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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월10일(주일 낮 예배)♣
성경:시편37:1-11(구828P)
제목:의인과 악인의 결말
1.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2.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3.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1)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땅에 거하여 정녕히 먹으리로다
4.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7.2)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잠잠히 참아
8.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9.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10.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
11.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서론
새해란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모두에게 주신 위대한 선물입니다. 이 시간을 지혜롭게 사용하면 놀라운 성공과 행복 및 보람을 얻게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낭패와 실망과 불행을 초래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해를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한 해를 시작해야 합니다.
우선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첫째로 어제를 잊으라(Forget yesterday)는 것입니다.
지난해의 성공도 실패도 다 잊어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거기에 집착하다 보면 그것이 앞으로 전진하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내일을 믿으라(Trust tomorrow)는 것입니다.
사실 기대하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한 해를 시작하면서 이 기대감이 없다면 더 힘들어지지 않겠습니까? 건강한 사람은 언제나 미래 지향적입니다. 그리고 항상 긍정적인 자세를 취합니다.
다시 말하면 "작년에는 그랬어도 금년에는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복된 일이 생길 거야! 반드시 더 잘될 거야!"라고 하면서 새해를 향한 기대를 걸고 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로는 하루, 하루에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라(Living today)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일년을 계획하고 그 성공과 실패는 봄에 무엇을 생각하고 계획하느냐에 달렸다고 말했습니다.
봄은 입춘을 말하고 음력으로 입춘은 음력 설날과 2-3일 사이에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훈은 설날에 무슨 생각과 무슨 계획을 하느냐가 그 해의 성패와 직결된다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도 "시작이 좋으면 모두 좋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마치 첫 단추를 잘 끼우면 밑에 있는 단추들이 잘 끼워지는 원리와 똑같습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올 한해를 보람되게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나간 과거의 잘한 것과 실패한 것들을 다 잊어버리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시면서, 주어진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금년에 성도님들께서는 이렇게 한번 살아 보시기를 바랍니다.
논지:다윗은 악을 행하는 자들의 불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뢰하라고 권면합니다.
1.증상:(TS):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1절)
본문 1절에"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하십니다.
여기 "행악자"는 누구입니까? 우리를 괴롭히고 억울하게 만들고 손해를 끼치고 고통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불의를 행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잘 되는 것 같고, 오히려 바로 인생을 살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을지라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본 시편은 다윗이 그의 노년에 쓴 시편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한평생 산전수전을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기쁜일도 맛보았습니다.때로는 쫓겨다니는 억울한 일도 경험했으며, 악인이 형통함도 보았고, 의인이 고난 당하는 현실을 목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종들이 말을 타고 방백들아 걸어다니는 모습도 보았으며
불의한 자가 득세하는 광경도 보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본문에서는 그의 아름다운 신앙을 돋보이게 하는 장면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CS):오늘 우리는 ?
불의를 행하고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잘되면 불평하고 원망할 때가 많았음을 솔직히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말씀대로 살지 않고 불신앙으로 사는 성도인데 하는 일이 잘되고 자녀들도 잘되면 원망도 하고 불평도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더 어렵고 힘들고 고통을 당하는데 불순종으로 사는 성도가 오히려 잘되고 축복을 받으면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신가? 의심까지 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편의 다윗은 그런 일들을 수없이 겪었기 때문에 불평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떻게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왜 불평하지 말아야 하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2.진단:왜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까?
(1).표면적 이유(TDS):
1). 끝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는 잠시는 성공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 그 인생은 실패하기 때문입니다(2절, 38절).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시37:2). "범죄자들은 함께 멸망하리니 악인의 미래는 끊어질 것이나(시37:38)"
미국의 마피아 두목들을 보면 인생을 평탄하게 마친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전성기에는 돈을 흥청망청 쓰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패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권세를 휘두르지만 감옥살이를 하다가 죽던지 감옥에서 맞아 죽던지 감옥에서 풀려 나와도 가난하고 비참하게 인생을 끝냅니다.
