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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나홍좌[羅弘佐]의 신도비명(神道碑銘) 최석정(崔錫鼎)
한성좌윤나공신도비명 漢城左尹羅公神道碑銘
내가 약관(弱冠)에 벗과 같이 명례방(明禮坊)에 있는 해주 목사(海州牧使) 나공(羅公, 나성두(羅星斗))의 집에 가서 과거 공부를 하고 있을 때 목사공의 조카인 어떤 소년이 찾아왔는데, 바로 공이었다. 공의 나이 겨우 17, 18세쯤 되어 보였으나 기개가 뛰어나 비범(非凡)하였으므로 마음속으로 기특하게 여기었는데, 그 뒤에 나는 문과(文科)로 나가고 공은 무과(武科)로 진출하였다. 병자년(丙子年, 1696년 숙종 22년)에 내가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있을 때 임금에게 아뢰어 공을 승지(承旨)로 추천하려고 하던 차에 공이 2품으로 승진된 바람에 그만두었다. 기축년(己丑年, 1709년 숙종 35년) 가을에 공이 수원(水原)에서 사임하고 돌아와 세상을 떠났는데, 염(殮)을 하기 전에 내가 찾아가 조문하고 장례를 치를 때 만사(挽詞)를 지었으며 이장(移葬)할 적에도 시를 지어 애도하였다. 공의 아들 나억구(羅億耈)가 상복(喪服)을 입고 나에게 찾아와 요청하기를, “저의 선친(先親)이 불행하게도 세상을 떠나자 집안일이 쇠락(衰落)해졌습니다. 묘소에 비를 세워 기록하지 않을 경우에는 선친의 사적이 날로 인멸되겠으니, 선생께서는 세의(世誼)를 추념하여 한마디 말씀을 아끼지 않았으면 합니다.”라고 하기에, 내가 ‘죄를 지고 물러나 오랫동안 필연(筆硯)을 접하지 않았다’고 사양하였으나 그가 10여 차례나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요청하였으므로 끝내 저버릴 수 없었다.
행장(行狀)을 살펴보니, 나씨(羅氏)는 본래 나주(羅州)의 큰 성씨였는데, 후세에 안정(安定)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아 그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나식(羅湜), 나숙(羅淑) 형제가 모두 을사 사화(乙巳士禍)를 당하였고 그의 막내아우 나익(羅瀷)은 내한(內翰)으로 교리(校理)의 벼슬을 추증(追贈)받았다. 그 뒤 2세에 이르러 나급(羅級)은 보덕(輔德)으로 영의정(領議政)의 벼슬을 추증받았는데, 이분이 공의 증조이다. 할아버지 나만갑(羅萬甲)은 참의(參議)로 좌의정(左議政)의 벼슬을 추증받았는데, 고고한 명망과 곧은 기개로 일세의 존중을 받았고 호는 구포(鷗浦)이다. 아버지 나성원(羅星遠)은 학문을 부지런히 하고 행실을 가다듬었으며 동춘(同春) 송 선생(宋先生, 송준길(宋浚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일찍 죽었는데, 공의 귀로 인해 호조 참판(戶曹參判)의 벼슬을 추증받았다.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권순창(權順昌)의 딸로서 기축년(己丑年, 1649년 인조 27년) 8월 2일에 공을 낳았는데, 유복자(遺腹子)였다. 공의 휘(諱)는 홍좌(弘佐)이고 자(字)는 제백(濟伯)인데 백부(伯父) 목사공(牧使公)의 슬하에서 자랐다. 공이 어려서부터 활달하여 법도에 얽매이지 않았고 조금 장성하자 동춘 선생에게 찾아가 글을 배웠다. 이윽고 붓을 던지고 선전관(宣傳官),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 경력(經歷)과 훈련원 정(訓鍊院正), 내금위장(內禁衛將), 첨추(僉樞), 내승(內乘), 훈국 중군(訓局中軍), 동추 겸총관(同樞兼摠管), 총융사(摠戎使), 훈련 도정 겸 주사 당상(訓鍊都正兼籌司堂上), 어영 대장(御營大將)을 염임하고 특별히 한성 좌윤(漢城左尹)에 임명되었다. 