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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37 -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들로 내전을 수습한 콘스탄티우스 2세!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 14권 “그리스도의 승리” 편에서 시대의 전환기에 살게된
사람들에게도 선택의 자유는 있으니 “흐름을 탈것이냐, 흐름을 거스릴 것이냐,
흐름에서 발을 뺄 것이냐“ 라고 했는데..... 오늘날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272년 모이시아에서 콘스탄티우스와 선술집 딸 헬레나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후 부친 콘스탄티우스는 292년 서방 부제로 출세하니 남자가 귀하게 되면 그리하듯 헬레나와
이혼하고 서방정제 막시미아누스 황제 딸 플라비아 테오도라와 정략결혼하면서 모자는 내쫓습니다.
그후 콘스탄티누스 대제 또한 서방 부제로 출세하자 아버지처럼 조강지처로 아들까지 낳은
서민 미네르비나를 버리고 전 황제 막시미아누스의 딸로 이모인 플라비아
파우스타와 결혼해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스 세명 아들과 딸을 낳습니다.
니케아 공의회 직후인 326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큰아들이자 내전 승리의 일등공신인
크리스푸스를 계모인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후처 파우스타와의 불륜 관계 라는 누명을
씌워 고문하고는 처형했으며 파우스타 역시 뜨거운 욕탕에서 죽이는데.... 인조가
소현세자와 며느리에 친손자와 사돈을 죽인 것과 같으니 일종의 "권력투쟁" 인 듯 합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고 후처에게서 난 친아들 셋이 나란히 공동 황제가 되어 극진한 영화를
누리는데..... 그 셋 중에 아무도 친어머니인 파우스타의 명예 회복과 기록말살형을 취소하지
않았으니,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피를 이어받은 탓인지 참 "냉혈한들" 이라 아니할수 없습니다.
337년 5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으면서 세 자식과 조카 둘에게 통치하게 했으니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히스파니아, 브리타니아이고 콘스탄티우스는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이며
콘스탄스는 이탈리아, 판노니아, 북아프리카 그리고 조카 달마티우스는 다키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이고 한니발리아누스는 북부 메소포타미아와 아르메니아 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2세가 주도해서 사촌 2명에 삼촌들까지 모두 죽여 버렸는데.... 황족들만
죽인게 아니고 대제의 측권으로 근위군단 장관으로 있으면서 총리였던 아블라비우스
와 그 수하들도 모두 살해됐지만 조카중에 12살 갈루스와 6샇 율리아누스는 살려두었습니다.
학살을 지시한 콘스탄티누스 2세는 시치미 떼고는 자기는 궁궐에 있지않았으며 관련이
없다고 거짓 성명을 발표했으니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이라고 불리며
그후 2명 조카들의 담당 구역은 콘스탄티우스 2세와 막내 콘스탄스가 나누어 차지합니다.
‘후회 인간’ 의 전형으로 뒤늦게 불만을 품은 콘스탄티누스 2세가 콘스탄스에게 북아프리카
를 요구했지만 콘스탄스는 무시했고....... 340년에 콘스탄티누스 2세는
콘스탄스가 미리 다키아에 있는 허점을 노려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로 쳐들어 갑니다.
북이탈리아를 횡단해 판노니아오 가는 도중에 콘스탄스군이 가로 막았고
아퀼레이아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해 살해되니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 브리타니아 모두 다 콘스탄스의 영역이 됩니다.
저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 2세 휘하 장병들이 겁을 집어먹고 전장을 이탈해 도주하는 바람에 어이없이 사로
잡혔고 살해도니후 주검은 강물에 버려졌으며 시신을 찾지 못한지라 무덤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세례를
받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기독교회도 모른체 했는데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죽은지 불과 3년후입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리우스파였던 반면 콘스탄스는 아타나시우스파에 기울어져 있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는 서로마 제국 콘스탄스에게 압도되었으니 아타나시우스파를
탄압하자 콘스탄스가 대군을 이끌고 "항의" 하러 왔을 때는철회해야만 했으며, 전력을
기울여 제국 방어에 전념하는 중에 콘스탄스가 350년에 휘하 장수 마그넨티우스에게 살해됩니다.
장남이 살해된후 3분지 1을 차지한 둘째 콘스탄티우스 2세는 대국 페르시아를 방어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머지 3분지 2를 차지한 콘스탄스도 질리지도 않고 라인강을 넘어
침공해 들어오는 게르만족을 방어하느라 여념이 없는 가운데 훌쩍 10년이 지났습니다.
