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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밭 그 사나이] 09
S#1. 연구소 앞 뜰 (낮)
(8부 엔딩에 이어서)
택 기 무슨 뜻이야?
수 진 (미안한) 옛날에 우리 안 좋았던 기억은 모두 잊어버리라고.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택 기 (잠시 생각. 씁쓸하게) 다시 뭘 시작한단 말이지? 그런 약속은 자신이 없는데? 미안하다. 괜히 시간 뺏어서...
택기 그냥 돌아서면,
수 진 (다급히) 그냥 나를 멀리하지만 마...! 그것도 안돼?
S#2. 마을입구 (낮)
택기의 트럭과 수진의 차가 잇따라 마을로 들어선다.
S#3. 마을회관 앞 (낮)
두런두런 모여서 간단한 음식을 나누거나 서성이던 동네 사람들,
택기의 트럭과 수진의 차가 와서 멎자, 보고는 모여든다.
커다란 쟁반을 들고 음식을 나르던 지현도 보고는 멈춰 선다.
차에서 나오는 택기와 수진.
송할멈 (지현 옆에 오며) 박사님이 여자시네...?
홍이모 이쁘네유...
명 숙 전에 봤던 아가씬데?
이장댁 그러게. 택기 대학 다닐 적에 자주 놀러왔던 아가씨 아녀?
수진을 데리고 사람들에게로 오는 택기.
택 기 인사드려. 이장님이셔. (이장에게) 이쪽은 강수진 박사고예, 외국서 미생물 유기농법을 공부하고 돌아와가 연구소에 있어예.
이 장 아이구, 그러세요...
수 진 안녕하세요. 강수진이라고 합니다. (공손히 인사하며 손 내밀면)
이 장 (손 닦고 송구하게 악수) 어케 와주셨네요... 저희는 이렇게 와주실 거는 생각도 못하고... 너무 감사드레요.
수 진 뭘요, 마음고생들이 얼마나 많으시겠어요...
다른 어른들께도 고개 숙여 인사하는 수진.
황송하게 수진에게 맞인사하는 사람들 속에서 바라보는 지현.
자기 옷차림을 매만지며 괜히 주눅이 든다.
S#4. 시골집 마당 (낮)
병달에게 인사를 하는 수진.
택기는 수진의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있고,
이장과 영배, 남자어른 두엇 따라와 마당가에 있다.
수 진 안녕하셨어요. 그 동안 별고 없으셨지요?
수진을 뜩 보고는 별로 좋은 기색은 아닌 병달.
병 달 왔어요?
수 진 (고개 숙일 뿐) ....
병 달 우쨌거나 우리 마을에 우환거리를 박사님께서 잘 잡아가 좋은 갤과가 있기를 바래요.
수 진 네...
택 기 (병달에게) 강박사가 당분간 저희 집에서 묵어야 할낀데...?
병 달 그래? 가만있자... 천상 지현이하고 방을 같이 써야겠네?
지현 문득 놀라 어리둥절 본다.
S#5. 지현방 (낮)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택기와 수진.
뒤따라 들어온 지현은 난감한 표정인데,
택 기 (수진의 짐가방을 내려놓고) 불편하겠지만, 남는 방이 없어서...
수 진 (택기에게 미소) 괜찮아. (지현에게) 어떡하죠? 나 때문에 불편해서...?
지 현 (애매한 미소) 아니에요, 할 수 없죠 뭐...
택 기 화장대는 곧 만들 거야. 컴퓨터는 내 방에 와서 쓰면 되고...
수 진 좋은데, 뭘... 그럼 밭에 바로 가볼까?
택 기 그래.
수 진 잠깐만. 금방 나갈게. (가방부터 열면)
택기는 나가고, 지현은 쭈삣거리며 보고 있는데,
수 진 (지현에게) 저기, 옷 좀 갈아입을 게요.
지 현 네? 아, 네... (나가려는데)
그제야 구석에 놓인 요강을 발견하는 수진.
수 진 저건 뭐예요?
지 현 (순간 챙피한) 요강... 몰라요?
수 진 아... (피식 웃는데)
지 현 나한텐 제일 중요한 물건이에요. 그러니까 불편해두 좀 참아주세요.
수 진 (쿡쿡 미소) 네. 그러세요.
괜히 뚱한 표정으로 나가는 지현.
S#6. 동 마당 (낮)
입이 나와 평상에 털썩 앉는 지현.
지 현 (혼잣말) 뭐야? 방을 어떻게 같이 써...?
이때 지현 뒤에서 실험 샘플채취도구들이 담긴 박스 들고 나타나는 택기.
(평소보다 뭔가 신경 쓴, 밭에 가는 차림이다.)
택 기 조금만 참아. 오래 있진 않을 거야.
지 현 (놀라서 돌아보며) 괜찮아요... 내가 뭘...
택 기 강박사는 이런 데서 안 살아봐가 불편한 게 많을 기야. 잘 도와줘.
지 현 그래야죠... 그나저나 해충이나 잘 잡혀야 될 텐데... 그게 문제죠...
이때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수진.
전문가 느낌을 풍기는 야외 실험복(정비사들이 입는 원피스 형태로 된)에 토시까지 끼고,
장화(역시 전문가 느낌의 신발)를 내려놓고 신는다.
왠지 주눅이 들며 쳐다보며 일어서는 지현.
수 진 (택기에게) 갈까?
택기와 함께 밖으로 나가는 수진.
집 밖에서 기다리던 이장과 마을 어른들과 함께 가고...
지현도 쫄래쫄래 따라 나간다.
S#7. 영배네 포도밭 (낮)
수진과 함께 포도밭으로 들어가는 택기.
이장과 남자 어른들은 가까이 따라가고, 아낙들, 할머니, 아이들은 뒷줄에서 구경한다.
수 진 (실험도구로 벌레를 떼서 보며) 육안으로는 쌍점매미충이 맞는데...?
택 기 천혜녹즙도 별 효과가 없고, 제충국도 전혀 안들어. 변종일 수도 있나?
수 진 (벌레를 시료봉투에 넣으며) 일단 실험실에 보내봐야겠어.
역시 사람들 우르르 둘러서서 보고 있고, 지현도 사람들 뒤에서 고개 빼고 뭐하나 본다.
홍이모 왜 약은 안 뿌리고... 자꾸 포돗잎하고 흙만 퍼가?
명 숙 벌레를 채취해다가 실험실에 가져가서 분석을 해야 된다잖아요...
이장댁 그려? 이러다가 또 시간만 자꾸 잡아먹구 해충만 더 번지는 거 아녀?
이때 수진이 수런거리는 사람들을 보더니,
수 진 (상냥하게) 가능한 빨리 적절한 방법을 찾아볼게요. 같은 해충이라도 밭의 토양이나 나무 상태에 따라 저항력이 다르거든요.
이장댁 (꺼뻑 죽어) 그래유... (되레 사람들 나무라며) 박사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잖유. 사람들이 걱정은 참!
수진과 택기가 박스를 들고 빠져나가면, 또 우르르 따라가는 사람들.
이때 수진이 발을 헛딛어 미끄러지면,
얼른 수진을 잡아주는 택기.
택 기 조심해...
수 진 고마워.
지현이 그런 두 사람을 본다.
S#8. 시골집 (낮)
지현이 혼자서 심드렁하니 집으로 들어서면,
병 달 (커다란 솥을 내오며, 화덕에 물 끓일 준비) 마침 잘 왔다.
지 현 (뭘 하시려나? 궁금해서) 왜요, 할아버지?
병 달 닭백숙 해먹자.
지 현 어머, 좋아요. 안 그래도 여름이라 기운도 없고, 고기 먹고 싶었는데 잘됐다.
병 달 (수진이 탐탁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내집에 손님이 왔는데 대접을 해야지...
지 현 (떨떠름) 그 여자 먹으라고 하는 거예요?
병 달 뭐하노? 얼른 닭 잡 안 잡고?
지 현 네? 닭이요?
병 달 백숙을 할라문 닭을 잡아야 할 거 아이가! 큰 놈으로 두 마리만 잡아라!
지 현 네? 아이, 씨...
S#9. 동 마당 (석양 무렵)
마당을 휘젓고 다니며 닭을 잡고 있는 지현.
땀에 쩔어 닭을 안고 뒹굴지만, 닭은 요리조리 빠져나가고 지현은 골탕만 먹는다.
