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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둘레길 길동무 원문보기 글쓴이: 수명산
한남정맥 종주 3구간 - 계양산ㆍ철마산
일 자 : 2002년 4월 3일
구 간 : 방아재고개 ~ 계양산 ~ 철마산 ~경인고속도로
도상거리 : 15.7km, 산행시간 : 6시간 20분
인천은 삼국시대부터 물로 둘러싸인 성이란 뜻의 '미추홀' 로 불리며 도시의 역사를 쌓았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경원군․인주․경원부로,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는 인천군으로 지명되던 인천은 정부수립 후인 1949년 인구 26만5천명의 시로 새롭게 탄생했다.
1950년 한국동란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호국의 선봉에 섰었고, 1974년에는 동양 최대의 갑문식 도크를 완공, 국제적인 항구도시로 발돋움했던 인천, 1981년 직할시 승격에 이어 1995년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강화군 ․ 옹진군 ․ 검단면을 통합해 명실상부한 광역시로 그 위상을 새롭게 정립했다. 21세기 동북아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국내 최초의 개항도시 인천...
인천이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초기 태종 13년(1413)이다. 태조원년(1392)에 인주로 환원되고 태종 13년(1413)에 이르러 모든 군이나 현에 '州'자로 바꾸는 바람에 인주가 물에 가깝다하여 '인천'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천의 명칭은 한자 풀이식의 '어진내(仁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인주 이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08시 40분 서해안 일대가 넓은 개펄로 되어 있어 개흙의 검다의 의미와 서해안 개펄이 석양에 붉게 노을이지면 홍학의 날개와도 같다 하여 단>자를 써서 검단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지는 인천광역시 서구 검단동에 위치한 346번 지방도가 지나는 방아재고개에서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만나는 검단2동 동사무소 2.8km라는 표지판...
정맥길은 고도가 50여m의 밋밋한 능선길, 5분 가량 메마른 숲을 통과하다 만나는 파헤쳐진 정맥능선, 공장지대 그리고 도로를 걷다가 고려하이테크 간판이 부착되어 있는 철망문을 들어선다.
참나무숲 사이로 교통호를 따라 한차례 가파르게 올라선 곳에서 천주교공원묘지가 보이는 헬기장에 오르고 오른쪽으로 비포장길 위로 조금은 남아있는 정맥의 마루금을 밟으며 내려선 곳엔 또 다시 공장들이 자리 잡고 있다. 청솔종합목재를 돌아 약수동 마을회관을 통과하며 가파른 오르막길 좌우론 진달래가 정맥꾼들을 위로라도 하듯 웃고 있다.
산불감시초소와 군에서 설치한 삼각점이 있는 능선분기점인 104.9봉에 오르고 남동으로 이어지는 정맥은 십자로 안부에 내려섰다가 송전탑을 통과하며 고도가 50여m의 완만한 능선길, 4차선도로에 내려서서 질주하는 차량을 피해 도로를 가로지르고 백석동 한들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잡목 숲을 헤친다.
예전부터 백석동을 한둘이라 하는데 코끼리 모양을 한 마을 뒷산인 상산이 흰돌이 많아 생긴 이름으로 흰돌이 변해 한둘이라 불렀으며 또한 큰 들을 뜻한다는 한들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한둘 동쪽 산밑을 둥근 달이 너무나 크게 보인다고 해서 큰 달을 뜻하는 거월이라 부르게 되었다나...
98번 지방도가 지나는 백석공원묘지 입구에 내려선다. 꽃집들이 즐비하다. 가까운 곳에 가족묘지가 있어 매년 지나치던 곳이지만 이곳이 우리의 산줄기 한남정맥이 지난다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횡단보도를 건너 마을길을 따르다가 만나는 이승길목사 묘소 1km를 가리키는 입간판, 능선길에 들어서니 완만한 오름길에 잣나무 조립지, 이어지는 참나무와 소나무가 어우러진 평탄한 능선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아름다움에 취한 산새들이 사랑싸움을 벌이고 있다. 정맥길에서 만나는 훈련에 소집된 예비군들...
