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부분 홍수 5장-8장에 이어서)
노아의 언약 - 창세기 9-11장
1. 하나님의 노아와의 언약(9:1-17)
언약이란 단어는 “자르는 것“의 뜻이다. 왜냐하면 서약의 행위는 곧 제물을 자르는 일로써 성립되어지기 때문이다(창 15:9- 이하). 노아를 통하여 하나님은 모든 인류에게 약속을 세우시는데, 그 말들은 오늘날에도 유명하다.
언약의 근거는 희생제물의 흘린 피에 두었으며(8:20-22) 이는 새로운 언약이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에 근거하는 것과 같다.
언약의 내용은
1)하나님은 홍수로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을 것.
2)인간은 동물의 고기를 먹어도 좋으나, 피는 먹지 말 것(레 17:10- 이하 참조).
3)인간과 짐승들 사이에 두려움과 공포가 있을 것과,
4)주요한 형벌의 원리로서의 인간의 정부(롬13:1-5 참조)를 보여 준다.
언약에 대한 맹세로서 하나님은 무지개를 세우셨다. 이 말은 무지개가 그 때 처음 나타났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세우실 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다는 뜻이다. 무지개는 햇빛과 큰 비로 말미암아 생기며 그 색채는 “하나님의 각양(여러 색) 은혜“(벧전 4:10)를 생각나게 한다. 무지개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다리가 되며,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갈라 놓은 깊은 구멍에 다리를 놓은 것을 상기시킨다. 무지개는 에스겔 1장 28절과 요한계시록 4장 3절에 다시 나온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언약이 노아 후에 오는 노아의 “씨“와 맺어진 것이며, 오늘날 우리도 포함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중한 형벌(9:5-6)을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인을 보복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지만(4:15), 이제는 살인자를 벌할 책임을 인간에게 주신다."
창 9:18-29
2. 가나안에 대한 노아의 저주(9:18-29)
죄-
600살이 넘은 단련된 성도가 이 죄와 수치에 빠졌다. 그는 젊은 탕아가 아니었다. 히브리 말로는 노아가 고의적으로 옷을 벗어 부끄러운 행동을 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무절제함과 불순전함은 언제나 함께 다닌다. 홍수 이후로지상에 생긴 새로운 대기(大氣)의 상태가 포도주를 발효시킨 것이며 노아는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을 몰랐다고 그를 변호해 주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들의 죄에 변명을 대는 일을 허락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 편에서의 세번째 실패이다. 인간은 에덴에서 불순종하여 추방당했고, 온 땅을 부패시켜 홍수가 임하게 했으며, 이제는 부끄러운 술주정꾼이 되었다. 이는 6장 5절과 8장 21절의 성취가 아니겠는가! 설상가상으로 함(Ham)은 자기 아버지를 존중하지 못하고 도리어 노아가 한 일을 “즐겁게 떠벌였다.“
저주-
노아는 함이 한 일을 알고 그 유명한 저주를 발하였다(이는 창세기에 나오는 세번째 저주이다- 3:14-17/4:11). 그가 함의 막내 아들 가나안(10:6)을 저주한 사실로 보아 이 죄에 아버지와 함께 이 소년이 관련되었음과, 아버지의 죄를 아들에게 씌우심을 알 수 있다. 가나안과 그의 자손들은 그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어야 했다. 10장 15-20절에는 이 민족의 이름들이 열거되어 있다. 그들이 결국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노예가 되었음은 뻔한 일이다. 말할 나위도 없이. 셈족은 유대인들이며, 그 종족이 10장 21-32절에 열거되어 있고, 11장 10-26절에서는 아브라함에게까지 그 혈통을 이어간다. 야벳의 후손들은 이방인들이다(10:1-5). 창세기 15장 13-21절과 10장 15-20절을 연관시켜 읽어보자.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어떻게 여러 종족의 구분이 이루어졌는지를 보이려는 것이 아니고 사도행전 17:26이 가르치듯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한 혈통“으로 지으셨음을 말하고 있다.
축복-
노아는 유대인(셈)들을 축복하고 가나안인들을 종으로 준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야벳)에게 널리 퍼지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그러나(영적으로 말하면) 저들은 유대인의 장막에 거하게 될 것이다. 바울은 로마서 9-11장에서 이를 설명한다."
