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바른 길을 알려준 아버지
“네가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代價는 절대 갖지 말라”
손미나
KBS 아나운서
1972년 서울 출생.
고려大 서어서문학과 졸업.
스페인 바르셀로나大 언론학 석사.
1997년 KBS 공채 24기 아나운서로 입사.
「가족오락관」, 「도전! 골든벨」, 「KBS주말 9시 뉴스」,
「세계는 지금」 등 다수의 프로그램 진행.
現 「세상은 넓다」, 「아침마당 토요 이벤트」,
「HAPPY FM 손미나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진행 중.
내 인생의 확실한 가치관을 심어준 아버지
부모님은 내 인생 최고의 「멘토」다.
어려운 일에 맞닥뜨릴 때마다
부모님은 언제나 나를 번쩍 안아 주고 업어 주고 손을 내밀어 주셨다.
또한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 보여 주신 그 길을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다.
어떤 일이든 도전해 볼 수 있는 용기를 주셨고,
누구보다 특별한 가족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셨다.
아버지는 역사 교수셨다.
아닌 게 아니라 식탁에서부터 늘 고리타분한
『공자는… 』 혹은
『군자는 사람이 볼 때나 보지 않을 때나 행동과 말이 똑같다』는
교과서 같은 말씀이 이어졌다.
「塞翁之馬(새옹지마)」를 비롯한 사자성어 풀이를 해준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되물어 꿈속에 나올 정도였다.
그때는 답답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내 인생의 확실한 가치관이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교환교수였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에서 1년을 보냈다.
당시엔 외교관 자녀가 아니어도 해외에서 2년 정도 공부하면
특채(특별전형)로 대학입학이 가능했다.
『1년 더 미국에 남겠냐?』고 아버지가 물으셨다.
심각한 고민에 빠졌지만 나는
『이것이 제 인생의 첫 번째 관문인데, 제가 이걸 옆문으로 들어가면
평생 옆문을 찾아다닐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네가 노력하지 않은 것에 대한 代價(대가)는 절대 갖지 말라』,
『돈이든 칭찬이든 뭐가 되었든
스스로 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받지 말라』던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가르침이 어느새 몸에 뱄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어떤 일로 갈등할 때마다
「이런 게 있는데 어떠니?」라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도록 계기를 마련해 주셨다.
高3 시절, 大入(대입)을 앞둔 중요한 시기에
나는 여름 보충수업을 받는 게 무척 힘이 들었다.
그때 아버지는 과감하게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충고해 주셨다.
가장 바쁘고 치열한 시기에
「쉬어 가는 것이 더 빠른 길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내게 가르쳐 주셨다.
그 가르침이 있었기에,
나는 방송생활의 절정기였던 2004년 여름,
스페인 유학을 과감히 선택할 수 있었다.
학과사무실로 날아온 아버지의 편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잘못한 일이 있으면 편지를 써 주셨다.
직접적으로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좋은 옛 이야기나 지혜로운 글귀로 스스로 생각하게 하셨다.
대학 1학년 초 개강파티가 있던 날이었다.
딱히 통금시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은 술도 조금 마셨고 평소보다 꽤 늦게 집에 들어갔다.
「크게 혼나겠구나」 하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 들어섰지만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었다.
조금의 야단이나 훈계도 없으니 더 겁이 났다.
그 뒤로도 아무 말씀이 없었고,
나도 최대한 모범적으로 귀가 시간을 지켰다.
며칠 뒤 학과사무실로 편지 한 통이 도착했다.
캠퍼스에 앉아 아버지의 편지를 읽는 동안, 가슴이 울컥해졌다.
「… 사람들에게 성인의 여자가 되는 것과 숙녀가 되는 것은 다르다.
네가 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나이만 먹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나는 내 딸이 숙녀였으면 좋겠다.」
그 가르침은 무서운 꾸짖음보다 컸다.
그날 이후 난 지금까지 생활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인생의 교과서처럼 내 삶을 이끌어 준 아버지와 함께
어머니는 헌신적인 희생으로 내 삶을 채워 주셨다.
1000만 분의 1 확률을 이뤄낸 어머니
네 살 때 어머니를 따라 안과에 갔다가
내 시력이 좋지 않다는 검진결과를 받았다.
의사는 안경을 쓰면 좋아질 수 있다며
6개월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으라고 했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지킬 게 너무 많았다.
네 살 때부터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눈을 뜨고 있는 동안엔 꼭 안경을 써야 했다.