잠시 좌측으로 자리잡고 있는 독재이 마을을 소개해 볼까... 독재이 마을은 독정의 변음으로 광산 김씨 중에서 감사를 지낸 분이 ‘독정’이란 정자를 세웠으므로 생긴 마을 이름으로 광산 김씨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이곳에 가장 큰산인 한뫼산, 둥근 모양을 한 등글재산, 소가 우는 것 같다는 와우산, 그 생김새가 코씨리 같다는 산산, 흰돌이 많아 백석산 등의 얕은 산무리를 이루고 있다고 한다. 독재이 뒷산인 와우산에 옛날 도당굿을 했다는 도당재고개, 종알대며 넘어갔다는 종알고개와 옛날 바다에서 벤댕이가 올라왔다는 벤댕이골, 골짜기가 모가 나 있다는 각골이란 골짜기가 있다는데...
군부대 철조망을 따라 군부대 정문이 나있는 진입로를 가로지르고 10여분 가량 철조망을 따라 두 개의 초소를 통과하며 이어나간다. 우측으로 공동묘지라 길은 넓게 나있고, 철조망과 헤어지는 고도가 100m 정도 되는 밋밋한 봉우리에서 남동으로 방향을 바꾸는 정맥길...
능선길은 완만하게 오르내림이 이어지면서 길을 막는 가시철조망, 송전탑을 통과하고 십자로 안부를 가로지른다. 우측의 시천동은 계양산 북릉 성황댕이를 경계로 시냇물이 시작된 곳이라서 생긴 이름이다. 원래 깊숙한 골짜기 벌판이었는데, 봇둑을 쌓아 만드니 갯골이 시내가 되어 냇물이 비로소 시작된 곳이라서 시시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 이전에는 한강 서쪽의 요충지였다고 한다. 시시내의 앞산인 꽃뫼는 꽃과 같이 아름다워 생긴 이름으로 이 산 깊숙한 곳에 고려 때 대성황을 이룬 구슬원이란 여촌각이 있었다고 한다.
구술원은 일반 민간인의 여객촌으로 동쪽으로 오류원, 제2한강교의 양화원, 남쪽으로 대야원, 시흥의 관음원, 서쪽으로 인천 미라원, 제물원, 북쪽으로 김포 광인원, 온산원, 갑곶 통진원, 하성 조강원, 봉성산에 연결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는 주막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몇 집만 남아 살고 있는 옛날 도자기를 굽던 마을이었던 점말, 그리고 지금 확인할 수은 없지만 시천동과 둑실동 사이에 줄기가 다섯 갈래로 갈라져 다섯 마리의 용이 모였다고 하여 부쳐진 오룡산이 있다. 능선분기점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며 밋밋한 봉에 오르니 시야에 더욱 가까워진 계양산과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신공항고속도로, 그리고 경인운하 공사현장이 정맥꾼들의 입을 벌리게 한다.
2차선 도로에 내려선다. 경인운하 건설현장 너머로 보이는 신공항고속도로와 정맥꾼들이 통과하여야 할 지하하수구를 확인한다. 포장도로를 걷다보니 둑실동 마을이 나타난다. 온갖 간판으로 도배를 한 둑실마을...
둑실동은 선조 29년(1596) 부평도호부사 심신겸이 퇴임 후, 원래 청백한 분이라 가진 재산도 없어 이곳 황무지에 낙향하여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개간을 하는데, 의로서 합동 단결하자는 깃발을 만들어 꽂고 농경에 힘써, 마을 이름도 그 뜻을 담아 둑실이라 했다고 전한다. 지금도 심부사의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봉우리가 다섯 개인 오봉산 물줄기는 마을 앞뜰 바래벌을 이룬단다.
경인운하 공사진입로를 따라 내려선다. 수많은 장비가 동원되어 발파하기 위해 천공작업을 한다. 발파암을 덤프에 실어주는 굴삭기, 바쁘게 오가는 덤프트럭들, 위험한 공사장을 가로지른다. 정맥꾼들의 통행을 금지시키지 않아 다행이다. 시대의 흐름 앞에 두동강이 나버리는 한남정맥의 운명 누가 이것을 막는단 말인가...
넓게 나있는 공사도로에 올라선다. 신공항고속도로를 통과하기 위해 왼쪽으로 약 100m 정도 거리에 있는 지하수로로 접근한다. 그리고 어두워 더듬거려야 하는 지하수로 커다란 사각의 맨홀을 빠져나와 다시 능선에 붙는다.
