. 신라의 전성時에는 王都(왕도 : 京中)에 178,936호가 있었으며, 1,160 방과 55 리(성 둘레를 말한다.) 및 35호의 대저택이 있었다.❳
➉ 신라(新羅) 국호(國號)의 변천(變遷) 과정(過程)을 보자.
乞 衣 食 國(걸 의 식 국) - 飛 集 其 國 家(비 집기국가) - 有 蠶 國(유잠 국) - 尸羅(호라) - 斯羅(사라) - 始林(시림) - 有 林(유림) - 有 鷄(유괴) - 鷄 怪(계 괴) - 鷄林(계림) - 徐 耶 伐(서야벌) - 徐羅伐(서라벌) - 新羅(신라)【기림이사금(其 臨 尼 師 今) (十 五 代) 十 年 : A. D 295】라고 한 것을 보면, 이들이 얼마나 많은 세월(歲月)을 견디어 왔는지를 추측(推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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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성호사설(星湖僿說) / 국 중 인 재 (國 中 人 才)
<본문> : 《진(秦)에서 피난해 온 사람들에게 동쪽 지방을 떼어서 빌려 주었으니, 진 나라에서 멀리 망명한 자들에 의하여 진한(辰韓)이 형성된 것이다. 진(秦)은 본시 기산(岐 山)에 있던 주(周) 나라의 옛 땅이었으니, 주나라의 한 가닥 문화가 큰 재[嶺]의 동쪽에서 없어지지 않았고 명맥을 유지 계승한 것은 곧 신라이다. 그러므로 예절의 영향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하였으며,
《경주(慶州)의 농지 구획 같은 것은 결코 미개민족으로서는 창안할 수 없는 것으로 진(秦)의 농지 구획법과 일치하다. 혹자는 농지 구획선을 결렬(決裂)해놓은 것을 파괴했다고 보는데, 이는 잘못이다.》라고 설명(說明)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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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세 나라【고구려(高句驪).백제(百濟).신라(新羅)】의 왕릉(王陵)은 고려(高麗) 땅에 있었다.
高 麗 史 4 卷-世 家 4-顯 宗 1 / 《是 月 敎 : "高 勾 麗 新 羅 百 濟 王 陵 廟 令 所 在 州 縣 修 治 禁 樵 採 過 者 下 馬." : 시월 교시에 : “고구려. 신라. 백제왕의 능묘【왕릉(王陵)과 임금의 신주(神主)를 모신 곳】가 있는 주(州)현(縣)에서는 능묘(陵廟)를 관리하고 주위에서 땔감채취(樵採)를 금하고, 말을 타고 지나가는 자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라” 》고 하였다.
● 반도(半島) 땅에는 이러한 것들은 존재(存在)하지 않는다. 대륙(大陸) 땅에는 수많은 왕릉(王陵)급 무덤들이 수없이 많으며, 하루하루가 지나는 동안, 왕릉(王陵)급 무덤들은 도굴(盜掘)되고 파괴(破壞)되어가고 있는 중(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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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속(繼續)한다면 몇 날, 며칠을 새도 끝나지 않을 원전(原典)속의 이야기다. 우리는 좀 더 현실적(現實的)인 조선사(朝鮮史)를 찾는데 노력(努力)해야 하며, 그것은 반도사학(半島史學)의 잘못된 점을 인식(認識)시키는데, 주력(主力)하는데 있으며, 반도사학(半島史學)이 깨어지는 날, 조선사(朝鮮史)는 새롭게 멀리, 비상(飛上)할 수 있을 것이다. 기대(期待)해본다.
2013년 06월 08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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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新羅. 신라 초기에 백제의 통역 없이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나라 이름도 그렇고, 역사 기록도 그렇고, 신라에 통합된 가락국의 구지가도 신화와 전설로 회자될 뿐, 역사의 진실된 기록은 오리무중 입니다. 秦의 亡人이라 秦韓이라고 했다는 대륙사의 기록은 정확한 기록 입니다. 신라의 역사는 서방에서 시작되어 동진한 것이 사실이며, 조선사의 기록에서도 이와같은 사실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다만 구지가와 연관된 역사의 유적을 따라가면, 그 시원지는 중동 지역임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도 고대의 역사 유적인 거북의 형태를 한 성곽이 사막 가운데에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신라는 우리가 현세에 보고 있는 기록대로, 한곳에 머물러 도읍을 했던 나라가 아님을 조선사의 역사서를 보면서, 그리고 조선사 역사 유적의 발자취를 따라서 발길을 옮기다 보면, 역사서에 기록된 新羅의 진실과 그 실체를 볼수 있는 것입니다. 신라의 9주 5소경은 참으로 의문을 자아내게 하지요. 고려의 태조 왕건에게 마지막으로 나라를 들어 바친 신라의 마지막 도읍지는, 지금의 중국 동해안에 조선사의 역사 기록 그대로, 성곽과 유적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천단과 성곽, 고대의 건축물, 역사의 기록에 부합되는 포석정, 태조 왕건을 맞아들인 임해전 등, 많은 유적과 유물이 산재하고 있습니다.
