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분 / 15세 이상 관람가>
=== 프로덕션 노트 ===
영원한 전세계 여성들의 로망, '샤넬'만의 독보적인 아이템이자
스타일의 교본으로 자리 잡은 탄생 과정을
엿보다
[샤넬] 아이템들의 탄생 과정에서 '샤넬'의 독창적인 스타일 감각과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열정을 엿볼 수 있어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프랑스가 선택한 포스트 '샤넬', 오드리 토투
오드리 토투는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
연기와 남다른 열정으로 프랑스가 가장 사랑하는 디자이너이자 완벽주의, 대담성을 대표하는 그녀만의 '가브리엘 샤넬'을 탄생시켰다. 연출을 맡은
안느 퐁텐 감독은 "오드리 토투, 그녀가 곧 샤넬이었다."라는 한마디로 그녀의 캐스팅 이유를 밝힐 정도로 단번에 그녀를 매료시킨 오드리 토투의
카리스마를 높이 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샤넬의 現 수석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로부터 "그녀가 '유일한 진짜 샤넬'이다."라고 극찬할 만큼
'샤넬'을 쏙 빼닮은 오드리 토투는 세기의 디자이너가 환생한 듯한 눈부신 연기로 스크린을 압도할 것이다.
■ HOT ISSUE
프렌치 시크의 거장이자 프랑스의 복식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코코'는 그녀가 카페에서 활동을 할 당시 생긴 애칭이다. 1910년 파리에서 여성 모자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여성복으로 전향하였다. '샤넬'은 여성들을 갑갑한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키고, 화려한 장식 대신 최초로 주머니를 단 심플한 옷으로 세련미는 물론, 짧게 줄인 치마 길이로 생활의 편안함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한 원피스의 형식을 파괴, 최초로 여성용 재킷을 만들었으며 현재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체인 숄더벡을 탄생시켰다. 특히, 당시 장례식장에서만 허용되었던 컬러, 블랙을 고품격화하여 '리틀 블랙드레스'를 제작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외에도 '샤넬'은 오늘 날 '샤넬 수트'라 불리는 가디건 재킷과 무릎길이의 치마 등 여러 가지 독창적인 스타일을 발표해 명성을 높였다. 그리고 그녀가 만든 향수 '샤넬 No.5'는 30초에 1병씩 팔릴 만큼 유명하다.
시대를 앞서간 패션의 혁명가 '샤넬', 스크린 위에 부활하다
전세계 여성들의 로망인 '샤넬'이 스크린을 압도한다. 모든 여성들이 꿈꾸는 아이템이자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여성 중 한 명인 '샤넬'의 삶과 사랑을 그린 <코코 샤넬>이 올 가을,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을 찾아오는 것. 명품 브랜드라는 겉모습 뒤에 숨겨진 '샤넬'의 드라마틱한 삶과 단 한번의 운명적인 사랑, 그리고 그 속에서 탄생한 다양한 [샤넬] 아이템들을 만나볼 수 있는 <코코 샤넬>은 여성들의 마음을 흔드는 캐릭터와 스토리, 더불어 다양한 볼거리와 아름다운 음악으로 감성을 자극할 예정이다. 사랑스러운 '아멜리에'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가브리엘 샤넬'로 완벽히 변신한 프랑스의 국민 요정 오드리 토투와 현재 [샤넬]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재현하는 [샤넬]의 의상들은 감성적인 스토리와 더불어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만들 것이다.
프랑스가 선택한 포스트 '샤넬', 오드리 토투
<아멜리에>와 <프라이스리스> <다빈치 코드>를 거쳐 매 작품마다 확고한 이미지로 대중들을 사로잡은 오드리 토투가 이번에는 세기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로 완벽 변신을 꾀했다. 코르셋으로 압박 당하던 여성들에게 패션의 자유를 선사한 혁명적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로 분한 오드리 토투는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 연기와 남다른 열정으로 프랑스가 가장 사랑하는 디자이너이자 완벽주의, 대담성을 대표하는 그녀만의 '가브리엘 샤넬'을 탄생시켰다. 연출을 맡은 안느 퐁텐 감독은 "오드리 토투, 그녀가 곧 샤넬이었다."라는 한마디로 그녀의 캐스팅 이유를 밝힐 정도로 단번에 그녀를 매료시킨 오드리 토투의 카리스마를 높이 사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샤넬의 現 수석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트로부터 "그녀가 '유일한 진짜 샤넬'이다."라고 극찬할 만큼 '샤넬'을 쏙 빼닮은 오드리 토투는 세기의 디자이너가 환생한 듯한 눈부신 연기로 스크린을 압도할 것이다.
