眞俗二諦(진속이제) / 김성철 교수 교리 해설(8)
불전을 읽다보면 서로 모순돼 보이는 가르침을 많이 만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악을 멀리 하고 선을 행하라.”고 가르치지만, 이와 반대로 “선도 악도 없다.”고 설하는 경문도 있다. 어떤 곳에서는 “자아도 없고 법도 없다.”고 하지만, “자기 스스로에 의지하고(自燈明), 법에 의지하라(法燈明).”는 부처님의 마지막 유훈(遺訓)에서 보듯이 다른 곳에서는 자아와 법의 존재를 긍정한다. 또, 윤회하려면 그 주체인 자아가 존재해야 하는데, 이는 무아설(無我說)에 위배되는 것 같다. 불전을 읽다가 이렇게 상충하는 가르침들을 접하곤 당혹감을 느낀 불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용수(龍樹: 150~250경)의 저술 가운데 ≪대지도론(大智度論)≫이란 논서가 있다. ≪마하반야바라밀경≫에 대한 주석서로 ‘대지도’는 ‘마하(大)반야(智)바라밀(度)’의 한문번역이다. ≪대지도론≫에서는 ≪마하반야바라밀경≫의 경문을 차례차례 제시하면서 문답 형식을 빌어서 그 의미에 대해 풀이하는데, 총 1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단순한 주석을 넘어서 각종 불교교리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담고 있기에 ‘불교백과사전’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대지도론≫에서 위에 제시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대지도론≫의 대론자는 묻는다. “부처님께서 제 시간에만 식사를 하라고 하셨는데, 어째서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율장(律藏)의 오후불식계(午後不食戒)에서 보듯이, 스님들은 정오 이전에 모든 식사를 마쳐야 한다. 그런데 ≪금강경≫에서 “과거의 마음을 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을 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을 잡을 수 없다.”고 쓰듯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 모두 실재하지 않는다. 어느 가르침이 옳은가? 또 부처님께서는 ‘무아’의 가르침을 베푸셨는데, 대부분의 불전 서두에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如是我聞).”고 말하며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또 불전에서는 일반적으로 ‘동, 서, 남, 북’의 방위에 실체가 없다고 말하는데, 어떤 곳에서는 “시방(十方)의 부처님들과 보살들이 오신다.”고 하면서 방위의 존재를 당연시한다.
그런데 이런 상충에 대해서 ≪대지도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르침은 진제이고, “제 시간에만 식사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속제다. “방위에 실체가 없다.”는 가르침은 진제이고, ‘방위를 긍정하는 가르침’은 속제다. ‘무아의 가르침’은 진제이고, “자아가 윤회한다.”는 가르침은 속제다. “선도 악도 없다.”는 것은 진제고,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라.”는 가르침은 속제다.” 그렇다! ‘부처님의 가르침들을 정리하는 가르침’, ‘가르침에 대한 가르침’, ‘메타(Meta) 가르침’이 있었다. ‘진속이제(眞俗二諦)의 가르침’이었다.
진제(眞諦)의 산스끄리뜨 원어는 ‘빠라마르타 사띠야(Paramārtha Satya)’인데 ‘최고의’라는 뜻의 빠라마(parama)와 ‘의미’라는 뜻의 아르타(artha)에 ‘진리(satya)’를 덧붙인 말로 승의제(勝義諦)나 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 한역하기도 했다. 따라서 ‘진제’란 ‘뛰어난 의미를 갖는 진리’, ‘최고의 의미를 갖는 진리’, ‘궁극적 진리’라는 뜻이다. 속제는 산스끄리뜨어로 ‘삼브리띠 사띠야(Saṃvṛti Satya)’ 또는 ‘위야바하라 사띠야(Vyavahāra Satya)’라고 쓴다. 위야바하라는 ‘세간’이라는 뜻이고, 삼브리띠는 ‘완전히(sam) 덮음(vṛti)’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무명에 덮여 있는 세간의 사람들을 위한 진리가 ‘속제’인 것이다.
진제는 ‘궁극적 진리’이고 속제는 ‘세간의 진리’다. 궁극적 진리인 진제에서는 모든 것을 부정한다. 시간이든, 자아든, 방위든, 선악이든 모두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진제에서는 시간도 없고, 자아도 없고, 방위도 없고 선악도 본래 없다. ≪반야심경≫에서 가르치듯이 “일체가 다 공하다.” 선종의 육조 혜능(慧能: 638~713) 스님의 게송에서 노래하듯이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다. 원래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속제에서는 오전과 오후의 시간도 있고, 윤회하는 자아도 있으며, 동서남북의 방위가 벌어지고, 선과 악이 판연하다. “없다.”거나 “공하다.”는 표현을 통해서 일체의 분별을 타파하는 가르침은 진제이고, 세속의 분별에 순응하여 선악을 가르고 세상을 묘사하는 가르침은 속제인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들은 진제와 속제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런데 이렇게 범주가 다른 가르침을 같은 수준의 가르침으로 착각하여 나란히 늘어놓고 비교할 경우 모순이 발생한다. “윤회와 무아의 가르침은 상충하지 않는가?” “공의 가르침과 선악의 가르침은 상충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런 물음은 ‘범주의 오류(Category mistake)’를 범하고 있다. 진제와 속제의 구분을 모르기에 발생하는 잘못된 물음이다. 무아나 공의 가르침은 진제이고, 윤회나 선악은 속제다. 전혀 차원이 다른 가르침을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착각했기에 우문이 발생했던 것이다. 진제와 속제의 이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리하는 중요한 틀이다.