지 현 (얼굴에 닭털만 붙고, 기진맥진해서) 으... 냄새... 내가 미쳐... 내가 누구 땜에 이 고생이냐...
다시 닭과 사투를 벌이는 지현.
이때 들어서는 수진과 택기. 지현과 딱 마주친다.
지현 창피해서 뻘쭘히 닭털 털며 일어서는데,
택 기 니 멍청하게 뭐하나? 닭을 잡을라면 머리를 써야지.
지 현 (수진 앞에서 쫑크를 먹어 더 무안) 아니, 멍청하다니요? 닭 잡는데 똑똑한 게 어딨어요?
택 기 참 내...
택기 모이를 한줌 집더니 닭장 안으로 죽 뿌리자,
잠시 후 닭들이 모이를 쪼아먹다가 한 마리가 닭장 속으로 쏙 들어간다.
닭장 안의 닭을 잽싸게 잡아오는 택기.
지현 무색해서 고개 돌리는데,
택 기 머리를 써. 머리를! 맨날 징징대지만 말고.
수진은 웃으며 들어가고,
택기 닭 들고 뒤꼍으로 사라지면,
지 현 (약 올라 택기에게 대고) 아이, 씨? 그래요! 댁은 머리 디게 좋네. 천재네, 천재! (머리에 붙은 닭털 턴다.)
S#10. 동 부엌 (밤)
식탁에 둘러앉아 닭백숙을 먹고 있는 네 사람.
맛있게 먹는 병달과 택기.
지 현 (찝찝해서 수저만 넣었다 빼며) 이게 아까 그 닭 잡은 거죠?
병 달 그럼, 닭을 잡았지, 소를 잡았나?
수진은 입맛이 안 맞는지, 애매한 미소 띠고 국물만 깨짝거리는데,
병 달 많이 들어요. (아직 친절한 감정 아닙니다. 수진이 온 것 탐탁지 않은 상태.)
수 진 (미소) 네... (국물만 먹는데)
지현, 괜히 그런 수진을 보더니 에라 모르겠다, 닭다리 뜯는다.
지 현 역시 집에서 기른 토종닭이라 맛있네요, 할아버지. 쫄깃한 게!
이때 조용히 일어나는 수진.
수 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병 달 먹은 게 ?네? 입맛이 안 맞는가?
수 진 아닙니다. (지현에게) 설거지는 내가 할게요.
지 현 그러세요.
택 기 (수진에게) 아이다. 니는 손님인데... 내가 할게. 가서 쉬어. (다정한 태도 아닙니다. 막상 수진을 자기 집에 데려오고 보니, 불편한 것들은 배려하게 되는 것.)
지현, 그런 택기를 쏘아보는데,
병 달 (E) 그럼... 손님한테 설거지를 하라 카문 되나...
수진이 나가자,
병 달 입맛에 안 맞는 갑네. 우짜지?
택 기 장을 좀 볼까예?
병 달 그래. 지현이 니가 장 좀 봐가 색다른 반찬이라도 해봐라.
지 현 아니, 우리 집 반찬이 어때서요? 맛만 있구만?
병 달 도시 입맛은 지현이 니가 잘 알낀데... 각별히 신경을 써봐라.
괜히 심통이 나는 지현.
S#11. 마당 샤워장 (밤)
샤워장 커튼을 열고 불을 켜며, 지현이 수진에게 설명한다.
지 현 천막 치고 샤워하시면 되구요, 나오실 때 불 잘 끄시구요. 그리구 모터 고장 나니까 물 아껴 써야 되요. (돌아서는데)
병 달 (뒤에 나타나며) 내집에 오신 손님한테 그기 무신 예의가?
지 현 네...?
병 달 편안하게 마음 놓고 씻어요.
수 진 네...
병 달 (지현에게) 넌 거게 있다가, 혹시 모타 고장 나면 여서 물 길러다 드려라. (들어간다.)
지 현 (속마음 소리) 어? 기가 막혀! 내가 저 여자 몸종이야, 뭐야? 무슨 목욕물을 길러다 드려? (하면서도 못 들어가고 맘 상해서 천막 옆에 대기하고 서있는데)
이때 택기가 뜨거운 물을 가지고 나온다.
택 기 머리 감을라문 이거 타서 써. 물이 차서 감기 든다.
지 현 (속마음소리) 아니, 저인간이?
수 진 괜찮은데... 고마워. (따뜻한 물 타고)
택 기 천막만 대강 쳐 논 거라 불편할 기야. 내일 다시 손 좀 봐야겠네. (돌아서면)
지현, 팩 토라져 실룩대며 자기 방으로 향한다.
그런 지현을 말없이 돌아보는 택기.
S#12. 지현방 (밤)
방에 들어오자마자, 열 받아 쏟아내는 지현.
지 현 하, 기가 막혀! 왜들 저래? 내가 불편하달 땐 신경도 안 쓰더니! (밖을 노려보며) 그래, 니네 애인이다 이거지? 잘해봐라.
이불 거칠게 펴서 까는데,
병 달 (밖에서 문 열더니) 뭐하냐? 과일이라도 썰어다 내가지 않고?
지 현 지금 목욕하는데, 무슨 과일이에요!
병 달 박사님 샤와 끝나고 드시라고 내다 드려라. (사라진다.)
지 현 내가 미쳐. (쿵쾅거리며 나간다.)
S#13. 동 마당 (밤)
평상 위에서 수박을 써는 지현. 입이 함박만큼 나왔다.
열린 방문으로 택기 방안을 보면,
원서들, 논문들 잔뜩 펴놓고, 책상 앞에 앉아있는 수진과 택기. (지현 시야.)
삐죽거리는 지현. 포도와 복숭아, 수박을 보기 좋게 놓은 양푼을 들고 간다.
S#14. 택기방 (밤)
지현 들어와 과일양푼을 두 사람 앞에 내려놓으면,
수 진 고마워요.
택 기 (대뜸 복숭아 집어 껍질부터 벗기며) 참, 수진이 니는 복숭아 알레르기 있지?
지 현 (어이없어 눈 똥그랗게 뜨고 보는데)
수 진 (택기에게) 괜찮아. (지현에게) 잘 먹을게요. (이내 책을 보며) 병원성미생물을 대량 인공증식 시켜서 밭에 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애.
택 기 (껍질 벗긴 복숭아를 수진에게 건네며) 해충한테 병을 일으키게 해서 스스로 죽게 하는 바이러스성 미생물?
수 진 (복숭아 자연스럽게 받아먹으며) 응. 쌍점매미충에 해를 가할 수 있는 바이러스를 찾아봐야겠어.
지현, 복숭아 껍질 벗겨서 주는 거 보고, 기가 차서 얼쩡거리며 보고 있으면,
택 기 (멋쩍어서 지현에게) 왜?
지 현 아니, 뭐... 더 필요한 거 없어요?
택 기 (수진이 온 이후 지현과는 좀 어색한 기분)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를께.
삐죽거리며 나가는 지현.
S#15. 동 지현방 (밤)
이불 깔면서, 수진 베개 팍 팍 쳐서 던져 놓고,
지 현 내가 무슨 하녀야? 필요하면 부르게? 그리고 무슨 공부를 저렇게 착 달라붙어서 해? 덥지도 않나? 뭐? 복숭아 알레르기? 골고루 하시네. 흥!
이내 복숭아 하나 집어들고 발라당 눕더니,
지 현 그래, 난 복숭아 알레르기 없다. (콱 베어문다. 심통 난 듯 먹다가 부엌 쪽을 통해 택기방을 힐끔 보면서, 괜히 주눅 드는)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학교 다닐 때 공부 좀 열심히 할 걸. (그랬다가 괜히 입 삐죽거리며) 공부는 무슨 공부? 농사에 공부가 뭔 상관이야? (다시 주눅 들며) 아니야. 그래두 미생물, 화학 이런 걸 알아야 과학영농을 하지. (갑자기 ‘포도생산기술’이라는 책을 끌어당겨 편다.) 맞아. 나도 공부하자. (엎드려 책을 본다.)
S#16. 동 택기방 (밤)
수진이 택기에게 자기가 보던 원서를 보여주면,
두 사람 머리를 가까이 하고 자료를 들여다본다.