여심 사냥할 단 하나의 영화 <코코 샤넬>
8월 27일, 가을의 문턱에서 여심을 사로잡을 단 하나의 영화 <코코 샤넬>이 스크린을 찾아온다. 세계 최고의 명품 디자이너 '샤넬'의 이야기를 다룬 <코코 샤넬>은 <오만과 편견>을 닮은 섬세한 감성과 <섹스 앤 더 시티>보다 고품격인 화려한 볼거리로 여성들을 매료시킬 예정이다.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으로 사랑을 놓칠뻔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그린 <오만과 편견>이 여성들의 공감대를 형성했다면, <코코 샤넬>은 '가브리엘 샤넬'이 자신의 일을 더욱 사랑할 수 있게 해준 '보이 카펠'과의 사랑과 비극적인 결말을 그리고 있어 보는 이들의 감성을 자극한다. 뿐만 아니라 <코코 샤넬>은 '마놀로 블라닉', '비비안 웨스트우드' 등 여성들이 꿈꾸는 수많은 아이템으로 가득 찼던 <섹스 앤 더 시티>의 매력에서 한층 발전하여 '샤넬'의 '블랙 & 화이트 드레스', '트위드 의상', '맥고 모자', '마린 룩'의 탄생 과정을 보여주며 많은 여성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극적인 음악과 감각적인 영상 위로 펼쳐지는 '가브리엘 샤넬'의 드라마틱한 사랑과 다채로운 [샤넬] 아이템들의 향연은 가을을 맞아 공허한 여성들의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줄 것이다.
누구보다 당당하고 독립적이었던 여성, 샤넬 - 오드리 토투
고아로 자라 옷 수선을 하며 가수와 배우를 꿈꿨던 샤넬. 세련된 외모로 수많은 남자들의 관심을 받지만 사랑 따윈 믿지 않으며 그들을 비웃는다. 보통 여자들이 꿈꾸는 안정적인 삶을 싫어하며 언제나 변화를 추구하던 그녀는 자신이 일하고 노래를 부르던 곳에서 발장을 만나 상류층 사회를 접하고 성공을 다짐한다. 발장의 집에 머물며 우연히 알게된 '보이 카펠'과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사랑에 빠진 그녀는 그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데…
샤넬의 유일한 사랑, 보이 카펠 - 알레산드로 니볼라
영국인 사업가로 자수성가한 남자. 친구 발장의 집에서 우연히 만난 샤넬의 독특한 매력에 끌리게 된다. 샤넬과 비슷한 불행한 과거를 지닌 둘은 서로에게 깊이 빠지고, 발장이 인정하지 않는 샤넬의 재능을 알아본 그는, 그녀에게 의상실을 열 수 있게 도움을 주며 그녀가 자신만의 스타일에 눈을 뜨게 도와준다.
샤넬을 귀족 사회로 이끈 남자, 에티엔 발장 - 브누아 포엘 부르드
자주 드나들던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샤넬에게 호기심을 느껴 그녀에게 접근한다. 사랑을 믿지 않는 딱딱한 그녀의 태도를 재미있어하며 무작정 자신을 찾아온 샤넬을 곁에 둔다. 발장은 샤넬에게 승마와 귀족 사회의 문화를 접하게 해주고, 이는 샤넬의 스타일 창조에 영감을 주는 계기가 된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음악감독이 완성시킨 아름다운 선율
영화에 생명력을 불어 넣다
<코코 샤넬>의 감각적인 영상이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면, 아름다운 선율의 음악은 단순히 영상을 장식하는 도구가 아닌 깊이 있는 감성으로 귀를 매료시킨다. 영화 곳곳에 마치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듯한 음악을 탄생시킨 사람은 바로 '알렉상드르 데플라' 음악감독.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로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 된 것은 물론, <더 퀸> <더 싱어> <발렛> 등 수 많은 작품들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아왔던 그는 이번 작품에도 그만의 실력을 한껏 풀어 놓았다. '샤넬'의 당당함과 변화를 추구하는 혁신적인 마인드 및 그녀의 디테일함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그는, 시간이 날 때면 언제나 촬영장에 들러 '오드리 토투'의 연기를 주의 깊게 관찰 했다고 한다. 특히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60여명의 뮤지션들의 참여로 만들어진 <코코 샤넬>의 음악은 '오드리 토투'의 연기뿐 아니라, 영화의 정교함을 강조시켜 준다. 음악감독의 이러한 노력은 영화에 고스란히 묻어나 관객들로 하여금 '오드리 토투'가 연기한 '샤넬'의 모습에 더욱 집중하게 만든다.