창 11:1-9
3. 하나님께 대항하는 니므롯의 동맹(11:1-9)
독재자(10:6-14)-
니므롯은 구스의 아들이며 함의 손자로서, 그의 이름의 뜻은 “반역“이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굉장한 폭군이요, 최초의 독재자였다. “사냥꾼“이란 말은 동물을 사냥한다기보다는 인간을 사냥한다는 뜻이다. 그는 바벨론 제국의 창시자이며 바벨탑의 건설을 주도했던 계획의 창안자였다. 역사는 니므롯과 그의 아내가 “어머니와 아이“로 둘러싸인 새로운 종교를 창설했음을 알려 준다. 상세한 내용은 히스롭(Hislop)이 지은 “두 바벨탑“이란 책에 나온다. 성경에서의 “바벨론“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과 종교적 혼란을 상징한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항하며 요한계시록 17-18장에 나오는 “큰 바벨론“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음을 본다.반역-
하나님은 땅에 충만하라고 명령하셨다(9:1/9:7/9:9). 그런데 인간은 바벨론 지역인 시날 평지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다(10:8-10).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의적인 반역이었다. 그들은 “동방으로“ 이동하였는데 이는 저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등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들은 연합하여 도시와 탑을 건설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께 반대하여 연합을 계속 유지해 가는 것이요, 자신들의 이름을 내는 것이었다. 이 모든 움직임은 계시록 17-18장에 나오는 바벨론을 중심한 인간(그리고 사탄)의 그리스도께 대한 최종적 반항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세계 교회와 세계 조직을 통해 연합되어 적그리스도에게, 곧 최후의 세상 독재자에게 이끌려 가지만, 저들의 계획은 좌절될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가 “하나의 세계“란 개념으로 급진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U. N.이나 세계 교회 연합(W. C. C.)등의 활동 덕택이다.
심판-
하나님은 그들이 반역을 계획함을 알고 그들을 심판하셨다. 하나님은 또다른 회의를 열어(1:26/3:22) 일군들의 언어를 혼란시켜 그들이 함께 일할 수 없도록 만들 것을 결정하신다. 이것은 심판인 동시에 사실상 자비의 행위이었다. 만일 그 계획을 계속 진행시켰다면 보다 무서운 심판이 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벨“이란 이름은 히브리어의 “바랄“이란 단어에서 유래되었는데 “섞다 또는 혼란시킨다“는 뜻이다. 아람어로는 바벨이 “혼란“을 의미한다. 이 장면은 인류의 여러 언어의 기원을 설명한다. 오순절은 바벨 사건을 역전(逆轉)시킨 것이라고 흔히들 지적한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진정한 영적 연합이 있었으며, 다른 말을 사용했으나 이해했고, 그 일로 인하여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영화롭게 했다."
창 11:10-32
4.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심(11:10-32)
10장 21-32절에는 셈의 가계(家系)가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가 이 계보를 뽑은 것은 아브라함이 그 계획에 어떻게 적중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목적에서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에게까지 계보를 끌어 간다(11:26). 우리는 여기서 또하나의 신적 선택에 대한 증거를 보게 된다. 하나님은 그의 은혜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다. 함과 야벳을 우회하여 셈을 택하시고, 셈의 다섯 아들들 중에서는 아르박삿(11:10)을 택하셨으며, 데라와 세 아들들 중에서는(11:26) 아브라함을 택하셨다. 이것이 히브리 민족의 시작이 된다. 이 명단에서 “에벨“이란 이름에 유의하자(10:21/11:14).
창세기 12장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을 떠나“라고 이미 말씀하셨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11장 31-32절의 기록을 보면 아브라함이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아버지를 뒤에 두고 떠나는 대신 그와 더불어 함께 갔으며, 그 순례가 하란에서 지체되었는데, 데라는 거기서 죽었다. 우리의 반(半)순종이 시간과 보화로 댓가를 치루게 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보냈어야 할 시간을 잃었으며 아버지도 잃었다. 이 여행의 다음 단계에서 아브라함은 롯을 함께 데리고 갔으나, 그도 버리고 갔어야 했다(13:5-14).
히브리서 11장 8-19절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요약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어디로(where)가야 하는 것인지 모를 때 믿었고(11:8), 어떻게(how)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를 때에 믿었으며(11:11), 왜(why) 그래야 하는지 모를 때 믿었다(11:17-19)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시 강조하지 않으면 안될 일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택한 것이 그의 업적(공로)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었다. 그는 우상의 도시, 갈대아 우르의 시민이었고 하나님이 자신을 그에게 계시하시지 않았더라면 불신자로 죽었을 것이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자녀들이 없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에 이르러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었고 세상에 큰 축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