수 진 여기 보르도 지방에 해충피해가 심각했던 사례가 있는데...?
택 기 어디... (영어를 따라가며) 바실러스 균만 살포한 경우... 포도잎의 왁스층을 파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경우 미생물 영양제를 함께 병행해서 엽면 살포해 주어야 한다...
수진이, 책을 읽는 택기를 보며 살픗 미소를 머금자,
택 기 (수진을 보며 약간 떨어지며) 왜?
수 진 아니야... 갑자기 우리 학교 다닐 때 생각이 나서... 그때로 돌아간 착각도 들고...
택 기 (어색해서, 책 덮어 놓으며) 피곤하지? 오늘 갑자기 내려와서 힘들겠다.
수 진 (택기 태도 알아차리고, 자료 챙기며) 아니야. 좋았어... 갑자기 동네 어른들 보면서 해충 꼭 잡고 싶다는 생각 들더라. 너한테 뭔가 빚도 갚고 싶고... 이렇게 해서 갚아진다면 말이야. (자료 들고 일어나는데)
택 기 니 내한테 빚 같은 거 없어.
수 진 (보면)
택 기 내도 니 원망 같은 거 안한다. 그냥 내가 못나서 널 못 잡았던 거지, 뭐...
수 진 .... (보면)
택 기 (무뚝뚝하게) 오늘 고맙다. 와줘서.
수 진 (어색하게 미소 짓고는) 잘 자. (나간다.)
잠시 착잡하게 보다가 돌아앉는 택기.
S#17. 동 지현방 (밤)
포도책 펼쳐져 있고, 지현은 혼자 엎드려 디자인 스케치 하고 있다.
지 현 왜 이렇게 안 와? 둘이 밤 새나 부지?
이때 들어서는 수진.
지 현 (괜히 놀라 일어나며) 이제 오세요?
수 진 (책들 내려놓고 앉으며) 아까는 인사도 제대로 못했네요. 저는 강수진이에요.
지 현 이지현이라고 해요...
수 진 (어색한 분위기) 한방을 써야 되겠네? 나 때문에 불편해서 어떡하죠?
지 현 아니에요...
수 진 (방을 둘러보며) 이 방도 그대로네...?
지 현 (의아해서) 전에 여기 왔었어요?
수 진 학교 다닐 때요... 그때도 올 때마다 이방을 썼는데... 겨울에 눈 내리면 조용해서 창 밖에 눈 쌓이는 소리가 들리고 참 좋아요...
지 현 (괜히 기분 나쁘다.) 그래요...? 저기, 해충은 언제 쯤 잡혀요?
수 진 글쎄요. 일단 연구소에 샘플을 보냈으니까 결과가 나와 봐야 알겠죠. 너무 걱정 마세요. 곧 잡힐 거예요.
지 현 네... 주무세요... (자려고 책 치우는데)
수 진 (스케치북 보더니) 어머 이거 지현씨가 그린 거예요? 그림 잘 그리시네...
지 현 (괜히 은근히 강조) 의상 디자인을 하거든요. 제가...
수 진 네...
지 현 지금 잠시 쉬고 있는데, 포도밭 받으면 다시 올라가서 할 거에요.
수 진 네... (엎드려 원서 책을 펴면)
지 현 (치우고 불 끄려다) 안자요?
수 진 먼저 주무세요.
지 현 전... 환하면 못 자거든요. 불 꺼야 되는데...?
수 진 어쩌지... 아직 잠이 안 오는데? 택기방에 가서 봐야겠네...? (일어나려 하면)
지 현 아니에요! 여기서 읽으세요. (억지로 배시시 웃는다.)
수진 다시 엎드려 책을 보면,
지현 누워서 못마땅한 듯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하지만 잠시 후 잠이 오지 않는 듯 다시 눈을 뜨고 일어나는 지현.
밖으로 나간다.
S#18. 포도밭 (밤)
택기가 심란한 기분으로 포도밭에 들어서면, 혼자서 벌레를 잡고 있는 지현. 인기척에 지현이 택기를 돌아보면, 뚱하니 마주보는 두 사람.
택 기 니 이 밤중에 혼자 나와가 와 이라고 있어?
지 현 그러는 댁은 왜 나왔어요?
택 기 (대꾸 없이 포도나무 살펴보며) 괜히 힘들게 벌레 잡지 마. 수진이가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좋은 결과가 있을 기야.
지 현 맞아요... (한숨) 미련하게 내가 왜 이러구 있나 몰라...
택 기 와? 수확량 못 맞출까봐 걱정돼서 그래?
지 현 (뾰루퉁 해서) 어떻게 알았어요?
택 기 그만 들어가. 이렇게 해서 될 거면 벌써 다 잡았지.
지 현 놔둬요. 나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대학원까지 나왔다는 사람이 벌레 하나 초장에 못 잡구, 사람이나 불러오고. 그거 밖에 안돼요?
택 기 (순간 삐딱해지는 표정. 하지만 꾹 참고) 미안해. 내 실력이 이거 밖에 안돼가... 미안타.
지현, 온다간다 말도 없이 그냥 가버린다. 씁쓸한 기분으로 말없이 포도나무를 들여다보는 택기.
지 현 (밭을 걸어 나오며, 궁시렁 궁시렁) 흥, 포도밭에서 연애사업이나 하는 사람이 누구야? 박사가 뭐 그 여자 하나야? 왜 꼭 그 여자를 데리고 왔어?
가버리는 지현.
S#19. 동 마당 (밤)
지현 화가 난 듯 들어와 방으로 들어가면, 잠시 후 택기 따로 들어와 평상에 앉아 지현 방을 돌아본다. 방 앞에 수진의 신발과 지현의 장화가 나란히 놓여있다. 말없이 바라보다 평상에 눕는 택기. 한숨 쉬더니 눈을 감는다.
S#20. 마을회관 앞 (아침)
고사상이 차려져 있고, 고사를 지내는 마을사람들. 먼저 병달과 박영감 등 마을어른이 절을 하고...
이 장 (뒤에 서서 보며) 어쨌거나... 해충이 잘 잡혀서... 올해농사도 별 탈 없이 잘 되게 해주십시요...
병 달 (절하고 나가며 수진에게) 우린 강박사만 믿어요.
이윽고 돼지머리 앞에 수진과 택기가 나란히 절을 한다. 한쪽에서 음식을 장만하는 아낙들. 그 모습을 보며 한마디씩 한다.
이장댁 그러고 보니 둘이 참 잘 어울리네...
송할멈 그러게. 꼭 신랑각시 같어?
지 현 (쟁반 들고서, 속마음소리) 잘 어울리긴 뭐가 잘 어울려?
홍 이 (언제 나타났는지, 지현 옆으로 들어서며) 잘 어울리긴 뭐가 잘 어울려유?
(시간경과)
커다란 솥에서 국자에 퍼 올려지는 국수가락. 지현 그릇에 국수를 퍼 커다란 쟁반에 올려놓으면, 수진이 나타나 국수들이 놓인 쟁반을 들고 간다. 지현, 의외네? 하는 기분으로 수진을 쳐다보는데,
송할멈 (수진의 국수쟁반 뺏으며) 아이구, 박사님이 이러시면 안되지유.
홍이모 그려유... 앉아계셔유. 홍이야! 저 지지배. 너 뭐하구 있는겨!
이때 지현 옆에 나타나는 홍이.
홍 이 아니, 저년이 여우짓까지 허네? (투덜대며 쟁반 받으러 간다.)
명 숙 세상에! 박사가 똑똑하기만 한 게 아니라, 성격도 참 싹싹하고 좋네!
마리아 맞다. 이런데 와서 촌사람들한테도 저래 잘하고...!
이장댁 군침 나네? 며느리 얻고 싶다~! 아들이 없는 게 한이여...
지현 괜히 삐쭉거리며 반찬들 담는다.
(시간경과)
남자 어른들과 둘러앉아 국수를 먹는 수진과 택기.
각기 수진 챙겨주느라 시끌벅적하다.
박영감 여기 박사님 괴기 좀 더 드리지.
이 장 (빈 접시 내밀며) 그래, 박사님 드시게 전 좀 더 갖고 와.
수 진 여기 남았는데... 괜찮아요...
영 배 (반찬 가까이 놔주며) 입에 맞을라나 모르겠어요...?
지현과 홍이는 반찬들 더 놔주느라 분주하다.