심지어 샤워할 때도 안경을 썼다.
어머니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내게 안경을 씌워 주고
잠들면 안경을 벗겨 주었다.
마지막 검안 때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
『이제 안경 안 써도 된다.
근데 미나야, 너 엄마한테 정말 잘해야 한다.
안경을 써서 시력이 좋아지는 확률은 1000만 분의 1이란다』
어머니는 한결 같은 분이었다.
수능시험 전날 온 가족이 외식을 했다.
「속이 안 좋다」며 저녁을 들지 않는 어머니께 아버지가
『내일이면 미나 시험 보니 이제 당신도 저녁을 먹으라』고 하시는 거였다.
그때까지 몰랐는데 어머니는 나를 위해 금식기도 중이었다.
가슴이 찡했다.
마음이 무거워져 집에 도착한 내게
어머니는 장롱 깊숙한 곳에서 꺼낸 배냇저고리를 건네주었다.
「처음 태어나 입었던 배냇저고리를 안고 가면 시험을 잘 본다.」는
동네 아주머니들 말에 20년 가까이 간직해 오신 거였다.
「이사도 많이 다녔는데…, 진짜 어머니 사랑이 이런 거구나!」
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흘렀다.
음악 선생님이었던 어머니는
결혼 후 전형적인 한국 어머니로서 「外柔內剛(외유내강)」을 보여 주셨다.
대학에 들어가니 여자로서 어머니를 더 이해하고 존경하게 됐다.
어머니처럼 겉으론 한없이 부드러우면서
정말 강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절대적인 사랑을 주시는 어머니를 보며
스스로 「힘든 환경에서 뭔가에 도전해 보자」 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은 첫 도전의 자극제가 되었다.
교환학생 시험을 봤고, 대학 3학년 때 호주로 떠날 수 있었다.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남동생과 우애가 특별하게 좋은 것도 부모님의 교육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학교 다닐 때부터 나의 귀가를 지켜봐 주셨다.
지금도 새벽 2시에 라디오 방송 프로그램 진행을 끝내고 들어가면
두 분이 번갈아 가며 마중 나와 계신다.
부모님은 그 사랑을 통해,
내게 한 번 시작하면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마무리하는 것임을 몸소 가르쳐 주셨다.
나 또한 마음속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하나 이루어 가고 있다.
지금도 난 내 가슴을 뜨겁게 하는 일을 찾아 가고 있다.
내가 소중한 사람임을 가르쳐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나 역시 내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은 참 귀한 사람입니다』
▣ 내 인생의 등대인 아내
『아내를 제일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尹潤洙
휠라코리아㈜ 대표이사 회장
1945년 경기 화성 출생.
서울高·한국外大 정치외교학과 졸업.
상명大 명예 경영학박사.
해운공사, JC페니, 화승 수출담당 이사, 대운무역 사장,
휠라차이나·휠라골프 부사장 등 역임.
現 케어라인㈜ 대표이사 회장.
인생의 고비마다 가장 든든한 후원자
「論語(논어)」에
「五十而知天命(오십이지천명) 六十而耳順(육십이이순)」이라는 말이 있다.
나는 1945년에 태어난 해방둥이로
2년 전 「귀가 순해지는 나이」라는, 耳順(이순: 60세)이 되었다.
이제 세상의 이치를 유연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든다.
사람들이 나를 일컬어 「샐러리맨의 우상」이라고들 한다.
나를 성공한 사람으로 인정해 주는 평가에 감사할 따름이다.
지금의 이 자리에 오기까지 나를 지탱해 준 버팀목 같은 사람이 있다.
나는 이 사람을 만나고 어려운 시절과 좋은 시절을 보내면서
내 인생의 小宇宙(소우주)를 완성시켜 나가고 있는 듯 한 느낌이다.
이 사람과의 인연 또한 세상의 귀한 이치이리라.
그 사람은 바로 아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아내를 가장 존경한다.
한국사회에서 아내와 자식 자랑을 하면 팔불출이라고 부르지만,
존경할 만한 사람을 찾기 쉽지 않은 세상에서
아내만큼 존경하는 사람은 없다.
내 아내는 빼어난 미인은 아니지만 사람을 푸근하게 해주는 여자다.
내 성격은 어디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하고
불안하게 여기저기 치고 받고 일을 벌이며 사는 스타일이다.
아내는 이런 나를 안정시켜 준 사람이다.