한국에서도 조직 범죄 두목을 했던지 술집이나 사창가를 운영했던 사람들이 아름답게 인생을 마감하는 적이 거의 없습니다. 악하게 성공한 사람이 오래 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러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시1:6)는 말씀을 결코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2). 남에게 행한 대로 당하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를 부러워해서는 안 되는 두 번째 이유는 남에게 악하게 하면 남에게 악하게 한 그대로 당한다는 것입니다(14, 15절).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얻뜨러뜨리
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시37:14)" "그들의 칼은 오히려 그들의 양심을 찌르고 그들의 활은 부러지리로다"(시37:15).
하나님이 자연을 지으실 때에 자연 법칙을 만드셨듯이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으로 이루어진 사회를 만드시면서 한 가지 법칙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인과응보의 법칙입니다.
영화는 허구이기는 하지만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서부 영화에 등장하는 총잡이를 보면 그렇습니다.
소문난 총잡이가 되기 위하여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쏴 죽였을 것입니다. 결국 총잡이로 유명해지면 이에 도전하는 다른 총잡이에 의해서 죽게 됩니다.
군사 정권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사람은 결국 쿠데타에 의하여 무너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52).
성경에도 인과응보를 철저히 체험한 사람이 나옵니다. 야곱입니다. 야곱의 주특기는 속이는 것입니다. 형에게 트릭을 써서 장자권을 포기하도록 했습니다. 임종 자리에 아버지를 속여서 형에게 갈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다가 외삼촌 밑에서 일할 때에 외삼촌에게 속아서 자기가 원하는 둘째 딸 대신에 큰딸과 결혼을 하게 되고 둘 째 딸을 얻기 위하여 7년을 무보수로 일을 해주어야했습니다. 연로한 후에는 다른 아들들에게 속아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에게 물려가서 죽은 것으로 알고 수십 년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연을 만들고 자연의 법칙을 주시듯이 인간을 만드시고도 인간 법칙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인과응보의 법칙이고 남에게 한 대로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자를 부러워하고 모방해서 안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젊은 부부들에게 말합니다. 양가 부모님에게 잘 해드리십시오. 여러분들이 부모에게 하듯이 자녀들이 여러분들에게 그대로 할 것입니다. 인과응보의 법칙을 무시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시편118:7"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3). 삶의 흔적이 남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본받지 말아야할 이유는 악한 사람의 삶은 기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한 사람의 인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20, 35, 36절).
"악인들은 멸망하고 여호와의 원수들은 어린 양의 기름 같이 타서 연기가 되어 없어지리로다"(시37:20).
"내가 악인의 큰 세력을 본즉 그 본래의 땅에 서 있는 나무 잎이 무성함과 같으나/ 내가 지나갈 때에 그는 없어졌나니 내가 찾아도 발견하지 못하였도다"(시37:35-36).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 중의 하나가 자신의 존재가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시하는 사람에게 화를 냅니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인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또 아첨하는 사람에게는 끌립니다.
아첨꾼은 달콤한 말과 행동으로 자기 가치를 인정 해주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아합왕은 어용 선지자400명을 두고 그들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양 받았습니다. 그들은 아첨하며 거짓을 말하니까 왕은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미가야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왕에게 전하니 왕이 듣기에 달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가야 선지자를 미워하고 핍박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첨의 말과 행동으로 여러분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가치는 자신의 삶이 흔적을 남겼느냐 안 남겼느냐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악한 삶을 산 사람은 이러한 면에서 실패하고 맙니다.
역사를 보면 우리가 이름을 암기하는 사람은 보통 의롭고 선하고 원칙대로 산 사람들입니다.
당시에 더 잘 사는 사람들이 있었고 더 큰 권력을 쥔 사람들이 있었겠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되지 않습니다.
집안에서 어른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어떤 가정에서는 자녀들이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의 말을 하면서 그를 기립니다. 흔적이 남는 삶을 사신 분들이십니다. 그러나 가정에서는 부모나 조부님의 이름이 거론되면 화제를 바꾸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흔적을 남기지 못한 삶을 사신 분들입니다.