영원한 전세계 여성들의 로망, '샤넬'만의 독보적인 아이템이자
스타일의 교본으로 자리 잡은 탄생 과정을 엿보다
여성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갖고 싶어하는 잇 아이템 [샤넬]. 19세기 말 화려한 패션만을 강조했던 파리에 '스타일'이라는 새로운 감각을 불어 넣어 혁신을 일으켰던 '샤넬'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디자이너들의 모티브가 되며 여성들을 꿈꾸게 한다. '샤넬'을 대표하는 [샤넬 체인백], [샤넬 트위드 정장], [샤넬 No. 5], [샤넬 투톤 슈즈] 등은 지금까지도 최고의 스타일 아이템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영화 <코코 샤넬>에서는 하나하나 열거하기에도 벅찬, 수없이 많은 아이템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실제 [메종 샤넬]에 보관 되어있는 문서를 바탕으로, 당시 유럽 여성들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킨 것과 장례식에만 사용되었던 '블랙' 컬러를 고품격화 시킨 것은 물론 일명 '톰보이 룩'이라 불리는 스타일의 탄생 과정 모두를 110분이라는 러닝 타임 속, 임팩트 있게 담아내 보는 내내 시선을 잡아 둘 것이다. [샤넬] 아이템들의 탄생 과정에서 '샤넬'의 독창적인 스타일 감각과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열정을 엿볼 수 있어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샤넬가의 現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참여한 <코코 샤넬>
시대를 앞선 [샤넬] 스타일을 한번에 담아내다
'샤넬'의 모든 것을 담은 영화 <코코 샤넬>이 주목 받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의상 제작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예술성과 세련미를 함께 겸비해 현재 많은 디자이너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칼 라거펠트는 영화 속 화려한 엔딩을 장식하는 장면이자, [샤넬] 아이템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마지막 패션쇼에 힘을 실어 줬다. 또한 마지막 '오드리 토투'가 입은 흰색의 [트위드 정장]은 직접 칼 라거펠트가 제작한 것으로 영화에 사실감을 더한 것은 물론, 실제 '샤넬'이 살아 생전 제작했던 의상과 액서서리 등을 [메종 샤넬]에서 직접 공수, 그녀의 전설을 완벽히 부활시켰다. 칼 라거펠트의 진두지휘로 완성도와 화려함을 더한 패션쇼 엔딩 장면은 <코코 샤넬>의 감동에 깊이를 더할 것이다.
클래식한 파리의 패션을 한 눈에, 그 속에서 빛나는 '샤넬'의 스타일
기존의 패션 영화와 <코코 샤넬>이 가지는 차별점이 있다면, 단순 트렌드를 쫓은 볼거리가 아닌 고품격의 스타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화려하고 다양한 패션과 오늘날 보아도 세련된 [샤넬] 아이템들을 한번에 확인 할 수 있다. <코코 샤넬> 의상 제작진들은 유럽을 장악했던 코르셋의 드레스와 '샤넬'의 심플하고 세련된 스타일을 대조시키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다. [샤넬]이 등장하기 전 많은 여성들이 즐겨 입었던, 가슴을 강조하는 블라우스와 리본 레이스 장식, 깃털과 프릴로 영화 속 드레스를 제작해 '오드리 토투'의 의상과 차별화시켰다. 특히 약 800벌의 각기 다른 모자와 드레스가 등장하는 영화 속 댄스 홀 장면과 경마장, 극장 등에서는 '샤넬'의 스타일리쉬한 패션이 도드라져 보여, 실제 당시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눈으로 확인시켜 준다.
고아로 자라 가수와 배우를 꿈꾸던 과거를 딛고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거듭난 '샤넬'. 완벽함, 유일함을 추구하며 언제나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 그녀는 그녀가 활동하던 당시부터 지금까지도 화제의 중심에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유럽을 넘어 미국에서도 유행을 선도한 브랜드 [샤넬]은 수많은 유명 인사들과의 에피소드에 빠짐없이 등장해 그녀와 브랜드의 높은 명성 및 대중성을 확인케 했다.
