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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
장식장을 버리고 / 박 찬 |
장식장을 버렸습니다. 떨어져 덜컥이는 문짝을 청테이프로 길게 입막음 하고 동사무소에 |
들러 오천 원짜리 스티커를 사왔습니다. 저승길 노잣돈치곤 값싼 그 몸값이 안쓰러워 |
쉽사리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한참을 그와의 이별에 매달립니다. 모서리를 밀치고 |
튀어나온 못이 허리를 꺾어 작별을 고합니다. 아내와 함께 시집와 십 여년, 그 사이 |
고장난 어깨가 삐걱거립니다. 긁히고 벗겨져나간 살점들과 아이들의 낙서자국, 더 이상 |
채울 수 없는 몸은 뼈대만 앙상히 늙어갑니다. 그 안에 담아두었던 신혼의 이야기며 |
육아일기며 단란했던 한 가족의 앨범들. 그리움을 이야기하며 많은 날들을 지탱해온 |
가슴에 아쉬움이 복받쳐 오르고, 돌아오는 길 모처럼 어머니께 안부전화를 넣었습니다. |
당신의 신경통은 다 나았다 걱정마라하시며 혼자 있는 자식걱정에 마음 졸이시는 어머니. |
밥은 제때 챙겨먹는지 빨래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미국에 있는 아이들과 애 엄마는 |
잘 지내는지…. 비워지지 않는 어머니의 걱정에 할 말 다 못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
습관처럼 올려다보는 하늘. 아메리카로 가는 비행기의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입니다. |
경남일보 |
허氏의 구둣방 / 이 미 화 |
발 끝에 달을 달고 저녁 강을 건너고 있는 허氏 |
구름처럼 떠돌았으므로 그의 생은 |
한쪽만 유난히 닳은 구두처럼 삐뚜름하다 |
그의 구두처럼 다 허물어져가는 |
옥봉동 산 1번지 아파트에 |
조등처럼 별이 걸릴 때 저녁하늘은 |
가난한 마을의 착한 지붕을 건너가면서 |
지상의 가장 낮은 바닥부터 따뜻하게 어루만져준다 |
이동전화기 판매점에 다니는 착한 처녀의 |
구두 뒷굽을 갈아 끼우던 허氏의 남루한 저녁에 |
잠깐 화사한 웃음이 번진다 |
이동식 컨테이너 박스에 맞춘 그의 굽은 등 뒤로 |
따각 따각 처녀의 발걸음이 이동전화기 전화 연결음으로 터진다 |
중심을 놓고 뒷굽을 맞춘 구두가 흔들린다 |
일용할 하루의 노동이 땀 내음 밴 구둣방을 넘보기도 하지만 |
늘 기우뚱 한쪽으로만 기우는 그의 세상에서 |
수선 중인 구두는 |
기운 없는 그의 한 쪽 무릎에서 완성되는 절망이 키운 꿈이다 |
다시 언제 그의 세상이 흔들릴지 모르지만 이미 구두 뒤축이나 |
밑창만으로 키워 놓은 |
환한 세상이 그에게선 자라고 있다 |
하나 둘 찾아와 박힌 별들의 뒷자리로 들던 그가 |
창문에 걸린 어둠을 후다닥 걷어내고 |
달빛 속에서 주춤거린다 |
볼이 넓고 우직한 신발 속 그의 한쪽 발이 |
나머지 발의 오늘을 타전한다 |
경상일보 |
이팝나무에 비 내리면 / 황 종 권 |
당신은 육지를 떠나기 전이면 뒤뜰에 있는 이팝나무 아래로 불러내곤 했지요. 이팝나무 |
한 뼘 위를 회칼로 그으며, 그만큼 자라면 온다고 무슨 굳센 다짐처럼 말하곤 했지요. |
하루에도 몇 번이고 이팝나무 아래에서 키를 재어 보았는데요. 키 대신 등짝에 파도소리가 |
자라곤 했었지요. 해가 기울수록 길어지는 그늘은 내가 미리 살아버린 주름이었을까요. |
이팝나무는 꽃을 버릴 때마다 나이테가 늘어갔던 거예요. |
먼 바다에서 당신배가 물결을 가를 때마다 일어나는 물살이, 제가 엉덩이 깔고 앉아 있는 |
포구 끝에도 닿는 것일까요. 하얗게 터지는 물살에선 목욕탕 스킨냄새가 나네요. |
바다가 물결을 가두는 것이 아니라, 물결이 바다를 그물처럼 가두고 있단 생각을 했어요. |