특히 20代의 젊은 시절을 암흑 속에서 보냈던 내게
아내는 인생의 「등대」가 되어 주었다.
아내는 인생의 고비 때마다
가장 든든한 지원자로 함께해 준 따뜻한 사람이다.
온양온천으로 신혼여행, 고모님 모시고 신혼생활
아내는 단순한 內助(내조)가 아니라
내 사업에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다.
아내는 혼수품으로 그때만 해도 귀했던 타자기를 갖고 왔다.
몸 하나 제대로 뉠 만한 방 한 칸 없던 시절,
그 타자기로 남편의 이력서를 수십 장씩 작성해 주었다.
첫 직장인 해운공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미국의 JC페니와 화승의 수출담당 이사를 거치면서
아내의 조언은 늘 힘이 되어 주었다.
몇 번이나 직장을 옮길 때
보통 사람 같으면 한 번쯤 말리기도 했으련만,
아내는 나의 결정을 전적으로 후원했다.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오히려 용기를 준 사람이다.
화승의 수출담당 이사 자리를 박차고 나와
1984년 여의도에 15평짜리 사무실을 내어 사업을 시작했다.
앉아 있기도 좁은 사무실에 직원은 고작 4명뿐이었다.
아내는 나의 손과 발이 되어 주었다.
경리이자 타이피스트였으며,
사무실 청소를 도맡아 하고 차로 나를 출퇴근시키는 운전기사 노릇까지 했다.
돈이 없어 사업이 휘청거리면 돈을 구하러 다닌 것도 아내였다.
나는 누구에게 단돈 10만원도 못 빌리는 성격인데,
아내는 자존심 죽여 가면서
친척이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사업 자금을 빌려 왔다.
생활비가 없을 때는
기꺼이 결혼 예물과 아이들 돌 반지까지 전당포에 맡겼다.
모 방송국 인터뷰 때 사회자가 물었다.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고. 나는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아내를 제일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그녀는 내 인생의 등대입니다』
내 인터뷰를 본 주부들이 감동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괜히 입에 발린 말을 한 게 아니었다.
아내를 향한 내 마음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중매로 만났다.
1974년 2월에 선봐서 10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어머니 없이 자란 까닭에 나는 유난히 정에 약했다.
아내는 나를 잘 감싸 안아 주었고,
나는 생전 느껴 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랑을 되찾은 것 같았다.
장인이 대한제분의 상무를 역임한 터라 아내는 부족함 없이 자랐다.
가난한 남자에게 시집온 아내는 무척 힘들게 살아야 했다.
돈이 없어 신혼여행을 온양온천으로 잠깐 다녀오고,
결혼 축의금으로 셋방을 마련해 살았다.
게다가 어머니를 대신해 나를 키워 준 고모님을 모시고
신혼생활을 시작했으므로 여러모로 아내는 힘들었을 것이다.
방 한 칸에서 두 칸짜리로,
일부 전세에서 독채 전세로 살면서 이사를 셀 수 없이 다녔다.
그렇게 떠돌다
처음 집을 마련한 것은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의 17평짜리 연탄 아파트였다.
그래도 아내는 우리 집이라며 나보다 더 좋아했다.
그 후로도 이사는 계속되었다.
조금이라도 더 큰 집으로 옮겨 가기 위한 「고난의 행군」이었다.
대다수 한국 사람들의 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이사를 많이 했지만 이사하는 날, 내가 직접 도운 기억은 없다.
이삿짐을 챙겨 본 것은 고사하고,
단 한 번도 이사하는 날 집에 있질 못했다.
그만큼 집안일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건 고스란히 아내 몫이었다.
회사일로 관공서는 수없이 들락날락거렸지만,
우리 집 관할 동사무소 위치를 모른 채 살았다.
『다음 세상에서도 당신의 동반자가 될 거예요』
또 한 가지 미안하고도 감사한 것은
두 아이를 사회에서 제 몫을 다하는 성인으로 훌륭하게 키워 주었다는 점이다.
얼마 전 심장병으로 고생한 이후 건강과 가족의 소중함을 절감했다.
지금도 서로 바쁜 생활로 많은 시간을 함께하진 못하지만
마음만은 항상 가족이란 이름으로 같이 지낸다.
내 곁에 이들을 있게 해준 것을 하늘에 감사한다.
30년 넘는 결혼생활에 있어서
우리 부부는 서로의 믿음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나와 아내는 지금껏 한 번도 서로를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우리의 믿음이 있는 한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마저 든다.
