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
맨 프롬 어스 Man From Earth 1, 2
어젯밤에 지인과 신앙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영화를 추천받았다. 맨 프롬 어스(Man from Earth)다. 이 영화는 2007년과 2017년에 두 편으로 만들어졌다. 나는 그 두 편을 모두 한자리에서 보았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14,000년을 늙지 않고 생존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을 주인공으로 상정하여 기획되었다. 만년을 넘게 살면서 지구의 빙하기와 문명의 변화를 모조리 경험한 어떤 사람이 있다. 그는 심지어 붓다도 만났으며 그의 가르침을 서양에 전하려고 길을 나섰다가 그리스도로 추종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늙고 죽어갈 때 자신은 늙지 않으므로 10년마다 다른 지역으로 옮기면서 살아간다. 이 허황된 이야기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제법 묵직하다.
이 영화에서 다루는 가장 큰 주제는 종교 문제다. 특히 성경과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성경을 인간의 책으로 여긴다. 영화에서 주인공은 사실 예수였다. 그는 사실 인도에서 석가의 가르침을 서양에 맞게 적용한 것뿐이라고 한다. 그는 죽지 않았으며 후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격화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이 이야기는 기독교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고 마침내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의 이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한 학자는 대중의 비판과 비웃음을 받고 은둔생활을 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 영화는 기독교 신앙을 모독하기 위함이라기보다 종교든 과학이든 자기의 생각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진실을 마주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를 지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난주간의 이튿날 부활절을 앞두고 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바를 믿는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은 다양한 것 같다. 영화의 제작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종교관을 영화를 통해 주장하려는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해석이며 주장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람이 진리를 마주할 때 자신의 신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우리는 현자나 전문가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 고마워한다.
하지만 사람이 말 그대로의 진리를 마주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반응은 자신의 무지와 허위와 악함에 대한 적나라한 깨달음이 아닐까? 그런 상황을 성경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 아닐까?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자신의 죄임됨을 깨닫고 두려워 죽은 사람처럼 엎드러지거나 괴로워한다. 이것이 진리를 마주한 사람들의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진리를 만난 것은 아니다. 친한 친구와 담소를 나누면서 그런 두려움에 빠지지는 않는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성경이 증언한다. 바울 사도가 선교를 위해 방문한 도시마다 배척과 비방을 당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을 볼 때 진리를 말하고 진리를 가르치는 사람이 대중에게 받는 대접은 환호와 갈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구도자들은 진리를 말하는 이를 진심으로 존경하며 모든 것을 바치면서 따른다. 진리를 말하는 이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사실 진리를 마주할 용기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사람은 누구나 신을 진심으로 믿으려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그 말씀의 진실성을 믿는 것이다. 그렇게 확실한 진리이기에 자신의 삶을 드려 그것을 따르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만약에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면 그는 분노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신앙을 부인하라는 압력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처음에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사실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확신한다.
그런데 신앙인이 구도자로서 성숙하면서 신앙의 가치와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지성의 성숙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다. 아이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실재라고 인식한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느낀다. 그래서 ‘까꿍!’ 놀이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그렇게 끌어당기는가 보다. 그러나 아이가 자라면서 이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점차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아도 엄마가 나를 데리러 올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을 어렵게 배우는 아이도 있다.
나의 신앙생활을 돌아볼 때 몇번의 위기가 있었다. 맨처음에 당한 위기는 성경 다니엘서의 기록연대에 대한 설명을 처음 읽었을 때였다. 나는 그 때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브리태니커백과사전을 읽으면서 입학시험을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위의 책은 다니엘서가 다니엘의 시대(주전 6세기)가 아닌 주전 168년경에 기록된 묵시문학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그 내용을 읽고 큰 충격에 빠졌다.
그해 여름 나는 내 인생의 미래를 목회자로 바치기 위해 신학의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성경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면 거짓 이야기를 위해 이런 결단을 해야 하는가 하는 염려가 마음에 일어났다. 그러다가 여름 수련회에 참석하여 주님 앞에 회개를 했다. 그 때 눈물을 흘리며 부른 노래가 이것이다:
두 손 들고 찬양합니다.
