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도 파노라마 정상 조망이 최고였던 양구 봉화산
1. 일자: 2020. 11. 21 (토)
2. 산: 봉화산
3. 행로와 시간
[심포리(09:17) ~ 등산로 입구(09:38) ~ 심포리 삼거리(10:48) ~ 정상(11:34~12:25) ~ 삼거리(14:20) ~ 국토정중앙(14:38~15:00) ~ 주차장(15:10) / 9.03km]
< 봉화산 산행을 준비하며 >
‘독도를 동쪽 극점으로 하는 국토 정중앙에 솟은 산. 정상 초원지대 소양호 조망 산행은 한라산 뺨쳐’기억을 더듬어 찾은 잡지에 소개된 양구 봉화산 소개 글의 제목이다. ‘봉화산은 사명산과 함께 소양호 북단을 에워싸고 있다. 양구를 대표하는 풍광 중 하나가 봉화낙월인데, 양구에서 볼 때 서산에 지는 일몰경과 함께 양구 봉화산에서 뜨고 지는 달 풍경이 한 폭 그림과 같다 한다. 명명의 유래는 산정에 봉화대가 설치된 데서 왔다. 6·25전쟁 이후로 군부대 사격장이 자리해 일반인 출입이 통제되다2002년 이후 양구군이 설정한 우리나라 국토 정중앙 지점이 생기면서 부분적으로 등산로가 개설되었다. 봉화산은 정상 풍광이 일품이다. 정상을 중심으로 서릉으로 약 500m, 북동릉으로 약 200m 구간에는 시원한 초원이 펼쳐진다. 발 아래로 막힘 없이 펼쳐지는 소양호반 조망을 즐기며 산행을 즐길 수 있다.’한라산급 산행이라니 과장된 것이겠지 한다.
가야 할 길을 3등분해 본다. 들머리가 석현리 선착장이라면 호반을 따라 걷다. 능선으로 올라 붙어 4.5km 긴 거리를 소양강 풍경을 벗 삼아 걷게 될 것이며, 심포리라면 도솔지맥 따라 2.2km, 비고 500m를 이겨내며 꽤 가파른 길을 올라야 삼거리에 당도한다. 이후 1.2km 평원지대를 거쳐 정상에 오르게 된다. 아산에서 제시한 산행거리가 8.6km인 것으로 보아 심포리 들머리가 유력하다. 시간은 넉넉잡아 2시간을 예상한다. 정상~국토정중앙탑 삼거리까지는 4km, 대세 내리막이라 90분을 예상한다. 국토정중앙삼거리~천문대는 0.6km 거리로 30분을 예상한다. 순수 산행시간은 4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다.
< 희망사항 >
주중에 늦가을 치고는 이례적일 만큼 큰 비가 내렸다. 봄이야‘이 비 그치면 강나루 긴 언덕에 풀빛이 짙어오겠다’지만, 지금 이 비 그치면 산등성이에 겨울이 성큼 다가올 게다. 오는 겨울을 기다리기 보다는 먼저 가서 맞으려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다. 그것도 가장 춥다는 강원도 내륙 깊숙이 자리잡은 양구 봉화산이다. 그리 인지도가 높지 않은 이 산이 유명세를 탄 건, 국토정중앙이라는 상징을 부여 받고 나서다. 그 상징점에 서서 정기를 받고 싶다.
등로 주변으로 군부대 사격장에 인접해 있다 한다. 양구에서 군생활을 하진 않았지만, 전방 입소훈련을 부근에서 받았던 춥고 아련한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다. 어은산이 올려다 보이던 GOP 초소에서의 몹시 추웠던 4월 초 어느 새벽이 기억난다. 내 젊은 날의 초상을 다시 그려본다.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과정을 기록한 글이다.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다르리라)
< 양구 가는 길에 >
내겐 일년 중 이맘때 몸의 저항력이 가장 떨어지는 때다. 오는 겨울이 두려워서 일 게다. 뒤척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길을 나선다. 달랑 3명이 탄 버스는 이내 사당을 출발한다. 잠시 후 형언할 수 없는 찬란한 주홍빛 아침 하늘. 마천루 사이로 잠실의 아침이 밝아온다. 다른 건 몰라도 날씨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춘천 휴게소를 지나 언덕을 내려서며 내려다보는 춘천 시내 뒤편으로 산들이 흐른다. 오늘은 먼 풍경이 좋은 날이 될 것 같다. 46번 국도 따라 소양강과 배후령을 지나 양구 땅에 들어선다.