(시간경과)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는 수진과 택기 일행이 보이고...
커다란 통(일명 다라이)에 다 먹고 난 그릇들 담는 지현과 홍이.
홍 이 (심통 나서) 박사님 박사님, 아주 난리도 아니구먼! 누군 뭐 반찬 안 나르나? 저 여자가 하면 아주 대단한 거고, 난 뭐 부엌데기여, 뭐여?
지 현 (이심전심이다. 한숨 뿐) ....
홍 이 한 동안 잠잠 하더니, 저 년은 왜 또 갑자기 나타나가지구 내 속을 뒤집어?
지 현 ....
홍 이 (속상한) 택기 오빠 같이 괜찮은 남자는, 당연히 여자들이 많이 따르는 거라고, 이해는 할라구 하지만... 그래도 너무 속상혀?
지 현 (어이가 없어) 이거나 잡어.
홍이와 지현, 함께 그릇들 담긴 통을 맞잡아 수레(일명 구르마)에 싣는다.
홍 이 저기... 언니는 애인 있다면서유?
지 현 애인?
홍 이 보건소 의사라며유?
지 현 어... (심드렁하게 끄덕끄덕)
홍 이 좋것어유. 근데 난 워쩌문 좋대유? 저 박사년 때문에 아주 미치것네?
지 현 (은근히) 왜, 또 머리채 좀 잡지 그러니?
홍 이 내가 못 잡을 줄 알아유?
이때 수진 갑자기 달려와,
수 진 저기, 물 한잔만... (기침하며 둘러보면)
홍 이 (순간 자기도 몰래 꺼뻑 주눅 들어, 얼른 물 따라주며) 네, 박사님. 여기 시원한 물...!
기가 막히는 지현.
수진 물 마시고 얼른 다시 달려가자,
홍 이 해충만 못 잡기만 혀봐. 내 그땐 머리카락을 한 올이라도 남겨 놓나!
이내 수레 끌고 가는 지현.
S#21. 시골집 (석양)
지현, 수돗가에 쪼그리고 앉아 쌓아놓은 설거지 하고 있는데, (두 다라이 정도 산더미 같은)
수진, 평상에 앉아 신발 벗고 맨발을 주무르고 있다.
병 달 (아직도 웃는 낯은 아닙니다.) 피곤하지요? 이집 저집 포도밭 돌아보기도?
수 진 (어른 주무르던 발 내리며) 아니에요...
이때 뜨거운 물을 들고 나오는 택기.
택 기 오늘도 엄청 돌아다녔어요. 황간마을 이장님까지 오셔가, 강박사를 청해갔다 아입니까.
병 달 그래...? 욕 많이 봤네.
택 기 여기다 발 좀 담그고 있어. 피로가 풀릴 거야
지현 더욱 짜증이 나며 그릇 거칠게 닦는데,
병 달 (지현에게) 참, 지현이 니는 화장실 좀 싹 치아라. 손님이 오셨는데, 화장실이 더러워가 되겄나. (들어가 버리고)
네? 이, 씨! 얼굴이 구겨지는 지현.
S#22. 뒤 마당 화장실 앞 (저녁)
우비에 잔뜩 중무장을 하고 청소도구 들고 나타난 지현.
지 현 난 여기 잘 쓰지도 않는데... 동네사람들이 그러는 건 이해해. 근데 할아버지까지 왜 이러시는 거야? 스트레스 받게? (마스크 쓴다.)
이윽고 화장실 문 열더니,
고개 돌리고 심호흡 후 들어간다.
S#23. 동 지현방 (밤)
벽에 기대어 책을 읽고 있는 수진.
지현은 입이 뚱하니 나와 자기 몸에서 냄새나나 맡아보면서 향수 뿌린다.
수진 문득 요강을 보면서 망설이더니,
수 진 지현씨...
지 현 (뜩 보면)
수 진 저기, 밤에 화장실 가기 무서워서 그런데, 이거 좀 쓸게요.
지 현 어머. 안돼요.
수 진 딱 한번만 쓸게요. (다가가면)
지 현 (잽싸게 몸 날려 요강을 끌어안으며) 안돼요! 이건 내 개인 전용이에요!
지현, 그 바람에 얼굴에 튄 오줌방울들 닦는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요강사수!)
수 진 그럼... 같이 좀 가주실래요? 화장실 가기가 무서워서...
지 현 (요강 잘 놔두며) 뭐가 무섭다고 그래요? 나도 다 혼자 가는데? 우리집 화장실 내가 청소까지 해놔서 얼마나 깨끗한데요...?
수진이 할 수 없이 그냥 나가면,
지현 요강 내려놓고 방문으로 간다.
지 현 그 화장실, 귀신하고 대화하는 곳인데... (히죽 웃으며 방문 틈으로 내다보면)
S#24. 동 마당 (밤)
수진이 나와서 어쩔까 하다가 택기 방문을 노크한다.
수 진 택기야...!
택 기 (나오며) 왜?
수 진 저기... 무서워서 그런데... 화장실 좀 같이 가줄래...?
택 기 (별스럽지 않게 앞장서며) 그래.
택기를 따라가는 수진.
이때 방에서 튀어나오는 지현.
놀란 표정으로 고개 빼고 뒤꼍으로 가는 두 사람을 본다.
S#25. 뒤 마당 화장실 앞 & 마루 (밤)
택기를 따라 화장실에 온 수진.
수 진 저기, 너무 멀리 가지 마.
택 기 여기 있을게.
수 진 (들어가려다가) 저기, 택기야... 노래 좀 불러줄래?
택 기 알았어.
수진 들어가면,
택기 돌아서서 나직이 노래를 불러준다.
주머니에 손 꽂고 서성거리며 무표정하게 노래를 부르는 택기.
마루 끝에 나와 숨어서 보는 지현, 열 받는다.
S#26. 동 앞 마당 (밤)
마당에 내려서는 지현.
수진의 신발을 집어들더니, 개한테 가져간다.
지 현 물어뜯어. 자, 박사님 신발이라 더 맛있어. 물어뜯으라니까?
개가 주춤주춤 도망가자, 개한테 꿀밤을 먹이는 지현.
지 현 야, 너 내 신발은 잘도 물어뜯으면서, 왜 저 여자껀 안 물어뜯냐?
이때 뒤곁에서 택기와 수진의 발소리 들리자, 얼른 후다닥 뛰어들어가는 지현.
(그 바람에 슬리퍼가 마당으로 붕 날아가 떨어지고)
수 진 미안해. 괜히 귀찮게 해서.
택 기 아니야. 불편한데 와가 내가 미안치.
수 진 (미소 짓더니) 옛날엔 니가 나한테 노래도 참 많이 불러줬는데...
택 기 내가?
수 진 응. 니가 작곡한 노래라고 하면서 많이 불러줬잖아. (웃으면)
택 기 다 어렸을 때지. 드가라.
수 진 여전히 무뚝뚝하긴... (웃으며 돌아서서 들어간다.)
복잡한 기분이 드는 택기, 방으로 향하려다 문득 마당에 나뒹구는 지현의 슬리퍼를 본다.
집어서 지현방 앞에 가지런히 놔주는 택기.
택 기 (피식 웃으며) 가시나... 신발도 꼭 지 같이 벗어놨네...
미소 머금고는 자기 방으로 간다.
S#27. 읍내장터, 수산물 코너 (낮)
지현 궁시렁거리며 혼자 장을 보고 있다.
지 현 (병달의 사투리 흉내) 박사님 입에 맞는 걸루다 장 좀 봐 오그래이. 귀한 음식으로 사오그라. 박사님 입은 뭐 하늘에 가서 달렸나? 아무 거나 먹지...
하지만 막상 살 때는 고심하다 좋은 걸로 사는 지현.
지 현 (낙지나 생선) 이거 얼마에요? 이건요? (잠깐 고심하다) 비싼 걸로 주세요. (돈 꺼내며, 심드렁하게) 그래... 나두 수확량 올려야 되는데... 잘해주지 뭐...
S#28. 보건소 진료실 (낮)
경 민 (청진기 떼며) 약을 꼭 꼭 시간 맞춰서 드셔야지요. 빼 놓지 말구요.
노인여 (귀찮다는 듯) 알았어.
노인환자를 모시고 나가는 서간호사.