사람이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는 자신의 장례식에서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장례식 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죽은 것을 슬퍼하고 애도하는 사람은 흔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장례식이 끝나면 즉시 잊혀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흔적이 없는 삶을 산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에 많은 사람이 기뻐합니다. 악한 흔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흔적을 남겨야지 흔적이 없거나 악한 상처를 남기면 되지 않겠습니다.
4). 심판이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이름이 남든지 안 남든지 상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실 사람이 극악해지면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인생을 재미있게 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살아있는 짧은 인생동안에 이웃을 이용하든지 파괴하든지 상관없이 최대의 쾌락을 맛보며 사는것을 목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생이 이 세상의 삶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는 것은 한번 정해진 것이고 그 후에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히 9:27). 그래서 다윗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의인을 핍박하는 악인들을 비웃으신다고 하였습니다(12, 13절).
"악인이 의인 치기를 꾀하고 그를 향하여 그의 이를 가는도다/그러나 주께서 그를 비웃으시리니 그의 날이 다가옴을 보심이로다"(시37:12-13)
CDS:우리들 이야기
악인들에 대해 이렇게 분명하게 하나님께 말씀하시는데도 악인들을 부러워하고 악인들이 잘되는 것을 탐내지 않았습니까?
악인의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셨다면 말씀대로 악인을 부러워하거나 불평하거나 시기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악인을 불평하고 부러워하하지 말아야 하는 표면적 이유도 있습니다만 더 깊은 내면의 이유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2).이면적 이유(TDI):악인의 부요에 동요하지않고 여호와의 성실
로 식물을 삼으며 인생을 여호와께 의지하면 하나님 앞에서 빛나는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3-6절).
3"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1)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땅에 거하여 정녕히 먹으리로다
4.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3).
곧, 성도가 하나님을 의뢰하면, 날마다 하나님의 성실된 보상을 체험하게 되나니, 그는 그것으로써 만족하기를, 기름진 식물로써 하는 것보다 더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한역과는 다른 번역들도 있습니다.
곧, (1)"진리로 네 양식을 삼으라"는 것, (2)"불법하게 탈취한 것으로 살지 말고, 진실히 얻은 것으로 살라"는 것, (3)"견고히 누리라"는 것등입니다.
시인은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이 선악을 분변해서 그것을 행하겠다는 인간의 결심이 아니라,여호와를 의지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선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어도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지 못하면 실패하기 쉽습니다.
식물(먹을거리)은 무엇인가 하면 매일 먹고, 때마다 먹는 것을 말합니다.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먹는 것이 식물입니다.
이처럼 성실이라는 것은 한 번만 행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늘 꾸준히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실을 체질화하라"는 것은 몸에 배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불성실할 때가 많습니다. 더욱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세상 사람들은 간사스럽고 음흉하고 엉큼합니다.
성경 (시62:4)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위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셀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입으로는 복 많이 받으라고 악수를 하면서도 속에는 미움과 저주가 가득 차 있습니다. 또 (시55:21) "그의 입은 우유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그의 마음은 전쟁이요 그의 말은 기름보다 유하나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입으로 말하는 것은 얼마나 구수하고 달콤하고 매력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 속은 늘 전쟁이요 뽑힌 칼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실하다는 것은 마음과 말이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실입니다.
예화)
옛날 어떤 임금님이 그 나라의 소년, 소녀들을 불러 모아 놓고 "사랑하는 소년 소녀들이여, 이제 봄철이 되었으니 너희들의 화분에 꽃씨를 심겠구나. 내가 가장 좋은 꽃씨를 준비하였으니 이 꽃씨를 받아서 화분에 심도록 해라. 가장 아름다운 꽃이 피게 한 사람에게는 내가 후하게 상을 주리라.