< 봉화산 ~ 국토중앙점 삼거리 >
9시 17분, 10명의 정예 참석자들이 안개 낀 대지를 깨우며 도로를 따라 오른다. 허옇게 서리 내린 땅엔 풀들이 땅에 엎드려 있다. 마지막 푸른 잎을 간직한 풀들의 추웠던 지난밤을 생각하니 짠하다. 산으로 향한 나무 가지 끝에 상고대가 보인다. 해안선님의 흥분한 목소리가 커진다. 기온 차로 인한 짙은 안개가 몽환적으로 피어난다. 도로를 800미터쯤 걷자 좌측으로 산길이 열린다. 군부대 초소 앞으로 멋진 상고대가 피어난다. 나도 수줍은 모델이 되어본다.
정상까지 3.5km의 오르막이 시작된다. 이 길이 도솔지맥에 속한다는 표식은 어디에도 없다. 무리 지어 걷으며 길을 함께하는 분들의 닉네임을 확인해 본다. 사진으로만 뵈었던 분들이 대부분이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은 쉽지 않다.
소나무 숲 사이로 빛내림이 목격된다. 숲을 뚫고 땅으로 내리꽂히는 햇빛이 키 큰 소나무 등걸에 걸려 빛이 산란하다. 장관이다. 반대편 산중턱에는 운해도 보인다. 발걸음이 빨라진다. 정상 능선에 서면 더 황홀한 풍경이 예약된 듯 마음이 들뜬다. 서서히 고도가 높아진다. 더 빠르게 기온이 오른다. 상고대와 운해의 꿈은 싱겁게 사라진다. 대신 능선 삼거리까지의 거리는 훨씬 가까워졌다.
등로는 생각만큼 가파르지는 않다. 소나무 군락은 사라지고 참나무 숲이 이어진다. 길에 낙엽이 더 풍성해지고, 돌에는 이끼가 짙게 돋아난다. 늦가을, 숲의 정취가 싱그럽다. 산어깨 길을 길게 돌아 삼거리에 도착한다. 90분을 걸었다. 몸이 산에 적당히 적응했는지 기분이 상쾌하다. 산새님이 주신 비타민에 힘을 얻는다. 후미를 기다리며 나누는 담소에 마음을 연다.
고도가 700미터를 넘었고, 정상까지의 거리가 1.2km 이니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리란 기대는 연이어 나타나는 범상치 않은 봉우리들에 의해 무너진다. 산행 후 처음으로 시야가 확 트이는 헬기장에 도착한다. 길이 순해진다. 그리던 평원지대에 당도한 것이다. 길을 호위하는 줄을 따라 한발씩 올라서자 우뚝 솟은 정상 봉우리가 눈 앞에 있다. 산에서는 보이면 지척이다. 확 트인 풍광에 취해 단숨에 정상에 오른다. 우측으로 산들이 너울진다. 거대한 검은 회색빛 덩어리들이 소양호를 품고 넓게 퍼져있다. 고사목 하나가 벼랑에 서 있다. 늠름하기가 장군이다. 고사목을 배경으로 소양호가 있는 산 풍경을 정신 없이 찍었다. 햇살이 쏟아진다. 춥지 않은 바람이 분다. 풍경에 압도되어 간다. 소지섭의 이름을 파는 인공 구조물은 그저 장난감처럼 느껴진다. 이 좋은 자연이 있는데 굳이 눈길을 줄 필요가 없다. 모델이 되고 또 모델이 된 이들을 찍는다. 기대 이상도, 이 정도면 로또다.
억새가 아직 남아 있는 정상 숲에서는 지난 가을 냄새가 난다. 가을 냄새는 메말라 가는 숲에 내리는 햇볕의 냄새라 했다. 먼 산을 바라본다. 동북 방향으로 사명산, 백암산, 가칠봉, 도솔산, 대암산의 모습이 보인다. 원근을 불문하면 모두 일직선 상에 도열해 있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800미터 급에서 360도 파노라마가 이렇게 시원하게 펼쳐진 산을 나는 아직 경험해 보지 못했다. 복 받은 곳에 더없이 좋은 날씨에 왔다.
봉화산 정상에 식당이 차려진다. 온 산을 아름다운산하가 전세된 기분이다. 유부초밥에 전복, 새우까지 산에선 엄두를 못내던 성찬에 감동한다. 염치 불구 주는 대로 받아 먹었더니 금새 포만감이 찾아온다. 따스한 차 한 잔의 여유까지 마시며 잊지 못할 경험을 한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 봉화산 ~ 국토중앙점 삼거리 >
황홀한 풍경을 배경으로 한 봉화산 정상에서의 잔치는 끝났다. 단체사진도 찍고 바위 난간에 서서 우리가 이곳을 다녀갔음을 남기는 사진도 찍었다. 커다란 카메라를 든 이들을 보면 괜히 부러워진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게 늦었다 여기고 영 용기가 나지 않는다.