외직(外職)은 중화 부사(中和府使), 서흥 현감(瑞興縣監), 봉산 군수(鳳山郡守), 여산 토포사(礪山討捕使), 숙천 부사(肅川府使), 춘천 방어사(春川防禦使), 정주 목사(定州牧使), 해미 현감(海美縣監), 영흥 부사(永興府使), 함경남도 병사(咸鏡南道兵使)를 거쳐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로 전직되었는데, 구관(舊官)을 전송하고 신관(新官)을 맞이할 때 폐단이 있다고 하여 유임되었다. 기묘년(己卯年, 1699년 숙종 25년) 과거로 인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났는데, 경진년(庚辰年, 1700년 숙종 26년)에 공이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명을 받고 다스렸다. 그때 마침 옥중(獄中)에서 나온 익명(匿名)의 글에 ‘과수(科囚)의 공초에 어떤 시관(試官)이 부정을 저지른 상황을 고발하였으나 포도청에서 그 내용을 삭제하고 아뢰지 않아 귀와 눈으로 전파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공이 체포되었는데, 이는 당인(黨人)이 때를 틈타 거짓으로 날조하여 사실로 만들려고 한 것이었다. 언로(言路)에서 심지어 공에게 형벌을 가하여 신문할 것을 누차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는데, 해가 넘도록 옥중에 갇혀 화를 헤아릴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노모(老母)가 있으니만큼 화복(禍福)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사정(私情)은 간절하지만 결코 무고한 사람을 빠뜨리고 마음을 굽혀 화를 모면할 수 없다.”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대부분 공이 억울하다고 말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용천(龍川)으로 유배되었다가 3년이 되어 사면령(赦免令)으로 인해 특별히 사면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경연(經筵)의 신하가 또다시 공의 억울한 사정을 아뢰자 복권(復權)을 시키고 춘천 부사(春川府使)로 임명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이어 수원 방어사(水原防禦使)로 임명하자 공이 사양하다 못해 부임하여 1년간 있다가 교체되었다. 공을 처음에 수원에다 장례를 치렀다가 임진년(壬辰年, 1712년 숙종 38년) 봄에 과천(果川) 명달리(明達里) 동쪽으로 향한 자리에다 이장(移葬)하였다.
공은 충성과 효도를 천성으로 타고났으며 체격이 위대하고 기품이 뛰어났으며, 민첩한 지식과 넓은 도량이 있는데다가 마음이 강하고 굳세어 빼앗을 수 없었다. 어머니를 기쁜 얼굴로 섬기면서 환경의 조절에 정성을 다 쏟았다. 사람들이 청년에 장수가 되는 것을 매우 부러워하였으나 변방 곤수(閫帥) 자리가 비어 전조(銓曹)에서 여러 번 공을 추천할 때마다 굳이 사양하고, 어머니의 봉양을 위해 반드시 내지(內地)의 자리를 구하였다. 평소에 슬하를 떠난 적이 없었고 변방에 임명되어도 어머니를 모시고 갔다. 여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우애가 매우 깊었다. 