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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회(URI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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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詩 읽기 스크랩 |영시| 세네갈 해안과 사람 손바닥보다 크지 않은 구름
홍해리洪海里 추천 0 조회 47 09.11.07 10:1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Noah Remembers the Coast of Senegal
-- Bradley Paul

 

Came the list finally, though without
its rotting apple or its vinyl sheath
of miniature ivory elephants
nor the wood on which they leaned
nor the sand they remembered to traipse --
they could get nothing done at this pace!
If fish were brought up they were brought up
with kelp and garbage and sand.
Some still breathed in the brutal nets,
some were blue and some green
like the ferns left behind in the heat;
some were dark like the ants on the fern
or the darker ants moving down the fern
away from the blackening trees.


노아는 세네갈 해안을 기억한다
-- 브래들리 폴

 

마침내 목록이 왔지, 비록
썩어가는 사과나 비닐 봉지로 싼
자그마한 상아 코끼리들은 없었지만
그들이 몸을 기대던 나무도 없고
그들이 어슬렁거리던 모래사장의 기억도 없이 --
그들은 이런 속도로는 아무 것도 얻지 못했는걸!
생선들이 잡히면 생선들을 다시마와
쓰레기와 모래알과 함께 꺼내 올렸지.
몇 놈은 아직도 잔인한 그물에 얹혀 숨을 쉬고,
몇 놈은 시퍼렇고 몇 놈은 초록색이었지
열기 속에 남겨진 양치류식물처럼;
몇 놈은 양치류식물 위의 개미처럼 시커멓거나
혹은 어두워지는 나무를 떠나 밑으로 내려오는
더 시커먼 개미처럼 시커맸지.

 

(필자 譯)


 요사이 한국도 미국도 어처구니 없이 오래 지속되는 혹독한 장마를 견디면서 혹시 노아의 홍수가 또 오는 것인가 하는 미신적인 걱정을 하면서 인터넷을 쏘다니다가 우연히 'Bardley Paul'이 수년 전에 쓴 시를 발견하고 이곳에 소개한다.

 

 '세네갈'은 서아프리카 대서양 연변에 현존하는 공화국 이름이다. 국민의 30프로가 국제 기준으로 하루를 살기 위하여 1 달러 25센트 미만을 소비하는 빈곤층에 해당하는 나라다. 장대비가 연일 쏟아지는 신이 하사한 재난에서 유독 혼자만이 은혜를 입고 살아남은 인류 최초의 알콜 중독자, 노아는 이제 와서 왜 하필이면 아프리카의 세네갈 해안을 기억하는 것일까.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시인은 독자의 그런 시시껄렁한 지적인 호기심을 친절하게 만족시켜 주려는 의도가 전혀 없어 보인다. 그는 한편의 시를 논문이나 성명서로 착각하거나 어떤 메시지나 큰 깨달음을 얻으려고 눈이 벌개진 독자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그렇게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젊음의 패기가 있다.

 

 'Donald Hall Prize'는 시, 단편소설, 논픽션, 그리고 소설분야로 나누어 있는 상인데 아직도 소설부문의 당선작 선정이 되지 않아서 최종 발표는 오는 9월에 하기로 돼 있는 까다롭기로 소문난 문학상이다. 금년도 시 분야에서는 진작에 'Bradley Paul'의 시 「The Animals All Are Gathering: 동물들은 모두 모여든다.」가 뽑혔는데 9월쯤에서야 일반인들이 그 시를 읽을 수 있겠다. 'University of Pittsburg Press'에서 그 이상한 제목의 시가 조만간 출간 될 것이라는 소식도 있다.

 

 그런데 워낙 오래 전부터 영화제작에 몰두해 왔던 폴은 자신의 수상작과 똑같은 제목의 짧은 영화를 만들어서'YouTube'에 벌써 떡 올려 놓은 것이 아닌가. 3분 정도 지속되는 동영상으로서 자기 자신은 화면에 나오지 않으면서 목소리만 들리고 아내가 고양이를 날로 잡아 먹는 장면이 잠깐 보는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납량 특집의 동영상이다.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구글 검색으로 지금 당장이라도 쉽게 그 동영상을 볼 수 있다.

 

 브래들리 폴은 1972년에 매리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Iowa Writers' Workshop'을 연수하고 <American Poetry Review>, <Pleiades>, <Smartish Pace>, <Boston Review> 같은 문학지에 꾸준히 투고를 해 왔고 2004년에는 첫 번 시집 『The Obvious:명백한 일』로 'New Issues Poetry Prize' 상을 받은 바 있는 아주 쟁쟁한 첨예시인이다. 그는 현재 화가이자 작가인 'Karri Paul'과 로스안젤러스에서 살고 있다.