마릴린 먼로의 유일한 잠옷, 샤넬 No.5
그 중에서도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사건은 바로 세계적인 섹시 스타 마릴린 먼로의 일화. 한 기자가 그녀에게 "밤에 잘 때 무슨 옷을 입고 잡니까?"라며 던진 짓궂은 질문에 그녀가 서슴없이 '샤넬 No.5'라고 대답한 것. '샤넬 No.5'는 '샤넬'의 첫 번째 조향사이자 그리스의 향수 전문가 '에르네스트 보'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샤넬'이 여러 향수 중 5번째 향수를 선택, 그것이 바로 이름이 된 것으로 유명하다. '샤넬 No.5'는 여성적 매력의 상징이자 전설적인 예술품으로 인정받아 1959년 뉴욕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기도 했다.
비극의 상징, 핑크색 트위드 의상
'샤넬 No.5'를 즐겨 입은(!) 이가 마릴린 먼로라면, '샤넬'의 트위드 의상을 즐겨 있었던 이는 바로 존 F. 케네디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였다. 60년대 스타일 아이콘이자 우아한 여성의 대명사였던 그녀의 대표 아이템이 바로 '샤넬'의 트위드 정장이었던 것. 일명 '레이디 라이크 룩', 국내에선 '청담동 며느리 룩'으로 불리는 그녀의 스타일은 당시 '재키 룩'이라는 단어로 불릴 만큼 지대한 영향력을 자랑했다. 특히 존 F. 케네디가 암살 당한 현장에서 그녀가 입고 있었던 '샤넬'의 피 묻은 분홍색 트위드 의상은 비극의 상징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유행과 실용성의 상징, '샤넬' 패션
140년이 넘는 전통의 미국 대표 패션 매거진 '하퍼스 바자'는 "샤넬 의상을 최소한 한 벌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유행에 뒤져 있는 여성이다."라는 말로 '샤넬'의 브랜드 가치를 설명했다. '하퍼스 바자'가 '샤넬'의 의상을 소개했던 1923년은 '샤넬'이 여성들에게 아름다우면서도 편안한 의상을 선사해 자유로움을 안겨주던 시기였다. 특히 남성들의 속옷에 쓰였던 저지 소재의 여성복과 무릎 밑 5~10cm 정도의 튜브라인 스커트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며 '샤넬'의 의상으로 하여금 해방과 자유의 상징, 시대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했다. 실용성과 미학을 담아 자신의 의상 철학을 펼쳐낸 '샤넬', 그녀는 시대가 인정하는 진정한 디자이너로서 세계인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다.
=== 참고자료 === <2009년 2월 5일자 발행 네이버캐스트 / 번역가 표정훈 글>
[인물 세계사]
20세기 여성 패션의 혁신가
가브리엘 샤넬
Gabrielle Bonheur Chanel, 1883. 8.19 ~ 1971. 1.10
1954.2.5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코코 샤넬의 첫 패션쇼가 열리다
20세기 여성 패션에 커다란 혁신을 불러일으키면서 패션 제국 ‘샤넬’을 이룩한 가브리엘 샤넬. 코코라는 별칭으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는 그녀의 일생은 ‘사랑하고 일했다’는 한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샤넬의 사랑과 일, 그리고 그 사이에 갈마들어 있는 영욕(榮辱)과 부침(浮沈)의 구구한 사연과 만나보자.
코코 샤넬이라는 살아 있는 전설이 부활한 전후(戰後) 첫 패션쇼
때는 1954년 2월 5일 이른 오후. 장소는 프랑스 파리, 뤼 캉봉 31에 있는 살롱. 계단 꼭대기 근처에서 아래를 유심히 살피는 한 여인이 있다. 실크 베스트와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회색 치마를 입은 여인은 초조한 기색이 역력하다. 손은 자꾸만 담배를 향한다. 프랑스, 미국, 영국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잡지 편집자, 사진가, 작가, 배우, 댄서등 다양한 인물들이 모인 것은 계단 위에서 몸을 숨긴 가브리엘 샤넬, 아니 코코 샤넬의 전후(戰後) 첫 패션쇼를 보기 위해서다.
