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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경암송연구센타 원문보기 글쓴이: 참소망
요한은 부자 아버지 덕분에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제사장과 유대 관원들과 허물없이 지냈던 그의 아버지는 요즘으로 치자면 선주쯤 됐을 겁니다. 그런 그가 어느날 예수의 제자가 됩니다.
그는 예수를 정치적 메시아로 바라보았습니다. 예수가 정권을 잡는다면,개혁 정권의 수장이 되어 예수를 보필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려 옆구리에 피를 흘리고 죽고 맙니다. 예수가 죽는 순간까지도 그는 예수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예수가 광풍을 일으켜 일거에 악한 무리들을 물리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적 메시아로 봤던 자신이 잘못됐음을 회개했고 진정으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 공생애의 사역 기간 동안 그는 한 시도 예수 곁을 떠나지 않았고,예수의 죽음과 부활 승천을 지켜 보았습니다. 많은 기사와 이적을 체험했고 전도를 통하여 초대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요한복음과 요한1,2,3서를 기록한 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돌산인 밧모섬에 유배되고 맙니다. 여든이 넘는 고령으로 육신의 고통이 이만저만 아닌 노동을 해야했습니다. 바다는 마귀의 날개처럼 짙푸르러 감히 탈출할 생각도 못했습니다.
『주님,겨우 이것이니이까?』하는 원망도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한번도 주님께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뭍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했던 요한. 그런 유배자 요한에게 예수께서 친히 찾아주셨습니다.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가슴에 금띠를 띠고 나타나신 예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말씀하셨던 겁니다.
△ 요한. 『이 바닷가 섬의 늙은이를 위해 당신께서 또 친히 내게 모습을 드러내시니…』 jeon jeong heeⓒ
그에게 바다가 육지와의 단절이었다면,의구심은 예수와의 단절이었습니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계1:9)
그는 예수의 사랑을 넘치도록 받은 제자였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며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는 요한이 있었습니다.
게으른 자의 길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잠 21:25)
어느 농장 주인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그 사실이 알려진 후부터 가축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 반드시 누군가가 희생양이 되어 잔칫상에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들은 회의를 열어 이 농장에서 주인에게 가장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희생제물이 되기로 했다. 먼저 황소가 나섰다.“나는 주인님이 농사를 짓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번에는 개가 말했다.“도둑을 누가 막는가. 내가 짖어대면 도둑이 도망간다” 고양이도 큰 목소리로 외쳤다.“나는 곡식을 훔쳐 먹는 쥐를 잡는다” 닭도 목을 길게 뽑으며 자랑했다.“주인에게 새벽을 알리고 아침 식탁의 달걀을 제공하는 일을 누가 하는가” 그러나 한 동물만은 말 한마디 못한 채 눈물만 떨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게으른 돼지였다. 이 사회와 가정에 쓸모가 없는 인생은 비참하다. 게으른 사람은 절대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없다. 게으른 사람에게는 항상 후회가 따를 뿐이다
게으른 자는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느니라 (잠 26:13)
한 길만을 택하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마 7:13,14.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 눅 16:26.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 눅 13:24.
한 주일학교 선생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얘들아, 부자는 이 세상에서 대궐 같은 집에 살면서 맛있는 음식이란 음식은 다 먹으며 살았지만, 결국 그 끔찍한 지옥에 가고 말았단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는 비록 이 세상에서는 구걸하며 살았지만 천국에 갔단다." 이야기를 마친 후 선생은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은 부자와 나사로 중 누가 되고 싶니 ?" 그러자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 세상에서는 부자가 되고 싶구요, 죽고 난 다음에는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러한 심리는 누구에게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 것을 마음껏 즐기다가 저 세상에서는 천국을 가겠다고 억지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실컷 마귀와 짝하다가 갑자기 저 세상에서 하나님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편, 저 세상에서도 하나님편이어야만 합니다.
"주님, 저희의 욕망은 이 세상에서는 세상 것을 즐기기를, 저 세상 에서는 천국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저희로 이러한 욕망 가운데 빠져 생 활하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당신은 혹,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기회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
같이 가는길
한 여행자가 말과 당나귀에 짐을 싣고 먼 길을 떠났다. 처음에는 모두가 기뻤으나 도중에 당나귀가 먼저 지치게 되었다. 그래서 당나귀는 동행하는 말에게 "견디기 힘이 드니 나의 짐을 조금만 덜어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같이 친구삼아 가던 말은 당나귀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결국 힘에 지친 당나귀는 얼마 못 가서 쓰러져 죽고 말았다.
그러자 그 주인은 당나귀가 지고 가던 모든 짐과 죽은 당나귀의 털가죽까지도 벗겨 말의 등에 실었다. 결국 울상이 된 채 그 여행이 다 끝날 때까지 말은 큰 고생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이다. 서로 돕고 보살펴야 쉬워진다. 혼자만 잘 살려다가 결국은 고난을 혼자 지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원주민이 가르쳐준 생명의 길
스탠리 존스 목사님이 인도 오지에서 선교할 때 있었던 일이다.
한번은 처녀림이 울창한 밀림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그만 길을 잃고 말았다.한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숲속을 헤매던 중 마침 나무를 베고 있던 한 원주민을 만났다.존스 선교사는 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내가 지금 길을 잃었습니다.나에게 길 좀 가르쳐주시오”
원주민은 길을 알려줄 생각은 하지 않고 “앉아 기다리시오” 하더니 일만 계속했다.존스 선교사는 무려 8시간을 그자리에서 기다려야 했다.
해가 진 뒤에야 비로소 원주민은 선교사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했다.따라나서긴 했지만 주위는 너무 깜깜했고 길이라고 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길이 어디 있습니까?” 답답한 마음에 물어본 존스 선교사에게 원주민은 “길은 없습니다.내가 가는 곳이 곧 길입니다”고 대답했다.