바다가 당신의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다의 것이었거든요. |
어둠이 달을 꽉 가두고 있는 밤은 비가 내렸지요. 어김없이 부엌은 생선 굽는 냄새에 몸살을 |
앓았고요. 저녁상에 올라 온 민어를 뒤집다가 손등을 얻어맞기도 했어요. 하늘에서도 |
물고기가 튀는 것일까요. 유리창에 맺히는 빗소리에선 심한 비린내가 나요. 그런 날은 |
이불속에서 뒤척거리는 일도 조심스러워요. 나는 당신에게 수평선을 그어 주던 아이였을까요. |
당신의 주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달의 인력이 오늘밤은 시린 손가락으로 내 발목을 |
잡는 걸요. 밀물 든 바닷가에선 빗소리가 주저 앉고요. 잃어버린 당신의 키는 언제쯤 |
만조를 이룰 수 있을까요. 사리※와 같은 당신과 나와의 거리에선 빗소리가 쌓이지요. |
비가 오는 밤은 달이 이빨이 아픈 꿈을 꾸는 건가 봐요. 이팝나무에 빗소리를 그어놓으면 |
우린 한 뼘 지워질 수 있을는지요. |
영남일보 |
구름의 화법 / 하 기 정 |
구름은 여태 제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어 |
형상은 당신 머릿속에나 있지 |
내가 만들 수 있는 건 물방울이 아니야, 보다 가볍지 |
당신의 어깨를 적실 수도 |
당신의 입가를 핥을 수도 있지 |
그러니 나를 구름이라 이름 짓는 건 아주 치명적이지 |
네가 구름이라고 부르는 것들, 네가 |
토끼, 라고 부르면 난 하마처럼 하품을 해 네가 |
고양이, 라고 부르면 난 호랑이처럼 포효하지 네가 |
의자, 라고 부른다면 금세 침대를 만들어 줄 수도 있어 |
만지면 폭삭 꺼지는 먼지버섯, 그러니 나를 |
버섯이라 불러도 좋아 |
형상은 당신 눈 속에나 있지 |
그러니S라인 B라인은 네 이름 |
무대가 아닌 곳에서만 춤을 출거야 |
내 음악은 내 귀로만 흘러들어 언제든지 |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나를 |
이해하려 시도한다면 그것은 서툰 오해 |
나를 만지려든다는 건 아주 절망적이야 |
롤러코스터를 생각한다면 모르지 |
추락은 오로지 빗물, 눈물 |
행여 구름을 담아서 팔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 |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의 시선을 구부리는 일 |
악어, 라고 하면 도마뱀이 되어줄래? |
고래, 라고 하면 돛단배가 되어줄래? |
나에게 나를 너, 라고 불러줄래? |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
무등일보 |
제비꽃 향기 / 김 은 아 |
생선뼈만 남은 개 밥그릇에 |
개미가 아우성이다 |
시간이 지나자, 삶의 살을 뼈만 남긴 채 |
말라가는 빈 밥그릇에서 |
시간을 붙잡고 보시를 하는 중이다 |
한 때 |
거친 바다를 헤엄쳐 |
푸른 꿈을 키웠을 너 |
어쩌자고 사람들 입 속까지 들어와 |
피와 살이 되고 마침내 개 입에서 |
생을 마감하는 너에게서 |
제비꽃 향기가 난다 |
햇볕이 개 밥그릇을 헤집는데 |
생선뼈는 온 몸으로 |
마지막 숨을 고르고 있다 |
비워라, 그릇 |
전남일보 |
먼지 / 김 혜 원 |
1. 무게 |
체중계를 꺼내려다 |
나보다 먼저 올라앉은 먼지를 본다 |
저것도 무게라고 저울 위에 앉았을까 |
털어내는 순간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
저 가뿐한 내공 |
내가 눈금처럼 꼼꼼히 |
몇 장의 졸업장과 얼마간의 통장으로 |
몸집 불리는 동안 너희는 세상을 |
깎고 갈고 부서지며 삭으며 살아왔구나 |
저울 위에 앉아 제 발자국 헤아리다가 |
세상 변두리 어디쯤 다시 찾아 날아올랐겠지 |
버려야만 이루어지는 저 가뿐한 무게 |
달 수조차 없는 그 삶에 |