첫 모델이 통로 무대로 걸어 나왔을 때 손님들은 단번에 알아챘다. 자신들이 기대했던 디자인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바야흐로 크리스티앙 디올의 ‘뉴룩’의 시대였으니, 그날 샤넬이 선보인 디자인은 철 지난 진부함으로 다가왔다. 디오르가 1947년 선보인 ‘뉴룩’은 여성의 몸매를 더욱 아름답게 보여주는 의상이었다. 어깨가 자연스럽게 내려오고 허리가 잘록하며, 가슴이 풍만하게 강조되는 상의와 라인을 넣어 풍성하게 디자인된 스커트는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이에 반해 새로운 유행을 거스르는 듯한 코코 샤넬의 컬렉션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1920, 30년대의 유물이자 과거의 망령으로 간주했다. 과거에 대한 향수가 남다른 이들만이 감상에 젖을 뿐이었다.
이윽고 쇼가 막을 내리고 사람들이 돌아간 뒤 살롱을 메운 것은 다만 정적. 친구들은 2층으로 코코 샤넬을 만나러 올라갔다. 여성 패션에 일대 혁명을 불러일으키면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부심으로 전진하던 그녀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흔들리는 드문 순간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며 2층에서 내려오지 못한 그날의 샤넬은 그 이전의샤넬과 분명 달랐다.
이 날의 패션쇼는 비록 컬렉션 그 자체로는 실패였지만, 코코 샤넬이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하나의 큰 사건이었다. 그 때 그녀 나이 70세. 그러나 <뉴요커>지는 그 무렵의 샤넬을 이렇게 묘사했다. “감각이 살아 있는 용모, 암갈색 눈, 빛나는 미소, 결코 막을 수 없이 뿜어져 나오는 생기. 그녀는 스무 살 여인이었다.” 코코 샤넬이라는 살아있는 전설이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장교와 사랑에 빠져 독일을 위한 비밀 작전까지 개입
제2차 세계대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독일군이 파리를 점령했을 때 샤넬의 나이는 57세. 그녀는 13살 연하의 독일군 장교 한스 귄터 폰 딩클라게, 본명보다 슈파츠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과 사실상 동거했다. 이들의 관계는 일종의 비밀 작전으로까지 이어졌다. 작전명이자 암호명은 ‘모자 견본’. 윈스턴 처칠이 1943년 11월 스페인 마드리드로 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샤넬은, 스페인으로 가서 처칠이나 영국 대사를 만날 작정이었다(샤넬이 먼저 제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독일은 패전으로 치닫고 있었으니, 처칠과 루스벨트는 독일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수용할 것을 요구한 터였다. 독일 수뇌부 일부가 이 작전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패전이 분명해지는 상황에서 평화협상의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걸었기 때문이었다.
샤넬은 마드리드로 갔지만 처칠을 만나지 못했다. 샤넬은 이미 영국 정보국의 요주의 대상이었다. 1944년 파리가 해방된 뒤 레지스탕스는 점령군에 협력한 이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샤넬도 붙잡혀 구금되었지만 처칠이 영향력을 발휘해 석방됐다. 1944년 9월부터 샤넬은 스위스에서 슈파츠와 함께 호텔을 전전하며 생활했다. 무시로 찾아 드는 권태를 달래기 위해 매일 저녁 모르핀을 주사했다. 그녀는 권태롭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더구나 고국에서는 크리스티앙 디올이라는 신예가 패션계에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지 않은가. 이것은 그녀가 귀국을 결심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카바레 가수였다가 연인의 도움으로 옷 만드는 재능을 살리다
1895년 샤넬이 12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는 샤넬을 포함한 세 자매를 수녀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에 맡겼다. 샤넬은 주위 사람들에게 이 시기에 관해 거의 말하지 않았다. 18살 때인 1901년 물랭의 기숙학교로 옮겨 졸업한 뒤, 보조양재사로 일하면서 밤에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코코가 트로카데로에서 누구를 만났던가?’라는 노래로 인기를 끌었다. 손님들은 “코코! 코코!”를 외쳤고, 이때부터 ‘코코’가 그의 이름처럼 불렸다(그녀 자신은 사실상 이름이 되어버린 이 별명을 별로 내켜 하지 않았다).