벼슬살이할 때 자신을 청렴과 검소로 가다듬고 정사를 간엄(簡嚴)하게 하였으며, 병폐를 제거하고 피폐한 것을 보충하는 등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간사한 관리가 감히 방자한 짓을 하지 못하고 백성이 안도하였다. 송사(訟事)를 심리할 때 마음이 공평하고 변론이 명석하였으므로 이웃 고을에 적체된 옥사(獄事)가 많이 들어왔는데, 한번 판결을 내리면 물러가 이의가 없었다. 특히 구휼(救恤)을 잘하여 남긴 문서가 전임(前任)보다 배나 되었고 가는 곳마다 송덕비(頌德碑)가 많이 세워졌으며, 공이 세상을 떠나자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부조를 하여 장례를 도와 주었으니, 여기에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남겼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한성부(漢城府)에 있을 때 법을 고수하여 동요하지 않고 금지의 조목을 밝혀 주의를 시켰으며, 거처하는 집에 담장이 무너져도 관청의 노복들을 시켜 수축하지 않았다. 장수로 있을 때 위엄과 자혜를 병행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매우 얻었고, 기율에 관한 일일 경우에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고 다스렸다. 장교(將校)들을 임명할 때 한결같이 청탁을 따르지 않고 오직 그 사람의 능력을 보아 하였다. 군문(軍門)에 공장대(工匠隊)가 있었으나 사람의 요구를 절대 들어주지 않았고, 군수(軍需)를 빌려주는 것을 일체 막았다. 오직 군사의 육성과 군량의 저축에 전념하여 사전의 대비를 하였으므로, 평론가들이 ‘최근 장수 중에 마땅히 공을 최고로 쳐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직책에 오래도록 있지 못하였으므로 군사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었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피차의 장벽을 두지 않았고, 후진을 이끌어 성취한 사람이 많았는가 하면 곤궁에 처한 사람을 보면 제때에 구제하지 못하지나 않을까 여기었다. 백성을 다스리고 군사를 거느린 지 30여 년이 되었으나 형벌을 남용하여 인명(人命)을 상한 적이 없었다. 평소 강개한 바가 많아 혹시 조정의 잘못된 일을 들으면 주먹을 불끈 쥐고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남쪽 병영(兵營)에 부임하여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을 때 사간(司諫) 유상재(柳尙載)가 연석(筵席)에서 논하여 구제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사간의 말이 옳다. 내가 그 사람을 보니, 결코 보통 무부(武夫)가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 뒤에 대각(臺閣)의 신하가 임금에게 아뢰면서 ‘아무개는 집에서 효도하고 벼슬에 임해 청백하므로 보는 사람들이 모두 이의가 없습니다.’라고 칭찬하였다. 공의 부음(訃音)을 보고하자 임금이 조회에 나와 슬퍼하며 말하기를, “아무개는 무장(武將) 가운데 쓸 만한 사람이었는데 뜻밖에 죽으니, 슬픔과 애석함을 금할 수 없다.” 하고 호조(戶曹)에 명하여 장례에 쓰는 여러 가지 물품을 후히 주게 하였으니, 세상에 드문 은전(恩典)이었다. 