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때로 우리가 결코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장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무지 탈출구가 없을 때, 울부짖고 몸부림쳐도 헤어날 방법이 없어 보이는 그런 절박한 순간을 맞이합니다. 돌아보니 저도 그런 순간이 몇 번 있었습니다. 사방이 높은 절벽으로 둘러 쌓여 있는 기분, 아무도 도와줄 사람 없는 듯한 외로운 처지, 차라리 이쯤에서 삶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드는 절박한 순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 그 역시 딱 그랬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목숨이 붙어있었지만, 호흡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사실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너무나도 끔찍했던 여행길, 길고도 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느라 그의 영혼과 정신은 죽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에게 제대로 된 사람 대접해주는 사람 한 명 없었습니다. 어디가나 천덕꾸러기요 애물단지였습니다. 사람들은 대놓고 그를 향해 손가락질했습니다. 평생에 걸친 그의 삶은 모욕과 멸시, 천대와 비아냥거림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렇게 바르티매오는 존재하지만 존재를 부정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바르티매오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구걸을 위해 하루 온종일 길가에 앉아있어도 관심 가져주는 이가 단 한명도 없었는데, 기껏해야 동전 한 닢 깡통 속에 던져주는 것이 다였는데, 예수님께서 바르티매오를 가까이 부르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상하게 이것 저것 물어봐주십니다. 측은지심 가득한 음성으로 이름은 몇 가지를 물어보겠죠? 이름이 뭐냐? 언제부터 이렇게 됐냐? 사는 곳은 어디냐? 오늘 예리코의 눈먼 이는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 삶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해, 결국 우리가 구원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정확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목이 빠지게, 정말 간절하게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기다림이 얼마나 간절했던지 마치 구조를 기다리는 난파선처럼, 구급차를 기다리는 응급환자처럼,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따라가 보십시오. 그가 얼마나 강렬히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의 오심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또 그의 예수님을 향한 기대감, 믿음은 또 얼마나 컸었는지 모릅니다. 그의 안테나는 오로지 한 방향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만나 뵙고 말겠다는 강한 열의, 그분께 도움을 청해보겠다는 열의, 그분은 반드시 나를 더 나은 삶에로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강한 확신, 그 능동성, 적극성이 그의 외침 안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 부르짖음이 얼마나 컸던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갑작스런 외침, 돌발 상황 앞에 사람들은 당황한 나머지 조용히 좀 하라고 나무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단 한 번의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더욱 큰 소리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절박하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새 삶을 향한 눈먼 이의 열정, 적극성, 간절함이 드디어 하늘에 닿습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와 만나십니다. 시각 장애로 인해 비참하고 혹독했던 그의 지난 삶을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께서 따뜻한 목소리로 묻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기다렸다는 듯이 눈먼 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예리코에서 그러하셨듯이 우리 앞에 멈추셔서 우리 얼굴을 내려다보시며, 우리의 인생 전체를 바라보시며 똑같이 질문 하나를 던지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오늘 우리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오늘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