존스 선교사는 마침내 원주민을 따라 걸어서 마을로 돌아왔다.살아 돌아온 그는 그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실감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
한 길만을 택하라
한 주일학교 선생이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얘들아, 부자는 이 세상에서 대궐 같은 집에 살면서 맛있는 음식이란 음식은 다 먹으며 살았지만, 결국 그 끔찍한 지옥에 가고 말았단다. 하지만 거지 나사로는 비록 이 세상에서는 구걸하며 살았지만 천국에 갔단다." 이야기를 마친 후 선생은 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은 부자와 나사로 중 누가 되고니 ?" 그러자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 세상에서는 부자가 되고 싶구요, 죽고 난 다음에는 나사로가 되고 싶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이러한 심리는 누구에게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 것을 마음껏 즐기다가 저 세상에서는 천국을 가겠다고 억지 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실컷 마귀와 짝하다가 갑자기 저 세상에서 하나님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편, 저 세상에서도 하나님편이어야만 합니다.
"주님, 저희의 욕망은 이 세상에서는 세상 것을 즐기기를, 저 세상에서는 천국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저희로 이러한 욕망 가운데 빠져 생활하지 않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어느 평신도가 선택한 군인의 길
11월 12일 종로 5가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거행된 한국비디오성서통신대학 제4회 수료 예배식에는 남다른 기쁨과 감회가 깊은 한 평신도가 있었다.
평신도 선교사로서 이제야 자격을 갖추게 됐다는 정형외과 전문의사이며 국군창동병원장인 김록권 대령(40세). 지난 85년 의사가 된 후 군의관으로 군복무를 하면서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됐다는 안수집사 김록권 대령은 군의관으로서 체험한 신앙생활을 통해 진정한 자신의 삶의 길이 무엇인가를 기도를 통해 깨닫게 됐다며 선뜩 군인의 길을 택했다고 말한다.
김록권 대령은 주위사람들이 미쳤다고 놀렸으나 그가 다짐한 군인으로서 선교사의 결심을 꺾을 수가 없었다. 군복무를 마치고 나면 돈과 명예가 확실하게 보장되는 전문의사임에도 불구하고 김록권 대령은 복음화의 황금어장
인 군대를 그냥 내버려두고 나 혼자만이 잘 살아 보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던 것.
민족복음화가 바로 군복음화에 달려 있기 때문에 군대를 안디옥 교회라고 생각하고 군에 남아 평신도선교사로서 군복음화에 모든 삶을 바치려고 결심했다는 김록권 대령은 이번 비디오성서통신대학을 마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김 대령은 특히 환자를 신앙으로 무장시켜 다시 자대로 보내면 이들이 부대 내에서 전도특공대가 되어 평신도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어 김록권 대령은 근무지를 자주 옮기면 그곳이 새로운 사역지가 되기 때문에 자주 이동하는 것이 더 즐겁다며 때때로 시간 나는 대로 비디 오성서통신대학을 통해 체계적인 성경공부를 해왔다고 한다.
현재 병원 내에 있는 새생명 교회에 목사가 없어 자신이 새벽기도회를 이끌고 있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김록권 대령은 이번 비디오성서 대학에 간호장교 7명을 졸업시킬 만큼 군복음 사역자 양성에 온 정성을 쏟고 있다.
항상 목사가 없는 곳에 근무지를 옮기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 한다며 이제 한국교회는 군선교에 대한 개념을 전폭 수정해야한다고 자신의 군선교관을 피력한다.
현재 군대 내에는 기독교인이 증가되고 있는데 반해 군목은 줄고 있다고 지적하고 군대에는 그 어느 때보다 잘 훈련된 평신도 사역자가 필요하다는 것이 김록권 대령의 지론. 특히 군대에는 가장 인생황금기인 20대 젊은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들에게 복음을 심어주면 민족 복음화를 그만큼 더 빨리 이뤄질 수 있다고 말하는 김록권 대령.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국군 창동병원 새생명 교회를 어느 독지가의 도움으로 신축하고 있어 기쁘다고 말하는 김록권 대령의 모습이 돈과 명예만
을 쫓는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의 신앙생활을 새삼 부끄럽게 느끼게 해주었다.
인생 길 서두르지 말라
일본의 야마모리라고 하는 사람이 벚나무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벚나무의 수명은 짧다. 그 이유는 꽃을 많이 피우기 때문이다. 벚나무는 소나무나 전나무보다 오래 살지 못한다. 아마 이것이 하늘과 땅의 이치인가 보다. 한 나라나 한 집안의 영광도 오래 갈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벚나무는 무상한 나무다”
벚나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벚나무는 한순간에 활짝 피었다가 한순간에 우수수 떨어져 버립니다. 나무의 수명도 짧은 편입니다. 화려한 꽃은 나무의 기운을 쇠하게 만듭니다. 또한 병충해를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벚나무는 흥망성쇠하는 인간의 역사를 연상시킵니다.
인류의 역사는 떠오르고 가라앉는 부침의 연속입니다. 영고성쇠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인생은 마라톤입니다. 한 순간의 기쁨과 슬픔에 너무 기뻐할 것도,너무 슬퍼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항상 든든한 마음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요.
첫째, 속도 조절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1시간에 걷는 속도는 4㎞ 정도 즉,10리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걸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능력을 감안하시고 시속 4㎞의 속도로 걸어가도록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출 13:21). 마라톤 경기의 선수는 속도 조절을 잘해야 우승할 수 있습니다. 처음 경기가 시작됐을 때 힘이 있다고 전력 질주를 하면 얼마동안은 앞서 갈 수 있으나 잠시 후에는 지쳐서 낙오되고 맙니다.
인생길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생길은 평생 가는 길입니다.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조급함은 절대 금물입니다. 인내를 가지고 내일을 위하여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기도로 전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화려하고 멋있는 장래가 보장될 것입니다.
둘째, 젊은 시절의 영화보다 노년의 영화가 더 귀한 것입니다.