아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그렇게 편할 수 없다.
아내와 같이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면서 나누는 대화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다.
옛날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다음 生을 갖게 되더라도 나는 비즈니스맨으로 일할 것』이라고 했다.
아내는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다음 세상에서도 당신을 믿는 당신의 동반자가 될 거예요』
아내는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 케네디 美 대통령
「발상의 전환」과 「도전정신」을 심어준 그의 취임 연설
금난새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1947년 부산 출생.
서울藝高·서울大 작곡과 졸업.
독일 베를린국립음악大 지휘과 수료.
국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KBS 교향악단 지위자,
수원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독일 챔버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現 경희大 음대 교수,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음악감독,
경기도립 교향악단 예술감독.
내 이름이 「금난새」인 이유
내 이름은 독특해서 한 번 들으면 오랫동안 잊기 어렵다.
나는 1947년 부산에서 金씨 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남들과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살아가셨던 아버지는
우리 가족의 성을 「금」씨로 바꾸었고,
나와 형제들에게 순 우리말 이름을 선물했다.
내 이름 「난새」는 「하늘을 훨훨 나는 새」라는 의미다.
지난 60년간
내 이름처럼 하늘을 나는 새가 될 수 있도록 해준 힘은 무엇일까?
내 이름처럼 꿈을 펼칠 수 있도록 해준 스승은
학창시절 선생님도, 친구도 아니었다.
중학생 때 나는 존 F 케네디 美 대통령의 취임연설 중
한 구절을 우연히 듣게 됐다. 이 한마디가 내 인생의 길잡이가 됐다.
『국가가 당신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라』
흑백 TV 속 케네디 대통령의 이 말이
반항기로 가득 찬 중학 1년생에게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준 평생의 「멘토」가 되었다.
「멘토」라는 말이 나올 때면 중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나는 1960년대에 경희중학교를 다녔다.
위로 형이 한 분 있었는데, 형은 영어를 잘했다.
형과 달리 나는 영어를 제일 못 했고,
영어를 잘하는 형에 대한 부러움과 영어를 잘하고 싶다는 바람이 컸다.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학교 근처 골목 낡은 판잣집 벽에 붙어 있는
「영어 교습합니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영어를 잘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그 교습소에 등록을 하고,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내게 영어를 가르쳐 주던 선생님은
연세大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던 부부 대학생이었다.
이분들은 특히 영어웅변을 잘했다.
영어웅변 연습을 하며 만나게 된 나의 「멘토」
그들은 내게 영어웅변도 가르쳐 주었다.
난 영어보다 웅변이 더 재미있었다.
영어교습소에서 공부하던 내게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친구들 중에서 영어 성적이 가장 나빴던 내가
학교 영어 콘테스트에서 1등을 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 후로 영어 공부가 즐거웠다.
특히 영어웅변은 내 생활 속의 한 부분이 되었다.
교습소 선생님이 영어 원고를 써 주고,
시범을 보이면 나는 길을 걸으면서 그 원고를 외웠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클래식 음악에 대해 스스럼없이 해설하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이때부터 쌓인 것 같다.
영어웅변을 배우던 어느 날,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웅변조의 영어 소리를 듣게 되었다.
거의 알아듣지 못했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들으려 노력했다.
무슨 내용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들려오는 말들 중에서 유독 명확히 들리는 내용이 있었다.
그것은 「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로 시작하는
「국가가 당신들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생각하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라」는 구절이었다.
어린 내게 「국가」나 「요구」 같은 말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이었다.
나는 케네디의 연설을
「모든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대로 그냥 따라갈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남들을 끌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제대로 해석이 됐는지 몰라도,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케네디의 연설은 내 삶에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마다
神의 계시처럼 내게 다가왔다.
독일에서 공부한 후 한국으로 돌아와
12년 동안 몸담았던 KBS 교향악단을 떠나
1992년 수원시립교향악단(수원시향)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 없이
유라시안 필하모닉이라는 민간 오케스트라단을 만든 것은
중학생 시절 들은 케네디의 말이 큰 힘이 되었다.
먼저 다가가는 공연
KBS 교향악단을 떠나 수원시향으로 옮길 때,
주변에서는 다들 『미쳤다』고 했다.
당시 한국의 음악가들은
외국으로 진출하거나 국립교향악단으로 가고 싶어 했고,
거기에 매달렸다.