진료를 마친 경민이 차트를 쓰는데,
핸드폰이 울리자, 받는다.
경 민 지현이니? 마침 전화 할라 그랬는데? 뭐? 어디? (창밖을 돌아보면)
창 밖에서 전화를 하면서 손을 흔드는 지현.
S#29. 보건소 밖 (낮)
경 민 (사진봉투 들고 달려 나오며) 왠일이야?
지 현 (장보따리 들고서) 장 보러 나왔다가, 잠깐 보구 갈라구... (보건소 쪽 힐끗 보며) 지금 시간 괜찮아?
경 민 괜찮아. (봉투 보여주며) 우리 리조트에서 찍은 사진 나왔어.
S#30. 보건소 근처 나무 밑 (낮)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경민과 리조트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고 있는 지현.
지 현 어머, 잘 나왔다.
경 민 이건 니가 예쁘게 나와서 몇 장 크게 뽑았어.
지 현 (사진 넘겨보며) 오빠두 멋있다...!
경 민 참, 그 동네 해충 때문에 아주 난린가보더라?
지 현 (사진 보며) 응. 아직도 안 잡혀서 걱정이야.
경 민 새로 온 그 박산지 하는 여자가 그렇게 괜찮다며?
지 현 (갑자기 경민 보며, 민감한) 누가 그래?
경 민 사람들이 그러던데? 똑똑한 여자가 성격도 좋고 착하고, 아주 괜찮다고 칭찬이 자자하더라?
지 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아무튼 시골 사람들은 박사네 하면 꺼뻑 죽어서... 솔직히 그 여자가 뭐가 있다고? 그 여자가 하는 건 뭐든지, 박사님 박사님, 아주 촌스러워서...
경 민 너 왜 그래?
지 현 내가 뭘...? 아니, 뭐... 쫌 착하긴 한데... 우리 집에서 내방 같이 쓰거든. 아주 불편해 죽겠어. 사람들이 손님이라구 손 하나 까딱 못하게 하구, 결국 내가 다 시중드는 거나 다름없어. 해충을 빨리 잡던지 해야지...
경 민 그랬구나... 안 그래도 너 밭일 할라면 힘들 텐데...?
지 현 그러니까!... 내 맘 알아주는 사람은 역시 오빠 밖에 없어. (히죽 웃는다.)
S#31. 어느 해바라기가 있는 길가 (낮)
택기와 수진이 마을 사람들과 함께 포도밭에서 나온다.
수 진 실험적으로 몇 그루씩 뿌려본 나무가 다행히 효과가 있네요.
이 장 그럼 연구소에서 만들고 있다는 미생물은 언제 쯤 밭에 뿌릴 수 있을까요?
수 진 내일 연구소에 가서 가져오면, 모레는 뿌릴 수 있을 거에요.
이 장 아, 그래요...!
사람들 좋아하고... 모두 어딘가로 또 바삐 향하는데,
이때 길가에 피어있는 해바라기 꽃을 보며 멈춰서는 택기.
수 진 (사람들과 가려다 택기 보고) 왜? (해바라기를 쳐다보면)
택 기 아니야. 먼저 가. 금방 따라 가께.
수진 돌아서서 가면,
택기 다시 해바라기를 바라본다.
Insert. - 난 해바라기 꽃이 좋아요. 크고, 희망적이잖아요.
길가에 핀 해바라기를 올려다보던 지현의 모습.
혼자서 해바라기를 보며 빙긋이 웃는 택기.
갑자기 작업복 주머니에서 맥가이버 칼을 꺼내더니, 누가 오나 살피고는,
잽싸게 해바라기를 끊는다.
근처 경운기에 해바라기 한 아름을 내려놓는 택기. (많이도 꺾었다.)
S#32. 피자집 (낮)
피자 먹으면서 이야기 하고 있는 지현과 경민.
지 현 근데, 오빠. 남자들은 헤어진 옛날 애인 다시 만나면 어때?
경 민 옛날 애인? (유경험자. 말하기 싫은)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
지 현 말해봐. 어떤데?
경 민 뭐... 좀 그렇지.
지 현 뭐가 좀 그런데?
경 민 평소엔 잊은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면...
지 현 (궁금해서) 막상 만나면?
경 민 (자기 경험담) 결혼했다는데도 미치겠더라구...
지 현 (그건 관심 없고) 저기... 그럼, 결혼 안 하고 아직도 미혼이면?
경 민 그럼, 더 미치지...
지 현 (약간 걱정) 그래...? 만약에 그 여자가 불행하게 됐을 경우는?
경 민 그러면... 어후, 돌아버리지.
지 현 (걱정스레) 그럼... 아주 잘돼서 옛날보다 더 멋있어졌으면?
경 민 더 돌아버리지...!
지 현 (뭔가 생각하며 중얼거리는) 그래...? 남자들은 옛날 애인 만나면 그렇구나...
경 민 왜 누가 옛날 애인 만났대?
지 현 어? 아니... (히죽 웃어보이고는 고개 돌린다. 심각한 표정.)
하지만 그런 지현을 뭔가 이상하다는 듯 보는 경민.
S#33. 저수지 길 (석양)
짐칸에 해바라기를 싣고 택기가 경운기를 몰고 간다. 해바라기를 돌아보는 택기. 뭔지 모를 미소를 살픗 머금고, 기분이 좋다. 그런데 이때 멀리 경민의 차가 와서 멎고, 차에서 내리는 지현. 그 모습을 보며 표정이 삐딱해지는 택기. 경민의 차는 떠나고, 지현은 장보따리를 들고 걸어서 집으로 향하는데, 자연스럽게 택기의 경운기와 저수지 모퉁이에서 만나게 된다. 지현과 가까워지자, 택기 경운기 끄더니, 얼른 팔을 뻗어 해바라기를 비닐로 덮어버린다.
지 현 어디 갔다 와요? 수진씨는요?
택 기 니는 어디 갔다 와?
지 현 (장 보따리 경운기에 놓으며) 장에 갔다가... 잠깐... 경민 오빠 좀 만났어요.
택 기 내가 포도밭에 없으면 니라도 포도밭에 붙어 있어야지, 와 싸돌아 댕겨?
지 현 내가 뭘 싸돌아다녀요? 박사님 입맛에 맞는 반찬거리 사가지고 오다가 잠깐 만난 건데?
택 기 밭에 해충 천진데, 걱정도 안 되나? 그래가 니 수확량 어디 올리겠어?
지 현 포도밭이야, 박사님하고 둘이서 잘 고칠 건데요, 뭘? 난 할일도 없더만?
택 기 그래도 주인이 돼갖고 밭에 붙어 있어야지! 포도도 다 주인 얼굴 보면서 크는 거야!
지 현 오늘 할일 다 해놓고 나갔어요. 댁이야 말로, 우리 포도밭은 안 지키고 이 동네 저 동네 남의 포도밭이나 다니면서 뭘 그래요?
택 기 내가 해충 잡을라고 다니는 거지, 놀러 다니는 거야?
지 현 해충은 강수진 박사님이 잡으시는 거죠. 댁은 수행비서 밖에 더 해요? 괜히 나만 갖구 그래. 흥!
지현 외면하며 바삐 걸어가면, 택기도 경운기 몰고 외면하며 간다.
지 현 (씩씩거리며 혼잣말) 지는 하루 왼 종일 같이 있어놓고? 난 겨우 두 시간 있다 왔다, 두 시간!
택 기 (혼잣말) 가시나. 여행 갔다 그냥 왔다캐서 속 좀 차렸나 했더니, 그기 아이구만!
S#34. 시골집 마당 (밤)
지현과 택기 들어서면, 수돗가의 병달이 보고는 일어선다.
병 달 늦었네? 저녁은...?
각자 뚱하니 대답도 없이, 지현은 장보따리 들고 부엌으로 택기는 자기 방으로 간다.
병 달 (쳐다보며) 쟈들이 와 또 저래? 또 싸웠나?
S#35. 동 지현방 (밤)
지현 수건에 손 닦으며 툴툴거리며 들어오면,
요강을 쓰려다가 놀라 얼른 무릎걸음으로 아닌 척 물러나는 수진.
지 현 (얼른 요강으로 달려가) 아니, 무슨 짓이에요? 박사님께서?
수 진 그냥... 어떻게 생겼나 한번 봤어요.