다시 오실 왕 여호와께
오직 주만이 나를 다스리네
나 주님만을 섬기리
헛된 마음 버리고
성령이여 내 영혼 충만하게 하소서
주님 앞에 내 생명 드리리라
이 찬양대로 나는 헛된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고백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만든 백과사전을 믿을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너무 자명한 것 같았다. 그후 나는 신학교에 들어가 졸업할 때까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문서설을 대항하는 태도로 공부를 했다. 그렇게 신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나는 창조과학회의 주장을 부지런히 공부하면서 신앙을 과학으로 변증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것은 잘 되지 않았다! 과학적 증거가 신앙을 갖도록 이끌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이후 나는 조금씩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 중에 하나는 Who Wrote the Bible? (Richard Elliott Friedman, 1987)이었다. 그 책은 문서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의 지성도 조금씩 성장해서 성경의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그 핵심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정말 여러 사람이 여러 주장을 펼치면서 성경을 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진리가 과연 있기나 한 건지 혼란스럽기도 했다.
성경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된 것은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부터다. 성경과 과학은 둘 중에 하나만 맞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둘 모두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이야기임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그렇게 성경을 보면서 나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사실로 믿어야 좋은 신앙이라는 생각을 벗어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정신과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즈음에 읽은 책은 ‘예수와 다윈의 동행(신재식, 2013)’이다. 나는 서울에서 열린 저자와의 대화 시간에 참여하여 그의 설명을 들었다.
그 후에 나는 더욱 성경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고 싶었다. 말하자면 성경의 핵심 가르침을 알고 싶었다. 교리에 답안지처럼 정리된 대답이 아닌 깨우침을 주는 그런 가르침을 찾고 싶었다. 인생과 세상을 좀 더 이해하고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깨우침을 원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종교를 가지고 있었으나 깊은 갈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은 니고데모처럼, 사마리아의 수가성에서 대낮에 우물에 온 여인처럼 나는 그렇게 삶의 갈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갈망이 성경을 가르쳐줄 수 있는 스승들을 찾게 했다. 그렇게 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쳐준 김세윤 교수의 글을 읽었고, 성경에 대한 판타지를 자극하여 준 프랭크 바이올라의 책, 영원에서 지상으로(From Eternity to Here: Rediscovering the Ageless Purpose of God, 2011)도 읽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나는 톰 라이트를 책으로 만났으며 성경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는 즐거움을 맛보기 시작했다.
톰 라이트의 글을 읽으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가 휴거를 부인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휴거 본문에 대한 그의 설명을 읽으면서 나는 조금씩 그의 주장에 설득되었다. 특히 하늘에 대한 그의 설명은 참 좋았다. 하늘과 땅은 쌍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주권영역이다. 그렇게 볼 때 지상과 천상의 이원론은 극복될 수 있다. 휴거에 대한 톰 라이트의 생각을 주변의 목회자들과 나누었을 때 나는 거의 이단아처럼 취급을 받았다.
1992년 서울 중랑구 금란교회에서 열린 종교재판에서 변선환 교수가 파면된 것은 종교다원적인 사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한국교회의 입장을 가장 잘 보여준다. 나는 그를 선각자라로 생각한다. 나는 비교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글을 읽으면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더 잘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스 큉의 글을 읽으면서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각 종교가 본질에 충실하면 서로를 배척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물론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깨어지는 불안한 상황을 겪지 않고 이 모든 배움이 수월하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맨 프롬 어스(Man from Earth), 이 영화는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얼마나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그것이 인생으로 하여금 세상을 더 풍성하고 더 아름답게 하는 길로 안내할 수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목적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질문과 토론과 의심 없는 맹목적인 신앙이 얼마나 허약하고 위험한지는 제대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결코 과거의 나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돌아갈 수도 없다. 인생은 나이가 들면서 배우고 깨닫는 범위와 깊이가 더해간다. 그것은 진리를 찾고 거기에 나를 바치고자 하는 구도자의 삶에 따라오는 결실이다. 누구도 그런 구도의 길을 쉽게 걸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길을 외면하면 자신은 동굴에 갇히고 세상은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다. 사람이 함께 사는 까닭은 서로에게 도움을 주어 우리 모두가 함께 진리 안에서 성장하기 위함일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보다 덩치는 작아도 지혜의 길을 찾았기에 생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지혜는 우리를 공존과 공영의 길로 안내한다.
<끝>.
참고:
우리 시대의 종교재판(변선환 교수에 대한 글)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456
부활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까닭
https://cafe.daum.net/Wellspring/VYWs/27
십자가, 무엇을 위한 죽음인가?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4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