콘스탄스는 저 게르만족과 10년을 싸우느라 서로마의 내정은 “남” 이라는 환관에게 맡겨
놓았는데 “남” 은 황궁에 거미줄처럼 환관 네트워크를 만들고는 세금을 착복하니
황제의 용병으로 복무하던 외로운 늑대들인 게르만 장군들은 제대로 보상 받지
못한데 불만을 품고 대표격인 마그넨티우스가 동료 용병들을 포섭해 황제를 죽인 것입니다.
게르만족 용병인 자기가 황제에 오른다면 지지받기 어려운지라 로마인 마르켈리누스를 바지 사장
으로 내세우기로 했는데, 선비족 나라 북연(후연)에서 한족(漢族) 풍발이 황제 모용희를 죽인후
그전에 전연이 고구려수도 국내성을 함락하고 5만명을 끌고 왔었는데 그 후손인 고운이 전임 황제
모용보의 양자가 되어 있었던지라 모용씨이니 왕으로 세웠다가 안정되니 죽인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째 이런 횡재가? 동생에게 눌린채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전쟁중이던 콘스탄티우스 2세는 서둘러
강화를 맺고 반란 진압에 나서니... 마그넨티우스가 반란을 일으킬 당시
도나우강 중류를 담당하던 사령관 베트라니오도 황제를 칭해 서로마에는 황제가 둘이나 양립했습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베트라니오에 대해 항복을 권유하여 휘하 병사들을 흡수했고 베트라니오
에 대해서도 관대한 처우를 했지만, 마그넨티우스에 대해서는 3년간
내전을 벌여 마그넨티우스 휘하 병사들 2/3 이상이 죽고 마그넨티우스는 자결하게 됩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명민하고 성실한 행정가이자 황제였지만 본인의 역량, 안정성
에 해가 갈 만큼 결함이 분명했으니.....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의
기록에 묘사되듯 매우 음험하고 의심이 많은데다가 음모 꾸미는데 달인이었습니다.
로마 제국 황제들에게 생존을 위협하는 최대 경쟁자는 황위 찬탈을 시도하는 반란자들이지 외부
이민족들이 아니었지만, 유능한 장군들과 억울한 희생자가 한둘도 아니고 연좌제로
잠재적 정적, 반란자와 가족, 부하, 노예들까지 제거한 경우는 콘스탄티우스 2세 뿐입니다.
장교들과 관료들은 승진을 위해 상급자를 밀고하는 것이 횡행했으며, '해몽 백작' 이라는 별칭의 밀고자는
사람들의 꿈 이야기를 황위에 대한 야망으로 교묘하게 왜곡하는 재주가 있어 지인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으며 신하 '쇠사슬 파울루스' 는 무고한 사람들에게 날조한 증거를 들이대며 옥죄기로 유명했습니다.
동서고금의 군주중 음험하고 의심많은 이들이 그렇듯,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의심과 주관적 예측만으로
직방계 혈육들을 옥죄였으니 과도한 친족 숙청으로 제위 승계 인재풀을 줄였고, 살아남은
친족들도 통제하면서 의심하고 처벌했으니 그가 급사했을때 마땅한 제위계승자들은 거진 사라졌습니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왕조는 단명하니, 1세기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게르마니쿠스,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브리타니쿠스
라는 제대로 된 정통성 있는 후계자들이 요절하고, 간신 세야누스의 궁중 음모와
네로와 세네카의 숙청계획과 의도적인 경쟁자 제거로 사라지면서 단명하게 된 이유와 비슷합니다.
로마 제국은 혼자 다스리기에는 광범위하였고, 한-위진 제국 혹은 훗날의 동로마 제국과는 달리 행정
체계도 발달하지 못해 한계가 명확했으니 콘스탄티우스 2세는 제대로 된 협력자는 필수였고,
대상자가 친족이면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안정성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후광 아래 견고했던 것입니다.
비극은 남자 황족이 그가 숙청한 숙부의 아들들인 갈루스와 율리아누스였으니 의심많고 예민한
콘스탄티우스 2세가 이들을 감시하고 의심했으니, 부황인 대제의 혈육이라는
정통성을 앞세울 대타도 콘스탄티우스의 견제와 의심으로 언제 죽을지 몰랐던 상황이었습니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그는 매우 영리하고 네로 처럼 즉흥적이지 않았던 부분일 것이니
따라서 네로 처럼 세네카, 부루스, 티겔리누스 같은 권신이나
간신에게 휘둘리지 않았던 황제였고 이 점은 제국에게 마냥 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게르만 대부족의 족장들은 자신들을 쳐죽이는 전사 황제 콘스탄티누스 2세에 경외심을 갖고 있었고
콘스탄티누스도 게르만족에게 두려움을 가진 적이 없었지만, 콘스탄티우스는
아버지와 달리 군재는 없었고 전투도 부하들에게 맡겼기에 아버지만한 카리스마는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는 음모의 대가였기에 배신과 술수라면 도가 튼 게르만족 족장들이 그를
당해내지 못했으니, 게르만족이 거짓 항복후 협상장을 기습해 콘스탄티우스를
비롯한 로마 고위층들을 다 죽여버리기로 했는데, 협상장에서 도륙을 당한
쪽은 게르만족 족장들이었으니 게르만족들은 콘스탄티우스의 로마군에 꼼짝없이 당합니다.