지 현 이건 남의 칫솔로 몰래 이빨 닦는 거나 같은 거예요. 박사님은 누가 박사님 칫솔로 이빨 닦으면 기분 좋겠어요?
수 진 아니요.
지 현 이거 몇 번이나 썼어요?
수 진 아니에요. 이번이 처음이에요.
지 현 (뚜껑 열어보더니 놀라며) 아니? 내가 아침에 분명히 비우고 나갔는데, 가득 찼잖아? 박사님도 거짓말을 하시네요?
수 진 (모르는 척) 무슨 소리에요? 원래 차 있던데...?
지 현 다시는 쓰지 마세요!
면목 없어 고개 돌리는 수진.
S#36. 동 택기방 (밤)
어둠 속에 누워서 생각하는 택기. 이리 저리 돌아누우며 열불이 난다.
택 기 장택기. 이 미친눔. 니 해바라기는 왜 꺾었어? 정신 나간 놈. 그런 거 갖다 주면 그 여자한테 환심 살 줄 알았어? 이지현이 쟤는 그런 거 좋아하는 애가 아니야. 쟤는 오직 돈, 성공, 이런 거 밖에 없다꼬. 그 의사놈 만나는 거 보면 몰라? 참기름 바른 차돌맨치로 뺀지르르 한 놈. 에이그, 으이!
자기 머리를 쥐어뜯더니 돌아눕는다.
S#37. 포도밭 (아침)
떨어져서 벌레 잡으며 일하고 있는 지현과 택기. 서로 뚱하니 냉랭한 기운이 감돈다.
지 현 (택기 들으라는 듯) 오늘은 왜 여기 계시나? 박사님 안 따라 다니고?
명 숙 박사님 연구소에 잠깐 가셨잖아.
지 현 그래요?
이장댁 원인을 알아냈나봐. 해충만 골라서 죽이는 바이러슨가 뭔가 하는 균을 만들어 갖고 온다잖여?
이때 범수가 쭈뼛거리는 희정을 끌고 지현 뒤에 와 선다.
범 수 (뒤에서) 아줌마!
지현, 문득 돌아보면,
범 수 저 보건소 갈래요!
희 정 나도요!
범 수 빨리 만원씩 주세요.
택 기 (못마땅한 듯 힐끗 돌아보며)
지 현 (택기 눈치 보며) 니들은 왜 여기 와서 놀고 그래? 시끄러워. 저리 가서 놀아!
범 수 보건소에 빨리 가요!
지 현 저리 못 가!
명 숙 (달려와 희정을 보며) 희정아, 너 어디 아파?
희 정 안 아파, 엄마.
범 수 아프기로 했잖아.
지 현 절로 안가? 빨리 가라니까!
명 숙 (지현에게 대뜸) 아니, 왜 애들한테 소리는 지르고 그래?
지 현 네? 아니에요. (다른 곳으로 피한다.)
범 수 이상하다? 보건소라면 환장하던 아줌마가 왜 저러지?
못마땅하다는 말없이 일만 하는 택기. 범수와 희정 다시 포도밭 밖으로 나가는데, 이때 멀리 포도밭 길가로, 고급 승용차 한대가 스르르 멈춘다. 차에서 내리는 남자들. 홍철과 황동춘 일행이다.
S#38. 동 포도밭 길가 (아침)
포도밭을 올려다보는 황동춘과 홍철, 비서들.
황동춘 (택기네 밭 가리키며) 저기가 그 고집불통 노인네 밭이지?
홍 철 네, 회장님.
황동춘 저기가 문제라. 저기만 박살나면 일이 참 쉬워지겠는데 말이야...
홍 철 네, 그렇죠...
음흉하게 포도밭을 올려다보는 황동춘과 홍철.
S#39. 포도밭 일각 (낮)
장갑낀 손으로 벌레를 잡고 있는 지현.
지 현 이놈의 벌레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박사만 믿고 있다간 벌레 언제 잡힐지도 모르고... 이러다간 수확량 못 맞춰. (갑자기 핸드폰 걸며) 포도밭 못 받으면 나만 손해지...
신호가면, 통화 기다리는 지현.
지 현 엄마야? 오늘부터 휴가라 그랬지? 아빠하고 여기 좀 내려올 수 없어?
지현모 (E) 왜? 무슨 일 있니?
지 현 밭에 병충해가 심한데, 이대로 가다간 포도 엉망 될 거 같애. 수확량 반토막도 못 나온다구.
지현모 (E) 뭐? 큰일이네? 여긴 재개발도 틀렸고, 그 포도밭 못 받으면 우린 끝장인데?
지 현 엄마. 아빠하고 당장 내려와. 나 혼자 이 벌레를 어떻게 다 잡어?
지현모 (E) 그래, 알았다. 당장 내려갈게.
지 현 (전화 끊으며) 됐어. 나는 나대로 할 수 있는 걸 해봐야 돼.
S#40. 시골집 마당 (낮)
커다란 나무판을 대패질 하는 택기.
병달이 지나가다 택기를 본다.
병 달 뭘 만드나?
택 기 (열심히 대패질 하며) 화장대요...
병 달 화장대? 화장대는 뭐에 쓸라꼬?
지 현 (광주리 들고 지나가며) 박사님 불편하실까봐 만들겠죠, 뭐.
입이 삐죽 나와 가는 지현. 그런 지현을 힐끗 보더니, 말없이 나무결을 다듬는 택기. (몽타주 느낌) 땀을 흘리며 나무와 나무를 끼워 맞추는 택기. 전동 드릴로 조립하고, 각종 전문 목공기계로 나무결 매끄럽게 갈아낸다. 나무결을 살려 기름을 먹이는 택기. 만드는 재미에 빠져 흐뭇한 미소가 얼굴에 살짝 스친다. 손잡이 장식도 달고... 거울도 붙이고... 드디어 나무 결이 자연스러운 심플한 화장대가 완성된다.
S#41. 동 지현방 (낮)
만든 화장대를 들여놓는 택기. 거울도 큼직하고 제법 근사하고 쓸만하다.
택 기 (여기저기 만져보며, 지현에게) 어때? 맘에 드나?
지 현 내 맘에 들어서 뭐하겠어요?
택 기 왜 자꾸 시비야? 이거 니 쓰라고 만든 거야.
지 현 흥, 나 줄라고 만들긴 뭘 나줄라고 만들어요? 내가 그렇게 불편하다고 그럴 땐 귀퉁으로도 안 듣더니, 그 여자가 오니까 잘만 해다 받치네?
택 기 니 지금 질투 하나?
지 현 (딴청 피며) 질투는 무슨 질투예요? 어이가 없어서 하는 소리지? 사람이 어쩜 이렇게 이중적이야? 내꺼 만들라고 사다 논 거울로 그 여자 화장대를 만들어 놓구선?
팩 토라져서 사라지는 지현.
택 기 저 가시나 저거!
S#42. 포도밭 중턱 (낮)
연구소 봉고차에서 액비를 내리고 있는 수진과 연구소 후배1. 택기와 영배, 홍철도 같이 나르고 있고, 지현도 액비통 받아 정리하고 있다.
택 기 (액비통 내리며, 수진에게) 생각보다 빨리 왔네?
후 배1 말도 마세요. 강선배가 어찌나 서두르는지, 우리 방 직원이 모두 매달려서 만든 거예요.
수 진 (액비통 나르며) 마을 분들 생각하면 한 시라도 빨리 만들어야지.
사람들 감탄하는데, 괜히 시큰둥한 지현.
수 진 이건 원액이니까 내일부터 희석해서 쓰면 돼.
택 기 고맙다.
수 진 고맙기는... 아무튼 이게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사람들 쌓여있는 액비통을 바라본다.
그 속에서 음흉한 눈길로 보고 있는 홍철.
S#43. 병달집 마당 (낮)
수돗가에서 요강을 씻고 있는 지현.
지 현 (씻으며) 요강에 자물쇠를 달아 놓을 수도 없고... 눈금을 표시해둘 수도 없고... 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거야? 찝찝하지도 않나...? 아무튼 이건 내 전용이야.
보물을 안 듯 끌어안고 들어가는 지현.
S#44. 지현방 안 (낮)
문을 열고 들어오는 지현. 요강을 내려놓으려는데, 새 스텐 요강이 하나 놓여있다.
지 현 어? 이건 뭐지?