지방의 이름 없는 교향악단으로 가는 것은 생각하지 않던 시절이다.
KBS 교향악단에서 수원의 지방 교향악단으로 가는 것은,
요즘 말로 하면 잘나가는 대기업 직원이
열악한 영세기업으로 가는 것과 비슷한 선택이었다.
나는 권위나 과시를 생각하지 않았다.
「문화는 많은 사람이 누려야 하고,
수원이나 경기지역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통해
좀 더 많은 문화적 만족감을 누릴 수 있다면
지휘자로서 내 일을 다 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 생각대로 행동했다.
수원시향으로 옮긴 후
나는 단원들에게 『클래식 음악을 접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우리가 먼저 다가가자』고 주문했다.
이런 열정이 통해서인지
한해에 10회 정도 공연을 하던 수원시향이
연간 80회 이상 공연을 하게 됐다.
청중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청중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클래식 음악에 무감각할 것만 같던
수원시민이나 경기도민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뜨거웠다.
나의 수원시향行을 말렸던 사람들이
그전보다 더 뜨거운 신뢰를 내게 보내 주었다.
케네디의 연설 「국가가 당신들을 위해…」라는 말처럼,
나는 사람들이 나와 수원시향을 인정해 주기 바라지 않고,
우리가 먼저 클래식 음악을 들고 사람들을 찾아가 우리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이것이 내가 더 높은 하늘을 날 수 있는 새가 되게 해주었다.
새롭게 유라시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경기도 교향악단을 이끌며
다시 한 번 내 인생의 멘토가 된 케네디의 연설문 구절을 조용히 읊조린다.
▣ 꾸밈없이 정직했던「론」부장
부하의 과오는 내 것으로 功은 부하에게
車錫勇
LG생활건강 사장
1953년 서울 출생.
경기高·美 뉴욕주립大(회계학) 졸업.
美국 공인회계사. 코넬大 경영대학원 석사(MBA).
인디애나大 로스쿨 수학.
美 P&G 입사,
필리핀 P&G 이사, P&G 아시아지역 탬폰 사업부 총괄본부장,
P&G-쌍용제지㈜ 사장, 한국P&G㈜ 사장,
해태제과 사장 역임.
직장동료의 솔직한 苦言
나의 첫 직장은 미국 P&G 본사였다.
입사 동기들보다 늦은 32세에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입사 후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일주일간의 교육 프로그램 마지막 날,
교육 참가자들이 동료들 앞에서 약 15분간 자신의 포부와
오리엔테이션 기간 중에 느낀 점들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들뜬 마음에 별다른 준비 없이 발표를 마쳤고
그 후 모두 함께하는 저녁식사 시간이 있었다.
그때 입사동기 중에 키가 크고 아주 잘생긴 테드라는 친구가
『얘기 좀 할 수 있냐?』며 내 곁으로 왔다.
그는 아주 솔직하게 나의 발표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말해 주었다.
『너는 외국사람이고 우리처럼 영어를 잘 못하지?
그런데도 오늘 너의 발표는 미리 준비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어.
앞으로 경쟁이 심한 P&G 같은 데서 살아남으려면
너는 우리의 두 배 이상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아…』
너무 당황스럽고 부끄러워서 저녁을 먹기는커녕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하니 그 친구의 말이 백 번 옳았다.
그리고 솔직하게 그런 말을 해준 것이 너무 고마웠다.
그 후 나는 회사 문을 여는 오전 5시30분에 출근하고,
문 닫는 오후 10시에 퇴근했다.
주말에도 회사에 나와서
週中(주중)에 미진했던 일들을 다시 보고 보완해 나갔다.
같은 일을 두 번, 세 번 더 생각하고 고민하니
실수도 적어지고 업무의 질도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입사 2년 후
회사 핵심부서 중 하나인 기획총괄부로 발령받았는데,
여기서 기획총괄부장인 론 부장을 만나게 되었다.
론 부장의 부하 사랑
첫 출근하던 날,
론 부장은 자신이 미군으로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부대에서 일하던 「하우스 보이」와 똑같이 생겼다며 농담을 걸어 왔다.
가뜩이나 언어문제로 열등감을 느끼던 나는 그의 농담에 몹시 부끄러웠다.
항상 밝고 농담을 잘하던 부장은 조그만 빈 양주병을 책상서랍에 넣어 놓고,
우리 부서가 상사에게 꾸중을 들은 날이면
병째로 양주를 들이키는 흉내를 내어 부서원들을 킥킥대게 했다.