가야 할 길은 대세 내리막이고 국토정중앙 삼거리까지 고도차도 크지 않으니 또 다른 풍경을 즐기며 여유롭게 걷겠지 여겼는데, 내리막 비탈이 몹시 가파르다. 게다가 낙엽이 짙게 깔리고 바닥도 미끄러워 몹시 위험하다. 급기야 꽈당 자빠진다. 한동안 얼얼하다. 만만히 볼 곳이 아니다. 길게 내려서면 또 그 만큼 올라서고, 한치의 평지도 없는 오르내리막이 계속된다. 길 사정을 잘못 알아도 이만저만 잘못 안 것이 아니다. 아침에 길을 나서며 스틱을 빼고 온 게 못내 아쉽다. 묵
묵묵히 걷는다. 걸음이 힘에 겹다. 걸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한다. 산길에서 문득 보이는 세속의 일들, 적요함에서 깨닫게 되는 삶의 깊이, 산에서의 길은 그래도 내 의지대로 내 힘 닿은 대로 갈 수 있어 다행이다. 지나온 봉우리를 올려다 본다. 산길은 조금씩 위로 흘러간다. 올라갈수록 무게를 더하면서 빠르게 흐른다.
길다. 생각보다 길이 무지 길다. 송전탑을 지나고 희미하게 이어지던 길에서 급기야 알바도 한다. 명세기 지맥 길인데 변변한 표지기 하나 없다. 낙엽에 묻혀 끊어질 듯 희미하게 이어지는 등로를 찾아 앞으로 나아간다. 고도도 여전히 700미터를 유지한다. 국토중앙점이 멀게만 느껴졌다. 산에서의 자만의 댓가는 처절했다. 그래도 내 작은 발놀림은 나를 국토중앙점으로 향하는 삼거리로 데려다 주었다. 3.5km 남짓의 내리막 길을 걷는데 2시간이나 걸렸다. 우측으로 솟은 국토중앙산이 유혹했지만 과시용 봉우리 임을 알기에 미련 없이 좌틀한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융단 같은 너른 계단 길이 이어진다. 밧줄을 잡으며 뒤로 걷는 호사도 누려본다. 제임스님, 서아님과 먼저 국토중앙점에 먼저 도착한다. 커다란 스테인레스 구조물이 휘몰이치며 하늘로 솟아 있다. 조각품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 보다는 헌법 3조에 뿌리를 두었다는 국토정중앙 지정의 근거를 알리는 글귀가 눈길을 끈다. 독도의 존재가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푹신한 길을 따라 내려선다. 멀리 주차장에 우리를 집에 데려다 줄 고마운 흰색 버스가 눈에 들어온다. 그 존재가 오늘따라 더 고맙다.
< 에필로그 >
산행을 다녀 온 일요일 아침 창 밖에는 또 비기 내린다. 오랜 만에 제대로 된 산행을 한 탓에 몸이 천근만근이다.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인다. 어제의 일이 파라라마처럼 지나간다. 정상 오름보다 하산 길이 더 힘겨운 특이한 산행이었다. 생각해 보니 정상 주변을 제외하고는 평지를 걸은 기억이 없다. 800미터급의 그저 그런 산으로 여겼는데 봉화산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래도 정상 주변에서 본 360도 황홀한 파노라마 풍경은 이 모든 힘겨움을 잊을 만큼 큰 즐거움이었다.
‘정상 풍광이 일품이다. 정상을 중심으로 시원한 초원이 펼쳐진다. 발 아래로 막힘 없이 펼쳐지는 소양호반 조망을 즐기며 산행을 즐길 수 있다.’잡지의 글은 허언이 아니었다.
10명의 단촐한 산행, 길을 걷는 내내 벗들이 있어 든든했다. 맛난 음식 나눠 주고, 스틱 없는 내가 낙엽에 미끄러질까 힘들여 옆으로 치워주는 고마운 마음들은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산 위에서는 오기 전 마음 속에 담아 두었던 양구의 기억들과 다짐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옛 것 위에 그저 새 것을 보태 올린다. 그래도 오늘의 봉화산 정상에서의 화려한 풍광은 아주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듯하다. 대장님과 함께한 이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