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박해의 순교자와 그 시복운동의 현재
김길수 / 전 대구 가톨릭대 교수
1. 서언
2. 박해 전개와 순교자들
3. 시성시복운동의 현재
4. 결언
[천주교 서울대교구 순교자 현양회 홈페이지 자료실에서]
신유박해의 순교자와 그 시복운동의 현재
김길수/전 대구 가톨릭대 교수
1. 서언
신유박해는 조선 조정이 본격적이며 전국적으로 벌린 최초의 박해로 조선후기 한국천주교회가 받은 이른바 4대 박해중의 하나이다. 1801년(순교 1년)에 일어난 이 박해는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1월 10일(음력) 내린 금교령으로 시작되어 그해 12월 22일(음)에 반포한 “척사윤음”으로 끝났다.
이 박해 중에 희생된 천주교 신자들은 모두가 순교자요 증거자라 할만 하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박해 중에 희생된 분들 가운데 일부와 그중에 시복시성 추진 대상자로 선정된 분들에 대한 시복시성 운동에 관해 간략히 정리해 봄으로서 순교자 현양회 성지 안내 봉사에 작은 도움이 되는 자료로 드리고자 한다.
2. 박해 전개와 순교자들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온건하던 정조가 승하하고(1801.6.28(음)) 순조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게된 대왕 대비 김씨는 정사를 마음대로 하게 되었다. 그는 노론 벽파에 속해 있어서 남인 시파와 천주교 신자들을 제거하려 했다. 대왕대비는 선왕의 장례식이 끝나기만 기다렸다가 시파 사람들을 몰아내고 벽파 사람들로 채웠다. 그리고 이때에 염려했던 대로 천주교 박해령이 내려지고 공식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1) 서울에서 박해와 희생자들
12월 17일 최필공 토마스가 체포되고 19일에 그의 사촌동생 최필제 베드로가 기도중에 오현달(스테파노)와 함게 체포 구금당했다. 이 때 양근에서는 조동섬(유스티노), 충주에서는 이기연이 체포당했다. 1801년 1월 9일(음)에 배교자 김여삼의 밀고로 최창현(요한) 회장이 체포당했다. 1월 10일(음) 공식 박해령이 내리고, 오가작통법이 시행되며 역율을 적용시켜 철저한 색출과 처벌하라는 엄명이 내린 상황에서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책롱사건으로 임대인 토마스가 구금되었다.
포도대장 신대현이 천주신자를 가볍게 처리했다 하여 포청에 수감된 천주교 신자는 의금부로 옮겨지고 신대현도 구금되었다. 2월 9일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의 국문이 시작되고 11일에는 권철신, 정약종, 14일에 정약전 16일에 이기양이 체포 구금되고 26일 까지 국문이 진행되었다. 이들 중에 정약종, 홍낙민, 최창현, 최필공, 이승훈등 5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고, 이가환, 권철신은 옥사하였으며 이기양은 함경도 단천, 정약용은 경상도 장기현, 정약전은 신지도로 각기 유배당했다.
(2) 경기도, 충청도의 순교자들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꼬)는 정약종과 함께 사형선고 받고 공주로 이송되어 참수당했다. 이 무렵 무명의 신자와 청주에서 잡힌 이종국이 공주에서 처형됬고, 경기도 포천의 홍교만(프란치스코 사베리오), 그의 아들 홍인(레오)가 서소문에서 순교했다.
3월 13일 여주 성문 밖에서는 원명도(요한), 임희영, 최창주(마르첼리노), 이중배(마르티노), 정종호등 5명이 처형되었다. 이 무렵 조용삼(베드로)는 옥사하였다.