전북 전주∼군산간 100리 길은 벚나무 꽃길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은 벚나무가 노화 상태에 있습니다. 전북도 산림행정과에 문의해보니 1975년에 전주∼군산간 40㎞ 도로에 6300여 그루의 벚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이중에 해마다 100여 그루가 시들어 말라죽거나 교통사고로 죽고 또 도로공사 등으로 훼손돼 보식을 한다고 합니다. 불과 30여년의 짧은 세월에 화려한 벚나무가 쇠락해진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해마다 꽃을 많이 피워 영화를 누린 까닭입니다.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젊어서 혜성처럼 두각을 나타내며 영화를 누리다가 어느덧 힘을 잃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잠 3:35)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 세상의 영화보다 하늘나라의 영화가 더 복스러운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7∼8절을 보십시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사도 바울은 세상에서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려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들이 허무하고 헛된 것인줄 알았기 때문에 분토처럼 버리고 영원한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받으려고 노력했습니다.“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을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 1:24∼25). 세상은 벚꽃처럼 잠깐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교회 분열 10가지 지름길
미국 종교 월간지 [무디] 2월호는 [교회가 분열될 수 있는 10가지 지름길]이란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서 [무디]는 교회를 분열시키는 요소를 열거함으로써 역으로 교회가 분열을 막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다음은 [무디]가 제시한 교회를 분열시키는 10가지 대표적인 사례이다.
1)교회 내 특정 개인의 요구사항에만 철저하게 초점을 맞춰라.
2)교회안에 떠도는 모든 소문과 비평을 다 귀담아 들어라.
3)목회자의 약점만 찾아내 이야기하라.
4)사랑 안에서 결코 참된 것을 말하지 말라.
5)불평 불만의 씨를 마음 속 깊이 간직해두라.
6)남을 용서하되 오직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는 자만 용서하라.
7)자신의 죄는 덮어두고 위선으로 가장하라.
8)공중기도 시간을 통해 교회에 대한 불만을 다 토해내라.
9)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항상 이기기에 힘써라.
10)하나님이 당신에게 [교회를 분열시키라]는 사명을 주셨다고 믿고 행하라.
가야할 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는 어린이 동화에는 체셔 캣이라는 말재주가 좋고 꾀가 많은 고양이가 등장한다.앨리스는 이상한 나라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찾다 갈림길에서 체셔 캣을 만난다.“어떤 길로 가야하나?” 체셔 캣은 앨리스에게 되묻는다.“어디에 가는데?” 앨리스는 “모른다”고 대답한다.체셔 캣은 웃으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 데도 갈 수 없어”라고 대답한다.
인간은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야 한다.인간에게는 온 길이 있고 갈 길이 있다.그 길은 하나님이 정하시는 길이다.그 길은 철새의 항로보다 더 정확하다.그 길을 알아야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우리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은 우리를 단련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다.욥은 고난의 길에서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고백한다.
유혹을 극복하는 최상의 길
플라톤의 제자인 토로킬러스는 바다에 배를 띄워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한번은 배를 타고 바다에 가서 놀다가 갑자기 풍랑을 만나서 배가 다
깨어져 죽을 뻔하고 겨우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집은 바로 바닷가에 있었는데 바닷가로 향하는 창을 다 막았습니다. 어떤 친구가 와서
"이 좋은 바다의 경치를 내다볼 수 있는 창들을 왜 이렇게 다 막았느냐?"고 묻자, 그가 하는 말이 "내가 지난번 배를 타고 나갔다가 꼭 죽을 뻔하고 살아왔는데 다시는 배를 타지 않기로 결심을 했지만 이 창을 그냥 두었다가는 따뜻한 봄날이 되어 이 창으로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면 다시 바다로 나갈 생각이 들까봐 아예 바다가 보이는 창을 막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마음을 시험하는 창이 있습니다. 이 창을 내다보면 우리가 언제 어떤 시험에 빠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약점, 시험의 창을 미리 알아서 아예 그 방면을 단단히 막아 버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다음에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언제든지 나를 죄의 유혹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을 아예 미리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 마음을 더럽게 하는 서적을 피하고, 오락을 피하고, 우리를 더러운 데로 인도하는 친구가 있으면 끊어버리십시오. 또한 유혹을 극복하는 최선의 길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돌아오지 못할 길
먹이를 찾던 물고기 두 마리가 먹음직해 보이는 지렁이를 발견했다. 한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에게 말했다.
"저 지렁이가 보이지? 저건 낚 시바늘에 끼워져 있는 거야. 낚싯바늘은 낚싯줄 끝에 달려 있지 그 리고 낚싯줄은 낚싯대에 연결되어 있고, 그 낚싯대는 사람이 쥐고 있어. 우리가 저 지렁이를 삼키면 우리 임이 바늘에 걸려 결국 프라 이팬에 얹혀지는 신세가 되고 말거야." 그러자 다른 물고기가 말했 다.
"하하하! 어릴 때 할머니가 자주 해주시던 바로 그 이야기구나. 나는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기는 믿지 않아. 프라이팬에 얹혀졌다가 다시 물 속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밝혀준 이가 어디 있어?
자네가 저 지렁이를 먹지 않겠다면 내가 먹어 치우겠네." 그러더니 그 물고 기는 지렁이를 삼키고 프라이팬에 얹혀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리고 자신의 말대로 그 이야기를 들려주러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오늘날도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하지 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이다. 성경은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고, 그 심판에 따라 믿는 이는 천국으로, 안 믿는 자들은 지옥 불 구덩이로 떨어진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시험을 피할수 있는길
어떤 사람이 하루는 임금에게 나아와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임금은 기름이 가득 담긴 잔을 주며 '이 잔을 들고 거리를 한 바퀴 돌고 오라, 단 한 방울의 기름도 흘리지 말고 제시간 내에 돌아와야 한다'라고 명했다. 그리고 신하를 불러 명하기를 칼을 빼들고 좇아가다 만일 기름을 흘리거든 가차없이 목을 치라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명령대로 한 방울의 기름도 흘리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제시간에 도착했다. 이를 본 임금이 칭찬하며 길옆에 있는 가게들을 보았느냐고 묻자 그는 기름에 정신을 쏟다 보니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말하니 임금은 그렇게만 살면 시험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오직 우리의 마음을 한곳 하늘나라와 그의 영광에만 두게될때 우리는 다른것을 보지 않게 된다 ( 너희는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엣것을 생각지 말라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시느니라
진주의 생명을 유지하는 길
`데어의 목걸이`라 불리는 장미빛 핑크색의 진주는 154개의 진주로 만들어진 것으로 주인인 마담데어가 프랑스 정부에 이 목걸이를 이양하여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것은 누구도 착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진주는 그 아름다운 색과 빛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목걸이의 주인이 경비원을 옆에 두고 그 목걸이를 목에 걸자 그것들은 다시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았다. 사람들은 진주가 자신의 생명과 광택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의 신체와 접촉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사람의 못에 장식되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였다. 그래서 진주를 보관하는 은행에서는 이들을 위해 소녀들을 고용하여 특정한 시간동안 앉아서 안전을 위해 그 은행에 보관되어 있는 진주들을 몸에 차고있다. 이러한 진주들은 인간과의 접촉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다.