물랭에서 그녀는 부유한 집안 출신 젊은 장교 에티엔 발잔을 만나 연인 관계가 됐다. 가수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걸 깨달은 샤넬은 발잔의 집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샤넬은 남성용 승마복과 스웨터 등을 여성용으로 개량하는 솜씨를 발휘했다. 발잔과 나란히 말을 타는 모습의 샤넬은 이제 고아원 출신의 수줍은 촌뜨기 아가씨가 아니었다. 발잔은 샤넬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게 도와준 셈이었고, 프랑스 상류 사회로 나가는 문을 터주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남성. 1910년 27살 때 샤넬은 피레네 산맥 북쪽 기슭에 있는 도시 포로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발잔의 친구인 영국인 폴로 선수 아서 카펠과 사랑에 빠졌다. 샤넬은 파리에 가게를 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는데, 발잔과 달리 카펠은 샤넬의 소망에 진지하게 관심을 보였다. 어느 날 샤넬은 “카펠과 함께 떠납니다. 용서해줘요”라는 말을 남기고 발잔을 떠났다, 그렇지만 이후에 샤넬과 발잔은 친구 사이를 이어나갔다. 샤넬은 발잔이 선물한 반지를 목걸이 삼아 평생 걸었다.
1910년 샤넬은 파리에 여성용 모자 가게를 열었다. 1913년에는 카펠의 도움으로 더 큰 가게를 뤼 캉봉 31에 열었다. 이 해 여름 도빌에 첫 번째 패션 부티크를 열었고, 1915년에는 비아리츠에도 개점했다. 샤넬은 디자인할 때 스케치를 하지 않았고 예닐곱 시간 넘도록 모델에게 디자인 중인 옷을 입혀보고 고치고 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모델들은 지쳐 쓰러지기 직전까지 가는 게 다반사였다.
영욕의 나날들,"나의 부티크는 나의 아이였다"
카펠은 1918년 영국 귀족의 딸과 결혼했지만 샤넬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듬해 교통사고로 느닷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샤넬은 “카펠을 잃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채울 길 없는 공허를 남기고 카펠은 떠났다”라는 말로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1923년 마흔 살의 샤넬은 영국의 대부호 웨스트민스터 공작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둘이 결혼하리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그녀는 일을 포기하고 공작부인으로 살아갈 마음은 없었다. 공작도 ‘웨스트민스터 공작부인’이 비즈니스에 종사한다는 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더구나 공작은 아이를 원했지만 샤넬은 아이를 가질 수 없었고, 그녀 자신도 이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 “나의 부티크, 그것이 나의 아이였다. 나는 사랑을 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남성과 사랑하는 의상 가운데 선택해야 했다. 나는 의상을 택했다. 내 인생에서 남성들이 없었다면 나의 ‘샤넬’이 가능했을지 가끔 의문이 들기는 하지만 말이다.”
1930년대는 샤넬의 영욕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MGM 창립자인 할리우드의 거물 새뮤얼 골드윈의 제의를 받아들여 1백만 달러를 받고 골드윈 휘하 배우들의 의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정점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1935년 결혼설까지 나돌게 된 동갑내기 연인 폴 이리브가 테니스를 하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샤넬은 참담한 마음 가운데서도 더욱 일에 몰두했다. 그러나 직원들이 파업을 벌이면서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 같은 시기에 다른 패션 디자이너들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아울러 히틀러가 일으킨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1939년에 결국 사업을 중단하게 됐다.
샤넬의 혁명 "여성의 몸을 자유롭게 하라"
샤넬은 몸을 꽉 조여 억압했던 코르셋에서 여성들을 해방시켰다. 무릎 근처까지 올라 간 치마를 통해 여성들을 땅에 닿는 긴 치마로부터 해방시켰고 편하고 활동이 자유로운 여성용 바지를 만들었다. 또한 손가방에 끈을 달아 어깨에 멜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은 당연시되는 여성 의상들이지만 당시로서는 혁명이자 해방이었다. 샤넬은 여성의 사회 활동이 확대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단순하면서 편하고 실용적인, 그러면서도 우아하고 기품 있는 스타일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 옷들은 바느질과 마무리가 완벽해 입는 이들마다 극찬했다.