지금부터 2개월 후 ○월 ○일 ○ ○시에 꽃이 핀 화분을 갖고 오너라"라고 공포를 하면서 꽃씨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어린 소년, 소녀들은 가서 그 꽃씨를 정성껏 심고 잘 가꾸었습니다. 드디어 그날 그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두가 화분을 가져왔는데 한결같이 다 울긋불긋하게 꽃이 핀 향기로운 화분을 가져왔습니다. 임금님이 쭉 둘러 보았습니다. 그러나 임금님은 기뻐하는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맨 끝에 선 한 소년은 화분만 가지고 왔습니다. 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너는 어찌해서 빈 화분만 들고 왔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소년이 말하기를 "임금님! 임금님이 주신 꽃씨를 가져다가 정성껏 심고 물을 주고 가꾸었는데 싹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화분을 그대로 가져 왔습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제서야 임금님의 얼굴은 화색이 돌면서 기뻐했습니다. 결국 꽃은 가져오지 않고 빈 화분만 가져온 한 소년에게 후한 상을 주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임금님이 준 꽃씨는 모두 인조 꽃씨였습니다. 생명이 없는 꽃씨였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꽃이 필 턱이 있습니까? 다른 소년 소녀들은 임금님이 준 꽃씨가 아닌 다른 꽃씨에서 생겨난 꽃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들은 정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임금님이 화분만 가져온 성실한 소년을 크게 칭찬하고 상을 후하게 주었듯이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한 사람을 찾으시고 성실한 사람을 믿으시고 성실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풍성하게 주시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성실한 사람은 미련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융통성이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주 꽉 막힌 사람 같고 답답하게도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언제나 신임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시 누리는 세상의 낙보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우리의 앞길을 여호와께 맡기면 의와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실 것입니다(6).
CDI:우리들 이야기
성도 여러분! 악인은 악인의 길을 가다가 망할 것인데 그것을 보고 질투하고 불평하느라 정작 우리가 살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놓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성실로 식물을 삼으시기를 바랍니다.아무리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여러분의 의와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실 것입니다.
3.처방:
(1).표면적 처방(TPS):
악한 자의 형통 때문에 불평하는 삶 대신에 여호와 앞에 잠잠히 기다리는 태도로 살아야 합니다(7)
7절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뢰를 잃고 인간적인 생각으로 조급해하거나 자기 나름의 방법을 강구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궁극적인 보응을 믿는 가운데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 맡김으로 심령의 평안을 누리는 것, 즉 믿음의 인내를 의미합니다.
성도는 자기가 무엇을 하겠다는 조급함과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고 참아 기다려야 합니다.
다윗은 이렇게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는 자를 ‘온유한 자’라고 하며, 그러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시 37:11).
하나님께 궁극적인 보응을 맡기고 악인들의 핍박과 그로 인한 고난을 참으며 인내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의 길을 형통하게 해주시고, 최후의 승리자가 되게 해주십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 중에 하나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조급해하거나 자기 나름대로의 방법을 강구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내하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들이 있을지라도 소망 중에 참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합니다. 인내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형통하게 해주실 줄 믿습니다.
성경은 기다리기 위한 조건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잠잠하고" 그랬습니다.
말을 많이 하고, 불평하고, 조잘거리는 것은 기다리는 자의 자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잠잠하지 못했습니다. 말을 많이 했습니다. 불평을 많이 했습니다. 조잘거림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아닙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참아" 그랬습니다.
인내는 기다림의 뿌리입니다. 기다림의 자세입니다. 조급해 하고, 다투고, 대항하는 것은 하나님의 싫어하시는 모습입니다.
로마서 8:25에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참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참아야 기다려집니다.
렌트(Lent, 사순절)란 '느리다'의 뜻입니다. 사순절은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다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립니다. 대강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다림의 계절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회복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그 자체가 은혜입니다.