정맥에는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작전중인 병사들, 우리의 산줄기를 찾아간다고 거듭 설명하며 통과한다. 한차례 가파르게 올라선 봉이 시설물이 있는 130봉이다. 더욱 가깝게 다가온 계양산이 너무나 가파르게 시야에 다가온다. 미리 충전하기 위해 둘러앉는다. 20여분에 걸친 중식시간...
능선분기점인 130봉에서 내려서면서 훈련장이 있는 군부대 철조망, 초병으로부터 능선 진행을 저지 받는다. 특히 이등병 앞에는 꼼짝 못하는 정맥꾼들, 사격훈련으로 영향을 받는 세 개의 정맥의 봉우리는 우회길을 따라야하는 아쉬움...
150m 안부를 통과하면서 다시 철조망을 따라 한차례 올라선 200봉, 잠시 내려선 송전탑이 서있는 안부에서 한없이 이어지는 힘겨운 가파른 오름길이다. 뒤돌아보는 빼앗긴 정맥능선, 바위들의 호위를 받으며 17분 정도의 인생길 같은 오르막과의 전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힘차게 오른다.
거대한 통신탑이 서있는 계양산(△394.9m) 정상이다. 휘둘러보는 조망 정말 멋지다. 동서남북 막힘이 없는 조망, 먼저 수명산을 확인해 본다. 옅은 구름에 쌓인 수명산, 많은 등산객들이 둘러앉아 조망을 즐기고 있다.
왜군과 명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고성이 자리잡고 있는 계양산은 옛 이름이 안나산인데, 어음이 변하여 아남산 이라 부르고 있다. 부평고을이 1018년에 수주로 되어 황어향 선곶에 수주읍이 있을 때, 이 계양산은 수주악, 이 수주가 1150년에 안남도호부로 개칭되니 이 수주악을 안남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후 1215년에 안남도호부가 계양도호부로 개칭되면서부터 계양산이라 부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양산은 기서지방의 주산으로 문학산, 청량산과 더불어 인천의 삼대 명산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한때 임꺽정이 계양산 기슭과 인근의 장명이 고개를 소굴로 삼았다고 하는 설화도 전해지는 곳, 계양산성은 주봉의 동쪽에 있는 봉우리를 에워싸는 형상으로 축조되어있다.
이곳은 한강의 서해로 흘러드는 길목으로 삼국시대 때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끊임없이 벌여졌던 곳이다. 계양산성은 이때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이후에 완전히 폐성으로 남았으며 일제는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계양산성 안에 공동묘지를 조성했는데 현재도 산성 안의 완만한 구릉지는 대부분의 공동묘지로 사용되고 있다.
둘레 약1,180m의 성벽은 현재 대부분 허물어져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구간은 거의 없을 정도며, 정자가 세워져 있는 아래 부분 등 일부구간에서만 옛 성터의 자취를 찾아 볼 수 있을 뿐이다.
정상 바로 아래 설치된 음수대에서 물 한 모금으로 새 힘을 얻고 내려온 능선분기점 헬기장에서 지나온 능선과 앞으로 이어질 능선을 확인하며 남서방향으로 가파르게 떨어지는 너덜길은 아름다운 진달래 꽃길이다. 장명이고개로 오르는 8차선의 도로 위로 그림처럼 자동차들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20여분만에 내려선 장명이고개가 내려다보이는 절개지 앞에 선다. 장명이고개는 계양산 서쪽을 관통한 서곶에서 부평으로 넘나들던 고개로 옛날 중국으로 통하는 큰길이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삼남 지방에서 개성으로 통하는 길이기도 하다. 징맹이고개 라고 부르는 이 고개를 중심으로 동서(한남정맥)의 능선을 따라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중심성을 쌓았는데, 지금은 완전히 없어지고 성문 공해루가 있던 초석만 남아있다고 한다.
징맹이 고개란 말은 매를 징말한다는 징매에서 나왔는데 고려 중엽에 매를 길들여 꿩, 비둘기 등을 잡는 매사냥이 성행해 나라에서는 도성 안에 매방을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매 때문에 주민의 피해가 커지자 충렬왕은 이를 경명현으로 옮기면서 징맹이고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징맹이고개 서쪽 50m 지점인 공촌동에는 고려 때 나라에서 세웠던 국영 매방자리가 있다. 고려 충렬왕은 매사냥을 즐겨 송도에 있던 매방을 이곳으로 이전하고 자주 이곳을 찾아오게 되고, 그래서 계양 도호부를 길주목이란 목사 고을로 승격시켰다고 한다.