문득 마음 무겁다 |
2. 높이 |
먼지도 세월을 견디면 높이를 갖는구나 |
어둠 속에서 말을 잊다보면 눈이 밝아지는 법, 나는 |
저 허름한 생의 목록을 다 적을 수 있을 것 같다 |
양말이 벗어놓은 하품 바스러진 각질의 한숨 비틀대던 머리카락과 맥없이 흘러내리던 |
낡은 옷의 넋두리 나뒹굴던 보풀의 푸념 몇 낱 희미해진 거울의 깨진 비명도 몇 개, 그런 것들이 |
그런 것들이 뒷걸음쳐 이 구석 찾았을 게다 |
내일이 꼭 오리라 믿었을 그들 |
나는 오지 않은 날의 달력을 찢어 |
숨죽여 쌓인 어제의 높이를 가만히 들어 올린다 |
3. 길 |
차 안에 쌓이던 먼지 |
어느 날 흔적이 없어졌다 |
닦은 적도 없는데 저희끼리 뭉쳤다가 |
알갱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나 보다 |
어디든 다시 떠돌고만 싶은 것 같아 |
조심조심 발판을 걷어 밖에 뿌려준다 |
순간 바람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서 |
일제히 질주하는 저 하얀 맨발들 |
길이란 열망이란 얼마나 서늘한가 |
천 길 절벽은 허공에도 있어 |
지상으로 추락하여 얼룩지는 생이여 |
흙물이 제 지나온 길 가라앉히듯 |
빗물에 씻겨 다시 먼 길 떠나는구나 |
밤하늘에 담겨 반짝반짝 눈을 뜨는 별들도 |
떠나온 별을 찾아 몇억 광년 속으로 |
저렇게 먼지처럼 뛰어든다던데 |
나 이제 몇십 킬로의 동력을 켜고 |
내게 남은 시간의 벌판으로 달려간다 |
불교신문 |
뼈의 기원 / 안 병 호 |
문득, 뼈가 시려오면 |
내 뼈의 아득한 시원을 찾아 |
눈과 바람의 길을 걸어 수백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
뼈대 있는 집안의 자손이라는 것이 |
대체로 나의 문명이지만 |
그것은 비석에 판각되거나 정의되어진 것만이 아닌 |
단단한 그 무엇이 내 속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
문장과 말 속에도 뼈가 있다하고 |
문중의 아재 한 분은 |
바람조차 투명한 뼈를 지니고 있다하므로 |
뼈는 삼라만상의 근원이다 |
모든 족속은 그 조상으로부터 |
몇 개의 맑고 흰 뼈를 물려받아 사는 동안 |
또 한 생이 고요히 마감되는 것이다 |
“뼈가 시릴 적엔 몇 모금 음복술로 덥히면서 오백년 전, 통정대부 할아버지를 만납니다. |
삼십대에 무슨 사화로 졸(卒)하신 당신, 처자식은 관노가 되고 그 때 당신의 눈물은 |
눈발이 되어 사방 백리까지 날렸습니다. 그때부터 당신은 뼈마디마다 수수눈꽃을 피우면서 |
아버지와 저의 뼈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눈발 속에도 맑은 뼈가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
아버지가 졸(卒)하시던 그 때처럼” |
아버지는 신발공장 공원에서 출발하여 |
생의 마지막 즈음 공사판 반장직에 올랐는데 |
젊은 나이에 병으로 졸(卒)하셨다 |
그 때 아버지는 뼈만 남은 문양으로 |
어린 내 손을 꼭 잡은 채, 흐린 물기를 보였는데 |
물기는 뼈를 타고 흐르다 서서히 결빙되고 있었다 |
어린 나는 앙상한 뼈의 모습이 |
너무 무섭고도 생경해 입관 하던 날조차 |
차거운 뼈를 따습게 데우지 못했다 |
그 날에도 먼 곳에서부터 눈발이 날려 왔고 |
오래지 않아 강아지처럼 여린뼈를 가진 |
내 아이가 세상에 나왔다 |
“아버지, 오늘 밤 수북이 눈이 내립니다. 눈송이 송이마다엔 당신의 눈물이 담겨있다는 |
것을 잘 압니다. 북편에서 날리는 눈발에는 종가에 계자로 와 당신 집안은 절손 된 9대조 |
조부님의 눈물도 보입니다. 저와 아이는 오늘 같은 밤이면 뼈를 살포시 맞대고 세상을 |
꿈꿉니다. 그래서 눈 오시는 밤은 참으로 마음 따습습니다.” |
뼈가 잘 맞물려서 사계절을 보냈다 |
펼쳐진 시간 속에서 |