휴양지 도빌에 첫 부티크를 연 샤넬은 한가로운 해변에서 여가 활동에 몰두하는 사람들에게 영감을 받아 이른바 도빌룩을 선보여 1920년대 최고 유행 패션으로 선풍을 일으켰다. 1926년에는 리틀 블랙 드레스로 다시 한 번 패션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별다른 장식은 물론 깃과 단추도 없는 이 검정 드레스는 오늘날까지도 하나의 전설이다. 여성의 풍만한 라인을 강조하는 것에서 벗어나 남성복 요소들을 도입, 단순한 편리성을 강조한 샤넬 정장도 또 하나의 혁명이었다. 장신구와 가방에서도 샤넬의 독창성은 유감없이 발휘됐다.
한편 향수의 대명사 ‘샤넬 넘버5’는 1921년 5월 5일에 처음 선보였다. 샤넬은 당시 연인이었던 러시아 망명 귀족 파블로비치의 소개를 받아 향수 전문가 에르네스트 보에게 첫 향수 제작을 의뢰했다. 보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샤넬은 1부터 5까지의 숫자가 붙은 샘플과, 20부터 24까지의 숫자가 붙은 샘플을 요구했다고 한다. 샤넬은 이 가운데 5번 샘플을 선택했고, 보가 향수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묻자 샤넬은 “넘버 5”라고 말했다 한다. 사넬은 진작부터 숫자 5를 자신에게 행운을 주는 숫자로 여기고 있었는데, 나중에 이 향수를 대대적으로 선보인 날도 5월 5일이었다. 샤넬은 피카소, 달리, 장 콕토, 스트라빈스키, 헤밍웨이, 콜레트, 그레타 가르보, 마를레네 디트리히, 그 밖에도 수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과 어울리며 때로는 그들을 후원했다. 예컨대 그녀는 장 콕토의 알코올 중독 치료비를 부담하는가 하면, 스트라빈스키가 <봄의 제전>을 작곡할 수 있도록 후원했다. 샤넬은 자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도움을 주려 하지 않았고, 대신 샤넬 자신이 도와야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을 드러나지 않게 도왔다. 전쟁 전 유럽 문화의 수도였던 파리에서 샤넬은 단연 문화예술계의 허브였다.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영원하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려면, 늘 달라야 한다.”
“남자들이란 모름지기 어린아이와 같다는 걸 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안 것이다.”
“패션은 복장에만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패션은 하늘에도 거리에도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이자 늘 새롭게 일어나는 그 무엇이다.”
“진정으로 럭셔리한 스타일이라면 편해야 한다. 편하지 않다면 럭셔리한 것이 아니다.”
“일할 시간과 사랑할 시간. 그밖에 또 다른 어떤 시간이 필요하단 말인가.”
“돈이 많은 사람들이 있다. 부유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 둘은 다르다.”
“우아한 기품은 새 옷을 입는 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패션은 건축이다. 그것은 균형과 비율의 문제인 것이다.”
“나는 럭셔리한 것을 사랑한다. 럭셔리한 것은 부유함이나 화려한 꾸밈에 있지 않다. 그것은 비속(卑俗)한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생겨난다. 비속함은 인간의 언어에서 가장 흉한 말이다. 나는 그것과 늘 싸우고 있다.”
샤넬을 형용하는 말로 가장 적합한 것은 ‘지칠 줄 모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지울 길 없는 아픈 기억 탓이었을까? 여러 차례 사랑에 빠졌고 주위에 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녀는 늘 외로웠다. 그리고 늘 일에 몰두했다. 일하지 않는 일요일이 그녀에게는 가장 견디기 힘든 날이었다. 그녀는 언젠가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친구들! 사실 친구란 없어.”
1971년 1월 10일 일요일이었다. 산책을 하고 평소보다 훨씬 더 심한 피로를 느끼며 침대로 향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외쳤다. “숨을 쉴 수가 없어! 창문을 열어줘!” 놀란 가정부가 샤넬의 방으로 뛰어갔다. “이것 봐, 이렇게 죽는 거야.” 그녀의 마지막 말이었다. 발렌시아가, 입 생 로랑, 피에르 발맹, 살바도르 달리 등이 애도하는 가운데 샤넬은 스위스 로잔에 묻혔다. 그녀의 육신은 묻혔으되 그녀가 창조한 스타일은 불멸의 이름을 획득했다. “사람들이 샤넬 패션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샤넬은 다른 그 무엇도 아니라 하나의 스타일이다. 패션은 철 지난 것이 되어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타일은 결코 그렇지 않다. 패션은 사라지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5.05.18 07: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