양근에서는 유한숙, 윤유일, 윤유오 등 13명이 처형되고 4월 2일에는 정철상 가롤로, 최필제, 정인혁, 정광수, 윤운혜. 정복례(칸디다), 이합규 등 6명이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3) 주문모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
강완숙(골롬바)의 헌신적 보필로 사목해오시던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순교(4월 19일(음))는 신부와 관련된 인물들로 박해가 확대 되었다. 3월 17일 송마리아와 신마리아가 사사되고, 3월 29일 서소문 밖에서는 김백순, 이희영(루가) 등이 처형당했다. 4월 20일에는 김건순, 5월 22일에는 여회장 강완숙, 궁녀 강경복, 문영인, 최인철, 김현우, 이현, 홍정호, 김연이, 한신애 등 9명이 참수당했다. 김이우는 고문중 옥사했고 정순매, 윤점혜, 고광성, 이국승, 황포수 등이 각기 고향으로 이송되어 처형당했으며 문윤진, 이재몽과 이괘몽, 김원성, 이아가다 등 많은 사람들이 참수당하였다.
(4) 전라도의 순교자들
3월부터 박해가 시작된 전라도에서는 유항검, 유중철,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이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고 김유산도 문초를 받았다. 또한 이들의 고발로 전주, 금산, 고산 등 여러 고을에서 200명 이상의 신자들이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배교자들은 석방되거나 귀양가고 한정흠, 김천애, 최여겸 등이 7월 13일 사형언도를 받고 고향으로 이송되어 각각 처형되었다.
그리고 서양선박 불러들이는 계획과 관련된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이우집 등은 9월 11일 사형선고 받고 전주로 압송되어 처형당했다.
(5) 황사영 백서사건과 순교자들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하고 황심은 옥청희와 함께 북경으로 가져가려 했다. 그런데 옥천희가 북경에서 돌아오는 도중 책문에서 체포당하고 9월 15일 황심이 체포되어 백서사건이 발각되었다. 이 백서 사건으로 박해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고 9월 29일 제천에서 황사영과 김한빈이 잡혔다. 그리고 역관 현계흠도 연루되어 체포당했다. 공모 여부를 캐기 위해 정약용․정약전도 다시 체포당했다. 이 사건 관련자로 김한빈과 황심은 10월 21일에, 황사영․ 옥천희․ 현계흠은 11월 5일 처형당했다.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단락되자 12월 22일 척사윤음을 반포하고 유항검의 부인 신희, 며느리 이순이(루갈다)와 이육희, 유중성에 대한 사형선고가 있고 이들은 전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끝으로 12월 26일에 16명에 대한 사형 선고가 있었는데 이경도, 손경윤, 김계환, 홍익만, 최설애, 김의호, 송재기, 장덕유, 변득중 등 9명은 서울에서 처형당했다. 그리고 정광수는 여주에서 김귀동과 황일광은 홍주에서 김일호와 권상문은 양근에서 한덕운은 광주에서 홍인은 포천에서 각각 처형당했다. 이로서 잔인하고 가혹한 박해는 끝이 내렸다.
3. 시성시복운동의 현재
현재 한국은 103위의 순교성인을 모시고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는 초대교회 창립기와 기해박해 이전의 초기 순교자는 한분도 들어있지 않다. 기해박해 이전 순교자와 그 이후에도 시성시복에 누락된 순교자들에 대한 시성시복은 한국 교회의 과제로 남아있었다.
(1) 교황령과 시행령의 변경
200주년 기념 사업위의 시복시성 추진위원회에서는 103위 시성과 함께 기해박해 이전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운동을 함께 추진했었다. 그러나 103위 시성식 마져 늦어질 것을 염려하여 중단하였다. 그 뒤 추진위원회에서는 다시 초기 순교자 98명에 대한 시복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안에 논쟁대상 부분이 있었지만 1905년 5월 20일 주교회의 전례위원회에서 “한국 천주교회 창립선조 98위”에 대한 시복 시성운동을 인준하고 추진위원도 위촉하였다. 추진위원회에서는 대상 순교자를 조정하여 청원서와 약전을 교황청에 제출하였으나 의도한 결실을 볼 수 없었다. 이때 교황청에서는 이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황령 <완덕의 천상 스승>(Divinus Perfectionis Magister, 1983,1,25)과 시성성의 시행령 < 주교들이 행할 예비심사에서 지킬 규칙>(1983,2,7)이 발표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 추진은 이 특별법에 따라 다시 추진되어야만 하게 되었다.