그는 가끔 나에게
『내가 베트남戰에서 맹호부대와 같이 싸웠는데
한국 사람들 진짜 무섭더라.』며 내 앞에서 무서워하는 시늉을 했다.
당시 우리 부서에는 짐이라는, 은퇴를 1년 여 남긴 나이 많은 직원이 있었다.
제일 일찍 회사에 나와 꼼꼼하게 숫자 하나하나를 점검하는
아주 성실한 분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매우 소심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
짐은 특히 상무를 유난히 무서워해서
상무가 우리 사무실 근처로 오는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손을 부들부들 떨며 심하게 긴장을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무서운 상무에게서 짐이 질책을 받는 일이 생겼다.
그가 준비한 기안서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인데,
상무의 성난 목소리에 짐은 거의 쓰러질 정도로 긴장을 하고 있었다.
가혹할 정도의 냉정함으로 일을 가르쳐
이때 론 부장이 그 사이를 막아서며
『짐의 기안서는 내가 그렇게 만들라고 해서 준비한 것이니
나를 꾸짖어 달라』고 했다.
결국 그는 짐 대신 꾸지람을 들어야 했고,
그날도 어김없이 빈 양주병을 벌컥벌컥 들이키는 시늉을 하며
미안해하는 짐과 우리들의 경직된 분위기를 풀어 주었다.
그가 농담 잘하는 분위기 메이커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일에 있어서는 가혹할 정도로 냉정했고,
그것은 바로 부하직원들의 실력 향상을 이끄는 견인차가 되었다.
론 부장과 특별한 인연은 나의 부족한 영어실력 때문에 맺어졌다.
미국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다고는 하지만 미국 일류기업의 업무기안,
정보보고서를 쓰려면 보통 영어 이상의 문장력이 필요했다.
영어구사 능력이 미숙한 나로서는
복잡한 비즈니스 현안을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이만저만 어려운 게 아니었다.
내가 기안서를 작성해 결재를 올리면
부장은 아주 깐깐하게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다시 쓰라고 돌려주었다.
어떤 때는 같은 기안을
여덟 번, 아홉 번 다시 써야 할 정도로 철저하고 혹독했다.
론 부장의 지적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지 말라는 것이었다.
『장황하게 몇 장에 걸쳐 상황을 늘어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다.
때로는 핵심을 꿰뚫는 두 줄짜리 메모가
스무 페이지의 보고서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
그의 가혹함 덕분에 나는 비즈니스의 주요 현안을
조리 있게 정리해 보고하는 능력을 빠른 속도로 개선시킬 수 있었다.
그 후 P&G에서 근무하는 동안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문서로 설득력 있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뼛속까지 드러내는 정직성」을 요구
론 부장은 직원들에게 「완벽한 투명함」을 요구했다.
『투명함이란 어떤 각도에서 보건
어두운 면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뜻한다.』며
『뼛속까지 드러내는 정직성이야말로 업무의 기본』이라고 강조했다.
자신 앞에 올라온 기안서를 몇 번씩 고쳐 주며
부하직원에 대한 진정한 열정을 보여 준 론 부장,
상대방이 듣기 불편하더라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나의 동료 테드.
나는 가끔 내 주변의 부하직원들이나 동료들에게
론 부장이나 테드만큼의 관심과 열정을 보여 주고 있는지 자문해 보지만,
그들의 10분의 1만도 못 하고 있다.
그들은 회사 내에서 정치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부서內에서 생기는 실수는 모두 자신의 과오로 떠안았고,
부서 성과는 부하직원 개개인에게 돌렸다.
그래서인지 론은 임원진급에서 탈락하고
결국 1992년 부장으로 정년 퇴임했고,
테드는 임원진급 1년여 만에 회사를 떠나
아프리카 난민구호 단체에 들어가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봉사하며 살고 있다.
꾸밈없이 정직했던 그들의 리더십은
승진과는 애초부터 거리가 있었는지 모른다.
비록 현실적으로
「승진」이나 직장에서의 「성공」이라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으나,
진정 순수한 마음으로 부하직원들을 격려하고 가르치며
동료에게 객관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은 그들의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리더십이 아닐까.
나를 비롯해 그와 함께 일했던 많은 사람들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모습을 기억하며
닮아 가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출처] 내 인생의 멘토 (스승) : 기획특집, 작성자 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