하지만 그의 의심증으로 황실 존속에 필수인 정제- 부제 협력체제가 잘 굴러갈수 없었고 마지못해
갈루스를 부제로 삼았지만 기어오른다는 핑계로 숙청했는데, 그럼에도 콘스탄티우스 2세는
명민하고 정치, 행정적 감각이 평균 이상이라 협력자가 필요했다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혈육인 갈루스의 동생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삼아야 했는데, 아무리
율리아누스가 순종적이고 딴마음을 품지 않는다고 해도, 협력자에 후계자이며
부제인 율리아누스와 그 휘하 관료, 장군들이 콘스탄티우스 2세를 경계한 원인이 됐습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율리아누스의 급성장에 위험을 느낀 나머지 페르시아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율리아누스
의 정예병 절반을 압수하려고 했는데, 서방 출신자가 많아 고향과 지나치게 먼 동쪽 끝
페르시아 전선으로 가는 것을 싫어했던 율리아누스의 군사들은 반발했고 결국 제국은 내전상황이 됩니다.
아버지 콘스탄티누스는 음모와는 거리가 먼 맹장이었고 성격도 화끈하고 잔인했으며, 할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는 온화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는데 이런 조상들에게서 궁중
음모에 닳고닳은 페르시아 왕중왕 샤푸르 2세와 역시 음모 꾸미고 배신하는데 도가
튼 게르만 대부족 족장들 뒤통수를 친 음모의 달인 콘스탄티우스 2세가 나온건 미스테리입니다.
야전군 관리와 군인들 생활에도 관심이 많았고, 확실히 장악하는 법도 잘 알았으니 황궁의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던 동생 콘스탄스 와는 달리 국경지대 순행에 열의를
쏟았으니 야전군을 확고하게 장악하게 됐고, 재위 기간 내내 본인의
성격적 결함으로 반란이 터지는 가운데에서도 로마군의 신망을 크게 잃지는 않았습니다.
사촌 율리아누스의 반란은 진압하지 못하고 병에 걸려 죽었지만, 콘스탄티우스가 장악력을 높여놓은 동방의
로마군은 배신하진 않았는데, 중병에 걸려 쓰러진 상황에서 억지를 부려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해 포기하고 율리아누스를 공식적으로 후계자로 인정했으니 자존심을 굽히는 융통성이 발휘된 것입니다.
콘스탄티우스의 꼼꼼한 성격과 야전군 장악은 대 페르시아 전선에서 빛을 발하였으니 일리리쿰 속주와 아카이아
와 마케도니아 속주까지 모두 서로마에 넘겨준 상태의 동방 제국을 가지고 무시무시한 상승세를 타던 사산
왕조에 한치도 밀리지 않는 대등한 승부를 벌인 것은 콘스탄티우스 2세의 조직력과 행정적인 수완 덕택이었습니다.
아미다를 잃은 것이 집중적으로 부각되는데, 콘스탄티우스 2세가 다스렸던 동방 제국은 역대 동서
로마 분할통치기 제국들 중 최약체였음을 생각하면, 전성기에 있었고
또 역대 가장 뛰어난 장군 황제를 보유했던 사산 왕조와 샤푸르 2세는 세월만 보낸 것입니다.
콘스탄티우스는 야만족에 대한 군사 원정도 감행했으니, 제국을 약탈하던 알레만니족에 대해 353년 부터
354년 까지 원정을 벌여 토벌했으며, 357년에는 모에시아 인페리오르 속주를 침입한 콰디족과
사르마티아족을 몰아내고 다뉴브강을 도하해 콰디족, 사르마티아족에 대한 반격작전을 성공시킵니다.
군제 개혁도 업적이니 갈수록 강해지는 사산 왕조를 상대하고, 중앙군을 강화하려면 황제
직속의 야전군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제1프레센탈군과 제2프레센탈군으로 증설
개편하였고, 그저 말 탄 보병에 불과했던 제국 기병들이 말타고 싸우는 기병이 되기
시작한게 그의 치세이며 기병을 대폭 늘린 조치는 이후 400년 넘게 기본 틀을 유지합니다.