조선사 역사의 허와 실을 가리고, 그 진실을 찾는 일이 고금을 통털어 손바닥을 보듯 한다 해도, 쉬운일이 아님을 많은 분들이 자각하고 있으리라 사료 됩니다. 소위 신라방이라고 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는 자들의 장난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입니다. 신라의 영역은, 아랍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겠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신라가 아랍의 중동 지역에서 나라의 운을 다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 할수 없는 부분 입니다. 숙신은 고구려의 주류이며 부여 또한 같으며, 숙신의 영역은, 불가리아와 터어키까지 미치고 있으며, 이에 대한 역사서의 기록을 따라서, 유적과 유물로 이를 증명하고 고증 할수 있습니다.
조선사 하나의 역사적 진실을 찾기 위하여, 모든 사서가 가리키는 천하의 만방을 살피며, 자기 희생을 감수하고 전진하는 제현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를 드리며, 다시금 문무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두 분의 "조선사"에 대한 애정과 우리 카페를 사랑해 주시고, 성원해 주시는 고마운 뜻, 감사드립니다.
카페지기 곧 운영자로써, 근거없는, 증명이 되지 않는, 고증이 될 수 없는 주장이나 논리는 굉징히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조선사를 진정 사랑하고, 존경하며, 아낀다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잘 아실 것입니다.
기원 전 230년 경 "이전"시대에 대한 신라와 관련이 있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움입니다. 문제는 "동진"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나, 서방의 어느 곳으로부터 왔으며, 어떤 인종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종과 조선사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조선사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주장은 대 환영입니다. 그러나 그 주장에 대한 고증과 근원, 출처는 기본입니다.
예를 들어 "중아지방"의 "조선"설은 근대까지 이어졌다는데 큰 문제가 되는데, 그렇다면 조선사는 우리들과 전혀 다른 <백인 계열과 눈은 움푹 들어가고, 코는 높은 종족과 붉은 머리털과 구레나룻와 수염이 많은 색목인>의 역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조선사와 대륙사는 이들에 대해 <특이체형에 대해 별도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은 곧 당시 대륙사와 조선사는 현재의 인종과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을 말해 주거든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안타깝습니다. 두 분 건강하세요.
대단한 연구물입니다.. 수고하시네요..^^
현제 서아시아는 흑백황이 다 있지여.. 그 개념으로 봐야 합니다.
대단한 수고는 아니지요. 러브선 님... 과거 줏대 업이 이제 아시는게 다행입니다.
그건 제가 올렸다가 삭제 하시면서... 뻔할걸 가지구...
조정의 월급받는 나라들은 나라의 조정에 도착하면, 각 나라의 관복을 벗고, 정치 합니다.
1~2주간 시차 적응하면서 향응제공 하면서,그리고 황제에게 아이고 우리 나라 보살펴줍셔,,,
표트르대제... 아시느분은 압니다.
광해군때, 독재하던분 그사람 아들이...
신라가 왕따지요
삼국통일해서 유물이 혼돈된거지요.
언어는 신라만, 왕따입니다.
그당시.
삼국 통일 후, 항상 통역관 대동 합니다.
또한 조선사도,동인,북인 대절하면서 통역관을 대동 시킵니다.서인,남인은 언어가 대충 통했나보군여
당연히 동인 북인은 언어가 다르지여.
자동차의 기원은 무엇인고인가? 지금 위키백과? 벤츠의 기원이 시험테스트 거쳐서 중국에 최초로 올린거 아닌가?자동차
황제에게 먼저 드립니다. 뜻
그때 당시 력사기록은 없는데,위키는 남아 있었죠.
중국황제의 이름은 없네요.
독일 자동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것 보다 구식이지만,물어 보니깐,중국 황제라고만 하네요.지금은 아줌마가 바껴서.(안내원)
이부분은 역사의 흐름땜시 무엇이라고 단정 할수 없습니다, 허나,중앙아메리카(멕시코 바로 밑에서)에서 남쪽브라질 북동쪽까지...
원숭이 동상이 있다는 사실...그것도 꼬리도 없는... 저도 지도 한방에 그 당시 년대에 말할수 없습니다.
그 과정이 끝나는 19세기보지만,방법은 여러나라를 가보는 수밖에요.
브라질에 비석이 우공이산이란 비석단어보고 충격 받았지만,왜 일본이 스페인,프랑스,영국과 상통하는지?
19세기는 그땅에 없는 나라인데요.강요 아닌지도(국가 차원에서)생각해볼 필요성도 있다고 봅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네덜란드...벽란도,,,한자동맹 생각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