(2) 교구별 시복시성 추진
교황청의 특별법에 따라 먼저 1985년 전주교구에서 독자적으로 시성시복을 논의하고 시복시성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윤지충 등 5명의 순교자를 선정하여 <5인 순교자 시복시성 청원서>를 작성하였다. 이 청원서는 1989년 2월 14일 주교회의 전례위원장 추천서를 첨부하여 교황청에 발송하였다. 그 결과 교황청 시성성 장관으로부터 “하느님의 종 5명의 시성 청원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라는 답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청주, 대구, 수원, 제주, 부산 교구에서 시복시성 작업이 추진되었다. 청주교구는 1995년부터 최양업 신부에 대하여 또 대구와 부산교구에서는 을해박해(1815), 정해박해(1827) 병인박해(1866)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을 추진하였다. 수원교구는 윤유일 등 8명의 순교자들을 1차 청원자로 확정하고 <하느님의 종 8위의 시복시성 청원서>를 교황청에 발송하여 장애 없다는 회답 공문을 받았다. 이 밖에 제주교구는 김기량에 대한 추진을 시작했다.
이와 같이 교구별로 시복시성운동이 전개되자 주교회의에서 이를 통합 추진하자는 의견이 대두되고 1999년부터 본격적으로 논의하다가 2000년 가을 정기총회에서 9개 교구의 시복시성 작업을 통합 추진할 청구인에 주교회의 사무총장 김종수 신부를, 청원인에 배티성지 류한영 신부를 임명하였다. 이로써 한국 천주교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토대를 마련하였다.
(3) 통합추진과 제 1차 대상 선정
2002년 3월 7일 한국 순교자 시복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제 2차 회의에서는 <제1차 시복시성 추진 대상 순교자>를 선정하고 특별위원회 산하에 신학위원회, 역사위원회, 통합추진위원회를 두기로 하여 위원을 임명하였다. 그리고 2002년 5월 20일부로 선정위원회 확인 작업 및 위원장 확정 인준을 했다.
이에 따라 “제 1차 시복시성 추진 대상 순교자” 선정 현황을 간략이 살펴보면 이들에 대한 공식명칭은 <첫 순교자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및 주문모 신부>라 한다. 9개 교구와 서울대교구 및 통합추진 회의에서 선정 제출된 제출 총인원은 222명이었다. 이중 선정자 126명, 보류자 29명, 제의자 67명이다. 선정자 126명은 순교자 ‘하느님의종’ 선정자 111명과 기존의 시복 청원자(하느님의 종) 13명으로 도합, 124명이고 여기에 증거자 ‘하느님의 종’ 선정자 2명을 합하여 총 126명이다. 이를 세목별로 구분해 보면,
(1) 시복대상(하느님의 종) 순교자 : 124명(기존 청원자 13명, 새로 선정한 111명)
(2) 시복대상(하느님의 종) 증거자 : 2명
(3) 선정보류 순교자 : 28명
(4) 선정보류 증거자 : 1명
(5) 선정대상 제외자 : 67명
<총 제출 222명, 선정자 126명, 보류자 29명, 제외자 67명>
4. 결언
시복시성 주교 특별위원회 위원장 박정일 주교님은 “이 시복시성 추진과정을 통해서 한국 순교자들의 신앙과 삶이 현양되고, 아울러 한국 천주교회의 신앙 쇄신과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그리고 “한국 교회 안에서 순교 신심이 활성화 되고, 한국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기도와 정성이 더욱 커지도록 사목자들과 신자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린다.”고 당부하셨다.
시성시복운동은 그 시성으로 끝날 일로 생각 될 수가 없다.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사랑받고 귀감이 되지 못할 성인의 양산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은 그들의 영성을 묵상하고 본받기 위한 절실한 마음가짐과 기도가 어느때보다 필요한 때이다. 순교신심 운동의 활발한 전개를 기대한다.