시험을 이기는 길
언젠가 개를 훈련시키는 사람이 쓴 글을 제가 인상깊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개를 훈련시키는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마룻바닥에 아주 먹음직스러운 쇠고기 덩어리를 갖다 놓은 후 개를 데리고 옵니다. 개가 쇠고기를 보고 뛰어가 그 고깃덩이를 물면 몇 차례 개를 때려주고 고기를 빼앗아 놓습니다. 그 다음 또 그 자리에 고기를 갖다놓고 기다리면 개가 또 뛰어가려고 달려듭니다. 그때 주인은 "안돼! "하고 명령을 합니다. 그러면 개가 멈칫하고 섭니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 훈련을 하고 나면 개의 태도가 달라지게 됩니다. 나중에 고깃덩이를 또 갖다놓을 때 개가 어떻게 달라져 있는지 아십니까? 개는 고깃덩이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봅니다. 주인이 무엇이라고 명령을 하나? 개는 주인의 명령에 따라 행동할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가 떡을 가지고 와서 시험을 합니까? 세상의 인기를 가지고 와서 시험을 합니까? 세상의 영광을 가지고 와서 시험을 합니까? 그것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이 무엇이라고 가르쳐 주시나? 주님은 어떻게 하셨나? 주님이 무엇이라고 명령하시나?" 그것을 보고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시험을 이기는 길입니다.
* 기도: 살아 계신 하나님, 매 주님의 설교와 각종 성경공부를 통해 주님에 대한 지식이 머리에는 점점 쌓여가지만 삶에 적용하기는 생각처럼 잘 안됨을 고백합니다. 그것이 이제껏 살아온 나와 다르고 힘들고 어리석어 보여도, 포기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날마다 연습하게 하소서.
가장 안전하고 빠른 길
어려움을 만날 때 도움을 구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능한 한 모든 친구들을 찾아가 실망하게 된 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처음부터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선적으로 전자(前者)를 택합니다. 그리고 심한 상처를 받고 난 후 에야 하나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 전자를 택하게 되든 후자(後者)를 택하게 되든 결국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면 후자를 택하는 쪽이 훨씬 더 현명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 마음 가운데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우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께 아뢴 후가 아니면 절대로 어떤 일이든 시작하지 않겠다 !”
갈림길에서 알게 된다
개 한 마리가 두 사람을 따라가는 상황에서 그 두 사람이 함께 걸어가는 동안에는 그 개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갈림길에 이르러서 한 사람은 이 길로 또 다른 사람은 저 길로 갈 때, 바로 그때 당신은 그 개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이처럼 한 사람이 세상적이기도 하고 신앙 고백을 하기도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주인이 하나님인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인지를 알아낼 수 없다. 그러나 그 사람이 갈림길에 이르기까지 기다리면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길로 부르시고 세상은 저 길로 부를 때, 그 사람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그는 세상 쪽을 버리고 신앙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주인이 세상이라면 그는 하나님과 양심과 신앙을 버리고 세상과 정욕을 따를 것이다.
죽는 것이 사는 길
어떤 사람이 깊은 산중에서 산불을 만나 타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궁리한 끝에 자기가 서있는 자리에 불을 질렀습니다. 불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 다음에 자기가 그 안에 들어갔더니 불의 피해를 막고 살아 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를 버리는 것이 자기가 사는 길이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남도 살고 자기도 사는 길입니다. 예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태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34)고 하신대로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 수십배 수백배로 사는 길입니다.
모든 죄악의 열매가 자기(Self) 중심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셔서, 자신도 부활하시고,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마다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자기를 항복 (Self surrender)시키는 것이 참으로 승리하는 길입니다.
모험의 길
늙은 노새는 제자리를 돌며 연자매를 돌리고 있었읍니다. 여 러 해 동안 그 노새는 맷돌을 끌어 농부의 곡식을 빻았읍니다. 그런데 방앗간이 점차 기계화되면서 농부는 더이상 노새 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읍니다. 여러 해에 걸친 노새의 충 실한 봉사에 고마와하며 농부는 노새가 목장에서 쉬며 지내도록 해 주었읍니다. 그러나 노새는 살아 있는 나머지 시간 도 문 옆에서 원을 그리며 돌 뿐이었읍니다. 노새는 방앗간 주인의 풀이 우거진 목장을 돌아다녀 본 적도 없고, 샘물에 서 물을 마셔 본 일도 없었으며, 참나무 그늘에 서서 쉬어 본 적도 없었읍니다. 다만 원을 그리며 돌았을 뿐이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하여 많은 것을 예비해 놓으셨읍 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신을 신고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 나야만 했읍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하란에 편히 머물러 있었다면, 우리는 아마 그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을 것입니 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났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많은 것을 예비해 놓고 계십니다. 우리의 창조주께서는 풍성한 삶-의미있고 풍요로운 삶-
에로 우리를 부르셨읍니다. 우리가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적인 신발을 신고 길을 떠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요롭고 기쁨에 찬 삶을 경험 할 것입니다.
마지막 숨길
결혼한지 얼마 안되는 청년이 있었다. 회사의 일로 어떤 사무실에 찾아 가자 그 사무실의 주인의 성실한 크리스챤이기에 이 청년에게 곧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당신은 크리스챤 입니까?` 청년은 `미안합니다. 저는 신자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무실의 주인은 간단히 신앙생활의 권면을 한 후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를 부탁했다. 청년은 `네,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하며 사무실을 떠났다., 삼주일이 지난 후였다. 한 젊은 미망인이 사무실을 찾아 와서 다음과 같이 말을 했다.
