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5-7장: 산상 설교
2. 예수님과 율법(5:17-20)
3) 계명을 버림/행함(5:19)
19절의 '이 계명들'('톤 엔톨론 투톤')은 18절의 '율법'을 지칭하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이 계명들'의 성격을 보다 정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 구원사의 시간 선상에서 19절의 계명들의 지시 대상은 성취-이후 시기에 속하는데 반해, 17, 18절의 율법의 지시 대상은 명백히 성취-이전 시기에 속한다. 그렇다면 '이 계명들'은 구약의 옛 율법이 아니라 성취된 율법을 지칭한다. 이 '성취된 율법'이란 '옛 율법'이 지향하고 목표하였던 새 율법이고, 예수님의 종말론적 지상 사역에 의해 성취된, 그리고 그의 재림에 의해 완성될 때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직 지켜야 할 메시아적 율법이다. 제자들은 율법의 모든 계율들을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 의해 성취된 의미로 그의 재림을 내다보며 계속 지켜야 한다.
17, 18절: 율법→옛 율법=모세 율법=성취될 율법(구약 시대 백성들이 지켰던 율법)→구약 시대; 예언의 시대▶예수님의 지상 사역 성취
19절: 계명들→새 율법=메시아 율법=성취된 율법(제자들이 지켜야 하는 율법)→메시아 시대; 성취의 시대▶재림 완성
19절의 두 쌍의 조건절들과 귀결절들은, 계명들(곧 성취된 메시아적 율법)의 가장 사소하고 덜 중요한 사항들까지도 순종하느냐 아니면 제쳐두느냐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완성 단계에서 사람들의 운명을 판가름 하시는 근거가 된다는 점을 분명해 해 준다. 이처럼 19절은 예수님의 성취에 비추어 이해된 율법의 지속적인 유효성을 잘 보여 준다. 이렇게 함으로써 19절은 17절에 대한 율법경시론적 해석을 경계하도록 해 준다.
4) 더 뛰어넘는 의(5:20)
20절에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를 더 뛰어넘는 '의'를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제시하신다. 여기서 '뛰어넘다'(페리슈오) 동사에 '더'(플레이온)가 첨가된 것은 제자들의 의(義)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義) 사이의 대조를 지극히 고조시킨다.
그런데 20절에서 제자들의 의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 사이의 대조는 질적인 것(곧 관계적인 문제)인가, 아니면 양적인 것(곧 행동의 철저성의 문제)인가? 21-48절의 대조적 교훈들에 비추어 볼 때,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드로가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양적인 향상을 포함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제자들의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그 질적 차이에서 발견된다.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더 뛰어넘는 의'는 '하나님의 통치에 기초한', 그리고 '그것에 의해 가능케 된'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통치적 관계는 율법과 선지자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하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였으며, 따라서 그들의 의는 이러한 근본적인 관계를 결여한 율법주의적인 자기(自己) 의였다. 그 결과 그들의 의는 메시아께서 도래케 하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렇게 볼 때, 제자들의 '더 뛰어넘는 의'는 하나님 나라에 그 시발점을 두며, 하나님 나라를 그 목표점으로 삼는다. 또한 제자들에게 기대되는 '더 뛰어넘는 의'는 하나님의 나라의 결과인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이 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 필요한 의는 구약 율법의 계율들이나, 더 나아가서 예수님에 의해 제시된 윤리적 교훈들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지켜 행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여기서 요구되는 '더 뛰어넘는 의'는 윤리적 규범들에 대한 문자적 준수 이상의 것으로서, 하나님의 통치에 기초한 의이며, 그 통치의 결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행동을 수반하는 의이다.
마태는 본 단락(17-20절)에서 율법경시론과 율법주의라는 이중적인 적을 대항하여 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좋은 제자는 19절과 20절의 상호보완적인 경고들에 대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율법주의뿐 아니라 율법경시론에 대해서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제자는 구약 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17, 18절)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를 우선적으로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20절). 하지만 좋은 제자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통치의 필연적인 결과인 윤리적 행동도 결여해서는 안 된다(19절).
3. 여섯 대조적 교훈(5:21-48)
본 소단원과 바로 앞 열쇠 단락(17-20절) 사이의 긴밀한 관계는 부인할 수 없다. 마태가 여섯 대조적 교훈으로 구성된 본 소단원을 열쇠 단락 바로 뒤에 위치시킨 것은, 열쇠 단락에서 제시된 예수님의 율법 성취(17절)와 제자들의 더 뛰어넘는 의(20절)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예들을 제공해 주려는 것으로 보인다.