기독교는 선친인 콘스탄티누스 1세때 부터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가 험악하게 대립했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서 나중에는 같은 아리우스파끼리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하는 등(아타나시우스파도 마찬가지) 지역의 기독교 세력끼리 사분오열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도 기독교인으로 아리우스파에 가까웠지만 종교 성향이 그리 강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로마 유일의 황제가 된후
분열되어 있던 기독교 세력을 통합하기 위해 재임기간 여러번 공회의를 개최했습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의 기독교 통합 노력은 정치적 안정을 얻기위함이라 교리에 대해서는
유연성이 있었으니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1세와 같았는데, 공의회를 개최해
주교들간의 대화 기회를 늘렸으며, 아리우스주의와 아타나시우스주의에서 극단적인
주장을 배제하고 온건한 주장들을 모아 양측이 받아들일수 있는 신경(creed) 을 작성했습니다.
시도는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으나 문제는 알렉산드리아에 버티고 있던 아타나시오스
주교였으니 그는 아리우스파와 어떠한 타협도 거부했으며, 황제의 통합 의지에
배치되는 것이었으니 결국 콘스탄티우스 2세는 355년 그를 반역 혐의로 체포하려 했습니다.
아타나시오스는 지지자들로 부터 체포 계획을 미리 전해듣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도망쳐
이집트 의 사막지대 여기저기를 옮겨다니며 도피생활을 하였고,
콘스탄티우스 2세의 감시망을 피해 이집트를 중심으로 자신의 지지세력을 공고히 했습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아타나시오스를 일시적으로나마 축출한후, 직권을 발동해 시르미움 공의회
(Sirmium Council) 에서 선친 시절에 채택된 니케아 신경을 아리우스파의 주장이
많이 반영된 새로운 신경으로 대체하도록 강행했지만 아타나시오스파의 반발을 불러일으킵니다.
아리우스파 강경파들은 성부와 성자 예수와의 관계를 규정하는 부분이 너무 모호하다고 반발했으니
결국 콘스탄티우스 2세 사후 신경은 유야무야되어 버렸으며, 알렉산드리아로
복귀한 아타나시오스와 지지세력에 의해 니케아 신경이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교리로 다시 부활합니다.
한편 콘스탄티우스 2세는 기독교 선교에도 열의를 보였는데, 고트족 선교로 유명한
울필라스 (Ulfilas) 가 콘스탄티우스 2세 시대에 활약했던
선교사니 덕분에 다수의 게르만 부족이 아리우스파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사촌 갈루스를 처형한 다음 355년에는 갈루스의 동생인 율리아누스를 부제로
임명하여 갈리아를 담당하게 했는데, 이후 악조건에서도 율리아누스가
활약하는 동안 도나우강 일대와 동방을 담당하면서 정제로서 통치했습니다.
359년, 사산 왕조의 재침공으로 동방 방위선에 있던 아미다가 점령당하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반격 채비를 했고, 부제 율리아누스의 주력 부대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는데, 전력을 보강받기 위함도 있었지만 율리아누스의 병력을 줄이기 위함도 있었습니다.
반발한 부제의 병사들이 율리아누스를 정제로 옹립해 다시 내전이 시작되었고 율리아누스 측이 먼저 움직여
도나우 방위선 병력까지 접수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쳐들어오던 와중에 중병이 들었고 황제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니 세례를 받은후 쳐들어오는 율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임명한 다음 44세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세베루스 황제 이후 로마 영토로 확립되었던 니시비스는 율리아누스의 원정 실패로 사산 왕조에
넘어간 후론 영영 로마 품안으로 들어오지 못했고 반면 아미다는 훗날 페르시아에게서
빼앗아오며, 아랍에 빼앗긴 후에도 9~ 10세기 반격기에 수복해 바실리오스 2세 치하까지 유지합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로마시 원로원에 있었던 승리의 제단 (Altar of Victory) 을 폐쇄
했는데 율리아누스가 다시 살렸다가, 그라티아누스가 다시 없앴고
다시 살리려는 로마 고위층의 청원이 있었지만 그후 황제들에게 모두 거부당했습니다.
콘스탄티우스 시기 이탈리아는 기독교가 공인되기는 했지만 국교는 아니었던지라 로마의 전통
다신교가 여전히 강세였는데, 자신은 기독교도이면서도 다신교를 적극적으로 탄압하거나
적대하지는 않았으니 그가 적극적으로 탄압한건 다신교가 아니라 유대교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