`저는 제 남편이 세상을 떠나며 남긴 말을 전해 드리려고 왔습니다. 제 남편은 선생님의 권유를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예수님을 따르는 신앙인이 되겠다고 작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며칠 전에 감자기 위독한 병에 걸려 죽음을 맞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남편은 죽음의 병상에서도 모든 것을 주님께 확고히 맡기고 평안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선생님께 말을 남겼습니다. `저의 영혼을 위해 베풀어 주신 관심과 사랑에 저의 마지막 숨길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 후에 주님 앞에서 뵙겠습니다.`
오르막길, 내리막길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했을 때 끝을 보아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도중 하차는 매우 위험한 경우도 있다. 어떤 일이 힘들다고 해서 그자리에 주저 앉으면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더 일을 어렵게 묶어놓는 결과가 되고 만다. 내가 지리산에 올라갔을때 65Km를 걸었는데 산 길이라서 매우 가파르고 험한 길이어서 매우 힘이 들었다. 이틀 째 되는 날 난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냥 산을 내려갈까 하고 지도를 펴보았다. 그러나 그곳은 우리가 계속 가야하는 길 이외에는 내려가는 길이 없었다.
무작정 내려가다가는 길을 잃기 쉬웠다. 산이 워낙 큰 관계로 길을 잃는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문제에 다다르게 된다. 그렇다고 왔던 길을 되돌아 갈수도 없었다. 되 돌아가기에는 너무도 많은 길을 걸었다. 허탈했지만 하는 수 없었다. 무거운 배낭을 낑낑 들고 다리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삔 무릎의 아픔을 삼켜야만 했다. 우리의 인생길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힘든 길이기도 하고 편한 길이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는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것도 절망의 끝인 죽음을 향하여...그렇다고 우리는 이 자리에서 주저앉을 것인가? 적어도 크리스챤이라면 죽음이 별 문제되지는 않을지 몰라도(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라면) 갈수록 되돌아가기 어려운 길을 우리가 가고 있다면, 끝이 얼마
남았는지 알지못하는 길을 우리가 가고 있다면, 지도가 없는 [삶]이라는 산길을 혼자서 걷고 있다면, 더더욱 우리는 이 자리에서 주저앉으면 안되는 것이다. 내게 주어진 길을 걷는 것, 그것은 우리가 가야할 길이다. `왜 이길은 오르막 길이 있습니까?` 라고 불평해보았자 그것은 어리석은 외침이다. 오르막길이 없으면 내리막 길이 있을 수 없듯이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내리
막길만 있다면 오히려 더 걱정할 노릇이다. 왜냐면 지금까지 내려온 길을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필연성 때문이다. (산행을 해보면 직접 몸에 와닿을 것이다.)
지금 오르막길을 걷고 있다면 힘차게 걷자. 걷고 또 걷자. 반드시 내리막 길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면 몸을 쉬고 각오를 새롭게하자. 그리고 언젠가는 끝이 있을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발을 가볍게 내 딛자. 그리고 다른 오르막길을 준비하자.
제자의 길과 그 개체
그런고로 본훼퍼 같은 신학자는 <제자의 길과 그 개체>라고 하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서는, 다시말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세 가지 결단이 있어야 한
다. 첫째, 단독 결정이 있어야 한다. 누구에게 물을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실존적인 문제이니까. 아내고 남편
이고 자식이고, 아무와도 관계없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생명의 문제이니까 단독으로 결정해야 한다. 둘째, 단
독으로 나서야 한다. 거추장스러운 것은 생각할 수가 없다.
이것은 주님과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기 때문에 혼자 나서야 한다. 셋째, 세상과의 관련성을 청산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과 만나고, 하
나님 앞으로 가는 길에 방해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지 끊어버려라.
툭툭 잘라 버려라. 그러지 않고는 결코
사람의 바른 모습, 그리스도인의 바른 제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가 갈 길
엊그제 미션이라는 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갔더니 표가 없어요. 아니 꼭 봐야 되는 사람이 왔는데 표가 없으면 어떡해요.
안 봐도 되는 사람들이 표를 사면 어떡합니까. 봐야 될 사람이 봐야 될 것 아닙니까. 들어갈 수도 없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앙일보 사장님께서 극장 앞을 나오셨다가 얼굴에 빛이 나는 사람을 본 것입니다. 벌써 다르잖아요.
영력 있는 사람이 보면, “아니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영화구경을 하러 왔는데 표가 없어서 못들어가고 있습니다.” “오십시오.” 제가 여러 사람들과 같이 갔었는데 다 같이 따라서 들어갔습니다.
얼마나 기뻐요. 공짜로 넣어주었는데요. 중앙일보 사장이 넣어주었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래서 같이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그랬어요. 우리 또 나갑시다. 왜요? 또 넣어줄 것 아니예요? 물론 또 넣어주죠. 밤낮 거기서 우린 표없이도 들락거린다라고 합니다. 극장에 왜 들어간 것입니까?
영화를 보러간 것 아닙니까? 그런데 '난 표없이도 들어갔다' 이것이 자랑입니다. 그래서 들어갔다가 나가고 또 들어옵니다.
구원이 꼭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 그것은 이제부터 갈 길이 있고 이제부터 경험할 것이 있고 이제부터 획득할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에베소서 4장에 의하면 이 부분은 이렇게 요구받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4:22―24) '새사람이 되라'가 아닙니다. 새사람인데 새사람다운 길을 가라는 말입니다.
천국에 가는 길 험하여도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로 목회자였던 마빈 감독이 내란으로 인하여 그의 가족과 집을 떠나 아캔자스 지방의 황야를 홀로 헤매고 있을 때였다. 마음에는 평안이 없고 실망과 고독스런 마음으로 어느 마을을 지나고 있을 때에 한 여인의 찬송 소리를 듣게 되었다.
"천국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와 같은 찬송 소리에 이끌려 발길을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찾아 들어간 곳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낡은, 가난한 과부가 홀로 살아가는 집이었다. 뜰에 앉아 무슨 일을 하면서, 낡은 쌤을 입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행복에 쌓여 그 여인의 얼굴은 소망의 빛으로 가득해 보였다. 한참 동안이나 넋을 잃고 여인이 부르는 찬송 소리를 듣고 있
던 마빈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오! 나의 하나님! 나도 주께로 가까이 가기를 원합니다. 나를 주께로 가까이 이끌어 주옵소
서!"하고 외친 다음 여인과 함께 찬송을 불렀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 마빈 감독은 그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세상의 소망이 끊어진 것 같은 지독한 가난함 속에서도 주와 함께 사는 한 여인이 부른 찬송은 수만 명의 설교자들보다 더 분명하게 나의 심령을 울려주었다."