여섯 대조적 교훈 모두가 약간씩 변형된 형태로 공유하고 있는 도입 형식구는 첫째와 넷째 대조적 교훈들에서 그 완전한 형태를 띤다: '옛 사람들에게 ... 라고 말하여진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21-22, 33-34절). 이 형식구 전반부는 '말하여진 것'('에레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이는 형식구 후반부의 '내가 말한다'('레고')와 대칭을 이룬다. 여기서 전반부의 초점인 '말하여진 것'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말씀하신 율법을 지칭하며, 그것이 주어진 '옛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시내 산 세대를 지칭한다. 이제 형식구의 전반부는 전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의역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시내 산 세대에게 말씀하셨던 율법을 너희가 들었다.'
형식구의 후반부('그러나 나는 너희들에게 말한다.')는 우선적으로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들을 시내 산에서 주어졌던 율법과 대조시키며, 예수님의 제자들('너희들')을 시내 산 세대 이스라엘 백성('옛 사람들')과 대조시킨다. 아래에서 우리는 이러한 대조들의 성격과 중요성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여섯 대조적 교훈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류의 세 대조적 교훈들은 첫째, 둘째, 여섯째 교훈들로서, 예수님의 성취적 가르침이 해당 계명들을 여전히 보존한다. 그에 반해, 둘째 부류의 세 대조적 교훈들은 셋째, 넷째, 다섯째 교훈들로서, 예수님의 성취적 가르침이 해당 계명들을 무효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3-1. 첫째 대조적 교훈: 살인(5:21-26)
"옛 사람들에게 '살인하지 마라. 누구든지 살인하는 자는 심판에 처해질 것이다.'라고 말하여진 것을 너희가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화내는 자마다 심판에 처해질 것이고, 자기 형제에게 라카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공회에 서게 될 것이며, 바보라고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불타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네 예물을 제단에 드리는 중에, 거기서 네 형제가 네게 원망할 일이 있다고 생각나거든, 24 네 예물을 그 곳 제단 앞에 놓아두고 가서, 먼저 네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가서 네 예물을 드려라. 25 네 고소인과는, 네가 그와 함께 법정에 가는 길에서 빨리 합의를 보아라. 그렇지 않으면, 네 고소인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재판관은 교도관에게 넘겨주어, 교도소에 갇히게 할 것이다. 26 진정으로 내가 네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코드란테스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살인하지 마라.'(21上절)는 십계명 중 제6계명인 출애굽기 20:13과 신명기 5:18을 인용한 것이다. 또한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을 것이다.'(21下절)는 출애굽기 21:12과 레위기 24:17 등의 내용들을 요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구약의 율법은 살인 행위 자체를 정죄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성취적 가르침은 살인 행위의 이면으로 들어가서, 살인 행위를 일어나게 하는 마음의 분노와 그로 말미암은 욕설까지 문제 삼는다. '라카'(아람어로서, 문자적 의미는 '텅 빈', 실질적 의미는 '골빈 놈'에 해당하는 욕설)나 '바보'('모레')는 그렇게 대단한 욕설이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한 욕설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욕설을 사용하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 보여 준다. 이처럼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과 증오심을 표현하는 것이 인간 법정에서는 살인 행위와 동등한 유죄 판결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러한 분노와 사소한 욕설까지도 제자에게는 살인 행위에 해당하는 유죄 판결 요건이 된다고 단호히 선언하신다. 특히, '바보'라는 욕설에 대한 형벌이 '불타는 지옥'에 던져지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선언(22下절)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화를 내는 감정 표현과 사소한 욕설까지도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되는지를 매우 인상적으로 강조해 준다.
만일 하나님께서 화를 내는 것을 정죄하신다면, 제자는 형제와 불편한 관계를 가지고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다(23-24절).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 제자가 다른 사람의 실책을 용서해 주어야 할 것을 요구하신다(6:14-15; 18:21-35). 그런데 여기서는 제자 자신이 형제에게 실책을 범한 상황이다. 그럴 경우, 제자는 자신의 실책을 바로잡으려는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형제와의 관계가 정상화되었을 때에라야 하나님께 대한 그의 제사는 받아들여질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가 형제와 화해하는 것이 얼마나 긴급하고 중요한지를 재판 상황 비유를 첨언하심으로써 재차 강조하신다(25-26절). 만일 제자가 형제와 화해하는 일을 게을리 할 경우, 그의 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는 결국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율법주의는 쉽게 빠져 나갈 여지가 많다. 예를 들어, 율법주의자에게는 '나는 살인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의롭다.'라는 식의 주장이 가능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제자들에게 기대되는 더 뛰어넘는 의는 그 시발점 자체가 율법주의적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 뛰어넘는 의는 그 시발점 자체가 율법주의나 일반 윤리와 전혀 다르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전제하며, 그 결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더 이상 깨어진 관계가 아니라 회복된 관계에 들어가 있음을 전제한다. 이처럼 더 뛰어넘는 의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게 된 제자들이 그 내적 성품과 태도가 철저하게 바뀌어 이루게 되는 의이다. 따라서 제자들의 더 뛰어넘는 의는 자기 의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곧 하나님의 통치)의 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