 

 독자는 브래들리 폴의 시에서 이상하고 알 수 없는 사물에 대하여 비논리적인 듯 하면서도 은근히 분별력 있는 목소리를 듣는다. 그가 창출하는 드라마는 시각에 호소하는 한편의 그림을 애써 흉내내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그림은 그림이고 시는 시가 아니겠는가. 더더구나 저 일기 비슷한 일상의 기록이나 신변잡기, 또는 자기의 고통이나 기쁨을 만인에게 누설하는 고백정신이 전혀 없다. 그는 더 이상 이런 수법에 독자들이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각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그는 차라리 독자로 하여금 시 속의 내레이터, 즉 시적 화자를 감식하려는 집착을 일찌감치 포기시키면서 그 대신 누군지도 모르는 알쏭달쏭한 목소리를 경청하게 하거나 그 목소리의 신비로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하는 방식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근래에 일부 한국시단에 유행처럼 번지던 의도적으로 엽기적이고 '그로테스크'한 표현과는 많이 다른, 아주 산뜻하고 치밀한 기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지하는 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시인은 시에서 자신의 출처를 잘 들어내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 특히 시의 속성은 여성의 패션처럼 들어냄과 감춤의 그 중간지점에 있다고 브래들리 폴은 제언한다. 결국 시인의 소명은 근엄하거나 유창한 연설보다는 신비한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의 입구를 제시함으로써 한층 더 경이로운 분위기를 창출하고 시인에게 통상적인 의미를 훼손당한 언어가 새롭게 부활하는 기쁨을 시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2.


Cloud No Bigger than a Man’s Hand
-- Dick Allen

 

It approaches from the sea, too small
For thunder and lightning
But ominous as a closed fist
And what it will bring

 

Nearing us, growing larger,
Is completely unknown.
Beware the leaves blowing, beware
The spot on the sun.
All is turned toward it. It rides
The brow of the mind.
Soon, it will shadow one cliff
And a small coastal shrine.

 

Beware the leaves blowing, beware
The spot on the sun.
Do your work well. Behold
The work yet to be done.


사람 손바닥보다 크지 않은 구름

-- 딕 알렌

 

바다로부터 접근하는 겁니다, 천둥과
번개를 위해서라면 너무 작지만
그러나 닫혀진 주먹처럼 그리고
무엇을 가져올지 불길하게시리

 

우리에게 가까이 오는 것, 점점 커지는 것이란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주의하라, 주의하라

태양의 흑점을.
만물이 그쪽을 향합니다. 그것은
마음의 절정을 몰고 갑니다.
좀 있으면, 그것이 하나의 절벽과
조그만 해안의 성전을 그늘지게 할 것입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주의하라, 주의하라 

태양의 흑점을.
당신의 일을 훌륭하게 하십시오. 아직도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유념하십시오.

 

(필자 譯)


 위는 격월로 발행되는 시 잡지 <Poetry> 금년 7,8월호에  게재된 'Dick Allen'의 시다.

 

 1930년에 태어난 딕 알렌은 모더니즘과 신비평주의가 팽배하던 미국시단의 'transitional generation (전이세대)'에 속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과 불란서와 이태리를 전전하고 베니스에서 생을 마친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와, 미국 시민권을 버리고 영국시민이 된 티 에스 엘리엇(T. S. Elliot: 1888?1965)과, 정신과병원에서 퇴원한지 3일 후에 엽총으로 자살한 어네스트 헤멩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같은 문호들과 동시대를 섭렵한 현 79세, 그야말로 노익장의 시인이다.

 

 그는 특히 "시를 쓰는 것이 의사질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라고 통쾌한 발언을 한 뉴저지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내과 수련의를 거친, 의사시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1883-1963)의 모더니즘과 이미지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자백한다. 돌이켜 보면, 시대적으로 우리가 유럽과 일본의 영향을 받아 주지주의主知主義(Intellectualism)에 심취하던 때다. 우리가 주지주의의 합리성에 머리를 조아리던 시절에 미국에서는 신비평주의(New Criticism)의 거센 파도가 일기 시작했고 딕 알렌도 그 물결에 합세한 시인이다.

 

 나중에 라캉과 데리다의 탈구조주의에 큰 동기의식을 불어넣은 신비평주의는 시의 확정적인 의미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차라리 어휘의 다양성과 복합성, 그리고 문장구조와 언어의 아이러니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어렸을 적 국어 시험에 '다음의 시행을 무엇을 뜻하는가' 했을 때의 정답은 항상 '조국을 잃은 슬픔'이었던 것을 기억하는가. 혹시 우리의 시단 일부에서는 아직도 정답을 추구하는 행각에 매달려 있는 것은 아닌지. 정답을 추구하는 마음가짐은 타신(他神) 혹은 다신(多神)을 용납하지 않고 유일신을 추종하는 심리적 습관의 소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와 종교는 엄연히 분별되어야 한다.