이것은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면서 부르는 찬송이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주는 것임을 알게 하는 말이다.
겸손의 길
성 부러더 로렌즈 수도사는 어느날 제일 싸움 잘하기로 소문난 수도원장으
로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그가 문제 많은 수도원의 문을 두드리자 젊은 수도
사들이 몰려 나왔습니다. 그들은 백발이 성성한 노수도사가 서 있는 것을 보
고, `노수도사가 왔구려! 어서 식당에 가서 접시 닦으시오` 처음 부임한 수
도사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전통이 된 모양입니다.
노수도사는 이 수도원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노수도사
는 `네! 그리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곧장 식당으로 묵묵히 걸어 들
어갔습니다. 노수도사는 한달, 두달, 석달, 접시를 닦았습니다. 멸시와 천대
와 구박이 대단했습니다.
석달이 지나서 감독이 순시차 왔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이 쩔쩔매었습니다.
그런데 원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감독이 물었습니다. `원장님은 어
디 가셨는가?` 수도사들이 대답했습니다. `원장님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
다.` 감독이 깜짝 놀랬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로렌즈 수도사
를 3개월 전에 임명했는데!` 감독의 말에 젊은 수도사들이 아연실색했습니
다.
그 즉시 식당으로 달려가 노수도사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노수도사의
죽기까지 낮아진 겸손의 도여! 그후부터 그 수도원이 모범적이 수도원이 됐
다고 합니다.
성공의 뒤안길
성공이 사람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을 다년간 연구했던 한 심리학자는 이런 결론을 내렸다. `동료들에 의해 성공했다고 평가된 사람의 반 정도가 불행을 느끼고 있다`고. 미국에서 복권에 당첨된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입에서는 `그 복권을 사지 않았더라면`이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갑작스레 큰 재산을 얻은 지 2년 후 부도 수표의 발행 때문에 전과기록
까지 얻게 되었다. 복권이 당첨된 사실은 여전히 유효하여 매년 연금을 받긴 했지만 그녀에게는 그 돈을 함께 나눠 쓸 사람이 없었다. 결혼은 파경이 이르렀고 가족들은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십자가의 길
십자가는 가장 잔인한 날카로움으로 우리 속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죽이게 될 때 비로소 십자가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귀중하고 좋은 것을 잃는 괴로움을 느끼게 될 때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못과 가시로 찔리는 것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주는 존경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그것을 그리스도 때문에 부인해버리는 것, 바로 이것이 사도 시대 이후 그리스도인들이 당해오던 십자가의 고난이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은 인기가 없는 것이고 또한 그것을 지는 이에게는 책망이 임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르하르트 테르슈테겐의 “순례자의 노래”에서는 광야를 지나가면서 사랑받지 못하고 주목되지 못하는 거룩한 여행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한 노력을 볼 수 있다. 그 마지막 절에 보면, “우리는 그가 가신 길을 따라가네 / 우리의 발이 찢어진들 어떠리? / 그가 표해놓으신 길에서는 / 덤불과 가시가 환영을 받는다네. /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고, 인정받지도 못하고, / 미움받고, 상하고, 명성을 얻지도 못하지만, / 오직 우리의 노래 속에 있다네. / 아들 딸들이여, 계속하여라! ” 그들은 자기들의 작은 생활 범위 밖에서는 알려지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위대하지도 못하였으나 그들의 노래는 아름답고 분명한 것이었다.
다른길은 없다
유명한 고대의 수학자 유클리트(Euclid)의 제자 중에 소타(PtolemySotar)가 있다. 소타는 이집트의 황태자로 뒤에 왕이 된 사람이다.
다른 학생들과 똑같이 공부하는데 수학은 정말 그에게 괴로운 과목이었다.
그래서 어느날 유클리드 선생에게 물었다. "나를 위하여 좀더쉬운 방법으로 가르쳐줄 수는 없습니까" 이때 유클리트의 입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수천년을 두고 울려오는 유명한 말이 쏟아졌다. "배움의 길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업느니라" (요14:6)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부한자나 가난한 자나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길은오직 예수를 통하는길 밖에 없는 것이다.
시멘트와 아스팔트의 보급으로 길이 깨끗해지고 편해졌다. 이런 시대에 진흙길을 그냥 내버려두거나 포장도로를 외면하고 흙탕길을 걷는다면 얼마나 우둔한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술집의 길,도박장의 길, 방탕과사치의 퇴폐의 길, 욕심의 길, 미움의 길 등 흙탕속을 허우적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진흙길은 진흙으로 새로워질 수없고 아스팔트를 덮어 새 길로 만들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 굽은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을 평탄케하는"(눅3:5) 구원자로 오셨다.
카나다 토론토에 사는 멀피 (Antoina Murphy)씨는 최근 1년 징역형이 언도되었다. 34세의 미혼녀인 멀피는 회사돈 1천 3백 달러를 훔친일이 있는데이 사건을 변호해주는 변호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이번에는 9백 달러를 훔쳤다. 지난 죄를 덮기 위하여 새 죄를 짓게된다.
두 가지를 덮기 위해 네 가지 죄를 짓는다. 죄는 기하급수적으로 급속히확장된다. 흙탕길을 진흙으로 덮을 수는 없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길 잃은 양
양이 울타리에서 구멍을 발견하고 그 사이로 빠져 나갔다. 도망나온
것이 하도 기뻐 멀리 까지 돌아 다니던 양은 되돌아오는 길을 잃고 말았다.
그러다 이리가 따라오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양은 달리고 달렸어나
이리는 줄곧 좇아오고 있었다.
이윽고 양치기가 와서 양을 구해 냈다.
양치기는 사랑스럽게 양을 어깨에 메고 양우리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모두들 입을 모아 울타리에 난 구멍을 못질해 막아야 한다고 주장
했어나, 양치기는 끝내 못질을 하지 않았다.
길 잃어버린 양
요즈음 사람들은 동물원 외에서는 양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양고기를 먹어 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양이 매우 중요한 동물로서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읍니다.