나의 뼈는 좀 더 유연해지고 |
아이의 뼈는 좀 더 옹골차졌다 |
몸속의 뼈들을 가지런히 정돈하여 |
순하게 낮추는 오늘, |
뼈마다 하얀 풀꽃이 피어난다 |
향불을 피우는데 음력 시월 을해(乙亥) |
이른 눈이 축문과 함께 투명하게 날린다 |
기서유역氣序流易 |
상로기강霜露旣降 |
첨소봉영瞻掃封塋 |
불승감모不勝感慕 |
근이謹以 |
청작서수淸酌庶羞 |
지천세사祗薦歲事 상尙, |
향饗 |
“당신들께서는 하얗게 뿌려지는 눈으로 혹은 투명한 축문의 곡조로 살아오십니다. 맑은 눈발 |
속 나폴 나폴 떠다니는 어린 것이 또 다른 뼈의 기원임을 깨닫고 있습니다. 생이 다하는 |
날까지 뼈를 추스르며 어린 뼈를 돌보려합니다. 아이를 가만히 껴안아봅니다.” |
국제신문 |
문탠로드를 빠져나오며 / 박 진 규 |
달이 저 많은 사스레피나무 가는 가지마다 |
마른 솔잎들을 촘촘히 걸어놓았다 달빛인 양 |
지난 밤 바람에 우수수 쏟아진 그리움들 |
산책자들은 젖은 내면을 한 장씩 달빛에 태우며 |
만조처럼 차오른 심연으로 걸어들어간다 |
그러면 이곳이 너무 단조가락이어서 탈이라는 듯 |
동해남부선 기차가 한바탕 지나간다 |
누가 알았으랴, 그 때마다 묵정밭의 무들이 |
허연 목을 내밀고 실뿌리로 흙을 움켜쥐었다는 것을 |
해국(海菊)은 왜 가파른 해변 언덕에만 다닥다닥 피었는지 |
아찔한 각도에서 빚어지는 어떤 황홀을 막 지나온 듯 |
연보라색 꽃잎들은 성한 것이 없다 |
강풍주의보가 내려진 청사포 절벽을 떨며 기어갈 때 |
아슬아슬한 정착지를 떠나지 못한 무화과나무 |
잎을 몽땅 떨어뜨린 채 마지막 열매를 붙잡고 있다 |
그렇게 지쳐 다시 꽃 피는 것일까 |
누구나 문탠로드를 미끄덩하고 빠져나와 그믐처럼 시작한다 |
*문탠로드(Moontan Road)-대한팔경의 하나인 해운대 달맞이언덕에서 달빛의 |
기운을 받으며 산책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된 2.2㎞의 산책로. |
중앙문예 |
폭염 / 박 성 현 |
아버지가 대청에 앉자 폭염이 쏟아졌다. |
족제비가 우는 소리였다. 아버지는 맑은 바람에 |
숲이 흔들리면서 서걱서걱 비벼대는 소리라 말했다. |
부엌에서 어머니와 멸치칼국수가 함께 풀어졌다. |
땀을 말리며 점심을 먹는다. |
아버지의 눈을 훔쳐본다. |
여자의 눈을 쳐다보면 눈이 뽑힌다는 |
아랍의 무서운 풍습을 말한다. 석류가 터질 때 |
아버지는 다시 아랍으로 갔다. 그리고 어머니는 |
빗장을 단단히 채우고 방을 나오지 않았다. |
세밑까지 어머니는 화석이 되어 있을 것이다. |
기다리면 착해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
내게는 마음이 없고, 문도 없었던 겨울이었다. |
한낮 / 박성현 |
버스가 서울역사발물관 앞에 멈췄다. 된장국 냄새가 솔깃하다. 골목을 돌고, 다시 골목 |
끝으로 가면, 저편에 집 한 채 기우뚱 있다. 영산홍이 피고, 떨어졌다가 다시 피는 |
5월에도 그 집은 비스듬히 서 있다. |
녹슨 파란색 철제 대문을 지나면 텃밭 같은 마당에 큰 개 한 마리 햇볕을 쬐고 있다. |
몇몇 노송이 한 세월 돌아가면서 입고 다녔던 장삼처럼 곱게 펴져 있다. 시멘트 |
담 가까이 돋아난 풀잎이 흔들린다. 허기진 마음이 풀잎을 따라 바닥으로 잠긴다. |
풍경 소리가 난 듯했으나 바람이 항아리를 울리고 간 소리다. 항아리에는 된장이 익어간다. |
대청마루에 모시적삼을 입은 노부부가 나란히 세모잠을 잔다. 수백 년 전의 기억은 |
모조리 잊히지만 한낮에는 늘 되살아났다. |
우체부 김 씨가 등기소포를 가지고 초인종을 누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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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