사도행전 1:4에는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게 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그들에게 육적인 만족을 주지 못하시고 승천하셨기에 얼마든지 실망감에서 떠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계실 때도 어려움이 많았었는데 이제부터 있을 본격적인 핍박으로 예루살렘을 떠나고 흩어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기다림은 성령강림의 조건입니다. 성령은 기다림의 선물입니다. 예루살렘을 성령강림의 장소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기다림은 어두움 속에서 진행됩니다. 그러나 기다려야 씨가 터집니다. 싹이 납니다. 열매가 맺힙니다. 나무로 집을 짓는데 6개월이면 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무 한 그루를 키우시는데 100년은 걸립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리심이 없다면 우리의 구원도 없습니다. 한 사람이 100일 걸려서 집을 지을 수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고 100사람이 하루에 다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인내(Patiece)와 열정(passion)이라는 두 단어는 라틴어의 한 단어인 '파시오'(pasio)에서 파생되었습니다.
파시오란 말의 뜻은 '견디다'는 뜻입니다. 인내는 견디는 것입니다. 열정도 사실은 견디는 것입니다. 견디는 것이 없으면 열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예화)
기다림에는 소망이 있습니다. "혹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못보셨나요? 분명히 엊저녁에 그 극장에서 잃어버린 것 같아요"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는 한 여인의 다급한 목소리로 극장 지배인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아니요. 아직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찾아보겠습니다. 잠깐만 전화를 끊지 말고 기다려 주세요" 지배인은 목걸이를 찾기 위해 극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지배인이 돌아와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기뻐하십시오 부인, 찾았습니다" 그러나 전화기에는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부인을 불러봤지만 이미 전화를 끊은 후였습니다.
아무리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그 여인을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여인 같습니다. 내가 해야 할 말은 실컷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는 데 실패합니다. 조급해서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준비하셔서 주시려고 부르면 응답이 없습니다.
조급함이 무응답입니다. 기다림은 응답입니다. 기다림은 적극적인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인내는 넋 놓고 기다리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므로 비상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셋째, 기다리면 길이 형동하게 됩니다.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악한 꾀를 이루는 자 때문에 기다리지 못합니다. 악한 꾀를 이루는 자는 기다리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런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악한 꾀를 이루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새치기하고, 끼어들기하고, 먼저 가려고 갓길로 가고, 중앙선 침범합니다. 이런 자들은 악한 꾀를 이루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고가 날 것입니다. 다치고 죽을 것입니다. 교통경찰에 잡혀 딱지를 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그 기다림은 지금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그 자체가 의미 있는 일입니다. 기다림은 준비입니다. 기다림 그 자체가 의미입니다. 기다림은 시간 허비가 아닙니다.
다윗은 시편 40:1에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잠깐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오래 기다렸습니다. 오래 기다린 결과 하나님은 다윗의 말을 들으셨습니다. 다윗은 기다림을 배웠습니다. 기다렸더니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신 것입니다.
식물학자의 말을 빌리면 식물은 밤, 어둠 속에서 가장 왕성하게 성장한다고 합니다. 식물이 성장에 필요한 영양소를 만들어내는 시간은 낮이지만, 줄기가 자라고 잎이 넓어지며 봉오리가 벌어지는 실제적인 세포증식을 위해서는 어둠, 곧 밤의 정적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인생도 어둠이 필요합니다. 밤이 필요합니다. 정적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다리는 것이 성숙하게 자라는 방법입니다. 마이크 머독은 '예수의 리더십 57가지 비밀'에서 "뛰어난 협상가들은 기다림이 무기라고 가르친다"고 하였습니다. 기다림은 무기입니다. 기다림은 형통입니다.
CPS:우리들 이야기:
성도 여러분!기다림은 신앙입니다. 기다림은 성숙입니다. 기다림은 인격입니다.
노아는 120년 동안을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노아가 기다릴 수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뜻도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다림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는데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기다려야 하나님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괴테는 "서두르지 않는다. 그러나 쉬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잘 기다립시다. 그렇다고 쉬지도 맙시다. 기다리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리는 것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주님께 맡기는 삶입니다. 기다림의 훈련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2).이면적 처방(TPI);온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11)
11절에"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온유함"이란, 이 '프라우어테이스'라고 하는 말은 결코 나약함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비겁함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강한 위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장 강한 군인은 싸움 없는 군인이요. 가장 큰 힘은 평화가 있는 힘입니다.