양과 숫양에 대한 얘기는 성경에 500번이나 언급되었읍니다. 창세기 4 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은 오래 전부터 가축으로 길러졌읍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랫동안 귀중하게 다루어졌읍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실 당시에는 굵은 꼬리가 달린 양이 가장 흔했읍니다.
그러한 종류의 양은 오늘날에도 이스라엘에 있읍니다. 그 꼬리의 무게는 4.5-6.5kg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꼬리가 동물의 가장 좋은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꼬리 먹기를 즐겨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양을 다 그렇게 중요한 동물로 보는 것은 아니지만 성서 시대의 사람들은 양을 가지면 매우 기뻐했읍니다. 양은 맛있는 요리가 되기도 하며 의복을 위해서는 털을, 아침에는 젖을 공급해 주기도 합니다. 만약 집이 필요하게 되면 사람들은 양의 가죽으로 튼튼한 천막을 만듭니다. 물건을 사고 싶으면 돈 대신에 양을 사용합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원하면 양 뿔로 나팔을 만들어 감미로운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양은 이렇게 유용한 동물이므로 하나님께서는 양이 혹사당하지 않을 수 있는 특별한 법칙을 주셨읍니다. 그들도 사람과 같이 일주일에 하루는 쉽니다. 이스라엘에는 이 동물을 사육하는 많은 목자들이 있읍니다.
양이 쓸모가 있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어진 이후 양은 소유주에 의해 조심스럽게 돌보아졌읍니다. 그는 종종 양과 함께 들에서 잠을 자거나 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았나 항상 살핍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늑대와 사람들이 양들을 훔치려 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지난 밤에 없어진 양이 있나 살펴보고, 한 마리라도 잃어버렸으면 곧 찾으러 나갑니다. 그는 나머지 양들을 울타리 속으로 집어넣을 후, 밖으로 나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하루 종일 찾으러 다닙니다.
영광의 길
언제나 자기 맡은 일에 성실하고 근면했던 한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일
해서 세계 최대의 재벌로 부상했다.
록펠러 (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라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부자라는 이미지만 지니고 있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그의 자선사업이다.
그는 이를 위하여 록펠러 재단을 세웠고, 5억 3천만 불 이상에 달하는
엄청난 돈을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쾌척(PhOx)한 사람이다.
이만하면 록펠러는 분명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진가는 후손에 의하여 더욱 빛나고 있다.
우선 그의 사업을 이어받은 록펠러 2세를 살펴보자.
그는 브라운 대학을 졸업한 수재로서 아버지의 사업을 더욱 빛내고 자기
들 기업 이미지를 아름답게 가꾼 사람이다.
원래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창업에 못지않게 수성 또한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 어려운 수성을 멋지게 성공시켰던 것이다.
그 다음 세대를 보자.
록펠러의 손자들은 하나같이 아이비 리그를 졸업한 수재들이다.
이들은 세상에 나와 은행장, 뉴욕주 지사, 자선 사업가, 아칸사스주 지
사, 미 연방정부의 재무장관, 대통령 특별보좌관, 부통령 등을 역임하면서
더 더욱 그들 가문을 빛내 주고 있다.
록펠러 가문에 이런 영광을 가져다 준 비결은 무엇일까 ?
그것은 각자 0자기 일0에 최선을 다하는 가풍(@ QG)에 있다.
그들은 이 가풍을 영속시키기 위하여 지금도 자녀들이 만 7세만 되면,
누구나 자기 잡비는 스스로 벌어 쓰도록 조처하고 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
사람들은 보통 상식을 벗어난 일은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 쉽기 때문에 새로운 일이나 새로운 꿈에 도전하는 것을 망설이고 쉽게 포기합니다.
전화, 비행기, 잠수함 등 모두 지금은 당연한 상식으로 통하고 이용하고 있지만 처음 그 일을 생각하고 그것을 시험할 때는 정신병자로 취급당하여 정신병원에 실려간 일도 있다 하니 상식을 뛰어넘는 꿈을 갖고 그 일을 실제로 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문화나 인류의 발전은 그런 꿈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남도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해..., 많은 사람들이 꿈조차 꾸지 않는 일을 내가 어떻게 해..." 하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라도 걸어가는 용기를 내십시오.
첫 걸음을 내딛고 나면 얼마나 많은 가능성과 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4가지 길
성경: 시편 138편
1. 감사하는 삶(1-2절)
사람에게 삶의 목적도 중요하지만 그 목적을 이루려는 자세와 마음가짐도 중요합니다. 사람의 환경이 나를 불행하거나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삶의 자세입니다.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도 자세 탓이고, 인생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자세 탓입니다. 같은 환경, 같은 처지, 같은 현실에서 한 사람은 천국에 살고, 한 사람은 지옥에 삽니다. 누가 천국의 삶을 살까요? 천국의 삶을 사는 가장 기초적인 요소는 감사하는 자세입니다.
2. 기도하는 삶(3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을 다 아시지만 그래도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에스겔 3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가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꿈같은 약속을 하시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37절) 은총이 약속되었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미 확정되었을지라도 우리에게는 기도할 책임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냥 "주님 뜻대로 하세요!" 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주님 뜻대로 하세요!"라고 해야 합니다. 기도응답을 체험하면 신앙의 의미가 새롭게 느껴지고 영혼에 큰 격려가 될 것입니다.
3. 말씀 중심적인 삶(4-5절)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롬 10:17). 이 구절에서 '들음'이란 '귀로 들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말을 들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그 다음에 어떻게 하는가?"하는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항상 말씀을 들은 후에는 무엇인가 새로운 결단과 작정이 있어야 하고, 날마다 삶 속에 이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어쩌면 내가 듣는 말씀 때문에 내 인생의 기초가 되는 인생관과 가치관을 바꾸어야 할지 모릅니다. 그처럼 말씀이 내 삶 전체를 바꾸는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전제 아래서 말씀을 경청할 때 우리의 영혼은 강건하게 됩니다.
4. 겸손한 삶(6-8절)
교만은 부족한 인간이 자기가 잘 났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친구가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의 친구와 위로자가 되어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 때문에 왕따가 되면 할렐루야지만 '신앙생활' 때문에 왕따가 되면 안됩니다. 생각할 여유를 위해 고독은 필요하지만 외로운 철새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반면에 겸손은 부족한 인간이 자기가 못났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습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 속에서 진실한 친구가 생기고 하나님께서 그의 친구와 위로자가 되어주십니다. 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듯이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 계속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받습니다.