이것들은 모두 공의 개략적인 행적인데, 임금의 총애가 생사간에 거듭 가해졌으니, 여기에서 공의 시종을 볼 수 있다.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金氏)인데, 그 선조는 신라(新羅) 왕자 김흥광(金興光)이고, 아버지 김우경(金宇慶)은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이다. 온화하고 정숙하며 유순하고 아름다워 부도(婦道)가 잘 갖추어졌고 측실(側室)의 자녀들을 자신이 낳은 자녀처럼 사랑하였다. 공과 같은 해에 낳고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 공의 곁에 묻히었다. 측실에서 난 나억구(羅億耈)가 승중(承重)하였는데, 한평군(韓平君) 이기태(李基泰)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둘째 아들 나억령(羅億齡)은 통제사(統制使) 정홍좌(鄭弘佐)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셋째 아들은 나억경(羅億慶)이다. 큰딸은 박창문(朴昌文)에게, 둘째 딸은 김도침(金道沈)에게 시집갔다. 나의 선조 지천공(遲川公, 최명길(崔鳴吉))은 구포공(鷗浦公, 나만갑)과 교분이 매우 친밀하였고 나는 공과 문무(文武)의 길은 다르지만 실로 3대 동안 서로 왕래하는 의리가 있었다. 공의 종형(從兄) 나현도(羅顯道)는 바로 나의 친한 친구인데, 공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나현도가 이어 세상을 떠났으므로 옛날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고려에 빛난 나씨 관향이 안정(安定)이라 장음정(長吟亭, 나식(羅湜))이 아우 있어 직필(直筆)을 잡으니, 그 이름 익(瀷)으로 영예의 증직 있었도다. 윤침(允忱)은 애석하게 학유(學諭)로 끝났도다. 보덕(輔德, 나급(羅級))을 탄생하니 덕행으로 칭송됐고 구포(鷗浦, 나만갑(羅萬甲))가 대를 이어 경사가 쌓인지라, 염직(廉直)과 문아(文雅)로 명망이 융성하니 양대에 내린 증직 모두 다 의정(議政)이네. 학문에 힘썼던 선친 일찍 죽었는데 공 바로 유복자로 어려서 뛰어났지. 무과에 뜻 굽힌들 병될 것이 뭐 있겠나? 평탄한 길거리에 천리마 달리었지. 열 차례 주군(州郡) 맡아 정사가 깨끗하니 기아(飢餓)를 구제하고 부패가 단속됐지. 먼 지역의 곤수(閫帥) 맡아 울타리가 되었고 두 병영(兵營) 총괄하여 병권을 장악했네. 군율을 잘 시행하여 엄하고도 정연했고 주사(籌司)에 참여 제어해 묘당(廟堂)에 잘 협찬했네.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되어 법령을 밝히었고 과거(科試)에 옥사(獄事) 있어 위임받아 심리하니, 기회 틈타 익명서로 교묘하게 중상하자 대각에서 형벌로 고문하자 주청했네. 무함한 사람 시켜 공 옳지 않다 하였으나 놀라거나 아부 않고 바른 대로 대답했지. 깊숙한 옥중에서 한 해를 넘기었고 실책으로 3년 간 변방에 귀양 갔는데 현명한 임금이 살피어 사면했지. 수원의 큰 고을에 토호들이 날뛰니 공 명해 다스리어 백성들이 구가했지. 국방에 소홀하여 안일(安逸)에 빠지니 간성(干城)처럼 의지해 외침(外侵)에 수응했지. 갑자기 세상 떠나 끝까지 못 다 쓰니 전후의 포상에 어명(御命)이 찬란했지. 행의(行義)와 지절(志節)은 사람들의 존경한 바여서 내 그 묘도(墓道)에 비명 지어 먼 후세에까지 밝게 드러내노라.
漢城左尹羅公神道碑銘