조금 먼 거리지만 횡단보도를 이용한다. 다시 능선에 붙으면서 철조망을 통과하며 이어지는 오름길 좌우로 진달래 꽃길이다. 중키의 소나무 숲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정맥의 화사한 봄날의 진달래 꽃길, 군데군데 정맥의 꽃들도 꽃망울을 터들이고 있다.
서구의 넓은 뜰이 내려다보이는 봉에 섰다가 철망문을 통과하며 커다란 돌탑이 쌓여있는 270봉에 오른다. 쉼터가 있는 능선분기점인 봉에서 내려다보니 계양산과 시가지가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
헬기장을 통과하고 하산길이 넓어 보이는 십자로안부를 가로지른다. 곳곳에 서있는 군 경고판과 사격장을 알리는 붉은 깃발, 다시 만나는 헬기장에서 잠시 쉬며 발아래 펼쳐지는 서구의 빌딩숲이 내려다보인다. 심곡동은 깊은 곳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이 마을이 탁운봉 바로 밑 깊숙한 골짜기에 있어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바다건너 인천국제공항이 들어서 있는 영종도도 가깝게 다가온다. 쪽빛 바다와 어깨를 나란히 한 인천국제공항은 인종을 초월한 5대양 6대주의 사람들과 푸른들, 바다가 맑은 하늘아래 어우러진 그린 에어포트라고 자랑한다. 주변에 멋진 레저단지와 곳곳에 공원, 세계 최고의 드라이브코스로 자리할 해당화 40리 길이 다듬어졌다고 한다.
잠시 머무는 환승객을 위해 다양한 테마관광코스가 만들어지고, 인천국제공항은 비즈니스와 레저가 조화를 이룬, 지구 위에서 가장 편리하고 아름다운 공항으로서 이제 세계로 가는 모든 길이 열린다나...
확 트인 조망길은 한차례 긴 오르막 끝에 올라선 210봉에서 만나는 월미도, 어릴 적 늘 주위에서 같이하던 월미도라 더욱 정겹다. 이어 오른봉이(14:23) 철마산(△226.5m)이다.
철마산은 이곳에 하늘에서 내려온 천마의 말발굽 자리가 있다는 마제석이란 바위가 있어 마제봉이라 부르며 신성시하고 있다. 이 곳 서쪽 기슭 골짜기에서 용마가 났다고 하며, 이 근처 일대에 있는 바위에는 꼭 말발굽처럼 움푹 패인 자국이 많이 있다고 한다. 현재는 군사적 요충지로, 마제봉 골짜기를 용이 난 곳이라 하여 용난골이라 부르며 지금은 복개되었지만 이 철마산에서 시작하여 서해로 흐르는 하천을 가정천이라 한다.
철마산을 뒤로 이어지는 정맥길은 경인고속도로와 하나아파트 단지를 확인하고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며 뚝 떨어지다가 내려선 곳이 6번 국도가 지나는 아나지고개다.
아나지고개는 동쪽으로 천마산 골짜기 물이 급류로 원적산 불쪽 기슭을 차고 지소를 이루어 청천내를 이룩하여 마장뜰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흘러가고, 이 지소에 기러기 떼가 많이 앉으니 기러기가 내려온 못이라 안하지라 불렸다나....
규장각에서 보존된 부평부 지도에는, 이곳 고개가 구십현으로 되어있다고 한다. 이는 이태조가 새 도읍지를 물색할 때 골짜기가 백개라야 하는데, 이 안하지 골짜기가 구십번째가 되므로 구십현이라 불렀다고 한다.
한때 포리의 전조창의 세미를 서울 경창으로 운반할 때, 이 안하지고개를 통과하였는데, 이 고개에 주막이 있어 주모의 이름이 안아지여서 이 주모 이름을 따서 안아지라 불렀다고도 전해지고, 김안노가 경인운하를 개굴할 때, 원통현에서 실패하고 이 고개를 뚫으려고 고개 밑에 연못을 만들어 안하지라 한데서 안하지가 되었다고도 전하고 있다. 다음구간 들머리인 서달산길에서 걸음을 멈춘다.
첫댓글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계양산
저는 아직도 미답지랍니다
갈 곳은 많고 여건은 안 되고 ~~~
덕분에 젛은 정보와 함께 구경 잘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