수 진 (가방에서 짐 풀며) 제 꺼예요. 제 전용...!
스텐 요강 옆에 나란히 사기 요강을 내려놓는 지현.
수 진 (화장대 앞에 앉으며) 근데 이 화장대 참 잘 만들었죠? 택긴 참 손재주가 좋아. 옛날에 내 책상도 만들어 줬었는데... 유학가면서 버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까운 거 있죠...
지 현 (화장대 앞, 수진 옆에 비집고 앉으며 상냥하게) 뭔가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이건 저 준다고 만든 거래요... (화장대 쓸어본다.)
수 진 (일어나며) 그래요...? 역시 택기는 자상해... (화장품 올려놓으며) 그럼 같이 좀 써도 돼요?
지현도 이에 질세라, 화장대 위에 자기 화장품을 깔아놓는다.
반씩 나눠 각자의 화장품 진열하는 것.
수 진 그런데 택기하고는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아요?
지 현 누가 그래요? 우리가 사이가 안 좋다고?
수 진 아니, 뭐... 제가 여기 와서 둘이 얘기하는 걸 한번도 못 봐서요...
지 현 네...
수 진 하긴 택기가 원래 성격이 무뚝뚝해서... 알고 보면 속은 깊은 남자에요.
지 현 속이요... 깊죠... (속마음 소리) 좁아서 문제지. 그 밴댕이 속알딱지!
수 진 그런데 이 화장품 어디 꺼에요? 첨보는 건데?
지 현 아! 이거요? 이거... 우리애인이 사 준거에요.
수 진 어머, 지현씨 애인 있어요?
지 현 그럼요. (갑자기 뻐기고 싶어지는) 우리애인이 여기 읍내 보건소에 있는 의사거든요. 이것도 피부과 개업한 친구한테 특별히 부탁해서 얻은 거래요. 나 줄라구...!
수 진 (피식 웃으며) 그래요...? 참 자상한가부다...
지 현 그럼요. 얼마나 자상한데요. 참, 사진 보여줄까요? (주변 둘러보며 핸드폰 찾는다.)
수 진 (피식 웃으며) 아니에요.
지 현 얼마나 잘 생겼는데요. (계속 찾으며) 어? 핸드폰이 어디 갔지? 잠깐 일어나 보세요. 어디 갔지...?
S#45. 택기방 (낮)
밖에서 문을 벌컥 여는 지현. 막 옷을 갈아입으려던 택기가 화들짝 놀라 재빨리 옷을 입는다.
지 현 (대뜸) 내 핸드폰 못 봤어요?
택 기 (얼른 돌아서서 옷 입으며) 노크 좀 하고 들어와!
지 현 (잠깐 돌아서서 피하며) 내 핸드폰 못 봤냐고요?
택 기 니 핸드폰을 왜 여 와서 찾아?
지 현 (냉큼 들어와 여기저기 뒤지며) 어디다 숨겨 놓고 장난하는 거 아니죠? 다 찾아봤는데, 없단 말이에요!
택 기 내가 니 핸드폰을 와 숨겨? 전화를 걸어보면 될 꺼 아냐!
자기 핸드폰을 열어 전화번호 찾는 택기. 양심에 털난 여자라는 이름이 보인다.
지 현 (나란히 붙어서서 쳐다보며) 내가 왜 양심에 털난 여자야?
택 기 (통화버튼 누르며) 그럼 아니야?
S#46. 포도밭 중턱 (낮)
‘강간범’ 이란 이름이 뜨며 핸드폰이 울린다. 액비통 옆에 몸을 숨기고 뭔가를 하던 남자 둘이 문득 동작을 멈춘다. 서로를 보는 남자 둘. 홍철과 황동춘의 비서다. 둘 다 양복차림이다.
홍 철 (작은 소리로) 뭐해? 빨리 전화 받어!
비 서 내 전화 아닌데? 니 전환가봐...
홍 철 내 것도 아닌데...?
엉거주춤 앉은뱅이 걸음으로 벨소리를 따라 걸어오는 홍철과 비서. 홍철이 떨어져 있던 지현의 핸드폰을 집어 든다.
홍 철 (흠칫하며) 강간범...? 강간범한테서 온 전환데? 이거 받아야 되나...?
비 서 멍청아! 그냥 내려놓고, 일이나 빨리 끝내!
홍철 전화기 내려놓고 액비통 앞으로 간다. 액비통에 무슨 약을 섞는 두 사람. (염산이나 독약 같은 분위기의 약병)
홍 철 이거 얼마나 넣어야 돼?
비 서 몰라. 아무튼 다 부어. 그래야 나무가 빨리 죽을 거 아냐?
홍 철 (주변 살피며) 이걸 꼭 환한 대낮에 해야 돼?
비 서 오늘 밤에라도 밭에 뿌리면 어떡해? 시간이 없잖아?
홍 철 안되겠다. 난 사람들 눈에 띄면 안되니까, 빨리 하구 와. 먼저 간다.
S#47. 포도밭 가는 길 (낮)
터덜터덜 걸어오는 지현.
지 현 이상하다... 분명히 내가 액비내릴 때까지는 핸드폰을 봤는데? (자기 머리 때리며) 아후 도대체 정신을 어따 두고 다니는 거야?
이때 액비통 옆에 뭔가 움직이는 걸 보고는,
지 현 어? 저기 누구에요? 뭐하는 거예요?
액비통 뒤에 숨어있던 비서가 깜짝 놀라 후다닥 도망친다.
지 현 (쫓아가며) 누구예요? 거기서요!
S#48. 포도밭 (낮)
뚜껑이 열려있는 액비통과 널려있는 빈 염산병들. 택기, 지현, 수진, 병달 등 마을 사람들 모여 보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눈치를 살피는 홍철.
이 장 어떤 놈이 여기서 농간을 부렸구만! 우리 마을에 왜 이런 일이 생겼지?
박영감 그러게나 말이여? 도대체 워떤 똥물에 튀겨 죽일 놈이!!
홍이모 이런 놈은 반드시 잡아다가 씨를 말려야 돼유!!
박영감과 홍이모 사이에서 뜨끔해서 진저리를 치는 홍철.
홍 철 (지현에게) 근데... 누군지 얼굴은 봤어유?
지 현 못 봤어요. 워낙 정신이 없어서... 양복차림이던데...?
병 달 우리 동네에 양복 입은 사람이 있나?
그 순간 다들 홍철을 보면, 홍철이 양복을 입고 있다.
홍 철 아니, 지는 유... 오늘 결혼식이 있어서유... (괜히) 아니, 내가 양복 입은 거 갖구 왜들 이래유! 나는 양복도 못 입어유? 나는 결백해유!
이 장 아니, 누가 뭐래나? 자네 혼자 왜 그래?
홍 철 아니 시방, 지금 절 의심하니까 그러는 거 아녀유?
이 장 누가 자네를 의심했다구 그래?
홍 철 지금 의심했잖아유. 아무튼 워떤 놈인지 내 손에 잡히기만 해봐유. 그냥 요절을 내버릴라니께...!
영 배 작년에 개발한다 어쩐다 하면서부터 마을에 뭔 일이 이렇게 많대요? 겨울엔 포도밭에 불이 나질 않나...
홍 철 (뜨끔해서 슬쩍 뒤로 빠진다.)
병 달 (수진에게) 그나저나... 일을 어쩌지...? 강박사가 애써 만들어 온 기 하나투 몬쓰게 됐네?
수 진 다시 만들어 오면 돼죠... (지현에게) 고마워요.
지 현 제가 뭘요. 전 그냥 핸드폰 찾으러 왔다가...
수 진 그래도, 지현씨가 핸드폰 안 잃어 버렸으면 아주 큰일이 날 뻔 했어요.
지 현 (히죽 웃으며) 제가 원래 핸드폰을 잘 잊어버리거든요. 헤헤...
S#49. 달리는 트럭 안 (낮)
택기와 수진이 타고 있다.
택 기 미안해서 어쩌지? 일이 번거롭게 됐네?
수 진 아니야. 그래도 다행이야. 지현씨가 핸드폰 안 잃어버렸으면, 동네 포도밭들 다 큰일 날 뻔 했어.
택 기 하여튼 그 가시나... 칠칠맞아가지고...
수 진 근데, 지현씨한테 왜 그래?