십자가의 길
영국의 선교사이며 탐험가인 리빙스턴 박사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선교 및
봉사활동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리빙스턴의 고향친구 몇몇이 아프리카에서 고생하고 있는 그를 위해 후원할 것을 결정하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네의 아프리카 선교활동을 적극적으로 돕지 못해서 미안하게 생각하네. 이번에 몇 교회에서 자원한 청년들을 보내줄 테니 그곳까지 가장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게"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청년들이 자원은 했지만 아프리카라는 지역적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고 당시 아프리카로 들어가는 교통편은 불편했고 그곳까지 가는 것은 큰 모험이었으며 또한 아프리카 선교의 후원을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 실정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들의 편지를 받은 리빙스턴은 이런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곳까지 쉽게 오는 길이 있어야만 오겠다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네. 나는 길이 없어도 오겠다는 사람들을 원하네"
길이 없어도 가겠다는 사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며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며 헌신되고 훈련된 사람입니다. 사람들을 좋게 하거나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갈1:10)
십자가의 길은 때로 험하지만 영광이 있는 길입니다. 너무 쉬운 길, 미래가 보장된 길만을 고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결정이 아닙니다.
고(故) A.W. 토저 박사에 의하면 한 젊은 신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는 질문으로 오래 믿은 신자에게 접근하였습니다. 그 성숙한 신자는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세 가지를 뜻한다. 첫째,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한 방향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둘째, 그는 뒤로 후퇴하지 않습니다. 셋째, 그는 자신의 앞으로의 계획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첫째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오직 한 방향만을 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한꺼번에 두 가지 방향을 대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두 마음입니다. 그들은 천국엘 가기 원하면서 세상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롯의 부인과 같습니다. 그들은 한 길을 달리고 있으나 또 다른 것도 바라보고 있습니다. 둘째로, 못 박힌 자들은 뒤로 후퇴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그에게 끝입니다. 커텐은 드리워졌습니다. 드라마는 끝났습니다. 그것은 십자가 사건의 종말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그의 옛 생활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끝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 옛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롬6:6)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5:24) 셋째로,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자신의 계획이 없습니다. 그는 더 큰집이나 더 좋은 차를 꿈꾸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끝낸 것입니다. 그의 쇠사슬은 모두 끊어졌고 그 매력도 다 가버렸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이 세 가지 면에서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까?
길을 잘못 알려주면
미국 동부에 혹심한 눈보라가 몰아쳤다. 기차는 제 속도를 내지 못한 채 거북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승객 중 갓난아기를 안은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내릴 역을 지나치지 않으려고 잔뜩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때 한 신사가 여인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내릴 역을 가르쳐 드리지요" 기차는 눈보라를 뚫고 서서히 달렸다. 기차가 어느 역에 멈추어서자 신사가 여인에게 말했다. "이곳에서 내리십시오" 여인은 신사에게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갓난아기를 안고 기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다음 정거장에서 신사는 머리를 감싸안으며 울부짖었다. 여인이 내려야 할 역은 바로 이곳이었다. 신사는 기차가 잠시 멈춘 줄도 모르고 여인에게 길을 잘못 가르쳐준 것이었다.
이튿날 여인이 내린 철길 옆에는 '아기를 안은 여인'의 모습을 한 눈덩이가
발견됐다. 여인은 철길에서 아기를 안은 채 얼어죽은 것이다. 사람에게 길을 잘못 알려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비극적인가. 하물며 영혼을 잘못 인도한다면 어찌되겠는가?
곧 갈아타십시오 어렸을 때 일이다. 대전역에서 기차를 탔는데 내가 가야 할 곳은 서울인데 기차를 타서 자리를 잡고 않아 있는데 왠지 좀 불안하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남에게 물어 보는 것이 챙피하게 느껴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그 기차 옆에 표시판을 보기로 하고 내릴려는데 기차가 출발하지 않는가 그래서 황급히 옆사람에게 이 가차가 서울행 맞지요? 했더니 "아니야 학생 이 기차는 부산행인데" 나는 가까스로 서서히 출발하는 기차를 내릴 수가 있었다. 내려서 건너편을 보니 서울행이 기적을 울리며 출발준비를 하고 있었다.
육교를 뛰어올라 쏜살같이 달려가 역시 출발하고 있는 서울행을 가까스로 탈수가
있었다.
신앙은 기차를 갈아타는 것과 같다. 어떤 분의 글귀가 생각난다.
허무하고 불리우는 지하철에 탔다면 곧 갈아타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에게 보람을 줄 것입니다. 교만이라 불리우는 비행기에 탔다면 곧 갈아타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을 보통사람으로 만족케 하십니다. 성공이라 불리우는 과속택시에 탔다면 곧 갈아타십시오. 성실이라는 새 차표를 받으셔야 합니다. 욕심이라 불리우는 배에 탔다면 곧 갈아타십시오. 상륙해야 할 만족의 항구는 예수님입니다. 시기와 미움이란 호랑이 등에 탔다면 곧 갈아타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의 묘약을 받으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차를 잘 갈아타는 판단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남길 말은?
독일의 암 병원에서 일어난 얘기이다.중년의 한 성도가 수술실에서 혀의 암 때문에 혀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됐다.마취주사를 손에든 의사가 잠시 머뭇거리면서 “마지막 남길 말씀은 없습니까?”라고 질문했다.혀를 사용해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최후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간호원,조수,견습의사들도 심각하게 그를 지켜보는 사이 침묵과 긴장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모두 ‘만일 나라면,만일 한마디만 남긴다면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런데 암 환자는 눈물을 흘리며 “주 예수여,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세번 반복하며 마지막 감사의 말을 남겼다고 한다.
이 감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신앙고백이다.즉 그리스도 안에서 죄를 용서받고 새로 태어난 기쁨과 감격을 갖고 있는 사람만이 진정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다.이런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 환난을 당해도 살아있음을 노래하며 소망에 찬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매일 아침마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로 나의 나됨을 깨닫고 감사기도를 드려보자.오늘도 나는 살아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