여러분! 가장 큰 승리는 원수가 찾아와서 화해를 청하는 그러한 힘이 그것이 가장 큰 승리입니다.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일만명을 상대로 해서 아주 면밀하게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통계에 의하면 성공의 비결이 뭐냐? 성공의 결정적 원인이 뭐냐하는 질문에 자본과 기술과 두뇌, 이것은 15%밖에 안됩니다. 성공의 결정적 요인은 화평과 온유한 성품이라고 했습니다.
온유한 성품, 이것이 성공 비결임을 여러분 알아야 합니다. 기술로 이기는 게 아닙니다. 성품이요 온유가 성품화 된 그 인격이
모든 면에 성공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왕권을 말합니다. 왕의 권세를 뜻합니다. 옛날에는 왕이 지방 영주에게 왕권을 주었어요. 온유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왕권을 주신다 그런 말씀입니다.
온유란, 자기 자신을 이기는 힘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내가 나를 이긴 사람이 온유합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이겼을 때 여유 있습니다. 온유합니다. 자기 자신을 이겼을 때, 자기자신과의 싸움에 실패한 자는 항상 불안에 떨고 목소리만 커집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넉넉하게 이긴 사람은 온유하고 여유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니라. 악한 사람 잘된다고 원망할 것 없습니다. 불의한 자가 잘 산다고 거기에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벌써 자기 마음을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멀리 내다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말합니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채소같이 마를 것임이로다. 잠시 후에 그곳을 살필지라도 없을 것입니다.
벌써 내다보고 있습니다. 현재에 매이지 않고 멀리 내다보고 있어서 그로서 자기 마음을 잘 다스렸습니다. 벌써 저만큼 내다보며 그는 불평도 원망도 없습니다. 여기 온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온유' 하게 되면 꼭 생각해야 될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모세입니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모세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모든 사람보다 모세는 특별히 온유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모세는 온유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는 데로 화가 났을 때에 아무리 애국심이라고는 하지만 자기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고는 하지마는 애굽사람을 때려죽인 사람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는 비겁하게 도망을 해서 광야에 나가서 40년을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온유합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비석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한다고 해서 그냥 내려 쳐 가지고 깨뜨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 민수기 20장에 보면은 반석을 꽝꽝! 두 번 내리치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혈기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사람보다 제일 온유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평가가 그렇습니다. 그것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 길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방법도 목적도 특별히 결과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운명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그리고 조용히 주의 뜻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다 맡기고 평안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평안한 바로 그 마음이 그게 온유함입니다.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내가 붙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지 못하고 내가 할 수 있을 것처럼 착각을, 그게 교만입니다.
다 맡기고 손을 드세요. 그것이 온유함입니다. 거기에 평안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의의 최종 승리를 확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그의 의를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 주시리라고 하십니다.
지금 땅에 묻혔습니다. 내가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요. 사람들은 몰라줘요. 그러나 네 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그 언젠가는 정오의 빛같이 나타내줄 것입니다. 그것을 믿기 때문에 오늘 여유가 있고 온유하여지는 것입니다.
CPI: 우리들 이야기:
성도 여러분! 온유는 그 자체가 축복입니다. 온유한 성품, 참 하나님이 주시는 소중한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러해야 될 줄 알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사탄은 계속 우리를 교만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은 우리를 온유하게 만듭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들어봅시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 온유, 절제.
"온유와 절제", 이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이 사람을 온유하게 만듭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온유한 자를 찾으십니다. 온유한 자에게 권세를 주십니다. 그에게 화평과 즐거움을 주십니다.온유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인의 형통을 보고 질투하고 화를 내며 불평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본성일 것입니다.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의 시각으로 인생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과 악인의 결말이 어덯게 나타나는지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그래서 우리의 삶을 불평하고 투기하는 데 낭비할 것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여호와를 기대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2010년 새해에 시편 37편 본문의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시고 축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