택 기 내가 뭘...?
수 진 너무 무뚝뚝하게 그러지 마. 서울여자잖아. 같은 말이라도 다정하게 해주면 더 좋잖아.
택 기 내가 그 가시내하고 다정한 말 할 게 뭐 있노?
수 진 왜 그래? 한집 살면서? 내가 한 방 쓰면서 보니까 좀 엉뚱하긴 하지만 솔직하고 귀엽던데...
택 기 귀엽기는? 하여튼 그 가시나. 철딱서니가 없어갖꼬, 누가 데려갈란지, 걱정이다.
수 진 걱정 안 해도 돼. 애인 있다던데?
택 기 애인?
수 진 몰랐어? 의사라고 자랑이 대단하던데?
택 기 (뚱하니 시선 돌릴 뿐)…….
S#50. 달리는 티코 안 (낮)
시골로 내려가고 있는 지현가족들.
지현모 해충이 얼마나 번졌으면 우리보고 내려오라고 했을까요?
지현부 수확량 못 맞추면 숙부님이 포도밭을 안주신대잖아.
지 호 그럼 가서 열심히 농사지어야겠네? 이 몸이 으스러지도록 해야겠다!
이때 갑자기 차가 쿨럭거리며, 본네트에서 연기가 난다.
차 안으로 연기 들어오고, 사람들 놀라면서 기침을 해댄다.
지현부 어? 이거 차가 왜 이러지?
지현모 으악! 차 빨리 세워요!
S#51. 한적한 국도 (낮)
연기 나는 본네트를 열어놓고 서성이는 지현 가족들.
지현모 (지현부에게 투덜대며, 전화 거는) 그러게 내가 진작에 차 좀 바꾸라니까...!
지현부 그래도 차를 10년은 타야지...
지 호 아빠, 이 차 15년째 타는 거야.
지현모 (이때 통화 연결 됐는지) 지현이니? 지현아, 어떡하니? 아빠차가 퍼져서 오도 가도 못하게 생겼다. 여기가 어디냐믄...
S#52. 연구소 앞 (낮)
택기의 트럭에 액비통을 싣고 있는 택기, 수진, 후배1.
후 배1 다행이 여유분이 있어서 잘됐네요. 일단 이걸로 쓰시고, 좀 더 배양을 해놀게요.
택 기 고마워.
후 배1 뭘요. (수진에게) 그럼 전화 주세요.
수 진 그래. 수고 좀 해줘.
수진과 택기가 트럭에 다시 오른다.
S#53. 달리는 경민 차 안 (낮)
경민과 지현이 차를 타고 어딘가로 급히 가고 있다.
지 현 오빠, 미안해서 어떡하지?
경 민 아냐, 괜찮아. 마침 진료도 다 끝났는데 뭐. 이런 기회에 니네 부모님께 자연스럽게 인사도 드리고 좋잖아.
지 현 인사?
이때 멀리 지현부모의 모습이 보인다.
지 현 어? 저기 있다!
S#54. 동 국도변 (낮)
경민의 차가 멈추자 돌아보는 지현 가족들. 차에서 지현이 내리자 반갑게 맞는다.
지 현 (달려오며) 엄마!
지현모 지현아!
이때 차안에서 경민이 내리자, 의아해서 보는 가족들.
지현모 누구니?
지 현 (다가오는 경민에게) 인사해, 오빠. 우리 엄마, 아빠, 내 동생.
가족들 어리둥절 고개 인사하며 보면,
경 민 (인사하며) 안녕하세요. 김경민이라고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오래 기다리셨죠? 진료가 좀 늦게 끝나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지현모 진료?
지현부 아이고, 어디가 많이 아프신 모양인데, 우리 땜에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지 현 아니야, 아빠. 이 오빠 의사야.
일제히 의사? 하며 경민을 보는 가족들.
S#55. 달리는 경민의 차 안 (낮)
흐뭇한 표정으로 뒷자리에 타있는 지현 가족들.
지 호 와! 차 진짜 넓고 좋다! 다리도 쭉 펴지고.
지현모 그러게나 말이다.
괜히 뿌듯한 지현.
지현모 그런데 자네... 아니 닥터 김...! 참, 뭐라고 불러야 되지?
경 민 (부드럽게 미소) 편하신대로 부르세요, 어머니.
지현모 어머니...? 호호호... (표정관리 하느라 벅차고)
지현부 그럼, 우리 지현이하고는 여기 와서 알게 된 거에요?
경 민 말씀 놓으세요, 아버님.
지현부 그래도 어떻게...
경 민 앞으로 자주 뵐 텐데요...
지 현 오빠랑은 대학교 때부터 알고 지냈어, 아빠.
지현부 그래...?
지 호 (불쑥 나서며) 근데, 형! 형 전공은 뭐예요?
경 민 나? 성형외과.
가족들 성형외과...!
지 호 (얼굴 내밀며) 제 얼굴은 어때요? 어딜 손 봐야 돼요?
일제히 고개 돌려 지호를 보는 가족들. 지호의 상태 안 좋은 얼굴이 해맑게 웃고 있다.
S#56. 시골집 앞 (밤)
뒷 트렁크에서 짐가방들 꺼내는 경민.
지현모 어머머... 닥터 김 그냥 둬. (지호에게) 뭐해? 니가 좀 들지 않고?
경 민 아니에요, 그냥 두세요. (지현에게) 이거 어디다 놔?
지 현 이쪽으로... (집으로 들어가면)
S#57. 동 집 마당 (밤)
지현을 따라 가방들 들고 들어와 마루 위에 놓는 경민. 지현부모, 지호도 들어온다. 이때 방안에서 나오는 병달.
병 달 누고? 누가 왔나?
지현모 숙부님! 저희 왔어요!
병 달 니들이 왜 왔나?
지현부 휴가거든요. 여태 지현이만 달랑 맡겨놓고 면목이 없어서요...
병 달 (지현부에게) 내가 니딸 부려 묵나 안 묵나 감시할라고 왔나?
지현부 숙부님도 참. 무슨 말씀을...
병 달 (그제야 경민을 보며) 아니, 그란데 의사선생님 아니신가?
경 민 안녕하세요. 할아버님.
지현모 어머? 숙부님도 닥터 김을 아세요?
병 달 그럼 알다마다. 내 배 아픈 거도 싹 다 고쳐주셨는데... 그란데 의사선생님하고는 우떻게들 같이 왔나.
지현모 (호들갑) 숙부님, 이 의사선생님이 다름 아닌 우리 지현이 애인이래요, 애인! 글쎄 대학생 때부터 사랑한 사이였다네요?
병 달 (의아하고 난감한) 뭐라? 지현이하고 사랑하는 사이?
지 현 (창피해서) 아이, 저기 엄마.
지현모 (표정관리하며) 어...? 그래...
경 민 (인사하며) 그럼,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지현모 아니, 저녁이라도 같이 들고 가지.
경 민 아닙니다. 모처럼 가족끼리 모이셨는데... 다음에 또 뵐게요. (두루두루 인사하고 나간다.)
지 현 그래, 오빠. 나중에 내가 전화할게. (경민을 따라 나간다.)
지현모 (섭섭한 듯 쳐다보며) 오늘 고맙네!
의아해서 눈만 껌뻑이며 보는 병달.
S#58. 동 시골집 앞 (밤)
경민을 따라 나오는 지현.
지 현 오빠, 오늘 정말 고마워.
경 민 고맙긴 뭘... 내가 더 기분 좋은데? 니네 부모님도 다 만나 뵙고?
지현 괜히 기분 좋아 수줍게 웃는데, 그런 지현을 사랑스럽게 보던 경민, 갑자기 지현의 손목을 잡아, 열린 차 트렁크 뒤로 이끌며, 차 뒤에 숨어서 지현을 살짝 안는다.
지 현 오빠, 왜 이래?
경 민 가만 있어봐. (기분 좋게 더 꼭 안는다.)
이때 언제 왔는지, 트럭에서 액비통을 내려 들고 돌아서는 택기와 수진.
수 진 (경민의 차를 보며) 누가 왔네?
그 말에 택기, 차를 돌아보며 걸어가면, 열린 차 트렁크 문에 가려 있던 지현과 경민의 모습이 드러난다. 지현을 안고 이마에 뽀뽀하는 경민이 보인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표정이 굳어지는 택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