 

 딕 알렌은 뉴욕주 북부 호반도시 'Round Lake'에서 태어나 자라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같은 주 시라큐스 대학(Syracuse University)를 졸업한 후 하바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아이비 리그 중의 하나인 브라운 대학원을 마친 영문학 석사다. 현재 뉴욕에서 차로 두 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커네티커트주의 트럼불(Trumbull)이라는 소도시에 은퇴한지 8년째인 지금까지 줄기차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근래 시집으로 『The Day Before: 하루 전날』를 2003년에 출간한 알렌은 <Poetry>, <The New Republic>, <The New Yorker>, <The Hudson Review>, <The Yale Review> 등등 많은 시 잡지에 부지런히 기고를 해 온 열정파다. 1990년도에 수차에 걸쳐 'The best poets in America'라는 인기상을 받았을 정도로 대중적이었던 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동양철학에 심취하고 특히 선불교를 연구한 경력을 과시한다. 대학교 전공과목이 물리학이었으니만큼 불교철학과 물리학을 접목시키려는 시도를 시에서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는 동양적인 냄새가 물씬하다. 심층의식 속에서 풍겨나는 신비주의자의 냄새를 맡을 수 있을 정도다. 그 또한 고백을 위주로 하거나 시사만평 같은 것 말고 내면적인 면목을 파헤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의 평론가들이 흔히 쓰는 말로 소위 '존재론적 탐색'을 염원했던 것이다.

 

 2003년 7월에 발표된 그의 'Abandoned Interview'에서 그는 자신의 시론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그 중 몇 부분을 임의로 발췌해서 여기에 옮긴다. 다분히 우리의 시적 구미를 돋구는 대목들이다.


1. 시간에 대하여:

 

 저는 시간에 대하여 두 가지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첫 째는 불교적인 관점이죠. 이것은 마치도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 1922-2007)의 'Chrono-Synclastic Infundibulum(시간의 동시적 구형 깔때기: 필자 譯) 이론, 즉 모든 시간,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 시점의 깔때기에서 쏟아진다는 학설입니다. 불교 이론이나 깔때기 이론이나 둘 다 현대 물리학과 상통합니다.

 

 시간에 대한 제 두 번째 생각은 실존주의 사상에 입각합니다. 그것 또한 물리학에서 말하는 가상현실적인 현실을 지칭하기도 하지요. 불교적 차원으로는 열반의 경지에서 감지하는 시간관념이 시간의 진면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 시가 보여주는 시간관념은 이 두 가지 개념을 추구합니다. 제 졸시 「Time to Hear Ourselves Think: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들어야 할 시간」에서는 불교적인 시간관념에 몰두하다가 속세의 시간으로 어떻게 환원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가 말했지요. "The world is too much with us...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나 벅차다...)"

 

2. 역사에 관하여

 

 실존주의의 거두 까뮈가 설파한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 이 시간에 살기를 선택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역사의 중요성을 역설할 수 있습니다. 선택이 이루어지는 순간 자동적으로 책임이 부과됩니다. 역사에 대한 지각이 과거의 실책을 피할 수 있게 합니다. 이를테면 경제공항,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인간의 달 착륙, 컴퓨터의 발달, 9/11 사태, 그리고 미래에 다가올 충격 따위에 유념해야 됩니다. 팝송 가수 밥 딜런(Bob Dylan)이 이렇게 노래했지요.

 

Because something is happening here
But you don't know what it is
Do you, Mister Jones?

 

-- 왜냐하면 여기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거든요
그렇지만 그게 무엇인지 모르시죠
아세요, 존스씨?

 

3. 시에 관하여 내게 무엇이 가장 소중한가

 

 저는 시의 정의에 대하여 시가 '계산적인 강렬함(measured intensity)'라는 말을 좋아하지요. 저는 시를 어떤 리듬감이 있으면서 강한 감동을 주는 매개체로 인식합니다. 그런데 시는 맨 처음에 하나의 소리(sound)로서 제게 다가오지요. 하나의 소리가 시에 발동을 거는 겁니다. 그 다음에는 그 소리를 열심히 쫓아가야 합니다. 바로 그 소리 때문에 사람 마음이 속세를 떠나 다른 세상으로 비상을 합니다. 그래서 독자도 시인과 함께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비상의 기쁨을 느끼는 겁니다.

 

4. 누가 혹은 무엇이 내 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가

 

 근본적으로 에머슨, 싸르트르, 선불교를 미국에 소개한 알란 왓츠(Allan Watts)와 일본의 스즈키(D. T. Suzuki), 그리고 도스토엡스키의 모든 소설 등등입니다. 특히 에즈라 파운드,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와 티 에스 엘리엇을 빼 놓을 수 없지요.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도 한시漢詩를 사랑합니다.

 


? 서 량 2009.07.19

-- <詩로 여는 세상> 2009년 가을호에 게재 (241-2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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