記余弱冠。與友生就明禮坊海州牧使羅公第。治擧子業。牧使公從子一少年來訪。卽公也。年纔十七八。觀其氣岸磊落不群。心奇之。爾後余籍文譜。公以武進。歲丙子。余長東銓。白于上。將擬公承旨。未幾。公陞二品。未果行。己丑秋。公自水原遞歸以沒。未棺斂。余往哭之。及葬。詩以相挽。其移葬。亦以詩哀之。公之子億耇纍然服衰來請曰。吾親不幸棄世。家事旁落。苟墓無志表。先父事蹟。將日就湮昧。願先生追念世好。毋靳一言。余辭以抱罪屛伏。久不治筆硯。涕泣申請。往返十數。有不可終孤。按狀。羅氏本羅州大姓。後世演食于安定。仍以爲貫。有諱湜,淑兄弟。並被乙巳士禍。其季諱瀷。官內翰贈校理。二世而至諱級。輔德。贈領議政。是爲公之曾祖。祖諱萬甲。參議。贈左議政。淸名直節重一世。號鷗浦。考諱星遠。劬學飭行。遊同春宋先生門。早沒。以公貴贈戶曹參判。母曰安東權氏。同知中樞順昌之女。以己丑八月二日生公。卽遺腹也。公諱弘佐。字濟伯。鞠於世父牧使公。少跅弛不拘繩檢。稍長。就學於同春。旣而投筆。歷宣傳官,摠府都事,經歷,訓鍊正,內禁將,僉樞,內乘訓局中軍同樞,兼摠管摠戎使,訓鍊都正。兼籌司堂上,御營大將。特授漢城左尹。外則中和府使,瑞興縣監,鳳山郡守,礪山討捕使,肅川府使,春川防禦使,定州牧使,海美縣監,永興府使,咸鏡南道兵使。遷三道統制使。以迎送有弊仍任。己卯。科獄起。庚辰。公以捕盜大將。受命按治。會有飛書出獄中。謂科囚爰辭。發告一試官行私狀。捕廳删不奏。傳播耳目。公遂被逮。蓋黨人欲乘時誣捏。以實其事。言路至請刑訊。屢啓而不允。經年牢狴。禍將不測。或曰。老母在。禍福不可不慮。公謂私情雖切。決不忍陷無罪。骫心圖免。人皆韙之。諸臣多以公冤爲言。猶謫配龍川。越三年。因赦特命全釋。其後筵臣又白其冤。命敍復除春川。辭不赴。繼授水原防禦使。力辭不獲。莅任期歲乃遞。公初窆水原地。壬辰春。移葬果川明達里向卯原。公天性忠孝。貌魁梧。氣稟英偉。有敏識弘量。而內剛毅難奪。事太夫人。愉婉節適。盡其誠。黑頭秉銊。人所艷羨。而當邊閫缺。銓部將擧公者數。輒固辭。必求內地爲養。平居未嘗離膝。至編管荒塞。猶奉往。有一姊弟。友深至。其居官。律己淸約。爲治簡嚴。於鉏荒纇補凋攰。靡不單心。猾胥莫敢肆。民得以按堵。於聽訟。心平而辨晢。傍邑岸獄多歸。一經亭斷。退無異辭。尤善於賑荒。留簿倍前政。所在多立碑。及沒。諸邑民致賻助喪。此可見遺愛在人。在京兆。執法不撓。明勑禁條。所居廧蔽傾塌。而不以版築煩官隷。其爲將。威惠並行。甚得將士心。事關紀律。繩治不少貸。凡於將校差除。一不徇請托。惟視其人能否。軍門有工匠隊。絶不許人求。軍需假貸。一切防塞。惟專意於撫御儲胥。爲陰雨之備。論者謂輓近將任。當推公爲首。顧不能久於其職。軍情咸惜之。至於待人。削去藩町。引拔後進。多所成就。見人阨難。閔惻拯濟如不及。臨民將兵殆三十餘年。未嘗濫刑傷人命。平生多慷慨。或聞朝廷差失。未嘗不扼腕嗟咄。其在南閫也。遭臺彈。司諫柳尙載論救於筵席。上曰。司諫言是也。予觀其人。決非常調武夫。其後臺臣啓稱某居家孝友。莅官淸白。觀者皆無間然。訃聞。上臨朝衋然曰。某武將中可用人。意外喪逝。不勝悼惜。命版曹厚庀喪具。曠典也。凡此皆公行蹟之槪略。而天語寵褒。荐加於存沒。此可以觀公始終矣。夫人光山金氏。其先新羅王子興光。考曰宇慶。漢城判官。溫淑柔嘉。婦道甚備。撫愛側出。若所生。生卒與公同年。祔葬公墓。側室子億耇承重。娶韓平君李基泰女。次億齡娶統制使鄭弘佐女。次億慶。女長適朴昌文。次適金道沈。不佞先祖遲川公。與鷗浦公契許甚密。余與公文武雖異趨。實有三世通家之誼。公之從兄顯道。卽余執友也。公纔下世。顯道繼沒。每念疇昔。爲之澘然出涕以悲。銘曰。
羅顯于麗籍安定。長吟有弟直筆秉。厥諱曰瀷有榮贈。允忱學諭惜無命。是生輔德稱德行。鷗浦世濟篤其慶。廉直文雅聞望盛。兩世貤爵俱議政。皇考篤學年不永。公是腹子幼挺穎。屈意跗注庸何病。長衢有蕩驥步騁。十典州郡載淸淨。惠綏顚連戢奸橫。授銊遐閫作翰屛。摠御兩營掌戎柄。師律克臧嚴且整。參提籌司贊廟勝。亞尹漢城明憲令。科試有獄俾按聽。蜚書乘機工射影。臺章剝膚屢上請。迫令誣人公弗肯。不怵不阿對以正。圜土幽幽歲且更。投荒三載肆有眚。赫臨牽復由主聖。水原雄府處驍勁。命汝往莅士飽詠。國疏戎備狃太寧。倚公干城需外警。奄忽滔滔用不竟。前後衮褒玉音炳。行義志節人所敬。我銘其阡昭玆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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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