용수의 ≪중론(中論)≫ 제24장 관사제품(觀四諦品)에서 논적(論敵)은 “모든 것이 공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하다면 사성제(四聖諦)가 부정되고 불법승(佛法僧)의 삼보(三寶)조차 파괴될 것이다.”라면서 공사상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 답하면서 용수는 진속이제(眞俗二諦)의 가르침을 제시한다. “부처님들의 가르침은 ‘이제’에 의거한다. 세간에서 행하는 진리와 승의(勝義)의 진리이다(제8게). 이 두 가지 진리의 구별을 모르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있는 깊은 진실을 알지 못한다(제9게).” 여기서 ‘세간에서 행하는 진리’는 ‘속제’를 의미하며 ‘승의의 진리’는 ‘진제’를 의미한다. 진제에서는 ≪반야심경≫에서 설하듯이 모든 것이 공하여 불생불멸이며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도 없다. 그러나 속제에서 고집멸도의 사성제는 결코 부정되지 않는다.
그런데 진속이제의 가르침은 이것으로 다가 아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예를 들어 ‘무아의 가르침’이 항상 진제인 것이 아니다. 때론 부처님께서 ‘무아’조차 참된 진리가 아니라고 부정하신다. 왓차(Vaccha)족의 비구가 부처님께 “자아가 있습니까?”라고 여러 번 여쭈었으나 답을 하지 않으셨다. 그 비구가 의아해 하며 돌아가자 아난에게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내가 만일 자아가 있다고 답했다면 그가 원래 갖고 있던 잘못된 사견만 더 키우는 꼴이 되느니라. 만일 무아라고 답했다고 해도 그가 원래 어리석은 자인데 어찌 그 어리석음을 더 키우는 꼴이 되지 않았겠느냐. 앞에서 그는 자아가 있다고 말했었지만 그 다음부터는 허무주의에 빠지게 될 것이니라. 원래 갖고 있던 유아(有我)라는 생각은 상견(常見)이고, 지금 갖는 허무주의는 단견(斷見)이니라. 여래는 양 극단[二邊]을 떠난 중도(中道)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느니라. …” 이어서 십이연기의 가르침이 베풀어진다.
“자아가 있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지는 윤회와 선악의 가르침은 속제이고, “자아가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이 진제이긴 하지만, 무아설의 참된 취지를 모르고 그 가르침에 집착할 우려가 있으면 무아도 부정하고 새로운 진제를 제시한다. ‘유아설의 상견’과 ‘무아설을 오해한 단견’ 모두를 속제로 격하시키고 새롭게 제시되는 중도의 진제다. ‘무아’는 무아라는 생각을 심어주는 가르침이 아니라 “자아가 실재한다.”는 생각을 씻어주는 가르침이다. 무아의 ‘무(無)’자는 “없다.”는 주장이 아니라 “틀렸다.”는 비판이다. 또, ≪반야심경≫의 ‘공(空)’은 ‘공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라, “사물이 실재한다.”거나 “사물에 실체가 있다.”는 분별을 씻어주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공사상’의 진정한 취지를 모르고 ‘공의 가르침’에 집착할 경우 공조차 부정하면서 “공도 역시 공하다(空亦復空).”고 설한다. 새로운 진제다.
진속이제 가운데 속제는 세속의 분별에 순응한 가르침이기에 ‘이론’이나 ‘주장’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진제는 ‘이론’이나 ‘주장’이 아니라 ‘세속의 분별을 타파’하는 ‘작용’이다. ‘무아’의 ‘무(無)’자는 ‘없을 무’자가 아니라, ‘유아설(有我說)’을 타파하는 ‘작용’이다. 반야경의 공(空)자는 ‘빌 공’자가 아니라 “사물에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씻어주는 ‘작용’이다. 세속의 분별을 타파하기 위해서 ‘무’나 ‘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진제를 제시하지만, 그런 진제가 다시 분별의 나락으로 추락하면 그 조차 파기(破棄)하고 새로운 진제가 제시된다. ‘변증적 파기(Dialectical destruction)’의 작용을 통해 진정한 진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진제를 구현하는 이러한 방식은 후대의 선불교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는 제자의 물음에 대한 조주 스님의 “무!”자 대답은 “없다.”는 부정이 아니라 ‘분별을 타파하는 작용’이다. 선승이 내뱉는 ‘할(喝)’의 고함과 ‘방(棒)’의 몽둥이질 모두 ‘분별을 타파하는 작용’이다. 진정한 ‘진제’는 ‘작용’을 통해서 체득된다. 초기불전에서 선문답에 이르기까지 진제는 모두 ‘한 맛(一味)’이다.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김성철 교수
월간 <불광> 2012년 8월호 / 불교, 쉽고 명쾌하고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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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眞俗二諦 / 김성철 교수 교리 해설(8)|작성자 수처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